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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몽테뉴와 데카르트의 차이: 데카르트처럼 확실성을 추구하다가 길을 잃고 만다. 몽테뉴처럼 모호하고 비정형적이지만 중요한 판단을 하는 대신에, 데카르트처럼 정형적인 사고방식을 선택함으로서 생각할 여지를 없애 버린다.
확률은 도박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흄의 귀납 문제(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성에 대한 추론)에서 유래하였다. 이 책에서는 확률을 수학적 원리 대신 실용적 회의론으로 간주한다. 이유가 무엇인가? 확률은 주사위나 더 복잡한 변수로 승산을 계산하는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불확실함을 인정하고 무지를 다루는 방법을 개발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시장은 운이 함정으로 작용하는 여러 분야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운에 크게 영향을 받기 때문에 단연 흥미롭다. 게다가 금융 분야에서는 운을 이해할 수 없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따라서 그 편향이 심각하게 나타난다.
두뇌는 확률 개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므로 ‘모 아니면 도’ 방식으로 단순화하려고 덤비기 때문에 ‘만사가 운’이 아니라 ‘생각보다 운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
열심히 일하고, 끈기와 인내 같은 전통적 가치들도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요소지만 그것이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간단한 원리를 자주 혼동한다. 성공의 필요조건과 충분조건을 혼동하는 것이다. 복권에 당첨되려면 일단 나가서 복권을 사와야 한다. 하지만 복권방에 가서 복권을 사오는 행위 자체가 복권 당첨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 행위는 단지 필요조건일 뿐이다. 물론 필요조건은 중요하다. 그러나 무작위 사건이 발생하는 세계에서는 중요도가 떨어진다.
그렇다고 열심히 살라던 할머니의 설교가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대부분의 성공은 몇 안 되는 ‘기회의 창’을 통해서 이루어지므로, 이런 기회를 잡지 못하면 결코 성공하기 힘들다. 그러니 행운을 꼭 잡아라!
우리 두뇌는 때때로 인과관계를 거꾸로 파악한다. 훌륭한 자질 덕분에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맞을 지도 모른다. 성공한 사람들이 모두 똑똑하고 근면하며 인내심이 있다고 해서, 그 반대로 똑똑하고 근면하며 인내심 있는 사람들이 모두 성공한다는 뜻은 아니다(매우 똑똑한 사람들도 이런 원시적인 ‘후견 긍정의 오류’를 일으킨다는 점이 놀랍다). 운은 타고난 능력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작용한다. 백만장자가 모두 끈기 있고 근면하다고 해서, 그 반대로 끈기 있고 근면한 사람이 모두 백만장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끈기 있고 근면한 사업가들 가운데 실패한 사람도 부지기수다.
라디오나 TV와 같은 언론 사업의 목적은 진실 추구가 아니라 거의 연예 사업이다. 이들은 언론인이 단지 연예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들을 사상가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일한다.
이 책에서는 실력으로 위장한 행운, 다시 말하면 결정론으로 위장한 우연을 다룬다. 그 대표적인 형태는 운아 좋아 성공한 사람들에게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들은 자신의 부를 실력의 결과라고 착각한다. 우리는 사바나 지역을 떠돌던 조상과 매우 닮았으며, 특히 신념 체계는 여전히 미신으로 가득 차 있다. 한 원시인이 코를 긁었더니 우연히 비가 내렸다. 이후 그는 땅이 가물 때마다 온갖 방법으로 코를 긁는다.
인간을 바라보는 현대 사상은 두 가지로 양극화되어 있다. 한쪽에는 유토피아 관점을 지닌 사람들로 루소, 고드윈, 토머스 페인, 규범경제학자 등이 있다. 이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믿으며, 행복과 합리성에 도달하기 위해 단지 명령만으로도 우리의 본성을 마음대로 통제하고 변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뚱뚱한 사람들에게 건강에 대해 알려주기만 하면 비만이 치료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다른 한편에는 인류를 비극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원래부터 한계와 결함이 있으며, 개인 및 집단적 행동에 앞서 이런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부류에 속한 사람으로는 칼 포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 투기꾼 조지 소로스, 찰스 샌더스 퍼스 등이 있다. 우리는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애써 결함을 고치려고 수고할 필요 없다. 인간은 결점이 많은데다 자연 환경과도 어울리지 않아서, 이러한 결함의 주변을 맴돌 뿐이다. 이것이 내가 (행운에 속지 않는) 두뇌와 (행운에 완전히 속아 넘어가는) 감정 사이에서 평생 치열한 싸움을 벌인 끝에 확신하게 된 사실이다.
세상에는 명쾌한 답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단순화에는 필연적으로 심각한 왜곡이 따른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그에게는 비트겐슈타인이 영웅이고 데카르트가 적이다). ‘바보도 이해할 만큼 단순화시켜야 한다’고 믿는다면, 단순화야말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지적하는 바이다.
이 책의 첫 부분은 솔론의 경고에 대한 자기 성찰이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내가 직업상 격은 확률편향들을 제시한다(이런 편향들이 계속해서 나를 속이고 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나 자신과의 싸움에 대해서 설명하고, 끝으로 몇 가지 실용적이고 철학적 조언을 덧붙인다.
솔론의 경고
당대 최고의 부자로 통하는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에게 솔론이 말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불행한 일을 생각해 보면, 지금 즐겁다고 해서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또 언제든 상황이 바뀔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감격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미래는 매우 다양한 형태로 불확실하게 전개될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 임종하는 그 순간까지 신이 행복을 허락한 사람에게만 진정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현명한 솔론은 운으로 얻은 것은 운으로 잃을 수 있음을 간파했다. 반면에, 운에 의하지 않고 얻은 것은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솔론은 지난 3세기 동안 과학을 사로잡았던 문제도 직관적으로 파악했다. 이른바 귀납의 문제다. 이 책에서는 이 문제를 검은 백조 또는 희귀사건이라고 부른다.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지만 만약 발생할 경우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오는 사건을 뜻한다. 솔론은 이와 관련된 다른 문제까지도 간파했는데, 이를 ‘비대칭 문제’라고 한다. 실패의 대가가 지나치게 클 때 아무리 자주 성공을 해도 소용없다는 의미다.
