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문학을 꿈꾸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베로니까
다도해 바닷길 - 창간회장 최병두
바로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길로 돌아가고 싶다
곧게 뻗은 고속고로보다
굽이굽이 오솔길을 따라
날개로 물결을 나는 수중익선보다
바람맞이 물결을 타는 돛단배를 타고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
거문고자리엔 거문고를 그리고
백조자리를 따라 백조를 읊고
전갈자리 전갈 꼬리를 치고
큰곰 작은곰도 함께 불러
여름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이고 싶다
바다에는 점점이 속삭이는 섬들
압해도 까치섬에서 까치와 놀고
자은도 할미섬 할머니도 만나
비금도 명사십리 해당화도
하의 장산 흑산 홍도 파도에 묻혀
다도해 바닷길을 돌고 돌아
하늘에는 반짝이는 별 바다에는 가물대는 섬
별빛 이은 별자리를 옮겨 섬길을 이으며
바로가는 길보다
돌아가는 길로 돌아가고 싶다
갯 벌 - 차범석
나이를 먹을수록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는 버릇,
높은 산도 오르기 싫고
불확실한 미래도 믿기지 않아,
내가 가장 안심하고 가라앉는 곳.
그곳은 고향이다.
고향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가까이 다가선다.
수십년 나이테가 끼어도
항상 새롭고 서늘한 대나무 겉살 같은,
잊으려고 바둥거릴수록 더 더워지는
첫사랑 같은 고향이다.
내가 가라앉을 맨 미닥은
고향의 한구석 똥섬 갯벌이다.
밀물이 걷히고 엉성하게 드러난
그 갯벌이다
썰물 때의 갯벌에는
감출 것이라고는 없는 벌거숭이들만 남는다.
갯벌도, 게구멍도, 버려진 쓰레기도
그리고 악동들도 모두가 벌거벗은 것.
감추지도 않고, 가리지도 않고
태양 아래 그대로 누워 있는데도
누구 하나 수치심이라곤 없는 썰물 때의
똥섬 갯벌이 나의 고향이다
고향살이 20년에
타관살이 55년
속고, 속이고, 빼앗고 빼앗기고,
미워하고 미움받고, 눈물 같고
진주 같은 온갖 잡것들이
이제는 썰물 때의 갯벌처럼
고시란히 드러나는,
그런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갯벌이 그리워진다.
木浦 오거리 - 범대순
꿈은 언제나 살아서 깨어 있다. 가슴 속에 온도로 때로는 파도로 목포 오거리가 나에게 그러하듯 그리움으로 알몸으로 깨어 있다. 오거리는 언제나 사나움의 푸른 빛살들 밤에는 더욱 아름다운 맨발로 뛰는 사람들 소나기 같이 욕설이 시원하게 길을 적셨다. 무수히 손때가 그리운 바위산에 다았었다. 나는 거기서 젊음을 배웠었다. 젊음의 부두와 그리고 기적(汽笛)을 배웠었다. 떠나가면서 들어오고 들어오면서 떠나가는 소리 전설 같기도 울분 같기도 한 바위를 배웠었다. 逸松도 三夏도 平步도 載錫도 다 가버린 오거리 송사리들도 날개를 달고 멀리 바다로 날아갔다. 그리하여 지금은 슬픔 같기도 하고 기쁨 같기도 한 옛날 젊음이 나를 멀리 거기 우두커니 서서 있다.
목포 사람들 - 최재환
유달산이 그렇듯
목포 사람들은 말수가 적다.
언제부턴가 주눅이 들어
전신의 응어리가 곪아 터져도
돌앉아 눈물을 훔칠망정
소리는 내지 않는다.
입을 열어야 할 말도 없지만
꿈벅꿈벅 두 눈으로
가릴 건 다 헤아리면서
이웃의 아픔도 귀로만 담는 사람들.
숨 쉬는 하늘이야
모두 우리 것,
바보스런 모습이
차라리 칼날보다 매서워
메아리의 화답은 잊고 산다.
발걸음을 옮기면 거기도 내 땅,
예나 제나 변함 없는
도시의 어느 구석에도
우리의 잔정은 무데기로 쌓여
덜컹거리는 세상 일쯤
모른 척 해도 되는 것을.
강이 막히고 산이 헐려
그리운 노래도 나그네처럼 비탈로만 흐르고
막힌 둑이 터지면
천혜의 땅에 햇빛도 여울질까.
열어야 할 말도 없는 입을
하구언 철문처럼 꽉 닫아두고 산다.
바람은 언제나 눈에 어린다 - 고중영
꾀나 낯선 바람이다.
늦가을 산정을 넘느라
푸석한 머리카락이 헝크러진 모습이다
시월상달 중순을 걸어넘는 산마루는
등이 적당히 굽었고
은행잎을 뿌리는
홀로된 여인의 숨결을 다둑거린다.
함께 놀던 다람쥐도
다람 다람을 줏으러가고
텅빈 산간에 눈물같은 빗방울이
아득하게 뿌려지면
뜨거웠던 여름의 기억이 폐결핵처럼 앙상하다.
/사랑하구요
축복합니다/
뜻이 분명치 않은 편지한장
자꾸 눈밖으로 나서는데
어린다
눈물에 어린다
그녀의 노년이 시작된 이 계절이
바튼 숨을 헐떡인다.
흔들리는 유달산 - 최 건
흔들리는 산도 있다.
흔들리는 사람이 되어 바라보면
바람으로 나무들 흔들리듯 밑둥째 흔들리고
안에서는
흔들리는 사람처럼
나날이 뜨겁게 타 들어가고 있는
상처 깊은 산
흔들리지 않았을 땐 흔들린 적 없었다.
겉으로 뜨겁고 겉으로 차가운
슬픔은 슬픔으로만 남고
기쁨은 기쁨으로만 남더니
내가 흔들리면서 산도 흔들렸다.
어둠의 빛 속에서도
유달산을 보고 있으면
어느 새 온몸으로 친숙해진
불멸의 手話.
'눈물을 웃음으로 감출 줄 알라' 그러고선
'웃음을 눈물로 감출 줄 알라' 그러고선
제 힘으로 덩어리째 흔들리면서
남이 된 세상 쓰러뜨리기라도 하듯
바람받이 나무처럼 흔들리면서
노래하더니
그 소리는 간 데 없이
海溝의 캘 수 없는 침묵으로
멈춰 있다.
그러고선
문득 한 마리 갈매기의 날개에 실려
혼자 춤추며 어디론가 떠나면서
우리의 작은 가슴을 쓰을며 가고 있다.
흔들리는 사람과 흔들리는 산이
오늘도
하루를 거두며 그물처럼 내리는 저녁놀 아래
마주보고 앉아서 手話를 한다.
// 갠지스강 뼈다구 뜬 물에 실비 오네 간짓대 들어 별 훑다 잠든 꿈 속 내 다시 태어나 붉은 말 되어 미친 갈기 날리더군 석양 속에서 비암 속을 보았지, 고 꼬불탕한 것 텃밭에 꽃 피었다고 좋아라더군 님 등에 타고 숲에 들어가 큰 나무 아래 앉으니 내가 나였네. |
바다에 띄우는 엽서 - 박유미
1. 감포 가는 길
멀리 경주에서도 한참을
내리 달려가는 버스길
저만치 멀어지고 있는 세상의 속도감
향기 같이 번지는 급한 마음의 물살.
감포 앞바다에 서니 철새들의 渡來
늘 푸른 秘境은 여전한데
내 것보다 더 절실한 강물의 울음
그 낮은 음성에 더욱 흔들리는 그리움.
2. 바다에 내리는 비
삶에 아득히 젖어
닿지 않는 손
비가 내린다, 바다에
다가갈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온갖 세상의 몰인정이 내게로 달려올 때
비 내리는 바다에 오면,
비로소 내 안으로 沈潛하는 내 안의 迷惑.
갑자기 불가항력적인 것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행복감
바다에, 비가 내린다,
9월에 서서 - 산향 조희범
한그루 나무는
갈밭을 건너 온 바람으로
창백한 붉은 꽃을 떨구고
이파리들은 슬픈 눈물을 지으며
갈색으로 변해간다.
상처로 남은 꽃잎들이
물결 위에 실려
모래톱으로 밀려오고
우듬지 위에 풋풋한 풋과일은
가을 햇살이 배어든다.
더디게 오더니만 어디쯤 왔을까
종교 같은 정념을 끌어 모아
정열의 숨결처럼 열매를 살찌우고
낯설음도 기쁨으로 다가오면
차라리 순박한 너를 맞는다.
달려온 바람이 열기를 몰아내고
지나간 시절의 눈부신 향수에
잠시 눈물 짓다가도 잉태한 기쁨에
푸석한 얼굴을 내밀며
너와 나의 인연을 길어 올린다.
억새의 춤 - 최홍걸
하늘공원에 올라
하늘바람 휘어잡고 쓰러지는
억새의 춤을 바라본다
억새는 다시 태어나 새가 되고 싶었을까
새가 되어
바람의 춤을 추고 싶었을까
몸의 중심으로 뚫린 바람의 길을 따라
한 해의 가장 푸르른
한로(寒露)의 날을 기다려
붉디붉은 노을로 타오르는 억새의 춤이여
날지 못하는 것은 한 줌 흙에 묻힌
뿌리 탓은 아니었네
뿌리를 움켜쥔 흙 때문은 아니었네
북악(北岳)의 하늘 저 편
새가 되어 날아오르던 전생의 나라가 있어
저리도 무애로운 바람의 허리를 휘어잡는가
가벼워져야 하네 가벼워져야 하네
이승을 잡아당기는
집념의 물끼를 죄다 털어 버리고
은회색 머리카락 쓸어 내리면
나는 억새
무욕의 춤사위로 날아오르는 나는 억새
하늘공원에 올라
바람의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억새의 춤이 된다 억새의 혼이 된다
고향을 떠난 벗에게 - 김엄조
보기만해도 배부른 가을이 왔는데
듣기만하여도 가슴이 뛰는 소식이
줄지어 기다리는데
知天命,이제사 고향을 떠난 벗이여
떠나야할 속사정은 내 알지 못하네만
떠나지 않고는 안될 까닭이 무언지
내 알지 못하네만
귀향의 날, 변함 없는
자네의 악수에 내 손이 저리길 원하네
고향을 떠난 벗이여
부디 주름살 쭉 펴시고
얼른 돌아 오시게.
