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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으로 가는 두개의 길목
미소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좌우합작운동
해방 그리고 신탁통치 논란으로 한반도가 들끊고 있을때 1946~1947년에 분단의 제공자 미소 양측은 한반도의 운명을 두고 눈치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있었다.
1946년 1월 16일 미국대표 아놀드 소장과 소련대표 스티코프를 단장으로 하는 미소공동위 예비회의가 서울 덕수궁에서 개최되고 있었다. 이 접촉에서 미국측은 38선으로 인해 생긴 시급한 행정,경제적인 문제를 토의하자고 제안했으나 소련측은 행정,경제문제는 미소간에 한국문제에 대한 정치적 해결이 이루어지면 자연히 해소될 것이라며 정치문제를 우선적으로 토의하자고 주장했다.
그래서 조선임시정부 수립 같은 근본적인 정치문제를 토의할 공동위원회를 1개월 내에 개최하기로 하고 2월 5일 공동성명을 발표한 후 폐회되었다. 3월 20일에 본회담이 열리기 시작했으나 시작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미소 양측의 견해차가 컸을 뿐더러 남한의 우익세력은 강력한 반탁운동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련측은 반탁을 주장하는 세력은 협의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하는 반면, 미국측은 정당 사회단체들의 민주적인 의사표시는 인정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서로간의 견해가 팽팽히 대립하는 가운데서 소련측이 한발 물러섰다. "처음에는 반대했어도 지금이라도 신탁에 동의하고 공위(공동위원회)가 결정한 결론에 협력만 한다면 협의대상을 부여할 수 있다."고 타협안을 제시했다.
그렇게 해서 4월 16일 공동성명 제 5호가 발표되었는데, 한국의 개인이나 단체가 이 선언에 따르겠다는 서명을 해야 공위에 참여할 수 있게 하겠다고 했다. 이러자 남한의 좌익계 정당과 사회단체,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즉각적인 지지를 표명했고, 남로당이 4월 20일 첫서명을 하였다.
하지만 남한의 우익정당 및 반탁 진영은 공동성명 5호가 신탁통치를 전제로 하는 만큼 서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자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선언에 서명하는 것이 찬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세력이 쏙 빠져버리면 공동위 자체가 좌익의 절대적인 우세가 분명했기에 미국으로써는 어떻게서든 우익세력을 집어넣어야만 했다.
하지만 미국의 이중적인 태도는 곧 소련의 반발을 낳게 된다. 미소공동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전제로 하는 만큼 공동위의 결정을 서명하면서 반탁을 주장하는 것은 기만이라면서 기만적인 반동분자는 반드시 제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떻게해서든 반탁을 주장하는 우익세력을 공동위에 집어넣을려고 하는 미국측의 억지에 미소공동위원회는 파탄날 수 밖에 없었다. 여러차례 하지와 치스차코프 사이에 성명전이 펼쳐졌고 서로의 주장이 되풀이되었다.
하지는 국무장관인 마샬에게 협상에 나서줄 것을 부탁했고, 먀살 국무장관과 몰로토프 외상이 협상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미 국무성과 소련 외무부 사이에 협상과 수정안이 오갔고, 우여곡절끝에 1947년 5월 21일 제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다.
2차 공동위원회는 1차 회의때와는 달리 처음에는 순조롭게 풀려나가는 듯 했다. 6월 9일 남북 정당 사회단체와의 협의 일정이 발표되었고, 6월 12일 공동성명 12호를 통해 미소공동위원회와 조선의 민주주의적 정당 사회단체와의 협의 내용 및 협의 방법에 대해 합의했다. 그리고 6월 25일과 30일 서울과 평양에서 남북 정당,사회단체와 미소공동위원회의 합동회의가 열렸다. 하지만 7월 초순 평양회의를 끝으로 더이상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2차 공동위가 처음에 팽팽한 대립각을 세우다가 그나마 합의하기 쉬운 형식적이면서 부차적인 문제를 우선적으로 다루면서 어느정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다. 하지만 협의대상 정당 사회단체 명부를 작성하기 시작하면서 다시 회의가 고착상태에 빠졌다.
