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 한옥마을
남산골 한옥마을은 서울시가 남산 제 모습 찾기의 일환으로 중구 필동 옛 수도방위사령부 터에 전통 한옥 5동을 이전·복원한
곳입니다. 당시 살던 사람들의 신분 성격에 걸 맞는 가구 등을 배치하여 선조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이곳은 경치가 아름다워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청학이 노닌다 하여 청학동으로도 불렸으며, 한양에서
경치가 가장 좋은 삼청동, 인왕동, 쌍계동, 백운동과 더불어 한양 5동으로 손꼽혔습니다. 청계천의 남쪽이라 하여 남촌으로
불렸으며, 벼슬을 떠난 가난한 선비들이 주로 살았습니다.
서울시는 옛 정취를 되살려 이곳에 골짜기를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였으며, 정자와 연못과 전통정원 등을 조성하였습니다.
총면적은 79,937㎡이고 그중 한옥마을이 들어선 면적은 7,934㎡입니다. 1998년 4월에 개관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울의 정도는 최근 들어 1,400여 년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온조 일행이 세운 한성 백제의 도읍지가 풍납토성이란
사실이 지하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구와 유물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옥인동 윤 씨 가옥
이 가옥은 1910년대에 건축한 순정효황후 윤 씨(순종의 비)의 큰아버지인 윤덕영의 집으로 종로구 옥인동에 있던 집이 너무
낡아 옮기지 못하고 건축양식 그대로를 본떠 이곳에 복원하였습니다. 원래 약 2만 평에 달하는 넓은 대지 위에 지은
총 19동 중의 한 채이며, 그곳 일대를 벽수산장이라 하였습니다.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이 집은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순종의 계비(순정효황후)로 책봉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인 1907년에 지은 집으로,
동대문구 제기동에 있던 집을 이전하였습니다. 집의 평면은 원(元)자 모양인데, 제일 위 터에 사당을 배치하고 한 단 낮은
아래에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등이 있는 재실을 두었습니다. 사당 앞에는 정료대(庭僚臺)를 설치했습니다.
재실(齋室)이란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자손들이 모이는 집으로 종중의 일을 논의하고 음복도 하는 곳입니다.
관훈동 민 씨 가옥
이 가옥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고의 부호로 손꼽히던 민영휘의 여러 저택 가운데 하나입니다. 1870년대에 건축하여
주로 풍문여중.고 설립자인 안유풍과 가족들이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종로구 관훈동에 있던 집들을 이전하거나 복원하였습니다. 원래 안채, 사랑채, 별당채, 대문간채,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이전 당시 안채만 남아 있었습니다. 안채는 이전하고 사랑채와 별당채는 새로 지었습니다. 대문간채와 행랑채를
짓지 않아 대가의 진면목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장대석의 기단, 칠량가의 가구, 6칸 크기의 부엌 등에서 대가의 면모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위장 김춘영 가옥
이 가옥은 조선 말기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으로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집을 이전·복원하였습니다.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서민주택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으나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괴석과
전돌을 사용하여 화방벽을 쌓아 집의 격조를 높인 것이 특징입니다.
도편수 이승업 가옥
이 가옥은 조선 말기 경복궁이 중건될 때 도편수이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에 있던 집을
이전·복원하였습니다. 원래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으나 안채와 사랑채만 이전·복원하였습니다.
조선 말기 중인계층 주택의 특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곳에는 타임캡슐광장이 함께 있습니다. 타임캡슐은 조선 왕조의 서울정도(1394.11.29.) 600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각종 문물 600점을 담아 1994년 11월 29일 매설하여 정도 천년이 되는 2394년 11월 29일 개봉할
예정입니다. 타임캡슐광장은 분화구 모양이며, 캡슐은 보신각종을 본뜬 모양입니다.
남산 :
남산(270.9m)은 북쪽의 북악산(342.5m), 동쪽의 낙산(124.4m), 서쪽의 인왕산(339.9m)과 함께 서울의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는 사신사(四神砂-左靑龍, 右白虎, 前朱雀, 後玄武) 중의 하나입니다. 남산은 도성의 남쪽에 있는 산이라는 일반화된
이름입니다. 원래는 목멱산(木覓山), 인경산(引慶山, 引京山), 또는 순 우리말로 마뫼라고도 불렀습니다.
남산은 동서의 길이가 2.7km, 남북의 길이가 2.1km이며, 성동구 왕십리 쪽으로 꼬리를 내렸습니다. 남산의 서쪽 봉우리
중에 깎아지른 듯한 곳을 잠두봉이라 했는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남산의 지덕을 배양하기 위해서는 뽕잎을 대어줄 필요가
있어 남산이 맞바로 보이는 한강 건너 사평리에 뽕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곳의 지명이 지금의 잠원동이
되었습니다.