*
우울한 날 - 홍주 (박광호 시인의 아들, 사제)
우울한 날이 있다
나만의 우울한 날이 있다
사랑도 삶도
지겨운 날이 있다
나도 모르게
당신이 생각나는
그런 날이 있다.
우울한 날 - 한빛 박광호 (화답시)
..... 그중에는 자기 십자가를 내려놓을 양으로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이도 있다. 그들의 나약함이 안타깝다. 주위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마음의 전환이 절실하다. 적극적으로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야한다.
기븜과 긍정의 자세로 자기 내면과 주위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한다.
풍경소리 7 - 조유금
차 한잔을 마시듯
슬픔까지도 중독되는 것인가.
명상의 소리 들으며 발길아래
아득한 허상의 외침들
이 세상 사는 동안
버리고 또 버려도 다 못 버리는
사람, 사람이여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서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나니
이 모든 것을 버리고 살면
몸도 마음도 평화로운 것이라고.
선사의 가르침을 냉소하며 살았건만
가슴에 묻힌 뼈
삭히고 있네.
그 바다는 지금 - 김동하
내 안타까운 마음 저 편에서
그 바다는 지금 까무러치고 있다
대반동해안 돌계단에 앉아
다도해의 살 냄새를 맡으며
차차 젖어 가는 눈동자처럼
타다 남은 노을 몇 장이 빈 하늘가에
마지막 불씨를 지피고 있는 바다
수평으로 달려오는 부단한 바람을 타고
금빛 반짝이는 모래알로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는 시야 끝에
끼룩끼룩 갈매기 한 마리
처연히 하늘을 긋고 있다
잠시 눈을 감으면 한 발 두 발
청춘의 모든 빛나는 기억들이 달려와
선홍빛 노을로 불타며 쓰러지는 하늘
내 안타까운 마음 저 편에서
지나간 견딜 수 없는 한 시대를 위하여
그 바다는 시방 하얗게 까무러치고 있다
땅의 사람, 바람의 사람
고향 만들기 10 - 조 한금
아, 상쾌한 아침이다. 상큼한 공기를 마시려고 현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나선다. 담장 옆 의 정자 추녀 밑에선 진즉 일어난 부지런한 참새가 시끄럽게 재잘댄다. 마당의 잔디밭에선 곤충들이 놀라 뛰어오르고 텃밭가로 심은 콩 포기 밑에선 풀벌레소리가 요란하다.
호박넝쿨 무성한 텃밭으로 들어서 본다. 여기저기에 누런 호박이 펑퍼짐한 엉덩이를 내놓고 젖은 몽고반점을 말리고 있는 중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호박전을 부쳐 먹을 요량으로 애호박을 찾느라 넝쿨을 뒤졌을 뿐인데, 무성한 잡초를 뽑아주느라 덤불을 조금 들췄을 뿐인데, 그럴 적마다 며칠 후면 영락없이 암꽃에 매달린 탁구공만한 애기호박이 땅에 떨어져 나뒹굴고 있는 것이다. 이놈들만큼 간섭받기 싫어하는 놈들이 또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난다.
나 역시 내가 하는 일 누가 간섭하는 건 죽기보다 싫은데 아마 내가 호박기질을 닮았나보다. 이놈들을 가만 내버려두고 지켜봐만 주면 덩굴손을 길게 뻗어 덤불속 구석구석에 제 몸통을 숨겨두고 언제 키워냈는지 몸집을 최대한 불려가며 익어가고 있다. 제 할일을 찾아서 스스로 하고 있는 자립심이 강한 놈들이다. 괜히 아이들을 잘 키운답시고 이것저것 참견하고 과잉보호하면 결국은 애기호박처럼 완숙을 다 못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호박에게서 배운다.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호박농사나 자식농사를 잘 짓는 것이라 결론짓는다. 이놈들은 잡초와 엉켜 어우렁더우렁 더불어 살기를 좋아하니 천생 서민의 먹을거리임이 틀림없다.
텃밭에는 다 영근 깨가 쏟아지고 있다. 태풍 곤파스의 영향 때문이다. 얼른 베어와 실내에서 선풍기로 말린다. 놈이 어렸을 땐 잎 옆에만 앉아도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났다. 이놈들은 아예 거름기 많은 걸쭉한 땅을 싫어한다. 척박한 맨땅에서 호리호리하게 자라 삐쩍 마른 몸매에 작은 주머니를 욕심껏 매단다. 깨 주머니 안에 수많은 깨알을 지식처럼 저장한 이놈들은 필시 선비요 청백리다.
마른 깻단을 턴다. 우수수 깨가 쏟아진다. 소나기 퍼붓는 소리 같다. ‘깨가 쏟아지는 기쁨’을 신혼 때가 아닌 늘그막에 경험한다. 한줌을 심었는데 두어 됫박 거뒀으니 일 년 내내 양념걱정은 없어졌다. 체면과 자존심을 하늘같이 떠받들고 살던 꼬장꼬장한 선비를 이젠 참기름이나 깨소금 양념처럼 만나보게 된 세상이다. 몇날며칠을 깨를 털어 갈무리하기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사먹는 게 싸다”는 말이 내 입에선 불쑥 튀어나온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동학란의 3일 천하 녹두장군 전봉준과 관련된 은유성 노래가사다. 날마다 녹두를 조금씩 딴다. 녹두를 심고 거두면서 그 작은 알갱이의 다양한 쓰임새는 인정하나, 파랑새가 앉아 녹두꽃이 떨어져서 녹두 수확이 없으면 청포묵 장수가 울고 갈만큼 포기가 튼튼하진 않다. 꽃 피었던 순서대로 익어가니 거두는데도 손이 많이 간다. 이놈들을 나물로 기르면 숙주나물이 되고 앙금을 갈앉혀 묵을 쑤면 맛있는 청포묵이 된다. 추석 송편의 고물이 되기도 하고 약으로는 해독제가 되기도 하는데, 그래서 정력 감퇴가 된다는 속설의 숙주나물은 스님들이 드시는 절음식이기도 하다. 나는 이놈들을 거두는 대로 설삶아 냉동고에 저장한다. 후일 귀하게 쓰일 때가 있을 것이다. 그래봐야 5천원 어치도 안 될 양이다.
참 이상하다. 5천원의 5만 배인 지폐를 손으로 주무를 때는 날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는데 5천원의 10분의 1도 안 되는 값어치의 푸성귀를 주무르면서 내가 이리 만족하고 좋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아이러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맞춤농사에 만족하고 거두는 재미에 행복하다. 땅은 정직하니 심은 대로 거둔다. 소출을 더 내기 위한 농약도 제초제도 성장 촉진제도 나는 모른다. 수많은 곤충과 방아깨비가 점점 자라 성충이 되는 뜨거운 한낮과, 청개구리가 유리창 문에 납작 엎드려 거실 안을 들여다보는 서늘한 밤이 있으면 농사는 하느님이 손수 지으시니 나는 그것만으로 감사한다.
‘땅의 사람’들! 그들은 고도의 기술자다. 처음부터 농촌에서 나고 자라 농사를 배웠고 몸으로 익히면서 잔뼈가 굵었으니 어지간한 노동은 오히려 운동이다. 첫새벽 다섯 시면 밭으로 출근하고, 해가지면 퇴근하며 휴일이 따로 없다. 씨 뿌리고 거두는 때를 알며 농약과 성장촉진제의 비율은 물에 얼마큼 타서 뿌려야 하는지를 머릿속에 담고 있는 전문가들이다. 오로지 경험으로 축적한 노하우니 사람마다 방법이 조금씩 다를 뿐이다. “농약 안하고 배추 키우는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큰소리친다. 배추벌레가 잎을 모두 갉아먹어 그냥 키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어려운 그들의 전문성을, 바람 따라 들어온 ‘바람의 사람’인 내가 감히 무슨 재주로 따라잡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땅을 최대한 활용하여 돈하고 바꾸는데 천부적이다. 금년엔 이상 기온으로 야채 값이 올랐다. 오이 10kg 한 상자에 4만 4천원, 그것도 현지에 놓고 도매로 파는 시세다. 하루 1백만 원 넘게 수입하는 그들을 나는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바라볼 뿐이다.
처음부터 농사 지러 들어온 귀농인은 아니었지만 고향을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들어왔으니 내가 먹고 살 것은 자급자족해야 한다. 그래서 농사 흉내라도 내본 것이, 음식 쓰레기를 밭에 묻어 거름을 대신하고 씨앗을 심고 잡초만 뽑아주는 것으로 얻어진 수확이 내 유기농 소채인 것이다. 내 엉덩짝만 한 면적에 대파씨를 얻어다 심었고, 내 키 면적 만큼엔 더덕씨를 사다 심었다. 이웃에서 부추도 몇 포기 캐다 심었고, 상추도 감자도 모두 얻어 심었다. 그런데 제일 편한 농사가 고구마다. 심어놓고 풀 좀 뽑아주면서 5개월을 기다리면 뿌리가 토실토실 영근다. 요즘은 그 순을 따서 데쳐 초고추장에 무쳐먹는다. 이 소박함이 바람의 사람으로 사는 귀촌보고다.
그런데도 이까짓 농사에 한동안 손이 부어 오므려지지 않았고 어깨 근육에 병이 나서 전주까지 통증클리닉 병원엘 다녔다.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것 아니지요? 고구마 한차 값 듭니다. 그만하세요.”
의사의 처방이다. 그러나 콩 한쪽도 열두 명이 나눠먹는다는 친정아버님의 가르침도 있었는데…
요선암(邀僊岩) - 김이경(김경숙)
미륵암에 다다르자 강바람이 풍경을 울린다. 우리를 반기는 것인가?