트레이더 네로의 운용 기법에 대해 한마디 하겠다. 그는 운용업계에서 누구보다도 더 보수적으로 거래한다. 지금까지 실적이 좋은 해도 있었고 나쁜 해도 있었지만, 정말로 ‘나쁜’ 해는 거의 없었다. 평균적으로 매년 약 100만 달러의 소득을 올려 세후 약 50만 달러를 축적했다. 이 금액은 그의 예금계좌로 직행했다.
네로는 왜 돈을 더 벌지 못할까? 그는 극단적으로 위험을 회피한다. 네로는 미리 정해놓은 손실한도에 도달하면 즉시 거래를 청산한다. 절대로 ‘무방비 옵션’을 매도하지 않는다. 막대한 손실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것이다. 확률이 아무리 낮더라도 큰 손실이 발생할 위험은 절대로 감수하지 않는다.
투자업계에서 14년 동안 활동한 네로는 개인 포트폴리오에 중기 미국채 수백만 달러가 있다. 무작정 열심히 일하는 사라들은 대개 집중력을 잃고 지적 에너지도 소진되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런 사람들은 결국 운에 휘말려 허우적거리게 된다. 네로는 근로 윤리 때문에 사람들이 신호 대신 소음에 집중하게 된다고 믿는다. 빡빡한 근무시간을 꺼리는 그는 비교적 소득이 적은 고유계정거래를 좋아한다. 시간이 넉넉한 덕분에 네로는 다양한 취미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1998년 고소득을 올리던 다른 트레이더들이 파산한 가운데 네로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운 때문에 승승장구하던 사람들은 운이 다하면 한순간에 파산하고 만다.
감정 표현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이겠다. 자신의 감정을 숨길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세한 신체적 신호를 통해 겉으로 보이는 인상이 전달되는데, 행동과학자들은 실력보다는 인상 때문에 리더가 된다고 한다. 이런 것을 오늘날에는 ‘카리스마’라고 한다. 리더십은 일종의 정신 병리와 관계가 있어서, 자부심 강하고 무신경하며 눈 깜짝 안 하는 사람들이 추종자들을 끌어 모은다는 기묘한 증거도 있다.
갑과 을 두 이웃이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갑은 경비원인데, 로또에 당첨되어 부촌으로 이사 왔고, 이웃에 사는 을은 지난 35년 동안 하루에 여덟 시간씩 치아를 치료하면서 살아온 평범한 의사다. 치과의사라는 직업은 단조롭기 짝이 없으므로, 을이 치대 졸업 후 인생을 수천 번 다시 산다고 해도 그 결과는 비교적 큰 차이가 없을 것이다. 반면 갑은 인생을 100만 번 다시 산다고 해도 거의 전부 경비원으로 살아갈 것이고(로또 구입에 수없이 헛돈만 쓰면서), 100만 번에 한 번 로또에 당첨될 것이다.
한 분야의 실적은 결과만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을 경우의 대체비용도 고려해야 한다(이렇게 다른 사건들로 대체하는 것을 대체역사라고 부른다).
대체역사라는 생소한 개념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한 괴짜 재벌이 러시안룰렛을 하여 살아남으면 1,00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한다고 가정하자. 여섯 개 가운데 다섯 개는 돈을 버는 역사이고, 하나는 난감한 부고 기사를 신문에 올려야 하는 역사다.
누군가 1,000만 달러를 벌게 되면 언론에서는 멍청하게도 그를 찬양하고 칭송할 것이다. 내가 18년간의 직장 생활 동안 월스트리트에서 만났던 거의 모든 언론인이 그러듯이 대중도 겉으로 드러나는 재산만 볼 뿐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가족, 친구, 이웃 들이 러시안룰렛 승자를 역할 모델로 삼기라도 한다면 어쩌겠는가?
나머지 대체역사 다섯 개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지혜롭고 사려 깊은 사람은 그 속성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러시안룰렛을 하려면 어느 정도 생각과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 게임을 계속한다면 결국 불행한 역사를 만나게 될 것이다. 만일 25세 청년이 1년에 한 번씩 러시안룰렛을 한다면, 그가 50회 생일을 맞이할 가능성은 지극히 희박하다. 하지만 이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서 예컨대 25세 청년이 수천 명이나 된다면, 우리는 몇몇 생존자를 보게 될 것이다(극소수의 생존자는 엄청난 부자가 되고 나머지는 무덤에 묻힐 것이다).
내가 다음과 같이 대체 회계의 개념을 제시하면 독자들은 별나다고 생각할 것이다. 러시안룰렛으로 베팅하여 번 1,000만 달러와 치과를 운영해서 번 1,000만 달러는 가치가 다르다. 룰렛으로 번 돈이 운에 더 크게 좌우된다는 점만 제외하면, 둘 다 구매력 면에서는 똑같은 돈이다. 회계사가 보기에도 똑같고, 이웃이 보기에도 똑같은 돈이다. 그래도 나는 두 돈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대체역사의 개념은 지성의 역사 여러 분야에서 다루어졌는데, 위험과 불확실성이라는 동일한 개념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설명할 가치가 있다(확실성이란 다양한 대체역사 가운데 가장 많은 숫자가 발생할 사건이고, 불확실성이란 가장 적은 숫자가 발생할 사건을 말한다).
현실은 러시안룰렛보다도 훨씬 험난하다. 현실에서는 수백 수천의 연발 권총에 총알 한 발이 들어 있는 것과 같아 방아쇠를 수십 번 당겨도 아무 일이 없으므로, 사람들은 안전하다는 착각에 빠져 총알을 존재를 망각한다. 이것이 검은 백조 문제인데, 귀납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역사가 주는 교훈 무시와도 연관되는데 도박사, 투자자, 의사 결정자 들은 남에게 일어나는 일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현실세계에서는 총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잠재된 위험을 볼 수 없고, 사람들은 러시안룰렛을 하면서도 ‘저 위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부가 생성되는 모습에만 집중하느라 그 과정을 보지 않기 때문에 위험을 간과하게 되고, 실패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된다. 게임이 무척 쉬워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태평하게 즐긴다. 그러면서 추상적인 위험에 대해 경고해주어도 사람들은 고마워할 줄 모른다(일어나지 않은 일은 모두 추상적이다).
