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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동산교회 김인중목사 이야기
1950년대 경기 부천. 11남매가 있는, 흥부네 닮은 집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아버지는 알코올의존증 환자였고, 어머니는 암으로 일찍 세상을 등졌다. 6명의 형과 누나도 차례로 하늘나라에 갔다. 6·25전쟁 중에도 목숨을 부지했던 혈육들을 앗아간 것은 어이없게도 굶주림이었다. 소년은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린 뒤 자하문의 경복고까지 매일 뛰었다. 그러느라 겨울에도 땀을 흘렸고 교복에는 소금이 하얗게 내려앉았다. 몇 포대의 강냉이 가루로 가족이 연명하는 형편에 버스비는 사치였다.집 주변 교회의 도움으로 어렵사리 공부하던 소년은 이렇게 기도했다.“하나님, 정말 계신 게 맞습니까? 신앙은 없는데 저 좀 도와주세요. 사는 게 지긋지긋하게 힘듭니다. 돈 없으니까 서울대 보내주면 그땐 정말 믿겠습니다. 그럼 나중에 멋지고 훌륭한 학교를 세우겠습니다.”
소년의 기도는 이뤄졌다. 재수 끝에 서울대 사범대 불어교육과에 입학했다. 소년도 약속을 지켰다. 목사가 됐고 1995년 교회 옆에 번듯한 학교를 세운 것.흥부네 10번째 아이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안산동산교회(예장 합동 교단) 김인중 담임목사(63)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활동하던 그는 대학 졸업 뒤 총신대 대학원에 진학해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1976년 9월 그는 다시 가야 할 길을 찾았다. 반월공단 조성을 보도한 신문 기사였다.“동아일보 사회면 톱기사였어요. 기사를 보는 순간 번갯불에 맞은 것처럼 떨리고 가슴이 쿵쿵 뛰었어요. 이곳에 가서 목회를 하면서 나처럼 가난하고 힘든 이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결심했죠.”
김인중 목사는 1979년 6월 스티로폼과 전기장판을 깐 지하실에 7명이 모여 교회 설립예배를 올렸다. 주변에는 공장 세 곳만 입주해 있었고 군데군데 염전이 있었다. 30여 년이 지나 16일 기자가 찾은 교회는 대학 건물을 연상시켰다. 본당 이외에 카페와 서점, 체육관, 공연이 가능한 홀,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체육관은 연중 개방해 지역 주민들이 여가시설로 활용하고, 홀에서는 인근 고교의 축제가 열린다.교회는 이제 출석신자 1만8000여 명으로 성장하면서 지역사회와 단단하게 결합했다. ‘안산다, 안산다 하면서 산다’는 안산에 스스로 찾아온 김 목사는 선교를 넘어 아름다운 지역사회의 꿈을 키워왔다.미션스쿨인 안산 동산고는 지난해에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에 130여 명을 진학시켰다. 무엇보다 집단 따돌림과 촌지, 폭력이 없는 학교로 알려져 학생들이 가고 싶어 하는 학교가 됐다. 전체 학생의 60%가 비신자다.교회는 야간 무료 공부방인 푸른꿈동산학교도 개설했다. 대학생 10여 명이 교회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방 교사로 봉사한다. 교회 주변 학원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학원에 다니기 어려운 저소득층 학생만 받아들일 정도로 지역 사회를 배려하고 있다. 인근 상록구 일동에도 매일 50명이 공부하는 무료 공부방을 운영한다. 신자 이재영 씨(59)는 “큰 교회이지만 작은 단위의 모임이 활성화돼 있어 가족 같은 분위기”라며 “지역 사회를 위한 다양한 활동 때문에 부담스럽다기보다는 자랑스럽게 ‘동산교회 다닌다’고 한다”고 말했다. 노인과 장애인을 위한 사역도 교회의 주요 관심사다. 동산노인복지관은 6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사회교육과 물리치료, 수지침서비스 등을 제공하고 있다. 이용자가 1200명을 넘을 정도로 인기있다. ‘장애인에게 최고의 재활은 직업 재활’이라는 인식에서 보호 작업장, 장애인과 사회재활교사들이 함께 생활하며 독립을 준비하는 그룹 홈서비스도 실시하고 있다.“이제 먹고살 만하다지만 아직도 주변에 어려운 이웃이 적지 않습니다. 교회는 정부나 지자체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연결하는 실핏줄이 되어야 합니다. 빛이 어둠을 밝힐 만큼 밝지 못하고, 소금은 짜지 않아 제 구실을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반성과 노력을 더 해야죠.”