소련측은 모스크바 협정을 반대하는 정당을 협의대상에서 제외하자고 했고, 미국측은 의사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이에 반대했다. 소련은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우익세력을 배제해 좌익의 우세를 보장하자고 했고, 소련측의 의도를 알고 있던 미국은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미소공동위원회가 난항에 거듭하는 동안 한반도는 점차 분단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다. 미소공동위가 고착상태에 빠져있는 가운데 남한에서는 반탁운동이 가열되었고, 좌우익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었다.
1946년 상반기부터 남한의 좌익세력은 미군정에 의해 탄압받기 시작했다. 탄압의 강도가 세지면서 이에 대항하는 좌익의 행동도 날로 과격해져갔다. 이는 대구 10월 항쟁으로 비화되어 유혈사태가 벌어져 좌우익사이에 분열의 골은 날로 깊어갔다.
이렇게 날로 사태가 악화되어가자, 미군정은 남한 내에 극단적인 좌우익을 배제하고 온건한 중도세력을 육성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김규식과 여운형이 중심이 된 좌우합작운동이 태동하게 되었다.
미국은 김규식의 중도우익과 여운형의 온건좌파를 결합시켜 자신들의 정책을 지지해줄 온건세력을 조직하고 그를 통해 좌우익의 극단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1946년 후반기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구성하려고 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재개될 경우 임시통일정부 논의에 주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조치였다.
하지만 미국의 의도대로 풀려나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중도파의 세력이나 입지가 너무 협소해 일을 진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군정은 여운형을 박헌영의 좌파에서 분리시키는데 초점을 맞추려고 한 반면, 여운형은 미군정의 힘을 이용해 남한에서 좌우합작을 성사시켜 이를 바탕으로 남북연합을 이루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좌우합작은 1946년 후반기에 완전 파탄나고 말았다. 그나마 여운형이 가지고 있던 세력은 박헌영의 3당합당을 통해 완전 와해되었고, 입법의원이 미군정의 자문기구로 전락해 이승만과 한민당의 독무대가 되고 말았다. 결국 아무것도 얻지 못한 여운형은 끝내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말았다.
여운형이 은퇴하자, 좌우합작운동은 표류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측도 좌우합작운동을 포기하고 이승만과 한민당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그와 함께 이승만과 한민당의 단독정부 주장이 힘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1947년을 넘어가면서 그동안 겉으로 들어나지 않았던 미소간의 갈등은 곧 냉전으로 표면화되게 되었다. 미국대통령 트루먼은 1947년 3월 12일 의회연설을 통해 소련과의 더이상 협력관계가 불가능함을 선언하고 소련의 팽창정책에 맞서 대소봉쇄정책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이 불리는 이 선언은 그리스와 터키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미국과 서방유럽의 적극적인 대응책이었지만, 이 여파는 곧 한반도에 닥쳤다. 마샬 외무장관은 몰로토프 소련 외상에에게 보낸 미송동위원회 재개와 관련된 서한에서 "만일 소련이 미국에 협조하지 않는다면 미군 점령지구인 남한에서만이라도 동 협정을 위한 시행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표명했다. 이는 곧 미국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단독행동을 하겠다고 하는 뜻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소공동위가 재개되었지만, 곧 결렬되었다.
이와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여운형은 평양에 비밀히 방문한 후 다시 정치 재개에 나서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좌우합작운동을 재개했지만 곧 암살당했다. 여운형의 암살과 동시에 좌우합작운동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민주독립당과 민주자주연맹의 결성-
여운형이 암살당한 이후 중도파는 지리멸렬되었고, 이로써 좌우합작운동은 좌절되었다. 그들로 인해 어느정도 지체되었던 한반도는 두개의 분단정부로 거침없이 질주하고 있었다. 북한은 1946년부터 시작된 민주개혁과 북조선노동당 창당을 바탕으로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남한 역시 1946년 12월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과도입의원이 결성되었고, 1947년 2월에는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하고 주요 행정으리 책임자는 한국인으로 교체했고, 6월 3일에는 남조선 과도정부가 구성되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분단이 남북의 과도기적인 임시정부가 구성되면서 분단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더구나 이승만등의 우익세력들은 공공연히 단정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미소공동위가 결렬된 후 미소는 서로간의 책임을 주장하며 공방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1947년 8월 29일 미국은 새로운 제안을 나섰다. "다시 미국에서 4개국 회담을 개최하고, 미소의 점령 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로 입법의원 선거를 실시하고 국회를 구성하자."