인생을 살면서 운에 저항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그 논리는 우리의 직관에 반하며, 더욱 혼란스러운 점은 그렇게 사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가면서 갈수록 더 운에 저항하게 되었다.
현실세계의 룰렛에서는 총구가 보이지 않지만, 총구를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려면 독특한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1980년대 내가 월스트리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을 때 트레이딩 룸은 사업지향적인 사람들로 가득했는데, 이들은 자기 성찰도 없고, 지극히 단순했으며, 운에 쉽게 속았다. 이들의 실패율은 대단히 높았는데, 금융상품이 복잡한 경우에 특히 더 높았다. 이들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다. 시장에는 낭비벽 심한 ‘이익 지향형’ 인간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파생상품 거래를 하면서 나는 사람들이 추상적인 위험에 대해서는 보험을 기피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생생한 위험에 대해서만 관심을 보였다.
우리 두뇌는 위험과 확률 문제를 만나면 피상적인 실마리라도 잡으려고 필사적으로 덤벼든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러한 실마리를 보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쉽게 판단을 내린다. 게다가 충격적인 과학적 사실에 따르면, 인지 위험이 따르는 문제에 대해서 위험 감지와 위험 회피를 처리하는 부분은 두뇌의 ‘사고’ 부위가 아니라 ‘감정’ 부위다. 그 결과는 가볍지 않다. 이는 합리적 사고가 위험 회피와 거의 관계가 없다는 뜻이다. 합리적 사고가 주로 하는 일은 자신의 행동에 논리를 갖다 붙이는 정도다. (독립적 사고 필요: 집단으로부터 뿐 아니라 나 자신의 감정으로부터도 필요)
그런 의미에서, 언론의 표현은 단지 세상을 비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정도가 아니라 감정 기관을 통해서 관심을 사로잡음으로써 사람들을 철저히 속인다. 이것이 가장 싼 값에 대중의 관심을 받는 방법이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해지는데(전 세계의 네트워크화로 연결의 강도가 갈수록 높아짐), 언론은 갈수록 우리의 생각을 단순화시키고 있다.
빌려온 지혜는 틀리기 쉽다. 그럴듯한 논평에 흔들리지 않으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상식은 18세까지 습득한 오해의 종합체에 불과하다는 아인슈타인의 말이 떠오른다. 게다가 대화나 회의, 특히 언론의 똑똑해 보이는 말은 더욱 의심스럽다.
대체역사의 개념을 대폭 확장하고 기술적으로 개선하면 대체역사는 트레이딩을 하면서 불확실성을 다루는 도구가 된다. 대체역사의 과학적 명칭은 대체표본경로인데, 경로는 결과의 반대 개념으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나리오가 발생하는 현상을 조사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새가 내일 밤 어디에 있을 것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 밤 새가 돌아다닐 수 있는 다양한 장소를 모두 알고자 하는 것이다. 확률이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펼쳐지는 사건들의 역학이다. 확률은 운을 가리키는 화려한 단어다.
트레이더 조사 결과 멍청한 낙관론자들은 강세장에서 돈을 벌지만, 이 돈으로 자산을 더 사들이면서 가격을 높이다가 마침내 자금이 바닥나게 된다. 한편, 비관론자들은 강세장에서 돈을 벌지 못해 망한다. 비관론자들은 강세장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갔고, 낙관론자들은 강세장의 풍악 소리가 멈추자 평가이익이 사라지면서 학살당했다. 그러나 예외가 하나 있었다. 일부 옵션 매입자들은 지구력이 탁월했다. 그래서 나도 이 대열에 합류하고 싶었다. 왜 그랬을까? 파산에 대비해서 보험을 매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하루의 손실로 자신의 일자리를 위협받지 않아서 이들은 편안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경험으로부터 얻는 위험회피는 비서술기억으로 기억상실증 환자도 기억한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우리는 자신의 경험으로부터도 배우지 못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과거에 경험한 감정적 반응이 단기에 그쳤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알고 지낸 동료를 가운데 역사가 주는 교훈을 무시한 사람들이 가장처참하게 파산했다. 그런 사람 중에 파산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나 정말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파산한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단지 돈을 잃는 데 그치지 않았다. 돈을 잃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시점에 돈을 잃었다. 파산한 트레이더들의 특징을 보면, 이들은 자신이 시장을 잘 파악하고 있으므로 불리한 사건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들이 위험을 감수한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라 단지 무지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고는 세상의 작동 원리를 이해하기보다는 재빨리 곤경을 모면하면서 결과를 얻도록 설계되어 있다. 사람들이 이후에 얻은 정보 때문에 사건 당시 자신의 지식을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후견지명편향, 즉 “나는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어” 효과라고 부른다. 실수란 사후적으로 평가할 대상이 아니라, 당시까지 존재한 정보를 바탕으로 평가할 대상이다. 이런 후견지명의 더 심각한 악영향은 과거 예측에 능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미래 예측에도 능숙한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점이다.
우연히 전쟁의 황폐함을 겪어본 뒤, 나는 신체적 위험보다도 품위 없는 빈곤이 더 견디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에게는 품위 있게 죽는 편이 경비원 같은 인생을 사는 것보다 훨씬 낫다. 그래서 나는 신체적 위험보다도 금융 위험을 더 싫어한다).
소음과 정보를 비유하자면, 소음은 언론에 비유할 수 있고 정보는 역사에 비유할 수 있다. 아이디어는 묵어야 아름답다. 나는 본능적으로 겉모습에 관계없이 새로운 생각보다 정제된 생각을 더 높이 평가한다. 그래서 침대 곁에 늘 고전을 쌓아둔다. 최신 기사들은 잡스러운 반면, 고대의 사상들은 단정하다. 의심스러울 때는 새로운 아이디어, 정보, 기법을 체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최선이 된다. 항상 명확하고 지독하게 거부하라.