김인중 목사의 교회 개척 이야기
저는 23년 전에 신학교 졸업을 하고 안산에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강도사 고시10일 전에 이사를 가서 가족 3명이 개척을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도 없고, 아파트 그림자도 볼 수 없는 동네였습니다. 그곳은 공단조성계획이 발표된 곳으로, 반월 공사무소 옆에 원곡동 성광교회 주변을 정리하여 최초의 이주단지 250가정을 강제 이주시킨 원곡동이었습니다. 거기에 이주단지로 27평 국민주택을 지어서 이주시킨 안산의 유일한 최초의 마을이었습니다. 나머지는 원주민들이 드문드문 20호, 30호씩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최초의 동네에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개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김인중 목사의 어린 시절
제가 서울대학교 나왔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부자여서 공부를 잘 시켰는가보다라고 오해를 하는데, 저는 안 해 본 고생이 없습니다. 효과적인 전도를 하려면 고생을 많이 해 본 사람이 그 가능성도 많다고 확신합니다. 저는 11남매 중에 10번째의 불신가정 중에서 태어났습니다. 누나는 시집을 가고 저희 형제 9명이서 살았는데 아버지의 무관심으로 영양실조로 형제 6남매가 죽고 3명만 남았고, 제일 위에 형은 중학교 2학년 중퇴, 그 밑에 형은 초등학교 중퇴… 어느 날 보니 형제들이 다 없어지고 저만 남게 되었습니다. 동네 어른이 '너희 아버지가 소사에 살고 있다'고 하여 찾아갔는데 어느 분과 동거를 하고 있었고, 생전 처음 보는 분을 엄마라 부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재산은 노름으로 다 날려버리고 셋방을 얻어서 사는데 연탄 살 돈이 없어서 나무하러 다니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가정의 책임감과 살 의욕이 잃어버리셔서 새엄마가 생활을 책임지게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주 원망스러웠지요. 이렇게 어려운 가정에서 살다가 제 인생의 가장 큰 변화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찾아왔습니다. 4학년 여름성경학교 때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가게 되었는데, 150명이 마루바닥에 모여 율동하고 노래하고 했으나 처음 듣는 노래 내용이 재미가 없었습니다. 설교는 구원과 부활에 관한 것이었는데, 속으로 "뻥치네"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여러분 개척교회를 하시면서 설교를 할 때 분명 나와 같이 말씀에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혀 믿기지 않는데다가 분반공부는 더 지루했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다시는 오지 않으려고 결심을 했는데, 교회 문을 나가는데 복숭아를 줘서 내일 또 와야겠다는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나가게 되니까 우등상, 암송상.... 등 가난한 나에게 공짜로 생기는 것이 많았습니다. 중학교 때는 여학생 때문에 열심히 다녔으나 여전히 믿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제2의 전환기
저는 집에서 신학교 간다고 했을 때 쫓겨났습니다. 공부를 잘해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 돈이 제일 싼 국립대학인 서울대를 갔습니다. 하여간 신문 돌리고, 복숭아 장사하고, 노동하고, 아르바이트 등 살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처음 서울대학교 시험 쳤다가 떨어졌습니다. 1년 재수하는 동안 양계장에 취직을 해서 양계장 도둑 보초 서면서 밤에 공부를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옆의 친구 상호가 교회를 잘 인도해줬고,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양계장 취직해서 난지도의 성암 개척교회 황종호 목사님을 만난 것이 나의 인생의 두 번째 전환기였습니다. 그 목사님이 내가 재수한 것을 알고 "김 선생 정말 대학에 가고 싶으면 내일부터 새벽기도 나오게" 처음에는 '이러니까 교회가 부흥이 안 되지' 했는데, '설마 목사님이 거짓말하랴?'하는 생각에 새벽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 절망할 때마다 교회는 거의 빠지지 않고 나갔지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25살 때 새벽기도 꾸준히 나가고 보초서고... 서울대학교에 간 것은 내가 갈 수 있는 능력은 1%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군대에 갔는데, 군대에 가서 또 의심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 술 마시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술을 마셨습니다.