하지만 당시 유엔은 미국이 주도하에 이끌고 있었고, 남한 인구가 북한 인구보다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남한 우익의 주도하에 국회가 구성될 것이 뻔한 상태였다. 당연히 소련은 이에 반대했고, 미소공동위를 통해 한국문제를 풀 수 있는데 그동안 합의를 이루지 못한 건 미국에게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미국은 9월 17일 유엔에서 토의하자며 한국문제를 유엔으로 넘겨버렸고, 9월 23일 제 2회 유엔총회는 미국의 한국문제 토의 제안을 채택했다. 모스크바협정에 위반된다는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엔에서 한국문제를 토의하자 소련은 "신탁통치없는 독립을 주려면 한국인이 외국의 간섭 없이 스스로 정부를 수립할 수 있게 미소 양군이 한국에서 동시철수해야 한다."는 미소양군 동시철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반면 미국은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한국위원단 설치안을 내놓았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던 유엔에서는 소련이 제시한 "미소양군동시철수안"을 부결하고, 미국이 제출한 "남북한 인구비례에 의한 자유선거"를 결의했다. 이와 함께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설치했다. 또한 미소양군은 한국정부 수립 이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했고, 점차 남북의 단정정부 수립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단독정부론이 점차 표면화 되자, 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남북민주주의자들 사이에 위기의식이 높아져갔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김규식과 홍명희가 그 중심으로 한 중도파 결집이 다시 한번 이루어졌다. <임꺽정>의 작가로 알려진 홍명희가 정치활동에 나선것은 1946년 12월이었다. 좌우익의 끈질긴 요구에도 불구하고 움직이지 않던 그가 문학활동을 접고, 정치활동에 나서게 된 것은 좌우합작운동의 실패와 분단이 가속화되어 단독정부론이 우익세력사이에 대두되면서 민주통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좌우익 어디에도 ㅅ속하지 않는 진보적인 중도파 민족주의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오랫동안 홍명희의 정치활동은 빛을 보지 못했다. 대하 소설<임꺽정>의 작가라는 꼬리표때문이었던 탓도 있지만, 김구,김규식과 더불어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한 이후 북한에 정착해 북한 초대 부총리와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을 역임하는 등의 북한에서 주요 요직을 지낸 탓에 그의 문학작품은 90년 이전까지 금서로 묶여있었다.
그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기 전에 평양을 세번이나 방문해 남북한의 정치 정세와 관련해 김일성,김두봉등 북한 지도부와 깊이 있는 의견을 교환했고, 연석회의가 성사되는 과정에서 김구와 김규식이 주저하거나 힘들어할때 그들을 추동했으며, 흩어진 중도파 세력을 모으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삼차에 걸친 평양방문에서 홍명희는 민주통일당을 결성했고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남한에서 단선반대세력의 규합과 남북협상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북한에 정착해 북한 정부 수립에 일조하였지만, 그를 좌파나 공산주의자로 매도할 수는 없다. 그는 좌파나 공산주의자라기보다 중립적 성향에 가까웠다. 하지만 아들인 기문과 기무가 좌익이었던 탓에 북한과 연계가 가능했다.
민족통일당 결성 이후 홍명희는 안재홍,여운형 등과 함께 중도정당의 통합문제를 논의했고, 여운형 암살 이후 스스로 정당통합을 주도했다. 1947년 10월 19일에 민주독립당이 결성되었다. 민주독립당이 결성된 뒤 독립당 중심으로 한 민주자주연맹이 결성되었다. 민주독립당과 민주자주연맹은 이후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하는 한 축이 되었다.
김구-김규식의 방북과 남북연석회의
단독 정부이냐? 통일정부이냐를 놓고 이를 추진하고자 하는 세력과 강력저지하는 세력들간의 한판대결이 벌어지고 있을 무렵, 유엔에서 한국임시위원단을 보냈다. 단장으로는 인도 법률가출신인 메논이 임명되었다. 국제호텔에 본부를 두고 3개의 분과위원회로 나뉘어 활동했다. 한국 정치지도자의 의견을 청취하는 제 2분과위원회는 1월 22일 남한의 이승만,김구,김규식,김성수,허헌,박헌영 북한의 김일성, 조만식,김두봉등 9명의 의견을 청취할 것이라고 밢했다.