고전의 가르침을 존중한다면 재잘거리는 현대 언론인들의 상혼을 무시해야 하고, 불확실성 속에서 의사 결정을 하는 사람들은 대중매체에 접하는 일을 최소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귓전을 때리는 ‘긴급’ 뉴스에서 소음 이상의 가치를 찾아내려 한다면, 이는 모래밭에서 바늘을 찾는 행동과 같다. 사람들은 대중매체가 그들의 관심을 끌어 돈을 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실러는 주가가 ‘무엇(예컨대 기업의 현금흐름)’에 대한 추정 가치라면, 시장가격은 변동성이 매우 커서 ‘무엇(대용으로 배당을 사용했다)’을 확실하게 나타내기 어렵다고 했다. 가격은 내재 가치보다 더 크게 움직여서, 때로는 지나치게 오르거나 내리는 과잉 반응을 보인다. 가격과 정보의 변동성이 다르다는 것은 ‘합리적 기대’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뜻이다(시장 가격은 증권의 장기 내재 가치를 합리적으로 반영하지 않고 과다하게 상승하거나 하락한다).
트레이더들을 대상으로 한 시뮬레이션 결과 신기하게도 가장 나이 든 사람이 유리하게 나왔는데, 희귀사건을 가장 오랜 기간 경험했으므로 이에 대한 저항력이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투자에서 손실로 말미암은 고통이 이익으로 얻는 기쁨보다 강도가 심하기 때문에 투자자가 빈번하게 실적을 확인하면 엄청난 심리적 적자를 보게 된다. 시간 단위가 길어질수록 투자의 성공률은 올라간다. 이렇게 시간 단위에 따라 달라지는 운의 속성을 전문가들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1) 시간 단위가 짧으면 실적이 아니라 변동성(소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편차만 볼 뿐이다. 그래서 기껏해야 편차와 수익이 뒤섞인 모습을 보는 것이지, 수익을 보는 것이 아니다(하지만 우리의 심리는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2) 우리 심리는 이런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3) 휴대전화나 태블릿 PC로 실시가 주가를 확인하는 투자자를 볼 때마다 나는 웃고 또 웃는다.
무작위 사건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도 탈진하게 되고, 잇달아 겪는 고통 때문에 감정도 메말라버리게 된다(도박 중독자와 유사). 사람들이 어떤 주장을 하든, 손실 때문에 겪는 고통은 이익에서 오는 기쁨으로 상쇄되지 않는 법이다(일부 심리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손실에서 오는 부정적 효과는 이익에서 얻는 긍정적 효과보다 강도가 2.5배나 크다).
가상역사에 대해서 논할 때, 모든 사이비 사상가의 아버지 헤겔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헤겔이 쓰는 용어는 자유분방한 파리의 카페나, 현실 세계와 완전히 격리된 대학의 인분학부를 제외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죄를 저지른다. 대개 지극히 난해한 방식으로 현실을 벗어나는 경제학자들조차 인간을 움직이는 동기가 합리성이 아님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있어서까지 합리적이고 과학적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해를 입히고 생존을 위협하는 경우에만 합리적이면 된다. 현대 생활은 우리를 정반대 방향으로 몰고 가는 듯하다. 종교나 개인적 행동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지성적이 되는 반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처럼 운에 지배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지극히 비합리적이 된다.
승승장구하던 트레이더 카를로스를 파산시킨 것은 1998년 여름의 폭락이었다. 이 마지막 폭락은 상승으로 반전되지 않았다. 이 시점까지 그의 분기 실적을 보면 나빴던 때는 마지막 분기 딱 한 번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전년도까지 누적해서 은행에 거의 8,000만 달러를 벌어주었지만 1998년 여름철 단 한 분기에 3억 달러를 잃고 은행에서 쫓겨났다. 러시아 채권을 매입했던 그는 시장이 하락하기 시작하자 더 매집했다. 물타기가 카를로스의 주특기였다.
“손절매는 얼간이들이나 하는 짓이요! 나는 비싸게 사서 싸게 팔 생각 없소!”라고 회의 시간에 언성을 높였다. 손실이 계속 쌓여 갔지만, 그는 경영진에게 다른 은행들은 더 큰 손실을 보았다며 소문을 전했다. “다른 은행들보다는 나은 실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스스로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이것은 산업 전반적으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징조였다. 업계 트레이더들이 모두 똑같은 거래를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다른 트레이더들도 곤경에 빠졌다는 말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다. 진정한 트레이더의 사고 구조라면, 다른 트레이더들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부유한 트레이더는 최악의 트레이더가 되는 경우가 많다. 일정 시점에서 보면, 가장 큰 성공을 거두는 트레이더는 시장의 최근 순환 주기에 가장 잘 맞는 트레이더다. 치과의사나 피아니스트에게는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직업은 운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손실한도를 초과해서 손실을 입으면 거의 극복하지 못한다. 무능한 트레이더는 포지션 정리하기가 이혼하기보다 어렵다는 말이 있다. 아이디어에 충절을 지키는 일은 트레이더에게나 과학자에게나 이롭지 않다.
트레이더와 투자자의 차이는 투자 기간과 투자 규모에 있다. 단기 트레이딩과 섞어서 하지만 않는다면 장기 투자는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문제는 손실을 본 뒤에 장기 투자자가 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매도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평범한 트레이더들은 심지어 ‘더 높은 가격’에도 매도하기를 싫어한다. 이들은 자신의 평가 기법이 틀렸을 가능성은 생각지 못하고, 시장의 평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판단이 옳았을 수도 있지만,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소로스도 결함이 많은 사람이지만, 그는 부진한 실적을 분석할 때 반드시 자신의 분석 틀을 시험한다.
불량한 트레이더도 시장 순환주기의 덕을 보면 단기나 중기적으로는 유능한 트레이더보다 우위를 나타낼 수 있다.
다윈의 아이디어는 생존이 아니라 번식 적합성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결국 운이다. 동물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일단 운이 시스템에 개입되면 매우 놀라운 결과가 일어난다.
