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룡변어정
신라시대의 유물로 밖의 팔각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내부의 원형은 원불(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다. 원성왕 때 이 우물에 세 마리의 호국용이 살고 있었는데 당나라 사신이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사람을 시켜 빼앗아 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월성 그리고 석빙고
월성
신라의 첫 번째 궁궐터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월성의 북쪽으로 추측하고 있다. 월성은 신라의 두 번째 궁궐로 만들어져 신라가 패망할 때 까지 사용되었다. 월성은 하늘에서 보면 반달 모양을 닮아 반월성이라고도 한다. 흙과 돌을 섞어 쌓았으며 남천을 자연 해자로 삼고 나머지 3면에 인공해자를 파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원래 호공의 집이 있던 곳인데 이곳이 좋은 땅임을 안 석탈해가 꾀를 내어 차지한 곳이다.
『 전설 : 석탈해가 토함산에 올라 바라보니 반월모양의 땅이 무척 좋아 보여 알아보니 호공의 집이었다. 이 집을 수중에 넣으려고 집 주변에 숫돌과 쇠붙이, 숯등을 묻어두고 조상대대로 쇠를 다루며 이곳에서 살 다가 잠시 다른 나라로 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집 주변을 파보면 증거 가 나올 것이라 하였다. 그의 말대로 주변을 파보니 쇠붙이가 나와 호 공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내막을 알게 된 남해왕은 탈해가 보 통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여 사위로 삼았다. 그 후 탈해가 4대 왕이 되 자 이곳을 왕성으로 정하고, 5대 파사왕 때 석벽을 쌓아 훌륭한 성을 만들었다. 』
석빙고
얼음이 귀했던 옛날에 석빙고는 겨울에 얼음을 저장하여 일 년 내내 꺼내 쓰던 돌로 만든 냉장고이다. 해마다 백성들이 얼음 저장창고를 지어야 하는 불편을 없애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쓸 수 있도록 화강암으로 만들었다. 현재 있는 석빙고는 신라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석빙고 가운데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었다.
어떻게 한여름까지 얼음을 녹지 않게 보관할 수 있을까? 석빙고에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있다.
대릉원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고대 국가의 왕들은 죽어서도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신라의 왕들은 도시 한 가운데 커다란 선왕의 무덤을 만들었다. 선왕의 무덤을 통해 자신의 힘을 과시해 백성들이 왕을 존경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대릉원은 평지에 23기의 고분이 솟아있어 고분군의 규모로는 경주에서 가장 크다. 23기의 능 말고도 수많은 무덤자리가 있었지만 봉분이 있는 무덤만 남기고 모두 없애버렸다.
천마총
일제 강점기 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고고학은 1970년대 들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래서 경주의 무덤 중 하나를 발굴하기로 하였는데 가장 큰 황남대총을 발굴하기 전에 작은 천마총을 시험 발굴했는데 그곳에서 많은 유물이 나왔다.
또한 천마총을 만드는데 하루 1백 명의 인부가 계속 작업한다고 가정하면 90일 가까운 시간이 무덤을 만드는데 필요했다. 대릉원 고분들을 만든 재료는 모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이어서 왕들의 무덤을 만들 때 동원된 백성들의 어려움을 상상할 수 있다.
금제 허리띠 금팔찌 은팔찌 금반지 등을 착용한 주검이 누워 있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말이 그려진 그림이 말다래에 그려져 있었기 때문에 천마총이라 불리게 된다. 천마도는 신라인의 그림 수준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자작나무껍질을 여러 겹 겹쳐 실로 누비고 둘레에 가죽을 댔다. 안쪽 주 공간에 백마를 그렸다. 천마총을 통해 신라 고분의 축조방법을 알 수 있었다.