그 가느란 떨림에 눈길을 멈추다 석등 앞을 지난다. 암자의 모퉁이만 돌아서면 영월의 무릉계곡이라는 요선암이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잠시 내려가다 문득 발을 멈춘다. 여기는 어디인가. 그리고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풍만한 둔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낸
채 모로 누운 여인, 보료에 얼굴을 묻고 턱을 고인 여인……. 초병인 듯 풍경소리가 다시 울린다. 그러나 강가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살결 고운 여인들은 인기척도 풍경소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들은 곤히 잠들어 있다. 잔물결이 일어 드러난 허리께를
살며시 덮어주지만 길손은 눈이 부시다. 숨소리마저 잠시 멈춘 곡 안에는 정적이 흐르고 풍경도 소리를 멈춘다.
숨을 고르고 계곡을 둘러본다. 강물을 보료삼아 누워있는 사람들은 편안하고 느긋해 보인다. 드러난 알몸이 햇빛에 반짝이고 강바람이 암향(暗香)인 듯 불어와 잠시 옷깃을 가다듬게 한다. 이들이 바로 천상의 선인(仙人)들인가.
요
선암은 영월군 수주면 무릉리 계곡에 있는 바위들의 이름이다. 조선시대 봉래 양사언이 ‘신선이 놀다간 계곡’이라는 뜻으로
‘요선암(邀僊岩)’이라 글자를 새긴데서 얻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잠든 선인들 허리를 껴안고 소리 없이 흐르는 강물은
주천강(酒泉江)이다. 그렇다면 저 강물이 바로 유하주(流霞酒)이리라.
달을 부르고 별도 불러 유하주에 꽃잎을 띄우고 노래했을 선인들의 모습을 그려본다. 강물은 그 선율을 기억하고 있기라도 하듯 들릴 듯 말듯 가락을 읊조린다. 그들은 금방이라도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것은 아닐까.
잠
든 사람들 너머 멀찍이 크고 작은 수많은 돌들이 물살을 희롱하고 있다. 희고 보얀 것이 물놀이하는 동자승인 것도 같고, 신화속의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알 같기도 하다. 화강석을 쓰다듬어 이리도 고운 살결을 빚은 강물의 시간이 가슴 언저리에 얹힌다. 시간, 그
오랜 시간이.
뜻을 세워 손발이 닳도록 무엇을 이루어 보았던가. 정하게 고인 것도, 단단하게 쌓인 것도 없다. 살뜰하게
갈고 닦아 모서리 닳아진 너그러움도 품지 못했다. 힘들면 돌아가고 주저앉기를 일삼았던 시간들이 내 안에서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의 마디들이 아프게 찔러오는 것 같아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몸을 뒤척일 것 같은 모로
누운 여인의 풍만하고 느슨한 곡선이 휘감겨온다. 내 몸마저 한 줄 부드러운 선이고 싶다. 평화롭다. 어떤 불화도 끼어들 틈이
보이지 않는 너그럽고 온화함이다. 저절로 그 속에 젖어들어 감히 속된 일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것 같다.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날 섰던 회오(悔悟)도 불안도 서서히 흐물거린다. 누군가 내 몸을 비단 너울로 쓰다듬는 것 같다.
말랑말랑할 것만
같은 흰 몸에 살그머니 손을 얹는다. 햇볕에 데워진 탓일까. 체온인 듯 따스하다. 그러나 그 뒤로 전해오는 맥박이 없다. 꼭
말랑한 살 속에 팔딱거리는 핏줄이 있을 것만 같았는데……. 무엇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허전하다. 그런데 그 또한 시선
닿는 곳마다 고여 있는 온화함이 이내 빈 곳을 채워온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너그러워지고 편안해지게 하는 기운, 그것이 어쩌면 이
바위의 맥박이고 숨결인지도 모른다.
조심스럽게 바위 위에 앉는다. 엎드린 듯 누운 듯 바위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쯤 물이
고인 웅덩이가 보인다. 요선암의 배꼽이다. 데스밸리에서 8년을 머물며 사막의 바람을 찍어온 사진작가의 사진첩을 떠올린다. 사막의
바람은 모래로 여인을 빚었다. 신비롭고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전율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평자(評者)가 대지의 배꼽이라고
일컬었던 사구(砂丘)속에는 어둠이 웅크리고 있었다. 빛이 모두 침몰해버린 블랙홀이었다. 숨막히는 긴장과 날카로운 고독이 뼈를 삭일
것 같았다. 그러나 요선암의 배꼽은 빛으로 출렁이고 있다. 잠깬 선인들이 언제고 마실 수 있도록 준비된 감로수인지 모른다. 혹
선계와 사바세계를 연결하고 있는 인연의 고리는 아닌지. 저 배꼽에 이어진 탯줄 따라 선계의 길이 열려있는 것이나 아닌지…….
이
골짜기에서는 누구도 미워할 수 없을 것 같다. 어떤 잘못이라도 다 용서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안타깝고 불안하고 초조한 모든
언어를 벗어버릴 수 있는 이런 곳을 일러 선경이라 하는가. 몸과 마음이 무게를 덜고 한없이 가벼워져 한 줌 깃털이 되는 것만
같다.
엄니가 끼레주시던 맛난 그 쏙국 - 박원석
어린 시절, 해마다 봄이 오면 장터 어물전에는 쏙이 많이 나왔다.
쏙이라는 것이 뭐냐? 생김새가 갯가재와 비슷하지만 갯가재나 바닷가재 종류는 아니다.
쏙은 남해와 서해 연안에 서식하는데 바다 밑 모래진흙이나 갯벌에 Y자모양의 구멍을 파고 살며
구멍에 물이 들어오면 나와서 먹이를 찾는다.
쏙은 이마 껍질 윗면에 사마귀 모양으로 돋아난 돌기가 많고 이 돌기 위에는 털이 다발로 나 있다.
또 온몸을 감싸고 있는 껍질 윗면에도 연한 털이 촘촘히 나있는데
이 쏙을 잡는 방법은 쏙 한 마리를 잡아서 다른 쏙의 구멍 입구에 넣으면
이 쏙이 구멍속에 있던 다른 쏙을 물고 나오는 속성이 있다.
어린 시절 개빠닥에서 이런 방식으로 쏙을 잡음시로 신기해하던 기억들이 아스라히 떠오른다.
그런데 이 쏙도 크고 오래 되면 껍질이 억세서 못 묵는다.하지만 초봄에 잽히는 쏙은 껍질이 연하고 부드라와서 그냥 ?아 오독오독 씹어묵기만 해도 참말로 만나다.그리고 렇게 씹을 때 나오는 쏙의 육즙이야말로 어찌나 감칠 맛이 나는지 별미 중의 별미다.
그리고 이 쑥국처럼 시원하고 만난 것도 읍따.봄철에 지천에 깔려있는 푸룻푸릇한 쑥을 뜯어다 넣고 된장을 약간 풀어 끓인 이 쏙국처럼 만난 국도 드물다.솥이나 냄비에 쑥을 많이 넣고 국물을 잠방하게 부은 다음 된장을 풀어 끓이면 하얀 쏙은 금방 고추색 빨간 빛으로 변하면서 오그라들며 익는다.
어려서는 이 쏙이 참 흔하고 가격도 쌌기 때문에 우리 엄니들은 봄철 쑥이 나올 무렵이면 장에 가서
꼭 사다가 국을 끓여주시곤 했다.된장을 넣어 끓인 국들이 다 만나듯이 이 쏙을 넣어 끓인 쑥국은 식어도 맛이 있었다.
어찌나 만나든지 밥도 묵기 전에 국자로 쏙과 쑥 건데기를 떠서 겁나게 많이 묵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제는 시골장터에 가도 예전처럼 이 쏙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다.아니 젊은 사람들 가운데는 쏙이 먼지도 모르고 쏙과 쑥을 넣은 된장국 맛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 것이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쇼핑물에서 충청도 서해안에서 잡은 쏙을 해물탕용으로 팔고 있는 것이 보인다.그렇다한들 낙지나 새우, 패류 등 아무 해물이나 넣어 끓인 정체불명의 해물탕이 쑥을 넣어 끓인 쏙국의 맛과 어찌 비교할 수가 있을까?
고향에 가면 쏙을 사다가 된장을 푼 쑥국을 한 번 끓여묵고 잡다.내가 맛보고 싶은 것은 쏙이 아니라 잊혀져 버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련한 추억들일 것이다.
바람의 사전 / 바다 - 정중수
인간은 바다와 혈연관계에 있다. 실제로 인간의 혈액에는 바다의
성분인 소금기가 스며 있다. 인간이 바다와 혈연관계라는 것은 비단 소금기만을 증거로 들어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에게는 자신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는 바다에 대한 동경이 있다. 그렇다. 바다를 처음 본 사람이라고 해도 바다를 한번 본 이후로는 바다를 잊지
못한다. 바다가 자신의 혈연이 아니고서는 그럴 수가 없다. 그것은 자신의 혈연을 본능적으로 알아보는 인간 특유의 오감에
기인한다고 할까.
나는 텔레비전이나 영화 같은 영상으로 비치는 바다만 보고도 금방 눈물이 나올 때가 자주 있다. 내가
바다에 미친 사나이어서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은 바다에 대한 독약 같은 그리움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내가 숨겨놓은
바다의 파도 소리를 녹음해놓고 바다가 그리울 때면 듣곤 한다. 어느 바다의 파도소리든 그 소리가 그 소리라고 할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한번만이라도 자신의 바다소리를 녹음해놓고 들어본 사람이라면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완도 바다와 강릉 바다의 파도 소리는
전혀 다르다. 나는 잘은 모르지만 솔숲에 부는 바람소리도 각기 다르리라고 생각한다. 하얀 물머리를 치켜든 수천만의 파도가
바닷가로 밀려와서 철썩이는 소리, 아니 어느 먼 나라의 소식을 싣고 와서 바닷가 모랫벌에 부려놓는 소리, 아니 아니, 하느님의
옷자락 같은 파도가 지구를 포옹하는 소리, 내 바닷가에서 철썩이는 파도소리는 나의 본능을 건드린다.
그것은 바다와 나의
교감이다.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바다와 내가 한몸이 되는 소리다. 나는 어디에 살고 있건 내 영혼은 결코 바다로부터 떠나지
못한다. 바다를 생각할 때 비로소 나는 번잡하고 시끄러운 서울의 골목에서도 위로를 받는다. 바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말이다.