어떤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은 다행이 희귀사건이 없는 표본경로를 잘 만나 생존했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고약한 점은, 희귀사건을 만나지 않고 지내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들은 희귀사건에 취약해진다는 것이다. (소규모 산물을 예방하면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고, 중앙은행이 시장에 미세 개입을 자주하면 큰 경제위기의 원인이 된다).
이코노미스트나 경제 전략가들은 전혀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 시장 전망을 발표하는 사람들이므로, 실제로 검증 가능한 사실보다는 순전히 말솜씨로 출세가 좌우되는 일종의 연예인들이다.
다음 주 시장이 상승할 확률이 70%, 하락할 확률이 30%라고 가정하자. 하지만 상승한다면 그 폭이 평균 1%인 반면, 하락하다면 평균 10%라고 가정하자.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낙관적인가, 비관적인가?
낙관적 또는 비관적이라는 용어는 실제로 불확실성을 다루지 않는, TV 해설자나 위험을 다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표현이다. 게다가 투자자나 사업가가 받는 보상은 확률이 아니라 돈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이 일어날 확률이 아니라, 그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얼마를 버느냐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자주 이익이 발생하느냐가 아니라, 그 결과 발생하는 이익의 규모다.
우리의 심리 구조는 반직관적인 현실에 순응하지 못한다.
불행히도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기법들은 대개 다른 분야에서 도입한 것들이다. 그래서 금융분야에서도 이런 기법들을 빌려와서 희귀사건을 무시하는데, 희귀사건이 회사를 파산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예: KIKO 사태로 멀쩡한 다수의 기업 파산). 금융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리 희귀한 사건이라도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라면 무시해선 안 될 것이다.
금융공학이야말로 사이비 과학이 잔뜩 첨가된 분야다. 이런 기법에서는 과거 역사를 미래 예측의 수단으로 삼아 위험을 측정한다. 과거 분포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법이 없으므로, 이런 개념 전체가 매우 값비싼 실수를 야기한다.
승리 확률을 극대화한다고 기댓값도 극대화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작게 이길 확률이 높고 크게 잃을 확률이 낮을 때 더욱 그렇다. 만일 러시안룰렛처럼 낮지만 대형 손실 확률이 있는 전략을 사용한다면, 거의 모든 경우 승리를 거두다가도 어느 순간 결국 파산하고 말 것이다.
자신의 집, 서재, 자동차가 동료의 것보다 크다는 이유로 자만심을 느낀다면, 이는 철학적 사고방식이 아니다. 시한폭탄을 깔고 앉아 자신이 그 분야의 1등이라고 주장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이다. 극단적 실증주의, 승부욕, 빈약한 논리를 바탕으로 추론한다면 장차 커다란 재난을 피할 수 없다.
조지 소로스는 항상 지극히 개방적인 마음 자세를 유지했으며, 자신의 견해를 바꾸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이 늘 오류에 쉽게 빠진다는 걸 인정했는데, 바로 그런 이유로 대단히 강력한 존재였다.
나는 취업 후 ‘근로 윤리’에 얽매여 회사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까 봐 걱정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을 얻고 인생을 즐기기 위해 은행 계좌를 두둑이 채워두어야 했으며, 철학자가 되거나 동네 맥도널드에서 일하는 것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포퍼는 내가 처음 ‘철학자’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인물이었다. 그는 진지한 철학자의 전형이었다. 포퍼에 따르면 이론에는 두 가지 유형만 존재한다. 1) 검증 과정에서 오류가 드러나 기각된 이론, 2) 아직 오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오류가 발견되어 기각될 가능성이 있는 이론.
포퍼에 따르면 과학자란 대담한 아이디어가 있지만, 자신의 아이디어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이들은 우선 자신의 아이디어가 틀리지 않았는지 확인하려고 노력한다. 자신의 추측을 반박하려고 대담한 추측과 엄격한 검증을 시도한다.
장기간 생존한 트레이더들은 포퍼주의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추측이 틀렸을 때 치러야 하는 대가도 확실하게 한정한다. 이들은 기준이 되는 사건이 발생하면 거래를 중단한다. 이것이 이른반 손절매로서, 희귀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 미리 탈출 기준을 정해놓는 행위다. 나는 손절매를 실행하는 경우가 드물다.
추론의 과정에서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데이터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전문가들이 더 빠르고 확실하게 함정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비즈니스 세계는 운에 크게 좌우되므로 이런 문제가 더 심각하게 발생한다.
운에 관한 편향은,
1) 우리는 승자만 보기 때문에 확률을 보는 관점이 왜곡된다.
2) 엄청난 성공의 원인은 대부분 운이다.
3) 인간은 생물학적 장애 탓에 확률을 이해하기 어렵다.
작은 집에 살면서 검소한 생활을 받아들여야 한다면, 부자가 될 이유도 없다. 사람들은 버핏이 억만장자이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한다고 입을 모아 칭송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검소한 생활이 목적이라면, 버핏은 수도사가 되거나 사회사업가가 되어야 한다. (퍼핏은 단지 투자활동 자체를 즐기는게 아닐까?). 부자가 된다는 것은 순전히 이기적인 행위이지 공익적 행위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장점은 박애가 아니라 탐욕을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탐욕을 찬양할 필요까지는 없다.
생존편향을 무시하는 것은 전문가들도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다. 왜 그럴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고 눈앞에 보이는 정보만 이용하도록 길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많은 대체역사 가운데 실현된 사건 하나를 보고 이를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생존편향은 실적이 가장 좋은 사건이 가장 눈에 잘 띈다는 뜻이다. 왜 그럴까? 패배자는 모습을 감추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오는 투자 기회를 평가할 때에는, 내가 주도적으로 찾는 투자 기회를 평가할 때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
“정말로 운이 아닌 경우는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운을 다루는 직업 중에도 실적이 운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카지노는 운을 관리한다.
운에 좌우되지 않고 성공하는 길이 많음에도 끝까지 끈기를 발휘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남들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은 보답을 받는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시장이 하락했을 때 증권을 매수하면 이득을 얻지만, 사람들은 임계점이 도달할 때까지 전혀 매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보상을 받기 직전에 포기해버린다.