개척시작
1979년에 총신을 졸업하고 강도사 시험 10일 전에 내려가서 350만원 전세를 얻었습니다. 안산으로 오게 된 것은 동아일보를 보는 가운데 '반월공단을 세울 예정이다'하는 기사를 신학교 1학년 때 보았는데 왠지 마음이 끌렸습니다. 그 공단은 배운 사람도 없고 가난한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기사를 오려놓고 3년 기도를 했는데 결국은 그 공단으로 가게 해주셨습니다. 신학교 2학년 때 결혼을 했는데, 장인이 처남을 맡기면서 준 60만원과 형이 50만원 준 것이 저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싶어 기도를 열심히 했고, 우여곡절 끝에 전도사 시절 교사들이 보태준 돈, 아르바이트 한 돈... 이렇게 해서 350만원을 마련해 지하 방을 얻게 된 것입니다. 5월30일 이사를 갔고, 6월 10일에는 대전에서 강도사고시가 있을 예정이었습니다.
첫 전도 열매
제가 처음 개척한 장소는 300호 정도 되는 동네로 80년 된 감리교회 하나가 있는 반월 원곡리3 블록이었습니다. 350만원의 평수30평, 실제평수 27평인 지하에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와 보니 지하라 바닥에 물기가 흥건해 있어서 스티로폴과 비닐장판을 깔아야 될 것 같아 일단 짐을 정리하지 않은 채 스티로폴 가게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개척교회 건물 옆에 보니까 '일우 철물'이라는 철물점이 눈에 들어와 들어가서 스티로폴 30장만 달라고 했더니 철물점 사장이 "뭐에 쓰시려고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정중하게 옆 건물 지하실의 반월동산 교회를 개척하러 온 김인중 전도사라고 인사를 했더니 사장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가 담배를 급하게 떨구기에 "혹시 교회에 다닌 적 있으세요?"하고 물었습니다. 사장이 고개를 숙이더니 "제가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장로교회에 다녔는데, 동국대학교 국문학과를 다니면서 4년 동안 불경을 듣고 배우다 불교 신자가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그를 전도하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사장님, 이 스티로폴 얼마입니까?"하고 물었더니 2만 5천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때는 스티로폴 값이 꽤 비쌌는데 지갑에서 돈 3만원을 꺼냈습니다. 전도할 수 있는 기회로 삼기 위해서였지요. 저는 일부러 손에 돈을 꾸부려 쥐었고, 돈을 살며시 들고 있으면 뺏아 갈 수도 있으니까 힘을 주고 지폐의 반을 꽉 잡았습니다. 사람이란 돈을 보면 누구나 흥분하게 되어있고, 만약에 돈을 안 꺼내고 이야기를 하면 외상을 하려는 수작인 줄 알고 의심을 받을 수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에 돈을 꺼내서 그냥 줘 버리면 자기 일을 다 봤으니까 복음을 듣기 전에 가 버리고, 돈을 잡고 있으면서 안 주고 있으면 돈을 받기 위해서라도 복음을 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불자인 사장님에게 13분 만에 예수님을 전했고, 이사 짐을 풀기 전에 1명의 양을 저에게 하나님은 주셨습니다. "사장님, '사영리'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이렇게 시작한 전도로 그 분은 예수님을 믿고 지금 우리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첫 개척의 첫 열매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사영리로 시작된 전도는 칠백 명이 될 때까지 저는 직접 했습니다.
두 번째 전도열매
두 번째 전도열매는 6월 4일이었습니다. 6월 10일 강도사 고시를 위해 불광동에서 합숙훈련을 하기 위해 월요일에 기도원을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6월 10일 개척예배를 드리기 위해 월요일 아침에 10만원짜리 강대상을 주문해 놓고, 간판가게를 갔습니다. 불광동에 가서 공부를 하고 내려와서 집에 오니 간판 주인이 찾아왔습니다. 철물집 사장님처럼 동일한 방법으로 4영리를 전하였습니다.