바다를 숨겨놓고 서울로 온 지 삼십년이 넘었다. 그 바다가 보고플 때면 신촌에서 인천 가는 버스를 타고 인천바다를 보러 가거나
강화도행 버스를 타고 가서 하루종일 바다를 보고 오곤 했다. 내가 숨겨놓은 바다는 아니지만 세상의 모든 바다는 서로 손을 잡고
있기에 내 바다를 본 셈으로 그랬다.
나는 한때 바다에 대해 쓴 책은 시집, 소설책 할 것없이 눈에 띄는 대로 사들이곤
했다. 바다의 침묵, 바다로부터의 선물, 바다여 바다여, 그들은 바다로 갔다.....아마도 내 서재에 있는 책들 중에 바다를
소재로 한 책이 몇분의 일은 될 것이다. 나는 온통 바다에 관한 책들로 둘러싸여 있는 셈이다. 조금 과장한다면 그리하여 매일밤
잠이 든 후에도 바다에 둥둥 떠다니는 표류선원이 된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언젠가는 헌책방에 들렀다가 우연히 미국소설을
들쳐보았는데 첫 귀절이 ‘The sea is high again today,’로 시작하는 것을 보고는 소설 내용이 무엇인지,
작가가 어떤 친구인지도 알아보지 않고 그냥 가슴이 울렁거려 사버렸을 정도다. 바다는 지금에 와서 나에게는 멀리 있는 그리움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의인화로 새겨져 있다. 바다와 속엣말을 나눈다는 말에 다름아니다. 만일 누가 어떤 바다에서 어떤 여자와 이승의
인연을 맺었다고 생각해보라. 마치도 달이 바다와 한번 인연을 맺으면 몇만년 달빛으로 짠 그물을 던져 바다를 끌어당기듯이 나 또한
그러하지 않겠는가. 내가 바다를 숨겨놓고 일평생 그리워하는 것을 한낱 감상(感傷)으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몹시
서운해 할 것이다.
바다에 대해서 사람들은 별의별 말들을 하고 있다. 나는 태초에 바다가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지구의를
놓고 들여다 보면 바다가 지구의 주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육지는 바다라는 국물 위에 수제비처럼 떠 있다. 나는
성서의 창세기를 읽다가 처음에 바다가 생기고 그 다음에 육지가 생겨났음을 알아보았다. 모르면 몰라도 창세기 때의 바다는 지금도
그대로다. 남극과 북극으로 몰려가서 얼음대룩을 이룬 바다가 녹는다면 지구는 창세기때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꽁꽁 얼어붙은 남극과
북극의 얼음대륙에 창세기의 바다가 잠겨 있기에 인간이 사는 육지가 바다 위에 드러나 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바다는
아득한 창세부터의 내 그리움이다. 나는 그 동경을 품고 산다. 그 그리움의 자손이다. 그 형제다. 그 사랑이다. 내 핏줄에는
바다의 파도소리가 돌고 있다. 내가 인간사가 슬프다고 울음을 터뜨리며 복받쳐 외친다면 그것은 정녕 태초의 바다가 소리치는
것이리라. 나는 지금 바다가 내 영혼의 시작이자 끝이라는 것을, 내 필생의 사랑이라는 것을 이런 식으로 쓰고 있다. 너, 나의
바다인 너, 나는 이 밤에도 너를 안고 뒤척인다. 바다여, 내가 너를 어떻게 부르면 좋으랴?
목 포 항 - 정영일
1
오전 아홉시 포구에는
戀書 속의 낱말들처럼
섬사람들이 선실에서 수군대고
오가는 여객선들이 하얀 편지 같다.
베드로여,
어부시절의 고의춤을 움켜쥔 바람 속에
그녀는 수많은 섬들을 껴안고 있다.
2
노란 물들인 조기를 30원에 파는
그물빛 스타킹의 눈빛을 보라
세번째의 큰 불이 한번 더 남아 있다.
목포사람들은 유달산의 큰 돌과
魚火를 골 속에 넣고 다닌다.
그러나 색씨를 돌로 치거나
시장에 불 지르진 않는다.
아침마다 색씨가 나와 항만을 묻어버린다.
끼이루우룩 끼이루우룩
선원이 닻을 감아올리는 동판화의
늙은 준설기 위에 물새가 한 마리.
어디로? - 최하림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 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가을江 素描 1 - 고정선
구절초 두 어 송이
가을 처마에 기대는 강가에서
바람은 강 위에
대자리를 깔았다.
花蛇 한 마리
사위는 향기로 몸부림치다
바위 틈 사이로 사라지는 데
太公은
조는 낚싯대에서 눈길을 거두고
江心에 가라앉은
산그늘을 베고 눕는다.
2
江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낚시꾼이 앉아 있습니다. 江心에선 숭어가 뛰는데 두 사람의 낚시줄은 짧기만합니다. 그저 오후의 한 자락을 즐기는 客들만 막걸리 잔을 기울이며 콩 놔라 밤 놔라 합니다.
江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이 동시에 낚시대를 챕니다. 지리산 한 곁에 기대어 있던 큰바위가 강에 얼굴을 담그고 싱긋 미소 짓는 그 때.
물여울로 퍼지는 큰바위 얼굴의 웃음에 낚시대가 휘청휘청합니다.
거두었던 낚시대를 다시 던지는 것은
허허롭지만은 않은 江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방파제에서 - 김재희
1
수평선 위에
섬 하나 떠 있다.
갈매기 한 마리
걀걀걀 울며 날고 있다.
망울 튼 동백꽃
보는 이 없이 질 적
어둠이 깔리는 섬
불빛 하나 깜박이고 있다.
불러도 메아리 없어
파도가 되어, 밀물에 쓸리어
마음속 고향
내 곁의 방파제만 치고 있다.
2
몇
척의 배, 닻을 내린 곁, 긴 둑길 따라 나와 홀로 선 사람. 부서지는 것은 포말이 아니라, 태풍의 끝, 지난 시간의 뭉친
구름, 천둥의 울음이었음을 이제야 깨우치는 가슴속의, 물고 쥐어뜯는 아픈 상채기, 아직은 봄이 이른데 앙상한 척추뼈의 끝머리 같은
이 허허로운 방파제 위에 얼마를 서 있어야 하나.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하나. 너는 바다 위에 둥둥 떠서 멀리 있는데...
간이역 소식
- 발령 - 박 관 서
풀벌레 울음소리 가득하다
이른 저녁 땅거미와 함께 찾아와
군데군데 무너진 역사 둘레 담벼락을
무시로 타고 넘어 풀수밭 가득히
밤늦도록 멈추지 않는 풀벌레 울음소리여
낯선 숙직실 얄팍한 선잠을 걷어내고
부스스한 얼굴로 나선 새벽 두 시의
작은 역사를 여전히 점령하고 있는
벌레들의 울음소리여 아무런 인수인계도
손뼉치는 맞교대도 없이 떠나감을 준비하는
풀벌레들의 아우성을 듣는다 푸짐한
수육 한 접시에 소주 몇 병을 나눠 마시고
어둔 얼굴로 밀려남을 걱정하며 돌아가던
옛 동료들의 뼈처럼 깊은 위안이 들려오고
간간이 먼길을 달려온 야간열차의
환한 불빛 맑은 기적소리에 묻혀 짙푸른
밤하늘의 별들 총총한 속삭임과 함께
지새는 한 밤이 어찌 슬픔뿐이랴 돌아서서
단단한 흰 소금기둥으로 한 점 불빛으로
지켜내는 어둠의 들녘은 또 이리 아름다워서
귀를 열고 마음을 열고 온몸 가득
돋아나는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이른 새벽 통근기차가 올 때까지 나는
전호등처럼 깜박깜박 잠들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 최창일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눈물을 주워 먹는 것이라 했다.
저 미치게 푸르던 하늘은 어디가고 천정을 두드리는 소낙비만 내리고
침묵의 강물도 어디선가 만난다는 약속으로 오늘도 흐르는데.
아직도 무슨 미련이 그리 짙어
설풋설풋 서러운 기다림이냐
인연이란 참으로 높은 은행나무 같은 것.
평생을 누추한 내안에서 커가는 기쁨으로만 살지
속마음은 따로 노나 보다.
황홀한 물별을 주워 먹던 저녁 식탁을 잊었느냐.
파랗게 적신 기다림은 언제 까지
둘이서 심어 놓은 감나무는 빨간 전등처럼 익어만 가고 있다.
하얀 여름의 망초 꽃도 고행처럼 동한거를 준비하고 있다.
뼛속이 비어서 하늘 끝까지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 뼛속이 비는 방법을 알려다오.
온전히 현명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텅빈 공중(空中)에 걸고 싶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온다 - 박 훤
바 람은 뜻깊은 언어를 불어온다 바람은 뜻모를 사랑을 불어온다 바람은 무서운 고독을 불어온다 바람은 미친 파도를 불러일으키고 바람은 바람은 오, 우리들 텅 빈 가슴을 채워주노니 사랑이여, 바람처럼 온 세상을 들끓게 하라 그러면 스산한 바람으로 잠재워지리니 오늘은 이처럼 조용히 잠들고 싶으니 나는 바람이 되어 깊은 바람이 되어 사라지리니, 사랑 속에 묻혀서
다시 만난 거북이 - 전승묵
아 네가 살아 있었구나
다시 만난 이 기쁨
살아 있는 것끼리 느끼는
피돌이 속의 희열이여
개구쟁이가 잡아 갔거나
잔인한 폭력자의 희생이 된 줄 알았는데
너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숨은 곳에서 나와 헤엄을 친다.
낚시에 걸린 너를
소재비 폭포 밑에 풀어 주고
너를 보려고 다시 왔다.
어떻거다 먼 남쪽 나라에서
이 갈라진 산천에까지 왔나
물 속에 노는 미물들 잡아 먹고
꼬옥 꼬욱 숨어 있다가
다음에 또 나를 맞아 다오.
*소재비(효자비): 인수봉 뒤쪽 골짜기
꽃과 나비 - 김일로
내음이 좋은
고운 꽃을
나만 갖어도 좋을까
이웃집 아기가 생각난다.