우리 두뇌는 작용할 때 항상 지름길을 찾아낸다. 우리가 인생의 모든 단계에서 최적화를 시도한다면, 무한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최적화 작업은 어디에선가 중단되어야 한다. 이를 발견한 허버트 사이먼의 아이디어는 ‘충족(satisfy와 suffice를 결합한 단어)’ 이었다. 충족에 가까운 답을 얻으면 사람은 최적화를 중단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주 사소한 결론이나 행동에 이르기까지 무한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이지만 그 방식은 제한적이다. 즉, 인간은 ‘제한적으로 합리적’이다. 그는 우리 두뇌가 어느 지점에서 중단되도록 설계된 최적화 기계라고 믿었다.
하지만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스키의 연구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확률적 사고와 최적화된 행동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밝혀냈다. 케인스 같은 일부 거장들을 제외하면 경제학자들은 자신이 불확실성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거장들은 위험에 대해 논하면서, 자신이 위험에 대해 얼마나 모르는지도 모른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인간의 두뇌 활동을 이른바 시스템 1과 시스템 2, 두 가지로 구분한다. 시스템 1이 관장하는 활동은 힘들지 않고, 자동적이고, 연상적이고, 신속하고, 평행 프로세스이고, 불투명하고(무의식적), 감정적이고, 확고하고, 구체적이고, 사교적이고, 개인적이다. 시스템 2가 관장하는 활동은 힘들고, 통제적이고, 연역적이고, 느리고, 연속적이고, 자각적이고, 중립적이고, 추상적이고, 집합적이고, 비사교적이고, 객관적이다. 연구자들은 시스템 1이 경험을 통해서 시스템 2의 요소들과 통합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마지오에 따르면 완전히 비감정적인 사람은 아주 단순한 결정조차 내릴 수가 없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고, 이리저리 재기만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다. 감정이 없으면 인간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드루에 따르면 감정 시스템으로부터 인지 시스템으로 가는 결합이, 인지 시스템으로부터 감정 시스템으로 가는 결합보다 강하다.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나서 설명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옵션 매도자는 벌 때는 새처럼 조금씩 먹고, 잃을 때는 코끼리처럼 크게 싼다. 내가 만나본 트레이더들은 대부분 옵션 매도자였다. 이들은 파산하면서 대개 남의 돈을 날렸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식에 대해서는 과대평가하고, 자신이 틀릴 확률은 과소평가한다.
어떤 사건의 변동률이 2%라면, 이것은 변동률이 1%인 사건보다 2배 중요한 것이 아니라, 4~10배 중요하다. 7% 변동 사건은 1% 변동 사건보다 수십억 배 중요하다. 우리는 통계의 비선형적 속성(지진과 비슷. 진도 5와 진도 7의 강도 차이)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의 두뇌는 유의미한 가격 변동과 단순한 소음을 구분하지 못한다.
항상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운에 속도록 타고났기 때문이다. 나는 감정을 다스릴만큼 똑똑하지도 강하지도 않다. 게다가 아이디어를 체계화시키고 실행하려면 감정을 사용해야 한다. 단지 내가 운에 속기 쉽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감정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만큼만 똑똑하다. 나는 감정에 지배받는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즐길 줄 알기 때문에 기쁘다. 두뇌가 신호와 소음을 구분한다고 해도, 나의 가슴은 구분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확률과 운에 대해서만 이렇게 어리석게 처신하는 것이 아니다. 쉽게 화를내고 일상적인 일에 감정을 드러내는 것도 합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가능하려면 감정이 필요하다. 인간은 적대감을 적대감으로 대응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다. 다행히 적과 마주쳤을 때 사용할 요령이 있다. 내게 화를 내는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것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눈을 들여다보면 우리 두뇌의 감정적인 부위가 자극받아 더욱 활성화 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인간이 아니라 화성인이라고 상상한다. 이 방법은 가끔 효과가 있다. 특히 상대방의 외형이 나와 전혀 다를 때 가장 효과가 좋다.
보통의 서평은 좋은 평이든 나쁜 평이든 책에 담긴 내용보다도 서평자 자신을 묘사한다. 나는 이런 메커니즘을 비트겐슈타인의 자라고 부른다. 자가 정확하다고 확신하지 못할 경우, 자를 써서 테이블을 측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테이블을 기준으로 자가 정확한지 측정하게 된다. 자를 신뢰하지 못할수록, 테이블보다 자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얻게 된다. 이런 원리는 정보와 확률을 넘어서 폭 넓게 적용된다. 아마존닷컴에 익명의 독자가 올린 글에는 그 독자에 관한 정보만 담겨있다. 하지만 권위자의 서평에는 책에 대한 정보만 담겨 있다.
우리는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못한다. 실험결과 비둘기에게 먹이를 무작위적으로 공급해도 비둘기들이 이에 반응해서 매우 정교하게 기우제 춤을 추듯이 행동한다. 이는 자신의 행동이 먹이 공급과 관계가 있다고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두 사건 A와 B를 볼 때, A가 B에 영향을 주거나, B가 A에 영향을 주거나, A와 B가 서로 영향을 준다고 가정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즉시 둘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고 믿어버린다. 똑똑한 척하기보다 무식한 척하기가 더 어렵다. 포퍼든 누구든 우리는 관계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자기가 축구 경기를 보면 꼭 대표팀이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
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으며, 에너지 대부분이 감정으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감정을 억눌러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누뇌와 감정이 따로 놀기 때문에 실적이 사전에 정해둔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실적보고서를 절대 보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게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며 훈계할 때 가장 화가 난다.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문제는 아는 것이 아니라 실행에 옮기는 것이다.
근처에 있는 수학자에게 확률에 대해 정의해달라고 부탁해보라. 십중팔구 계산하는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확률은 승산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 결과, 원인, 동기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수학이 계산 도구가 아니라 명상 도구라는 사실도 기억하라.