CCC 있으면서 4영리로 내가 예수님을 믿었기에 캠퍼스에서 수 천명에게 4영리를 전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간판집 주인은 화를 내어 사영리를 못 전하고 해서, 사영리 말고 사생활을 물어보다가 밤 12시 반이 넘었습니다. '우연은 없다' 이 사람 전도하라고 주신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을 우연으로 보지 마십시오. 할 말도 없고 그래서 기도하다가 순간 이 사람이 술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얼굴이 까만 사람은 술을 좋아한 사람으로 짐작하고 나의 간증을 시작했습니다. 술 얘기를 하니 눈이 동그래지면서, 오히려 나에 대해 물어서 본론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새벽 2시였습니다. 새벽 2시 25분쯤 결국 4영리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펑펑 울면서 "나 같은 사람 예수 믿어도 돼요? 저는 어머니를 때렸고, 8년 전에 딸이 도망갔습니다. 아침부터 술 먹고 간판 만들고... 저는 모든 동네사람이 욕합니다.""의인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습니다." 라고 내일 첫 개척예배에 참여할 것을 권했습니다.
첫 예배
날이 새고 11시에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방에서 커텐을 제치면 바로 본당을 나오는데 새벽에 돌아간 간판집 사장이 나와 있는데 온 예배당이 꽉 찬 것 같았습니다. 10분 지각한 송 사장과 우리 가족 전부, 이렇게 첫 개척예배를 드렸습니다.
강도사 고시에 합격하고 안산으로 올라와 그때부터 250호 동네를 구석구석 매일매일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전도할 때 매번 '사영리'를 이용했습니다. '사영리'를 전할 시간을 주지 않을 때는 전도지를 나눠주었습니다. 교회 주소와 복음에 대해 접근하는 내용의 문구가 적혀진 전도지를 한 웅큼씩 들고 나갔습니다. 그것도 한 종류가 아닌 일곱 종류 내지 열 종류의 전도지를 준비했습니다. 만약에 한 종류만 준비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한 번 밖에 찾아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도지를 주는데 "지난번에 받았어요."하면 대답할 말이 없으니까. "이건 지난 번 거와 다른 겁니다. 읽어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하고 건네주면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는 매번 전도 나갈 때마다 전도일지를 가능한 한 썼습니다. "몇 월 몇 일 몇 시, 어느 버스 정류장. 어느 동네. 전도지 제목은 OOO, 전도지 몇 장을 가지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돌았고, 그 때 어떠 어떠한 사람을 가능성 있는 사람으로 발견했다."는 내용의 일지를 기록하는 것입니다.
또 전도지를 그냥 주지만 말고, 줄 듯이 딱 내밀면 본능적으로 전도지를 붙잡았습니다. 전도지를 잡았을 때 같이 전도지를 잡고 이야기하거나 전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사람이란 무엇을 잡았다가 놓으면 창피하니까 일단 잡았으면 체면상 붙들고 있습니다. 잠깐 그 사이에 "교회를 다녀 본적이 있으십니까? 종교가 있습니까? 부모님이 예수 믿습니까? 회사에서 상사 중에 믿는 분이 있습니까? 친구 중에 믿는 분이 있습니까? 누가 교회 가자고 권해 본 적 없습니까? 왜 안 나가십니까?" 등등 해서 대답할 때까지 질문을 연속적으로 퍼붓습니다. 그러면 어느 질문이든 하나쯤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6개월 동안 250호 마을을 싹 돌았고, 한 집은 13번 이상 가게 되었습니다. 꼭 6개월만인 12월 25일에 어른 97명이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효과적인 전도 사역
1. 꾸준히 구체적으로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라 (골 4:2-3, 행 1:8)
① 가족 ② 친구 ③ 이웃 ④ 도시 ⑤ 나라와 세계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골 4:3)
바울 같은 사람도 교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다면 우리도 교인들과 같이 기도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죽으면서도 사울의 마음이 열리기를 구한 것처럼 꾸준히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은 직접 심방은 못해도 아파트 학교 동사무소 등 안산의 곳곳을 위해 기도 심방을 매일 합니다. 안산의 동사무소를 싹 훑으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계속 제가 심방하는 곳마다 구역이 이뤄지고 교구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저의 누나는 보살이고 형은 2번 이혼을 했는데, 그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30년 기도했더니 보살누나 권사 되었고, 형은 집사가 되었습니다. 가족 전도가 다 이루어졌습니다. 많이 이름을 부를 때는 3500명을 부른 적이 있습니다. 매일같이 반복하면은 어느 날 통하게 됩니다.
2.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늘 기억하라(믿으라) (눅 10:19-26)
전도자는 정말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는다면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불쌍하여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죽은 다음에는 구원의 기회가 없고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3. 한 영혼을 온 천하 보다 귀하게 여기라.