예쁜 나비
추는 춤을
나만 보아도 좋을까
이웃집 아기가 생각난다.
- 1974, 목포문학
한 해를 보내며 - 김강
내 여기 잠시 와서 머물다 감을
풀잎인들 아랴.
청태 낀 석탑위에 떠 가는 구름
한 송이에도 눈물이 일렁거리는,
갈잎에 수선대는
바람인들 아랴.
사랑은 가고 오는 것.
그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도 쉼없이,
가고 온다는 것을
이슬인들 아랴.
풋풋한 흙 한 줌 손에 담고 그 향기에
취해 가슴 뛰놀던 내가 새긴 발자국.
내 아이들이 다시 딛고
해는 뜨고 달도 지나니,
꽃은 피고 지고,
지는 꽃을 더 영탄함은
그녀가 더 꽃다운 이름을 지녔음을
내 여기 잠시 와서 머물다 감을
꽃인들 아랴.
莊子가 꿈꾸는 나비의 꿈 - 김정숙
- 뱁새의 행복한 둥지
몸집이 작은 뱁새
그래서 눈도 가는 뱁새.
그대여
뱁새의 행복한 둥지를 보았는가.
울울창창한 숲속이라한들
뱁새가 깃들 둥지,
숲속의 나뭇가지 하나면 족한 것을.....
온 숲을 다 차지하고
하늘만한 둥지
빈 골짜기같은 둥지가
뱁새에게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한가로이 달을 볼 수 있고
구름과 하늘
태양을 볼 수 있는 보금자리
오직 작은 몸집의 안식처.
새끼를 치고 노래하며
단란을 누릴 수 있는 보금자리
나뭇가지 하나의 작은 둥지
행복한 뱁새의 둥지.
추모시 / 저 하늘에도 슬픔과 눈물방울이 - 이종석
?아지른 절벽의 고도에 와 있는 심정입니다.
그리하여 꿈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엄연한 현실인데 어찌할 것입니까?
이렇게도 허망할 수가 있겠습니까?
40여년을 생새고락을 같이 하면서
목포와는 거리가 먼 저와 끈끈한 정으로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생활을 위해 고초도 마다않던 그대여
일생을 詩밖에, 아니 문학과 원고지밖에 몰랐던 銅岩이여!
지금, 죽음이란 것이 현실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의 가슴 쓰라림!
<살아있을 때, 잘 해!>
이것이 명언이요 진리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후회를 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그려.....
어차피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 누구나 한 번은 겪어야되는 이 불변의 자연의 법칙과 이 순리!
당신이 가신 후, 때때로 너무 외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저 아무 생각없이 고독해지는 날 아직까지도 당신의 체취가 살아남아 있어
내 주변에서 뱅뱅 맴돌고 있는 것입니다.
일 몰- 김미래
오늘도 출구는 보이지 않는다.
뿌우연 선창 너머
빈혈 앓은 태양
황사 바람에
-쿨럭, 쿨럭 숨막히는
불투명한 미래와
끝없이 출렁이는
청보리밭과 유채꽃 사이
신열 앓은 내 열일곱은
바다 끝, 그 너머에 대한
기대와 그리움으로
무작정
유달산을 오르곤 하였다.
해질녘
서러운 짐승이 되어
피를 토하듯 부르는 나의 노래
불 꺼진 창, 솔베지의 노래, 수선화
저 구름 흘러가는 곳………….
목포시 죽교3동 137번지
막막한 일상이
달착지근한
환상의 지주빛 당의정 한 알을
겁없이 삼킨다.
내 사랑은 - 유경희
바람이었습니다
구름이었습니다
보이지않고 잡히지않습니다
님 떠난 뒤 길었던 세월 겨우 한 달
가는 곳 마다 속삭입니다
내가 옆에 함께 가고 있어
안개속에 서 있는 나를 느껴봐
혼자 걸어도 외롭지 않습니다
슬프지 않습니다
바람을 좋아하는 소녀이다가
구름을 사랑하는 여인이되어
꽃잎에 쓴 편지를 기다립니다
님을 보내며 - 박미경
생전에 그리도 정갈했던
그대 옷깃 추려놓고
바닷가 푸른 바다
바라보게 쌓아놓고
어떴습니까?
이 바닷가 차암 좋지요?
우리 처음 남자와 여자로 만나던 곳
마지막 실컷 구경하라고
저승이 무슨 색인지 몰라도
푸른 색이 고플지도 모르니
양복도,한복도 당신따라
날아가버리고
생각해보니 깃털보다 가벼운
모시옷 하나 없는 당신
다섯뼘도 못되는 당신 살던 옷장안 그들
천국에는 신발도 필요없겠지요?
살아남은 사람들
어찌 눈에 밟혀 그리
허망하게 가시었습니까?
부르던 그대 눈가에 맺힌 눈물
아직도 눈에 삼삼,
아련하기만 합니다
죽기까지 그대 몸 감싸며
안아주던 옷들 한번
다시 만져봅니다
행여 못죽은 미련이 있거든
함께 가지고 가달라고
자꾸 쓰다듬어 봅니다
지상에서 못다한 말
한 번 불러봅니다
어여쁜 내 사랑이여!
별 - 전효숙
새벽 별 하나가 내 가슴으로 내려왔다.
받아 안고선 어찌 할바 몰라 망서리다
그냥 담담하게 있는듯 마는듯 있으라 했다.
먼 훗날까지 빛이 바래이지 않는다면
나는 별을 안고 사는 女子?
마음속 길동무 삼아 내가 가는길 밝혀 줄 수 있다면
산낙지 -정미덕
내가 좋아하는 산낙지
언제나 싱싱한 산낙지를 좋아한다.
어머나 산낙지를 어떻게 먹나요? 라고 했던 사람도
보이지 않은곳에서는 살짝 먹는다.
나는 내숭은 싫어한다.
싫으면 싫고 좋으면 좋고
그런 솔직함이 좋다.
낙지요리는 자신이 있다.
아마도 내가 좋아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매운낙지는 더욱 맛이 있다.
무교동의 한귀퉁이의 실비집을 기억한다.
매운낙지 먹으며 오가는 정다운 이야기들,
정다웠던 사람들,
먹는 기쁨은 사는 기쁨이며 사는 기쁨은 먹는 기쁨이다.
귀여운 세 송이 작은 꽃 - 김순화
이름 모를
노란 꽃 세송이
흰 눈 속에 사알짝
피었어요
잠 깨우는 새 소리는
없었지만
약속한듯 세 송이
함께 폈어요
갸냘픈 잎새
여린 줄기가
추운 겨울 보내고
봄 빛 풀어요
초롱초롱 맑고 고운
꽃 이파리는
얼음 녹고 미움 녹는
눈빛이에요
삼 학 도 - 김종두
삼학의 한을 누가 달래줄 것인가
뭍이 되어 흔적조차 찾을 길 없는 섬 삼학
지금 삼학도는 어디쯤일까
유달 선비를 연모하던
세 자매의 애틋한 사랑
학이 되어 유달을 맴돌던 그 나래
끝내 눈 먼 섬이 된 비련의 이야기는
이제 누가 들려줄 것인가
억겁의 세월
모진 강바람 거친 물살에도
한 점 흩어짐 없이 유달만을 바라보던
그 애절한 속살의 정절
화석된 가슴 촉촉히 적셔주던
앞개 강바다 흘리던 불빛
밤마다 목포 머슴아들을 불러내어
목포의 눈물을 노래하던 주모는 어디로 갔을까?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들던
목포의 사랑 삼학도
지금 삼학도는 어디 쯤일까
고향을 묻는다 - 강승도
길들은 고향을 묻는다
걸어도 걸어도
꿈속에서 조차 다가서지 않는 멀고 먼 고향 길
이제
그 길을 가고만 싶다.
황토길 듬성듬성 발부리 채이며
걸었던 신작로
진흙탕 물고인 내 고향
이른 새벽
허리춤에 도시락 가방을 둘러메고
줄달음치다가 동네 아이들 편싸움에
지각하던 등교길
회오리 바람 불면 두 손으로 샛눈 가리고
황모래 보얗게 뒤집어 쓴 채
까닭없는 눈물 흘리던 개구쟁이들
도락구 시발 택시 꽁무니에 매달려
뿌우연 연기방구 기름냄새가 턱 없이 좋았던 시절.
그 길을 따라서.
매 미 - 가 람
서러워, 서러워
목청껏 울어도 서러워
굼벵이 삶
어둠의 긴 세월이 서러워
악을 쓰고 울까
기를 쓰고 울까
세상에 눈 뜨고
이제 좀 살아 볼까 하니
너무나 짧은 이승 살이가 서러워
가을빛 - 전홍구
비탈진 산 계곡
물든 단풍
가지 잎 사이로
비추인 햇살이
바위틈 새로
졸졸 흐르는
잔잔한 맑은 물 위에
메마른 나뭇잎 하나
날아와 작은 배 되어
스산한 가을바람에
두둥실 떠 흘러
나와 함께 가잔다.
맑은 물 계곡에
가을이 피를 토해
가지 잎을 온통
붉으락푸르락
멍들게 해
졸졸졸 흐르는
잔잔한 맑은 물속에
작은 물고기까지
가을 색으로 물들게 한
스산한 가을바람에
졸래졸래 꼬리를 흔들어
나와 함께 하잔다.
풀꽃의 이름 - 김창완
우리나라 산에 들에
우거진 풀들은
이름 하나 못 가진
중생인 줄만 알았더니
개불알
쇠씹꼿
며느리밑씻개
그런 이름 가진 풀들이 있고
이름처럼 막돼먹어
산에 들에 퍼질러 살긴 살아도
장미, 수선, 백합보다
더 순결한 꽃도
피울 줄 안다네
베고니아
코스모스
아네모네
감미로운 꽃이름에 넋잃고 살아온
젊은날이 부끄러워 얼굴 붉히고
개불알
쇠씹꼿
며느리밑씻개
부를수록 힘솟는 이름 부르네
우리나라 산과 들이 자기것인 양
차지하고 안 내놓는 이름 부르네
목 포 - 김옥재
목포, 당신은
내 가슴에 얹혀질 흙
내 영원한 불멸의 사랑
오늘도 내 귀는
삼학도 파도로 평화를 열고
영혼 속에 그려 넣은 유달산
그 무릎 자락에 얼굴을 댄다.