내가 평생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트레이더는 나이젤 배비지인데, 자신의 과거 신념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통화가 약세가 될거라고 강하게 주장했으면서도, 불과 몇 시간 뒤에는 전혀 거리낌없이 충동적으로 그 통화를 매수한다. 왜 생각이 바뀌었을까? 그는 설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않는다. 이런 특성을 타고난 유명한 인물이 조지 소로스다. 그가 지닌 강점 중 하나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순식간에 자신의 견해를 뒤집는 것이다. 소로스 같은 진정한 투기꾼들의 특징은 경로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과거 행동에 전혀 구속받지 않는다. 하루하루가 백지상태에서 시작된다. 소로스를 보라. 그는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자신이 틀리기 쉽다고 털어놓는다. 나는 소로스로부터 얻은 교훈을 살려, 매일 아침회의 때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며 실수하기 쉬운 멍청이들이지만, 천만다행으로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일깨워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이 남보다 낫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보통 80~90%가 자신을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위대하지만, 과학자 개개인은 위험하다. 과학자도 인간이라서 편견 투성이다. 어쩌면 고집이 세서 보통사람보다도 더 심하다.
서사시의 영웅들은 결과가 아니라 행동으로 평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결국 최후는 운이 결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해결책은 품위뿐이다. 품위란 환경에 직접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계획된 행동을 실행한다는 뜻이다. 그 행동은 최선이 아닐수도 있지만, 분명히 최상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이다. 억압 속에서 품위를 유지하라. 이는 아무리 보상이 크더라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태도다. 또는 체면을 지키려고 결투를 하는 것이다. 배우자감에게 이렇게 구혼할 수 있다. "나는 당신에게 반했소. 당신에게 완전히 사로잡혔소. 그러나 내 품위를 떨어뜨리는 짓은 하지 않겠소. 당신이 나를 조금이라도 모욕한다면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오."
감정이 활동을 시작하면 지성은 뒤로 물러난다. 따라서 현실세계에서는 우리의 합리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 자기계발서들은 대개 무익하다. 아무리 현명한 조언이나 감동적인 설교라도 우리 본성과 어긋날 때는 곳바로 묻혀버리고 만다. 스토아 철학이 흥미로 점은, 우리의 본성인 품위와 탐미주의를 바탕을 둔다는 사실이다. 이제부터 불행을 만나게 되면 개인적 품위에 초점을 두라. 어떤 상황이 닥쳐도 지혜롭게 사는 모습을 보여라.
사형 집행일에 가장 화려하게 차려입어라. 품위있게 똑바로 서서 사형 집행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겨라. 암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불운을 맞이한 피해자처럼 처신하지 마라(의사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에게 이를 숨겨라. 알려주면 사람들은 상투적인 말을 하면서 당신을 회피할 것이다. 당신을 진심으로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품위 있는 태도를 유지하면 승자든 패자든 모두 당당하게 느껴진다). 손실이 발생해도 부하 직원에게 지극히 공손하라. 다른 사람의 잘못이었더라도 자신의 운명에 대해 남을 비난하지 마라. 아내가 잘생긴 스키 강사나 젊은 모델과 달아나더라도 자신을 동정하지 마라. 불평하지 마라.
나의 어린 시절 친구처럼 일종의 '태도 문제'로 고통받는다면, 사업이 어려워지더라도 착한 사람처럼 행동하지 마라(내 친구는 동료에게 "사업을 안 해도 좋으니 태도를 바꿔라" 하고 당당하게 메일을 보냈다). 행운의 여신도 어쩌지 못하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당신의 행동이다. 행운을 빈다.
능력을 드러내는 열쇠는 반복성이다. 표본 경로가 아주 길어지면 결국 서로 닮게 된다. 우리가 카지노에서 단 한 번 룰렛에 돈을 걸어 100만 달러를 날렸다면, 원래 카지노가 유리했던 것인지 단지 내가 운이 나빴던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으나. 그러나 1달러씩 100만 번을 건다면, 카지노가 유리하다는 사실을 체계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이것이 흔히 대수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표본 이론의 핵심이다.
기업가는 자신의 아이디어에 목을 걸었으므로, 실패하면 묘지로 직행하게 된다. 그러나 CEO는 기업가가 아니다. 사실은 '허수아비'인 경우가 많다. 금융 시장에서 허수아비의 정의는 겉모습만 번지르르한 사람이다. 더 적절하게 표현하자면, 이들은 의사결정 능력보다 승진하는 능력이, 즉 '사내 정치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프리젠테이션 전문가들이다. 이런 임원들은 잃을 것이 없으므로 비대칭 현상이 발생한다.
리더십도 마찬가지로 해묵은 문제다. 우리는 미친 결정을 내렸어도 운이 좋아서 전쟁에 승리하면 영웅으로 떠받드는데, 이는 멍청한 짓이다. 우리는 과정에 상관없이 승자는 숭배하고 패자는 경멸한다. 성공을 평가할 때 운도 고려하는 역사가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아니면 과정과 실적의 차이를 의식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불확실성은 사람들에게 편안함을 준다. 어떤 사람이 지하철로 출퇴근하며 출발시각을 모른다면, 이 사람은 기차를 타는 사람들보다 지하철이 더 자주 오기 때문에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출발 시각을 모르기 때문이다.
일정 수준의 불확실성은 결함투성이 인간에게 혜택이 되기도 한다. 일정을 조금만 무작위로 바꾸면 지나치게 효율성을 높이려는 수고를 덜 수 있다. 불확실성을 조금만 더하면 시간 압박을 잊어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저녁 식사를 즐길 수 있다. 그는 극대화가 아니라 충족을 추구하게 된다. 행복에 관한 어떤 연구에 따르면, 최적화를 추구하면서 자신을 압박하는 사람들은 즐기는 동안에도 어느 정도 고통을 받는다.