당시 우파를 대표하던 김구와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두고 대립하고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과 한민당을 등에 업고 남한만의 단독정부을 세워야한다고 주장한 반면, 김구는 남북정치협상과 전국총선거를 주장했다. 김구는 홍명희, 김규식이 주도하던 중도파의 정당협의회에 참여해 단선단정을 막기 위한 마지막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구는 2월 16일 북한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지도자회담을 제안하는 서신을 보냈다. 서신의 내용은 "4김을 중심으로 한 남북지도자들간의 정치협상을 하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 남북이 각각 애국정당 대표회의를 소집해 협상대표를 선출하며,회담의 기조로 우리의 일은 한다는 자주적인 입장과 더불어 우방의 호의를 강조함으로써 결국 유엔 감시하의 총선거를 주장했다.
이런 생각은 북한의 "미소 양군 철수후 전국 총선거"를 주장하던 북한과는 다른 것이었다. 김구는 그당시만해도 유엔을 믿고 있었다. 유엔 한국임시위원단과의 만남에서 김구는 "남북요인회담안"을 유엔 소총회에 정식으로 제안해줄 것을 요청했고, 메논의장은 이를 긍정적으로 대답했으나, 끝내 유엔 소총회에서는 이들의 주장이 받아지지 않았다.
당시 유엔은 앞서 말했듯, 미국이 주도하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졌던 국제연맹에 불만을 품고 가입하지 않았던 미국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앞장서서 만든 것이었으니 유엔은 미국의 눈치를 보았고, 한반도 문제는 미국이 의도하는 대로 흘러갔다. 당시 한반도 여론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바람과 달리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김구등이 주장한 남북회담을 지지하고 있었으나, 유엔은 끝끝내 미국과 이승만이 원하던 남한의 조기 총선거를 선택하고 말았다.
유엔의 결정에도 불구하고 김구등은 남북회담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아울러 남한 단독선거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북한은 김구와 김규식등을 지원하기 위해 성시백이라는 인물을 남파하게 된다. 당시 북한은 김구가 추진하던 단선반대운동에 대해 두가지 입장이었는데 김일성의 북로당은 단정반대세력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으나, 박헌영의 남로당은 김구를 매국적 반동분자로 규정했고, 중도파였던 홍명희 마저도 우익적 반동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남로당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활동을 파탄시킬 수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의 단정반대세력과의 연합을 불필요하다."라고 호언장담했다.
이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남북노동당연석회의까지 열렸으나 끝내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했을뿐 의견은 통일되지 않았다. 결국 남로당은 독자적으로 분단 반대투쟁을 전개하고, 남한 내 민족주의자들과의 합작문제는 북로당이 담당하기로 했다.
남로당은 민전과 함께 "단선반대 구국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독자적인 투쟁을 나서게 되었다. 남로당의 주된 전술은 주로 파업과 파괴 경찰서 습격, 우익에 대한 테러, 그리고 단독선거 반대를 위한 선전,선동 활동이었다. 이른바 2.7 구국투쟁이 전개되었는데 이 결과 2월 7일부터 20일까지 벌어진 투쟁 결과물은 30건의 파업, 25건의 맹휴, 55건의 충돌과 103건의 시위가 벌어졌으며 8479명이 검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단독선거에는 그렇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김일성은 성시백을 남파하여 김구, 김규식, 홍명희등을 만나 중도파을 지원하고 남북연석회의를 추진하는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하도록 했다. 성시백은 남한에서 김일성과의 연결고리로 활동하며 해방정국을 남북을 왕래하며 활동하다가 1950년 북로당 남반부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 수사를 받던 중 인민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24시간전인 6월 27일 새벽 5시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워낙 그의 행동반경이 방대해 그의 행적을 정확히 밝히지 못해 베일에 싸인 수수께기의 인물이었다.