남산은 북서쪽으로는 암석이 층계를 이루고 여기저기 계곡이 깊고 그윽하여 풍경이 기묘하며, 정상에 오르면 사방 일대가
모두 눈 아래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시민들은 물론 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선 시대 남산에는 소나무가 울창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면 엄하게 처벌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나무는 우리 민족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송충이를 핑계로 고의로 소나무를
잘라냈습니다. 더구나 광복과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너도나도 베어내서 지금은 소나무가 거의 없고 낙엽수림만이
빽빽합니다.
서울한양도성
서울 한양도성(Seoul City Wall)이란 조선 시대 한양을 에워싼 높이 약 5~8m, 전체 길이 18.627km의 도성을 말합니다.
주로 도읍지의 관리와 방위를 목적으로 조성된 시설물입니다. 좁게는 도시를 둘러싼 성곽과 성문을 지칭하지만, 넓게는
그 안의 공간까지도 아우릅니다.
한양도성은 우리 고유의 축성기법과 집단 장인 기술을 바탕으로 구축되었으며, 현존하는 전 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큽니다. 도성은 성벽, 성문(8), 치성(5), 곡성(2), 수문(2), 옹성, 봉수대 등의 시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한양도성은 그 축성 시기를 조선 태조 연간, 세종 연간, 숙종 연간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부분적인 수축과
보수공사는 영조, 정조, 순조, 고종 때도 있었습니다. 순조 때는 60cm 내외의 정방형 성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장충단
장충단(獎忠壇)은 을미사변(1895년) 때 순국한 대신과 장병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1900년 11월 고종이
남소영(신라호텔 부근)이 있던 곳에 세운 사당으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그리고
춘생문사건(1895.11.28) 때 죽은 충신들의 제사도 함께 지냈습니다. 장충단은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사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습니다.
1926년 일제는 이곳 일대에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습니다. 1932년에는 공원 동쪽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이자 사찰 박문사를 짓고 정문으로는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을 옮겨다 지었습니다. 일제는 이곳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불렀으며,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春畝)는 이토의
호였습니다. 마침내 장충단은 벚꽃 동산에서 일본 혼을 추모하는 휴식처가 되어버렸습니다.
장충단비는 장충단을 세우게 된 내력을 새긴 비로 장충단과 함께 세워졌으며, 앞면의 ‘장충단’이란 글씨는 순종이 황태자
시절에 쓴 글씨(예필)입니다. 후면은 충정공 민영환의 글입니다. 이 비는 일제가 뽑아버렸는데, 광복 이후 찾아서
영빈관(신라호텔)에 두었다가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수표교
수표교(水標橋)는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길이 27.5m, 너비 7.5m, 높이 4m의 아름다운 돌다리입니다. 조선 초의
대부분의 다리는 토교(土橋)나 목교였으나 태종과 세종 연간에 석교로 교체되었습니다.
수표교는 원래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곳에 마전이 있어서 마전교라 불렀습니다. 세종 23년(1441)에
다리 서쪽에 물 높이를 측정하는 수표를 설치하면서 다리 이름이 수표교로 바뀌었습니다. 수표의 설치는 처음에는 나무
기둥에 눈금을 새겨 수위를 알아볼 수 있도록 했으나 성종 때 돌기둥으로 교체하였습니다. 돌기둥에는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겼으며, 다시 3, 6, 9척에는 ○표를 파서 각각 갈수(渴水), 평수(平水), 대수(大水)를 헤아리는 표지로 삼았습니다.
수표교는 정월 대보름날 다리를 밟으면 다리에 병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어서 이때만 되면 너도나도 몰려나와서
다리 밟기를 했다고 합니다. 이는 교(橋-다리)가 우리말로는 다리(脚)와 같이 발음되므로 이렇게 하면 1년 12달 다리에 병이
생기지 않는다는 속설 때문이며, 주로 12다리 밟기를 했습니다.
다리 밟기와 더불어 정월 대보름 전 2~3일은 수표교를 중심으로 개천 위아래에 연날리기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의 통행이 많았던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숙종과 장희빈의 만남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 수표교는 영희전(永禧殿:태조·세조·원종·숙종·
영조·순조의 초상화 봉안)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명절이 되면 임금이 이곳을 전배하였습니다.
어느 날 숙종이 영희전을 전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수표교를 건너다가 부근 여염집에서 문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역관의 딸 장 옥정이라는 여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숙종은 이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고 마음에 들어 궁궐로 불러들였는데,
그가 바로 장희빈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