목포, 당신이여!
정한의 새 한 마리
당신 따뜻한 품으로 부르옵소서.
격렬한 몸짓으로 날아가 안겨
평생 조이던 가슴 활짝 열리라.
목포, 당신은
내 가슴에 얹혀질 흙
내 영원한 불멸의 사랑입니다.
|
귀 성 - 鄭 글
지금쯤 모두들 모였겠지
시집간 누님도 서울간 동생도
밥상을 가운데 두고
빈 자리 보고 날 생각하겠지
그리고 우리 어머니 주름진 눈가에 괸
내가 외로워 울고 있을까
마을 앞 동산엔 적송가지 늘 푸르고
나의 동무 나의 친구
찌든 얼굴로 내 가면
서울에 인간들이 몇이나 있드냐 물을까
서울엔 도대체 인간들이 없다고 할까
아아,보고파라 내 고향 주막집
구름 - 차원재
하늘에 떠 있다가
고개를 들면 멀어지고
날마다 보고 싶어
기다리는 마음처럼
가까이 얼굴 내밀면
어리석은양 빈 손
편지 - 박혜경
너를 보낸 다음 날
습관처럼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서둘러 시동을 걸고,
윈드 스크린에
물 몇방울을 날렸지.
그 때 아주 낯익은
느낌이 내 얼굴을 감쌌어.
그러고 나서 아주 우연히
단풍나무 사잇길을
혼자 걷고 있었어.
그런데 또 그 아주 낯익은 느낌이
이제는 온 몸을 채우기 시작했어.
그리고 마침내 생각이 났단다.
그것은 유년시절
수돗가에 놓여진 양은 세숫대야에서
하기 싫어 겨우 하던 11월의 세수.
그 아주 차갑고, 시리고,
맑은 느낌이 차오르던
유년시절의 세수를 하듯
그런 낯익은
너를 향한 그리움이
지금 나를 채우고 있단다.
반야의 뜰 - 민영희
몸을 팔아 연꽃 다섯 송이를 사들인 이유는
이 몸이 연꽃으로 피기위한 까닭이었습니다.
진흙의 썩은 물 속에서
날아 오른 관음의
부드러운 옷자락 사이
어머님의 젖가슴이
눈꽃 같이 피어난다.
법 아닌 법의 온갖 경계를
미소로 밀어내고
고요히 분별을 끊은 참 생명을
연꽃에 담았습니다.
뜰에는 반야의 싹이
무성히 자라고 있습니다.
동명동 그 판자 집 - 강정삼
바다 냄새가 축축하게 찌든 날
오동나무에 세차게 여름비가 내리던
하숙집 뒷방에 모인 팔뚝이 굵은 아이들
하늘 높이보다 훨씬 높은 대망의 휘파람을 불던
조촐한 모임에서 둥그렇게 앉아 밤을 지새우며
미래를 담론하던 그 얼굴들이 보고 싶어서
먼지 낀 앨범을 펴보았지요
얼굴이 긴 아이는 가수가 된다고
마냥 노래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키가 작은 아이는 형사가 된다고 우쭐대는 모습
코 목소리 내던 얌전이 아이는 목회자가 된다는
알알이 버릴 수 없는 그 꿈들은 지금
백발이 성성하여 힘없이 지팡이 짚고
유달산이나 등산하며 소일하고 있을까
그립고 보고 싶고 만나고 싶은 꿈 많은 아이들
동명도 그 판자 집은 간 곳 없고
문명의 찬란한 그림자가 우뚝 선 채
마음은 아직도 그 시절에서 떠나지 않네
목포 나그네, 아- 추억 속에서 눈물짓는다
정물(靜物) - 천치풀
고요한 빛
선명함을 더해 오는
레몬
아무렇게나 놓여진
그대로의 자세로
돌처럼 움직이지 않는
무게를 더한다.
깊은 그릇
어둠 속에서
고인 물처럼
정지된 시간은
스스로를
깨뜨리지 않고서는
흐를 수가 없다.
자네 맵씨보다야 더 곱것능가 - 김시라!
여보게!
오늘따라 황혼의 꽃구름이 왜 이리 곱당가?
이 사람아! 아무리 곱기로서니
자네 맴씨보다야 더 곱것능가!
글메! 오늘 모처럼 낚시를 나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지구를 낚었으니
쇠주나 댓병으로 너덧궤짝 가져오게
아놈 낚느라 땀 말깨나 흘렸네
허! 쾌사 중 쾌사네
은하수로 담근 은하주를 차고 갈테니
매운탕이나 잘 끓여놓게
그란디, 그놈의 괴가가 오염이 심해
그냥 묵어도 될랑가 모르것네
첫 발자욱 - 김숙
낯 익은 몇 몇 님들의 함자가
스무 해 쯤 지난 추억을 끄집어 냅니다.
찻집에 걸리던
해안선의 밤
담쟁이 넝쿨이 둘러쌓인 돌담집의 클래식 선율도
옮겨 놓곤 하였지요.
기억합니다.
베레모를 즐겨 쓰시던 고 황 의돈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
약한듯 키가 크셨던 주 정연님의
확 트인 목소리,
곱슬머리의 운동선수 같았던 최 병두님,
회색빛 항구 목포를 안쓰러워 하던
라보엠의 가슴앓이
20세기 귀퉁이를 지키던
아름다운 님들의 모습을
오늘 이 곳에서 뵙게 됩니다.
반갑습니다.
거두지 못한 닻에 걸려
정박의 답답한 세월이
오늘은 차라리
지킴이의 뿌듯함으로 다가옵니다.
쑥을 캐며 - 鄭 글
쑥 캐러가요
봄날 쇠똥 냄새 맡으며
풀잎 사이를 비집고 돋아나는
고향을 캐러가요
날 가슴에 묻고 꺼내지 못하는
그대 마음을 캐러가요
오갈 데 없는 내 정이 촐랑대며
細雨에 힘 얻어 훌쩍 큰
풀잎들 젖히고 그대 가슴처럼 탱탱한
쑥들을 꺾어요
먼 산 참꽃들 보다
오히려 그대를 사랑이라 부르며
쑥을 캐요 봄을 뽑아요
사선 - 김덕진
잠자리 한마리
덫에걸린듯
빠져나가지 못하고
파다닥 파다닥
여린 날개짓으로
허우적 거린다
살려달라고
투명한 플라스틱
판넬과유리로 치장된
삼층계단위로
허공을 가로질러
푸른하늘은 보이는데
출구를 찾지못한
파닥거림으로 다시한번
안간힘을 써 본다
보는이의 마음이
안타깝도록
오후
땅이 혼돈할 정도의
천둥소리와함께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창밖을 내다본다
잠자리 몇마리
허공을 배회하고있다
사랑해 - 정선영
<영어> I love you. (아이 러브 유)
<독일어> Ich liebe dich. (이히 리베 디히)
<불어> Je t'aime. (즈 뗌므)
<일본어> 愛(あい)している. (아이시떼이루)
<필리핀어> Mahal kita. (마할 키타)
<아랍어> Wuhibbuka. (우히부카)
<루마니아어> Te iubesc. (떼 이유베스크)
<러시아어> Я Вас Люблю. (야 바스 류블류)
<이태리어> Ti amo. (띠 아모)
<포르투갈어> Gosto muito de te. (고스뜨 무이뜨 드뜨)
<서반아어> Te qiero. (떼 끼에로)
<헝가리어> Szeretlek (쎄레뜰렉)
<네덜란드어> Ik hou van jou. (이크 하우 반 야우)
<에스페란토> Mi amas vin. (미 아마스 빈)
<한국어> ♥사랑해♥
천둥과 번개 외 - 신수룡
당신 어디 사시는 누구신지?
이리 비 쏟고 어둔 밤 내 집 문 두드리시는
쓰레기야 미안하다
잊고 살았던 것 하나, 청소를 ?다가 문득 찾았다
너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너를 보내는 것이다
봄바람 타고 오는
자유니 정의니 젖은 깃발처럼 걸려있는 속절없는 꿈속에서
형제여, 4월은 차라리 화약냄새라도 그립다
목련 외 - 최은하
긴 겨울 그리움 지운 한 송이 꽃
지난한 그리움이 틔운 상아빛 온유여!
엄마
내 안의 나를 품는 바다
엄마!
일본의 북알프스 - 이두백
지진 화산폭발 쓰나미 막은 3천 고지 마다
진품 산수화 수 놓아 여덟 폭 병풍 펼치고
만년설 시베리아 뇌조 풍혈 품은 골짝 마다
왕인박사 글월 영암 기 읊조리는 신선 살고 있어
칼찬 무사 순사 다 숨었지만
차마 쇠말뚝 박지 못했네
창 같은 암릉 설기 떡 같이 부숴지는 칼바위
천길 낭떠러지 틈틈으로 개미되어 오르내리며
산이 발아래 놓여 짓 밟고 있었지만
대마도가 우리 땅 주장하는 망언자
우리 역사교과서 왜곡하자는 국수주의자
차마 같이 되지 못했네
종조할아버지 두만강 건너 북간도 가게한
제국주의자 찾을 수 없었지만
신사모신 산봉우리 참배하는 학생들 속
군국주의자 자살 폭격자 또 숨어있을 지 몰라
밝은 인삿깔 욘사마 펜된 여인네 친절한 배려에도
차마 마음 편히 천둥 번개 맞을 수 없었네
은공 - 정곡 이양우
네가 입은 헌 옷이라
천더기 여기지 말게
자네 살갗을 보듬어주어
평안을 지켜준 은공
나중까지 걸레로 남아
더러움을 씻어주네,
네가 먹은 찌꺼기라
천더기 여기지 말게
자네 배고픔 채워주어
목숨 지켜준 은공
나중까지 밑거름되어
곡식을 키워주네.
이따금 - 윤수린
마치 생산 공장에서
불량품을 골라내듯
그렇게 이따금.
잘 정돈되어가던 감정이
툭, 불거질 때마다
그 이유를 일일이
확인해 본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예측에 근접하고 보면
스스로 과신도 오만도 히힛
이따금.