정향명이라고도 불리었으며,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태어나 서울의 중동학교(중동고등학교의 전신)을 졸업하였다. 1925년 4월 박헌영·김단야,임원근·조봉암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사회주의 청년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1928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3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뒤 상하이에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옌안을 거쳐 충칭의 팔로군에서 활동하면서 독립단체의 통일전선 형성에 힘썼다.
1946년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사회부 부부장을 지냈으며, 1947년 5월 남반부정치위원회라는 조직을 결성하여 여운형의 사회노동당이 발전적으로 해체된 뒤 결성된 근로인민당 창당을 지원하였다.
한편, 이남에 머무는 동안 이북으로부터 많은 물자를 반입·매매하여 활동자금을 조달하였고, 1949년에는 중국과 밀무역을 하여 공작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우리신문》을 경영하여 정치공작도 벌였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남북협상과 임시정부 계열 출마자들의 정치자금을 지원하다가 검거되어 6월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그는 남로당합당에서 배제된 좌파와 중도좌파 인사들을 결집해 통일전선에 합류시켜고, 남북연석회의 당시 단정반대 세력을 규합하는 활동에 많은 기여를 했다. 그리고 김일성의 특사로 김구를 만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한 인물도 성시백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성시백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남로당과 다른 차원에서 대남 지하 사업을 계속 하였고, 군대 경찰 내의 프락치 활동과 군의 월북 공작에도 관여했으며 국회 프락치 사건 등에도 관련하는 등 그의 활동은 실로 방대했다. 그가 체포되었을때 드러난 비밀 아지트만 2개쯤 되었고, 마지막까지 노출되지 않은 게 7개나 될 정도로 활동이 치밀했고 규모도 엄청났다. 그는 후에 북한에서 지하당공작의 첫 영웅으로 영웅 칭호를 받았고, 평양에 있는 "애국열사릉"에 그의 가묘가 있다.
이와 같이 북한은 남한의 종도파 민족주의자들의 연합 방안을 다각도로 전개시켰고, 김일성은 통일 세력의 조직화를 위해 남북 대표가 모이는 회의를 구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구,김규식의 남북회담을 위한 2월 서신이 도착했고, 북한은 김구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대남 연락부장 임해를 서울에 파견했고, 그 결과 애국적인 행위라는 결론을 내렸다.
아무튼 남북연석회의가 어느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남한의 단정반대세력의 움직임과 더불어 북한의 통일세력 결집 노력이 서로 상충하여 그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이 제의한지 40여일만인 3월 25일에서야 북한은 답신을 보낸다. 북한의 답신이 늦어진 이유는 남한의 상황이 유동적이어서 유엔 소총회의 결정과 그것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반응르 지켜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소 흔들리던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반응이 최종적으로 정리된 것은 3월 12일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천명한 7거두 성명 이후였다.
3월 20일과 2일 열린 북로당 중앙위원회 특별회의는 남북연석회의에 과난 구체적 방안과 서신 제의의 내용을 검토했고 이를 기초로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북민전)은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하여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사회단체에 고함"이란 성명을 발표했다. 이와 별도로 김구와 김규식에게 따로 서신을 보내 전달했다.
서신의 내용은 김구-김규식의 "남북지도자회담"을 약간 수정하여 북한 10명, 남한 15명으로 된 예비회담 격인 남북조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를 4월 초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것이었고 북민전 이름으로 본회담 격인 "남북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4월 14일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회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로당 좌파세력이 우익 중도파를 배제한채 서둘러 북행했으며 미군정은 김구-김규식의 북행을 저지하기 위해 온갖 공작을 다 펼쳤다. 이렇게 되자 김규식은 방북을 망설이게 되었다. 4월 12일 경교장 회의에서 김구는 연석회의에 참여하기로 결정했으나 김규식은 불참을 표명했다.
한독당은 김구,조완구 조시원 3인을 포함한 대표단 5인을 확정했지만,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은 그때까지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김규식이 "참가5원칙"을 조건으로 내건 것을 북한이 수락함에 따라 최종적으로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앞서 말했듯 남한 좌파세력은 앞서 서둘러 북행했고 중도파들은 분산적으로 참여했으며 김구와 홍명희는 4월 19일, 김규식은 4월 21일 38선을 넘었다. 38선을 넘는 과정에서 김구는 방북을 반대하는 군중들이 경교장에서 가로막는 바람에 경교장 후문을 통해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을 동행한채 4월 19일 아침 6시 45분에 38선을 넘었따.