충족을 추구하는 사람과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대개 충족을 추구하는 유형이다. 그는 인생에서 원하는 바를 미리 정해놓았고, 충족을 얻는 순간 멈출 줄 안다. 목표를 달성해도 욕망을 계속 키워나가지 않는다. 생활수준이 향상되더라도 이에 따라 소비 수준을 끊임없이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탐욕스럽지 않기 때문에 충족할 줄 안다. 반면,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세율을 몇 %만 낮출 수 있다면 언제라도 이삿짐을 꾸리는 유형이다(돈을 버는 중요한 이유가 원하는 곳에서 살려는 것인데, 이런 사람은 돈 때문에 원치 않는 곳에 사는 셈이다). 부자가 되고 나서 그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해 까다로워진다. 커피가 식었다고 불평한다. 미쉐린 가이드의 최고 등급 레스토랑에서도 요리가 형편없다고 투덜댄다. 테이블이 창가에서 너무 멀다고 불만이다. 요직으로 승진한 다음 일정이 너무 빡빡해졌다고 힘들어한다. 출장을 갈 때도 모든 일정을 최적화한다. 12시 45분에 사장과 점심을 하고, 4시 40분에는 피트니스클럽에 가며, 8시에는 오페라를 감상하는 식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한계나 제한 또는 일정한 선이 있어야 편안함을 느끼는 것인가. 끊임없이 효율성을 추구한다면 인간 이상이 되려하는 것으로 이것 자체로 인해 고통을 받는 것인가. 죄짓는게 당연하고 실수하는게 당연하고 불확실함이 당연하다는거 이것을 받아들여야 편안함을 누릴수 있는 것인가. 불확실함이 쉼을 주는 것인가?)
인간관계도 분명치 않다.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수준을 높이려 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인지, 아니면 불행한 사람이 극대화를 추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튼 이런 사람에 대해서는 운도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다.
나는 인간이 정확한 일정에 적합한 존재가 아니라고 확신한다. 인간은 소방대원처럼 살아야 한다. 화재가 언제 발생할지 모르므로, 일이 없는 동안에는 편안하게 뒹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야 한다. 안타깝게도 본의 아니게 극대화를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고급 주택가 아이들은 주말에도 시간을 쪼개 태권도와 기타를 배우고, 종교 교육을 받아야 한다. 지금 알프스 산맥을 천천히 달리는 기차에서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주위에 출장 중인 사업가는 보이지 않고, 주로 학생이나 은퇴자들이다. 이들은 ‘중요한 약속’이 없으므로 일정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뮌헨에서 밀라노까지 가는 길도, 항공편 대신 일곱 시간 반이 걸리는 열차를 선택했다. 바쁜 인생에 찌들어 사는 사람들과 떨어져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려는 생각인데, 이런 여행은 사업가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10년 전쯤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 나서 자명종 시계를 치워버렸다. 지금은 내 생체 시계에 따르고 있는데 여전히 비슷한 시각에 일어난다. 내 일정이 10여 분 정도 모호해지면서 생활에 큰 변화가 나타났다. 물론 업무에 따라서는 자명종 시계를 써서라도 시간을 꼭 지켜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외부 압력 때문에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아도 되는 좋은 직업을 선택했기에 일정에 시달리지 않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 수도 있다. 극단적으로 대안을 정리하자면, 우리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고 가난하게 살 수도 있고, 시간의 노예가 되어 부자로 살 수도 있다.
나는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인간이 일정에 맞춰 살기 어려운 존재임을 깨달았다. 칼럼 쓰는 것과 책 쓰는 것의 차이를 인식하고 나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책 쓰는 것은 재미있지만, 칼럼은 고통스럽다. 글 쓰는 것 자체는 외부의 제약만 없다면 재미있다. 내가 원고청탁을 수락하려면 글의 길이를 예측할 수 없어야 한다. 결론을 알 수 있거나 어떤 틀을 따라야 한다면 나는 글을 포기한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 조상은 개요, 일정, 마감시간 등에 얽매여 살지 않았다.
한계상황을 생각해보면 일정이 지닌 추잡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당신은 언제 죽게 될지 정확히 알고 싶은가? 영화가 시작되기도 전에 누가 범죄를 저질렀는지 알고 싶은가? 차라리 영화의 상영 시간조차 모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불확실성은 삶의 질을 개선시켜줄 뿐만 아니라 정보 면에서도 가시적인 혜택을 제공하는데, 특히 메시지가 자기 충족적이면서 파괴력이 강할 때 그렇다. 중앙은행이 환율 안정을 위해 시장에 개입할 때, 바로바로 미세조정을 하는 것보다 일정 범위를 설정하여 어느 정도 소음을 허용한다고 가정해보자. 환율이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개입하므로 환율이 소폭 출렁여도 중요한 정보가 되지 않는다. 일정 소음이 허용되므로 사람들은 환율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는다. 환율은 변동하지만 폭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진화생물학, 진화게임 이론, 갈등 상황에도 적용된다. 우리 행동을 어느 정도 예측하지 못하게 하면, 갈등 상황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우리가 항상 똑같은 임계점을 기준으로 반응한다고 가정하자. 예를 들어, 일주일에 17번 모욕을 당한다면, 18번째 모욕을 당하는 순간 상대편 얼굴에 주먹을 날린다고 생각해보자. 이런 식으로 우리 반응이 예측 가능해지면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서 임계점 직전까지만 우리를 모욕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임계점을 임의로 변경해서 때로는 아주 사소한 농담에도 과잉 반응을 보인다면, 사람들은 어느 선까지 모욕해도 좋은지 알 수가 없다. 갈등 상황을 맞이한 정부에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정부는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도 때로는 과잉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점을 상대국에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과잉 반응의 강도조차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어야 한다. 예측할 수 없게 만들면 분쟁을 강력하게 억제할 수 있다.
랍비 힐렐은 “남에게 당하고 싶지 않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 나머지는 모두 주석에 불과하다”고 했다. 내 화두를 찾아내기까지 평생이 걸렸다. 내 화두는 이렇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 마음 깊이 간직한 것, 개인적인 것, 이야기들은 것, 실체가 있는 것을 좋아하고, 추상적인 것을 경멸한다. 우리에게 좋은 것(미적 감각, 윤리)과 나쁜 것(운에 속는 어리석음)의 차이는 모두 여기서 나오는 듯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