한 영혼이 정말 귀하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한 사람만 전도 잘하고 잘 양육하면 그 한 명이 얼마나 귀한 줄 압니까? 중학교 아이를 전도해서 잘 양육했는데, 지금 그 학생이 자라서 동산고등학교 지을 때, 그 사람 때문에 4억 5천만원 절약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4. 하나님은 어떤 악한 사람일지라도 구원하실 줄 믿으라 (행 9:4-22)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설교만 하지 마시고 믿고 기도하고 사람을 찾아가십시오. 사울도 변화되는데, 분명 변화될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도 변화시켜 주십니다. 수많은 사회에 암덩이 같은 사람도 기도하면 변화시켜 주시고 만나게 해주십니다. 사울이 변화될 가능성은 1%도 없었지만 스데반이 기도했을 때 스데반의 기도대로 응답하신 하나님. 지금 이 시대에도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5. 자연스러운 만남과 지속적인 관심을 쏟으라 (메모지 준비 : 이름, 전화번호, 반응 등을 기록한다) 메모지를 늘 준비하십시오. 어딜 가도 항상 가지고 다니시기 바랍니다. 가다가도 누굴 만나면 그 사람의 특징 전화번호를 기록하여 기도하고, 만나도록 하십시오.
6. 복음의 내용을 확실히 알고 담대히 제시하라 (히 4:12, 롬 10:13-15)
복음을 전하십시오. 쓸데없이 "교회에 나오면 잘됩니다." 이런 말이 아니라 “예수님 믿으면 구원 얻는다”라는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임을 전하십시오. 전 사영리 하나만 가지고 26년간 전했고, 어딜 가도 설교 때도 늘 사영리를 전합니다. 복음을 전해주면 10명 중에 5명은 꼭 교회에 나옵니다. 오로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7.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라 (고전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고전 2:4) 마귀의 붙잡인 영혼을 살려내는 것은 박사학위가 아니라 오직 성령만이 하십니다. 여러분, 기도하는 일에 정말 목숨을 거십시오. 새벽기도 철야기도 열심히 하다가 깨닫는 것은 내 열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8. 전도일지를 기록하라 (지역, 시간, 전도지 종류, 대화내용과 반응 등)
어느 지역에 누구와 어디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어떤 전도지를 주었는지 늘 기록하는 습관을 가지십시오. 전도지도 매일 다른 걸로 전해줬고, 전도지를 붙잡고 전하고, 전화하고... 생전 모르는 사람도 일곱 번째 만나면 당연히 친해집니다. 처음에는 냉랭해도 일곱 번째 만나면 정성에 감동 받아서 한 번이라도 교회에 나오게 됩니다. 그때 복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9. 전도지역을 정확히, 부지런히 파악하라 (높은 곳, 앞 동 등)
가만히 계시지 마시고, 동네를 다 파악하십시오. 저는 아파트입주 예정일을 다 기록해 놓고 기도하고 입주 날이 되면 반드시 전도지를 가지고 나갑니다. 무조건 전도지를 아파트에 넣지 말고 베란다에 빨래 널린 것을 보고 입주 된 것을 확인하고 기록하여 입주된 곳에 전도지를 넣습니다.
10. 낚시전도(개인)와 그물전도를 병행하라 (소그룹초청, 전도집회초청)
개인전도와 소그룹전도, 그룹전도를 병행하십시오. 개인전도하는 것이 늘 우선이지만 여기서 놓지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행사나 이벤트를 통해 계기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생활 전도가 참 중요한데, 저는 조깅하는 시간을 통해 인사를 하고 친해집니다.
11. 복음을 전하거나 들려줄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라 (다락방축제초청, 대각성전도집회나 온가족주일 등) 다락방, 소그룹 축제, 대각성 전도집회를 통해 자연스러운 계기를 마련하십시오.
결론
다 잊어버려도 이 세 가지만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1.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히 여기자 -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소중한 줄 알고 기도 하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온 가족을 구원시킵니다.
2. 성령의 능력을 사모하자 - 기도하면서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킵니다.
3. 분명한 복음을 들려주자. - 믿음은 들어야 합니다. 교회 자랑을 하지말고 복음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서 전하는 곳에는 개척교회마다 필요한 영혼을 보내주십니다. 괜히 교회를 세우신 게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고 꾸준히 기도하고, 찾아가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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