김구와 김규식이 들어왔을때 이미 남북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는 막이 오른 상태였다. 4월 14일에 열리기로 한 회의가 두 사람을 기다리다가 도착이 너무 늦어지자 4월 19일 개막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오전에 시작된 예비회담이 길어지는 바람에 본회의는 저녁 6시에야 평양 모란보 극장에서 개막하였다.
북측은 북로당,민주당등 15개 정당단체 300명 대표가 참가했고 남측은 남로당,사회민주당등 31개 정당단체 245명 대표가 참석했다. 이후 새로운 대표들이 참가하면서 회의에는 총 56개 정당 695명이 참가했다. 회의는 4월 23일까지 진행되었고 김구는 여기서 "조국이 없으면 민족이 없고 민족이 없으면 무슨 당 무슨 주의 무슨 단체는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현단계에 있어서 우리 전민족의 유일한 최대 과업은 통일독립의 전취인 것입니다."라고 했다.
회의를 통해 세가지 공식 문건이 채택되었는데 <조선정세에 대한 결정서>, <전 조선동포에 격함>, <사회주의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정부와 북미합중국 정부에 보내는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 요청서>등이었다.
이 가운데 모든 기초가 되는 것은 <조선정세에 대한 결정서>(결정서)였다. 이 결정서 초안을 주도한 사람은 김일성,박헌영등 좌익이로써 남한과 남한 단정세력을 과격하게 규탄하는 내용이었다. 이 결정서를 토대로 작성된 <전 조선동포에 격함>이란 내용 역시 미국을 "제국주의자"로 이승만 김성수등을 "미제국주의의 주구" 혹은 "민족반역자"로 격하게 비난했다.
이러다보니 회의에 참여한 우파인사들은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정서 채택에 소극적이었는데 하지만 남북지도자협의회에 기대를 걸고 <결정서>에 소속단체의 이름으로 서명했다. 연석회의가 끝나고 김구,김규식,김두봉,김일성등의 4김회의와 남북요인 15명이 참여한 지도자 회의가 열렸다.
김구와 김규식은 회의를 제안할때부터 남북요인회담에 비중을 두었고, 그 결과에 기대를 가졌다. 남북대표자연석회의 다음에 이루어진 일련의 회담들을 통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일종의 공감대를 마련했다. 그 결과는 4월 30일에 발표된 <남북제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였다. 주요 내용은 "외국군대철수, 통일정부수립이었다.
4월 30일 발표된 <공동성명서>는 5월 1일 평양방송에 발표되었고, 남한은 5월 3일에 보도되었다. 회의에 참여했던 좌우 정당은 지지를 표명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역사적인 회담을 마치고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비록 큰 성과는 아니었지만, 통일정부수립에 대한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했다는 데에서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미군정은 회의 결과에 대한 대응책으로 과격한 탄압을 일삼았다. 하지만 김구와 김규식에 대해서 공산주의자의 모략에 빠졌다 면서 회의참가자에 대한 분열을 시도했다.
최근까지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남한의 평가는 "김구와 김규식이 민족적인 관점에서 이 회의를 진행했으나 공산주의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돌아왔다."는 게 주류였다.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한 남북민족주의자들이 참여한 연석회의에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남북 양쪽에 단독정부가 수립된 것을 본다면 결과적으로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반드시 이것을 실패라고 몰아붙일려는 없다. 분명한 사실은 당시 상황이 분단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이루고 분단을 막기 위한 노력이 그때까지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미소 양군이 주둔하고 신탁통치를 둘러싼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리고 분단이라는 역사적인 흐름을 막기 위한 연석회는 무모한 도전일수도 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제에게 강제로 국권을 피탈당했을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고 이것에 대한 결과물이 45년 광복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으킨 독립운동의 하나하나는 어떻게보면 무모할 수 도 있고 일제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없는 하찮은 것일 수도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런 것이 하나하나 쌓이면서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의 연석회의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인 흐름을 거스를수는 없었지만,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초당적인 민족 단결과 통일운동에 새로운 시발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 연석회의를 독립운동의 신발전이라고 규정했다.