황남대총
경주 무덤 중에 가장 큰 황남대총은 남북으로 길게 놓여 있는 표주박 모양이다. 남쪽 무덤은 먼저 죽은 왕이, 북쪽 무덤은 왕비가 묻혀있다. 발굴조사에서 왕의 무덤에는 시신이 있는 관과 부장품 상자, 주로 무기와 생활용품이 출토되었고, 왕비의 무덤에서는 ‘부인대’라고 적혀 있는 허리띠 끝 꾸미개, 금관, 목걸이, 팔찌, 곡옥 등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왕의 무덤에는 순장을 한 것으로 추측되는 20대 여자의 시신도 나왔다.
신라 고분의 내부구조는 돌무지무덤(적석총)과, 돌무지 덧널무덤(적석목곽분)으로 되어있다. 땅을 파서 모래와 자갈로 깔고 목관을 넣고 그 위로 큰 돌을 쌓고 물이 새어들지 못하게 진흙을 덮어 다진 뒤 다시 흙으로 봉토를 덮었다. 이와 같은 구조는 도굴 당할 염려가 없는 것이 큰 장점이다.
김유신장군묘
신라의 삼국 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은 단연 김유신이다. 그러나 그는 정통 신라인이 아니라 가야 국의 시조인 김수로왕의 12대 손이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여동생을 김춘추에게 시집보냈다.
『 김유신은 김춘추의 옷고름을 의도적으로 찢고 집으로 데리고 와서 동생 문희에게 옷고름을 달게 하고 자리를 피해주어 결혼하게 만든다. 김춘추는 진골이어서 문희와 결혼할 수 없는 입장이었는데 선덕왕이 남산에 나들이 왔을 때를 맞추어 문희를 불태워 죽인다고 연기를 피워 결혼을 승낙 받게 된다. 훗날 문희는 왕후가 되고 그의 아들 법민이 왕위를 이어 문무왕이 된다.』
김유신의 가장 큰 공은 선덕여왕 때 비담이 난을 일으켜 월성에서 공방을 벌일 때,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여왕이 패할 징조라 여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다음날 허수아비에 불을 붙여 연에 매달아 띄워 어젯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소문을 내 군사들이 용기를 얻어 승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또, 황산벌에서 백제장군 계백을 물리치고 사비성을 함락하여 백제를 멸망시킨다. 667년 문무왕을 따라 당나라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11월 환군하였다. 이듬해 9월 나당연합군으로 평양을 칠 때 연합군 대총관이 되었으나 왕명으로 금성에 남아 국방을 맡았다. 문무왕 13년 673년 7월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유신 장군의 묘 둘레의 호석에는 12지신 상을 새겼다. 대개의 경우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들이 새겨지는데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다. 삼국을 통일한 공로가 컸으므로 무덤의 양식이 어느 왕릉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는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뒤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
김유신장군의 비석 묘자에 릉자에 물을 부우면 묘자가 나타난다고 했는데...우리가 했을때는 안변했지?
포석정
포석정은 신라 왕실의 별궁으로, 역대 임금들이 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지금은 정자 등의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마치 전복같이 생긴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다. 화강암으로 만든 수구의 길이는 약 6m이며 63개의 돌로 만든 도랑으로 물이 흐르는 포석정은 왕이 귀족과 둘러 앉아 술잔을 나누며 춤추고 즐기던 곳이다.
석구는 ‘유상곡수’를 벌일 수 있는 특이한 구조로 만들었다. 유상곡수란 수로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그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놀이로, 이러한 목적으로 만든 도랑을 곡수거라 한다. 이 놀이는 천 년 전 중국에서 하던 것이다.
경애왕 4년(927) 11월에 왕이 술을 마시며 즐기다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잡힌 뒤 자결하여 신라의 패망을 재촉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경애왕이 연회를 즐겼다고 하지만 견훤이 근처까지 쳐들어 왔는데 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또 견훤이 습격했을 때는 음력11월이라 밖에서 연회를 즐길 날씨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국가의 사당으로 경애왕은 국난을 맞아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포석정은 실제로 제사 터이자 연회 장소였을 가능성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