강은 다 말려서라도
그 바닥을 볼 수 있다지만
사람 속은 죽어서도
알 수 없다고 하던데
입으로 시인하고
맘으로 부인하는
절대 분리형 기만적 비책도
이따금.
시간이 내 주변을 맴도는지
내가 시간 속을 서성이는지
삶이 주검인지
주검이 삶인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따금.
나 같은 무허가
언제 철거당할지
이따금.
山峰의 시 읽기 - 김길주
夏景 靑田 이 상범
河景 _ 주 정 연
포천땅 연곡리 靑田과 素月이 어우러 노니는데
羽羽羽ㅅ자로 흐르는 물이 흘러도 연달아 흐릅니다려
내가 알기로 일본의 하이쿠(俳句; はいく)와 비슷한 글을 우리도 쓰자하여 짧은 시 쓰기 운동을 벌려 이미 오랜 동안 '두줄시' 작업을 하고 있는 주정연 선생과 최병두 선생,두 분선생은 이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이 부분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최병두 선생은 올 설 무렵에 우리 카페에서 '설 날'이라는 시를 내가 소개한 바 있다. 그런데 오늘 주정연 선생의 시는 이 분이 그림그리는 시인이기에 이 '하경'이 특별히 내 감회를 새롭게 한다.
靑田은 우리 근대화단의 6대 화가중의 한분이고 우리 고유의 정서와 우리 산천을 소재로 명작만을 남긴 화가이다. '夏景'이라는 그림도 여럿 있어서 나는 주선생의 시도 그림 夏景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河景이다. 청전의 그림에는 물이 없는 그림은 별로 없다. 물론 우리 산천의 승지가 모두 그러하기 때문이리라. 주정연 선생은 내가 알기로는 한국화를 하는 화가는 아닌 줄 알고 있다. 서양화를 문인화 처럼 화재를 넣어 그림 그리기를 좋아 하는 별척스런 작가다. 다시 말하면 글자 그 대로 詩中有畵, 畵中有詩 인 셈이다.
河景에는 靑田과 素月이 어울려 노닌단다. 그러면서 '흘러도 연달아 흐릅니다려'라고 소월의 음성을 그대로 가져왔다. 참으로 절묘한 인용이다.
가 는 길 - 소월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번....
저 산 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 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물은
어서 따라 오라고 따라 가자고
흘러도 연달아 흐릅디다려
그런데 그에 앞서 羽羽羽ㅅ자로는 박재삼이 매미 울음을 明明 (밝게 밝게~) 함과 같이 물이 흘러가는 소리가 곧 羽羽羽ㅅ자로 음역하여 새로운 변신을 추구하는 소망은 곧 적벽부에 나오는 羽化而登仙을 연 상하게한다. 주정연 선생의 연치를 생각하면 선생도 이미 인생의 후반부, 세월도 흐르고 산과 물도 무심히 흘러가는것, 아름다운것들은 모두 흘러만 가는것인가! 이 흘러가는 모든것들 앞에서.그러나 그는 항상 젊게 새롭게 정리하려는 의지가 바로 이 짧은 두 줄 詩에 용해 되어 있는것을 알 수있다. - 동목포
유달산 사랑 - 박영호
삼십 년 만에 목포역에 내려서니
뽀얀 안개에 쌓여있던 유달산이
고개를 빠끔히 내밀고
나를 보고 먼저 반긴다.
’오메 니 왔냐, 니 많이 변해 뿌렀다-잉’
이제는 모두가 낯선 거리
아무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
그래도 우르르 내 눈앞에 몰려 나오는
눈물겹게 정다운 옛 모습들
오거리, 휘파리 골목, 뻘바탕 마파지, 뒷개 ...
옛집을 찾아서 죽동과 중앙극장 앞을 지나
불종대를 찾아 가지만
모두가 옛 종소리를 따라 천국엘 갔는지
이제 그들은 어디에도 없다
삼학도는 두 섬만 남아있고
반쪽만 남은 오포대 노적봉과
멀리 내다 보이는 영산강물이
이제는 그 물길이 아나니
운졸이, 짱뚱이, 모치는 어디 가서 볼거나
가난한 사람들이 서럽게 웅크리고 살던
유달산 기슭 초가집들은 간데 없고
멀리 바라보이는 뒷개 건너 돌산에는
지금도 푸른 수의의 죄수들이 아른거리고
그들이 돌을 깎던 정 소리와
기마경찰에게 총을 맞고 쓰러지던 한 탈옥수의
우리도 잘 살아보세! 하고 외치던 소리가
지금도 귓전을 때리는 것 같다
이제는 모두가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지만
그래도 남쪽에서도 맨 남쪽 끝 항구
서러운 남도의 역사를
유달산 너는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떠나오던 날도
유달산은 빗 속에서 울고 있었다
잘 가거라 잉- 나는 니를 안 잊을랑께,
니도 나를 잊지 마라-잉
이제는 기적도 울지 않는 기차에 앉아
이것이 마지막 이별만 같아
나도 그를 따라 마음 속으로 울고 있었다.
<1981년 6월 15일 저의 처녀시집 "잃어버린 시" 상재를 축하해 주신
김일로 선생님의 마음의 선물이십니다.> 최병두
“‘시인 정설헌’을 아시나요” - 김선기
미당 서정주 시인(1915~2000)이 타계하던 날 밤, 그 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여서 기억이 더 생생하다. 데드라인 무렵 낯익은 목소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대뜸 ‘‘말땅’이 저 하늘의 별이 되었다네, 별이….”기분도 그렇잖은데 술 한잔 하자는거였다.
과
거의 행적이야 어떻든 현대시단에 한 획을 그엇던 미당이 떠난 것은 문학의 끈을 놓지못하고 있는 나로선 충격이었다. 사실, 연합통신
리얼타임뉴스를 통해 미당의 죽음을 알고 있던 터라, 그의 제의를 선뜻 받아들였다. 우리는 궁동 예술의 거리 선술집에서 만나 술병
깨나 쓰러뜨렸다. 그날 밤 내내 미당(未堂)을 떠나보낸 슬픔에 못이겨 주먹울음을 펑펑 울어대던 이가 바로 시인 정설헌이다.
을유년 정월 초사흗날, 그의 죽마고우인 주정연 시인에게서 비보를 받았다. 정설헌 시인이 이 세상에 없다는….
시
인 정설헌(본명 정장선·1944~2005)은 예순 두 해를 외롭게 살다갔다. 아니, 지상에서의 마지막 남은 시간까지 그 외로움을
만끽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신안 하의도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목포중·고를 거쳐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졸업한 문재(文才)였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미당은 그를 애제자로 삼고 ‘청아(淸雅)’라는 호(號)를 내렸다. ‘속 되지 말고 티 없이 맑은 마음으로 시를
쓰며 살아라’란 스승의 깊은 맘이 담겼으리라.
정설헌은 스승인 ‘미당(未堂)’을 ‘말땅(末堂)’이라고 불렀다. 그의 ‘말땅론(未堂論)’은 스승에 대한 존경심과 애증이 한껏 묻어나 사제지간의 애틋함을 엿볼 수 있었다.
정
설헌은 문단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문단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야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단화 된 문단 풍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었다. 그는 간혹 문학 행사에 나가 ‘패거리 문학’의
폐단에 목청을 높였다. 독설을 쏟아내는 그를 문단에서 좋아할리 없다. 그래서 정설헌은 늘 혼자였고, 그 고독감을 술로써 풀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맘이 맞는 문우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60~70년대 잘 나가던 주정연·박광호·정영일·김창완 시인이 그들이다.
정설헌은 그들과 1966년 1월 ‘흑조(黑潮)’동인을 창립했다. 1920년대 시단을 이끌었던 이상화·박종화·홍사용
중심의‘백조(白潮)’시대는 가고, ‘흑조(黑潮)’가 이어받아 한국시단을 지고가야 한다는 게 정설헌의 욕심이었다. 흑조는 그해
12월 청마 유치환의 발문을 얹어 첫 동인지를 창간해 지난 2000년까지 34년간 28권의 동인집 발간, 한국
문학동인사(文學同人史)를 다시 쓰게 했다.
그후 정설헌은 ‘흑조’마저 환멸을 느끼고, 1982년 7월 목포에서 열린 ‘흑조의 밤’에서 ‘사설(辭說)’ 발표를 끝으로 절필했다.
그러나 그는 붓은 놓았으되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4반세기를 온 몸이 붓이 되어 살았다. 이제, 유작이 되어버린 ‘사설’만이 ‘정설헌의 40년 시혼(詩魂)’을 느낄 수 있어 애틋하다. 그의 절필시가 된 ‘사설(辭設)’의 일부다.
‘…<중략> 조금만 더 가면 짙푸른 바다가 보인다고 했다. 그래 고개도
넘
고 산도 넘었다. 가다가는 소나기도 만나고 번개와 천둥도 만났다. … <중략> … 조금만 더 가면 바다가 보인다기에
고개도 넘고 산도 넘었다. 가다가는 넉살좋게 웃고 있는 여우와 눈도 맞췄다. 넉살좋게 웃고 있는 여우와. 조금만 더 올라가면
바다는 보인다는데.’
문단의 병폐와 사이비 문인들을 향해 살기어린 독설을 뿜어댔던 시인 정설헌. 그가 그토록 보고싶어했던 자신의 바다는 무엇이었을까.
봄나들이 - 이방순
봄 햇살은 유리창 밖에서 아우성치고
조팝나무에 하얗게 핀 시 때문에 까치들이 호들갑을 떠는 아침,
멀리 있는 아들에게 그곳 봄도 이곳처럼 소란하냐고 물었더니
소란한 곳이 어디 한곳 뿐이냐고, 사스와 전쟁으로 여기도 소란하기는 마찬가지 지만
가로수마다 연두빛 움이 돋아나고 있으니 걱정말라며 전화를 끊는다.
창문을 열고 불곡산의 봄을 바라보니
허리가 보일듯하니 흰 소고의 입은 구름이 산 고개티 오르듯 느려느려 떠간다.
굴신屈伸의 일상 접어두고
가까운 강원도 산골 이라도 저 구름처럼 떠가고 싶어져 창문을 닫고 대문을 나선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커피 마시려고 휴게소에 들렀다.