분단정부가 수립된지 벌써 60년이 넘었고, 전쟁이 일어난지 60년이 다되어가는 있는 시점에서 한반도 통일은 아득하고 먼 훗날의 일일지는 모르겠으나 결과적으로 통일은 꼭 이루어야 할 민족적인 사명인 것이다. 통일에 대한 경제적인 비용을 들먹거리며 통일을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통일을 이루게 될 경우 그 가져오는 성과나 결과물은 그들이 들먹거리는 경제비용보다 더 크면 컸지 작지는 않다. 더구나 통일을 단지 경제적인 수치로 계산한다는 것도 어불성설인 셈이다.
만약 김구와 김규식이 초석을 다져놓은 연석회의를 토대로 남북회의가 지속되었다면 단독정부 수립을 막지는 못했을 망정 적어도 한국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분단도 오래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역시도 연석회의를 민족적인 관점이기보다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을려는 생각이 있었고, 2차 연석회의는 그런 북한의 의도가 분명히 들러낸 회의였다. 김구와 김규식이 불참한 가운데 2차 회의가 열렸고, 북로당이 짜놓은 각본대로 진행되었다. 거기서 나온 <남조선 단독선거 실시와 관련한 정치 정세와 조국통일을 위한 장래 투쟁대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헌법과 입법기관 선거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2차 회담은 결국 북조선 정부 수립을 위한 정치적인 명분을 제공한 셈이고 얼마 안있어 남과 북은 서로 다른 정부를 수립했다. 이것은 민족 비극의 시작이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탄생
남한의 5.10 단독선거
김구와 김규식등이 북한에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하고, 한반도 통일을 위한 민족적인 합의를 일구어냈지만, 당장 닥친 5.10 선거를 막을 수가 없었다. 미군정이나 이승만 김성수등은 남로당의 선거분쇄노력에도 불구하고, 단독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유권자 80%이상이 등록한 가운데 투표율은 95.5%에 달했다.
미군정의 강행에도 불구하고, 선거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에 대한 회의감이 없지 않았는데 투표참여율만 본다면 미군정과 한민당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제주도같이 좌우세력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인해 선거가 무기한 연기된 곳이 있긴 했지만, 5.10 선거는 무난하게 치루어졌다.
200명 제헌 의원을 뽑는데 948명이 출사표를 던져 4.7 대 1의 경쟁율을 보였고, 당선자는 무소속이 85석,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의 55석, 김성수의 한민당 29석, 이청천의 대동청년단 12석, 이범석의 민족청년단 6석, 기타 14석이었다. 무소속 당선자 가운데 상당수는 독촉계열과 한민당 계열이었지만, 우익정당의 공천을 받고 선거에 나서면 오히려 짐이 된다는 생각에 무소속 출마를 한 것이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이 그만큼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다.
한편 김구의 한독당은 당원칙에 따라 5.10 선거에 보이콧했고, 우익 중도세력 일부는 선거에 참여했으나 미군정의 방해로 제대로 선거를 치루지 못했다. 5,10 선거가 끝난 후 5월 31일 당선자회의를 열어 초대 국회를 구성했다. 의장에는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와 김동원이 선출되었다.
6월 3일부터 헌법과 정부조직법 제정 작업에 들어갔으며 7월 1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다. 17일에는 제헌 헌법이 공포되었고, 7월 20일에는 대통령에 이승만, 부통령에 이시영이 선출되었다. 7월 24일 대통령 취임시기 거행되었고, 8월 15일 미군정 종식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한편 북한도 남한이 선거를 치루고 단독정부를 구성해나가자, 서둘러 정부 구성 작업에 착수했다. 6월 2일 북로당 정치위원회 확대회의가 개최되어 "4월 28일~4월 29일 북조선인민회의에서 통과된 헌법을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통일적인 최고 입법기구를 세우기 위한 총선을 치른다"는 방침을 정했다.
북한은 제 2차 남북지도자협의회를 개최하여 정부수립에 따른 명분쌓기에 들어갔으나 김구와 김규식이 불참을 선언했고, 북로당이 짜놓은 시나리오에 의해 북한 정부 수립에 대한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회의로 진행되었다.