두대 나란히 서있는 커피 자판기는 커피값이 각각 달라서 왼쪽것은 보통커피 300원 오른쪽 것은 보통커피 350원이었다. 나는 당연히 50원이 싼 왼쪽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한 젊은이가 다가와 무심한 얼굴로 오른쪽 자판기에 딸가닥 딸가닥 동전을 떨어뜨렸다.
나는 커피를 꺼내면서 돈을 넣고 있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젊은이. 이쪽은 50원이 더 싸구먼요.>
젊은이는 심퉁한 표정으로 두 자판기의 가격을 번갈아 보더니 한 순간에 얼굴이 환해지며 재빨리 반환기를 돌려서 꺼낸 동전을 왼쪽 자판기에 집어 넣으며 나에게 말했다.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이번에는 내가 멍해졌다. 50원에 생명의 은인? 그럼 100원이면 뭐가되까.
언제나 몇템포 느린 나는이 벼락같은 한마디에 넋만 찾으며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다가
<저울 눈에 앉은 파리도 황금으로 보는 갑네요.> 토속적인 말 겨우 한마디 했다.
커피를 마시던 젊은이가
<지금부터 저는 이 50원으로 남은 일생 살꺼여요> 하며 또 환하게 웃었다.
또 먼 천둥 소리여? 불알 두쪽만 대그락 대그락하고 살겠다는 거여? ...
말로 튀어나올뻔한 생각을 누르며
<심산에서 이나 잡으며 살랑가?>하고 웃었다.
우리는 엄청 친한사람처럼 50원으로 말이 되기도 하고 안되기도 하는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덕분에 커피 잘 마셨다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영
월군 수주면 두산리는 치악산, 배향산과 응봉 자락이 품은 화훼농가이다. 두산리에 입구가 있는 치악산 뱀골은 2000- 2005년
9월까지 자연보호 목적으로 행락객 출입금지가 되어 있고 뱀골 깊숙히 사는 대 여섯 가구 주민의 방문객들과 혼자서 산책하는 사람
정도는 그곳을 오염시킬 행위를 할 염려가 없으므로 방문자의 신상과 방문목적을 일지에 기입하면 환경보호 지킴이에게 입골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청정지역이다.
물 흐르는 소리 가득한 뱀골은 심오하지 않으나 조붓하며 정갈하고
잘 자란 소나무와 낙엽송들은 그 그늘아래 앉아 풀끝의 이슬 바라보며 인조자루의 개똥을 털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한다. 걷노라면,
물가 혹은 바위틈에 품고있는 페이소스 가득한 촌 소년같은 들꽃들은 문득 가슴 한토막을 저리게 하고 의식은 숲으로 스며들어 흐르는 물이되고 바위가 되고 나무가 되어 돌아오는 길에는 끝내 숲을 배태하고 만다.
햇
살이 엷어질 무렵 황둔 삼거리에서 안흥찐빵 이천원어치 8개 사서 옆자리에 놓으면 나는 더 부자가 되고, 시골 길에서는 라디오
주파수도 잡지 못하는 불쌍한 내 조랑말 덕분에 <가지마오~ 가지마오~ >를 테프에서 따라 부르며 솔치고개를 넘어
판운으로 간다.
<신림 - 주천의 88번 도로에서 411번 운학리길을 시작하는 삼거리의 황둔 막국수집 막국수는 먹어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안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던 시절 - 유 금 호
<......
늦게까지 장가를 가지 않고 있어서 주변 분들께 그 동안 걱정을 끼쳐 드렸는데 저, 이제 장가가기로 했습니다....신부는 더러 보신
분도 계시겠습니만 같이 문학의 길을 걷는 김정수라고..... 결혼식은 어려서 자랐던 해풍 부는 시골 바닷가에 가서 치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제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하셨던 손장윤 선생님께 주례를 부탁드렸습니
다.......>
생각하면 꽤 치기 어린 결혼 선언문이었던 셈이다.
청첩장 서식 같은 건 싹 무시하고, 둘 다 직장이 있던 서울의 예식장도 아니고, 시골 바닷가에서,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 주례로 장가를 들겠노라고 복사된 친필 편지로 나는 서른세살 노총각 시절의 종말을 공표 했었다.
74년 10월 19일.
이 친필 편지는 시골 양가에도 물론 통고되었다.
그 편지를 보내고 30년째.
지
금이야 아내가 꽤 알려진 방송작가가 되었고, 나도 학교에서 월급이 나오고, 가끔 소설이나 잡문을 쓰면 많지는 않지만 원고료라는
것이 나오니까 소주 값도 되지만 30년 전 우리 결혼 무렵엔 주변이 거의 비슷하게 다 가난했었지 싶다.
나도 가난했고, 아내도 가난했고, 집안도, 사회도 다 가난했다.
그래서 우리는 같이 살아갈 집이나 방, 그 흔한 장식장이나, 무슨 세간 살이 따위도 없었고, 그런 것을 준비할 여력이나 계획도 없었다.
나는 하숙하던 집 아주머니에게 내 방에 사람이 하나 더 들어와도 괜찮다는 허락을 얻어, 숟가락과 젓가락 두 개, 밥공기와 냄비 두 개를 시장 통에 가서 사 왔던 것이다.
신혼을 우리는 그렇게 내 하숙방에서 아침밥만 끓여 먹으며 시작했다.
지금도 비슷하지만 당시 서른세살 노총각은 소설을 씁네, 학문을 해야겠네, 비현실적인 꿈속에서 살았고, 아내 역시 풋내기 신문 기자로 현실적인 생활 감각이란 게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신기한 것은 둘 다 그 시절, 한번도 가난이 슬프거나 비참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주일 두어 번은 좁은 하숙방에 내 술친구들을 불러 소주에다 마른 멸치와 고추장으로 술 파티를 열곤 했는데, 아내 역시 끼워 들어 즐겁게 떠들어대곤 했으니까 말하자면 둘 다 소갈머리가 하나도 없었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결혼에는 운명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겠지만 우리 결혼 역시 조금은 숙명이었다는 회상을 한다.
우리가 결혼을 결정했을 때는 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얼마 후였고, 아내 역시 몇 년간 병석의 아버지를 여읜 후였다.
거의 같은 시기 두 분이 세상을 떠나시지 않았다면 우린 결혼까지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금도 가끔 하곤 한다.
장
가 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들에게 며느리 될 여자를 보여 주어야 눈을 감겠다던 아머니의 유언 가까운 애소에 부탁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던 나는 그녀에게 속사정을 털어놓았고, 우선 어머니가 편하게 떠나실 수 있도록 연극을 해보기로 하고, 어머니를 안심 시켜
드렸던 바로 그날, 그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우린 두 분을 보내고 나서 일종의 숙명으로 우리들 결혼을 결정했었다.
그러나 나는 4남매 가난한 시골 출신의 장남이었고, 아내 역시 6남매의 장녀.
부모 한쪽씩을 잃고 큰형에게, 큰누나에게 용돈이라도 탈 수 있을까 쳐다보고 있는 동생들 속에서 양쪽 집안 다 우리 결혼에 작은 세간 하나도 보태어 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몇 년 전 집을 옮기면서 낡은 장농을 버린 적이 있었다.
첫 아이가 생긴 훨씬 뒤, 내 소설 원고료가 생각보다 조금 많이 생겨 우리가 최초로 장만했던 상표도 없는 싸구려였는데, 그걸 버리면서 아내의 눈시울이 젖어가던 것을 기억한다.
모유가 부족해 분유를 먹던 첫 아이의 분유가 떨어졌던 일요일 오후, 나로서는 내 생애 최초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몹시 슬프고 쓸쓸한 체험이었다.
우
린 신혼시절 호주머니가 늘 가벼웠지만 시장 통 싸구려 순대 집이나, 포장마차에서 같이 빗소리를 들으며, 혹은 일요일이면 친구들을
불러 서울 근교 산마루턱에서 내 스타일의 엉터리 요리 솜씨를 뽐내며, 사르트르를, 장.주네를, 홍명희와 이태준을, 때로는 달리에
대해서, 샤갈에 대해서, 고갱과 고흐에 대해서 지치지도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그래서 늘 부자였다.
부부가 비슷한 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재산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우리는 지금도 가끔 한다.
서로의 일을 간섭하는 일은 피하지만 부부가 때때로 동료로서 살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의 풍요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내가 방송 작가가 된 후 어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아내가 농담 삼아 했던 말이 기사로 실린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술이 엉망으로 취해서 쓰러져 잠든 내 모습을 보고 저러다가 한 순간 남편이 죽어 버릴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서 아이 둘을 돌아보았다는 것이다.
남편이 없어도 아이는 길러야될 것 같아 내가 잠든 뒤 틈틈이 드라마를 써 보았던 것이 당선이 되었고, 그 이후로는 나보다는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의 길을 지금껏 걸어온다.
부부 각자가 자기 일을, 그러면서도 얼마간 소통되는 세계의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부부싸움의 기회를 거의 주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신
혼 초에는 사글세 방 생활이라 주인집에 민망해서 싸우지 못했고, 작은 집이 생겼을 때는 아이들 앞에서 다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기회를 놓쳐버리다 보니 우리는 아직 제대로 부부싸움을 못하고 30년을 흘러 보낸 채, 나이를 먹어버린 셈이 되었다.
이제는 또 주말 부부가 되다보니 시간이 없어서도 부부 싸움의 기회가 영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고중영 출판기념회
김일로 시화전
두줄시 송년회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꼬
1998년 이후 여태 목포출향문인회를 즐겨 주신
나그네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하루 수업을 마친 뿌듯한 마음으로 종례를 하듯
종간호로 한 세월을 마감하는 심사가 시원코도 섭섭합니다.
나그네 걸음걸음 내내 문운이 함께 하시기를....
내내 건강 행복하시기를.....
그럼 모두모두 안녕히^^
2013. 9.
추신 - 이 목포나그네 카페는
십오년 나그네 발자취가 담긴 자료실로
오다가다 다리 쉬는 쉼터로도 쓰이기를 바랍니다.
목포출향문인회 종간회장 주정연 삼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