8월 25일 북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다. 북한 지역 선거는 212 선거구에 227명의 입후보자가 등록했따. 이는 민전 후보에 반발해 일부 선거구에 복수 후보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선거 방식은 흑백 찬반투표였다. 선거 결과 전체 유권자의 99.97%인 452만 4,942명이 투표했고, 민전 후보에 대한 찬성률은 98.47%였다. 이렇게 선출된 후보들은 북한 지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되었다.
이와 함께 남한 지역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남조선 대표회의가 8월 21~26일 해주에서 개최되었다. 해주 대회에는 7월 중순부터 비밀선거를 통해 선출된 1080명의 남한대표가 참석했고 그 가운데 360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남한 지역은 철저하게 비밀선거로 이루어졌다.
남한 지역의 투표는 대부분 개별방문과 서명날인등의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당원들이 간접 날인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남한의 비밀투표는 남로당이 주도했고, 남로당의 정치 군사간부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생들이 행동대원으로 동원되었다. 이렇게 남북한에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572명이 선출되었고, 본격적인 정부 구성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김일성 내각 출범-
북한의 입법기관격인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끝나자, 본격적으로 정부구성에 들어갔다. 9월 2일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 제 1차 회의가 개최되었고, 회의는 9월 9일 정부수립, 9월 10일 인민공화국 수립을 경축하는 연회까지 8일간 계속되었다.
회의의 주된 의제는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구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채택, 내각 구성, 정부 정강 결정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 북한의 권력구조를 결정하는 최고인민회의 의장단 구성과 내각 구성이 가장 핵심적인 문제였다.
당시 북한에는 김일성의 항일무장세력, 박헌영의 남로당세력, 허가이의 소련파 세력, 김두봉을 중심으로 한 연안독립동맹, 그리고 국내 공산주의자들과 조선민주당, 천주교 청우당 등 여러세력들이 난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배분을 둘러싸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이런 가운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일단 거국내각 형태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권력지분의 대부분은 북로당과 남로당이 나눠가졌다. 북한의 초기 주도권을 둘러싸고 두 세력간의 치열한 각축전끝에 권력배분의 기본원칙이 정해졌다.
내각 요인의 대부분은 북로당이 차지하고, 최고인민회의 의장단과 상임위원회는 남로당과 남한 출신들에게 대폭 할애하기로 한 것이었다. 최고인민회의 의장에는 남로당계의 허헌이 부의장에는 천도교청우회의 김달현과 남로당 이영이 선출되었다. 상임위원회에는 김두봉(위원장), 홍남표,홍기주(부위원장), 강량욱(서기장)이 선출되었다.
그밖에 상임위원이 17명이 선출되었는데 남로당계열이 12명으로 남로당이 최고인민회의가 장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로당이 내각의 요직을 차지함으로써 권력의 균형을 이룬 상태였다. 수상에는 김일성이 결정되었고, 부수상에는 박헌영, 홍명희, 김책등이 선정되었다.
9월 9일 정식으로 정부가 출범한 북한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정치 경제적으로 순조롭게 발전하고 있었다.반면 남한은 정부수립 이후에도 좌파세력과 빨치산으로 정부의 존립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비하면 북한 정권은 안정적이었다.
정치적으로 소련의 지원으로 동유럽 사회주의권과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대내적으로 인민정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경제적으로는 1949~1950년애 걸친 2개년 인민경제계획을 수립해 1944년 이전의 생산 수준을 회복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남북한은 정부가 수립되자마자 한반도의 유일국가로 인정박기 위해 대외적인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북한은 정부수립 다음날인 9월 10일 최고인민회의에서 미소양군의 동시 철수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한편, 곧바로 소련과 정부승인문제를 협의했다. 10월 12일 소련은 "북한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했다. 12월에는 군대를 철수했고, 다음해 1월에는 상주대사관을 개설했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던 유엔은 남한 정부를 공식승인했다. 미국이 가장 먼저 남한 정부를 공식 승인했고, 서방 유럽 국가들도 잇따라 남한 정부를 승인했다. 이렇듯 남한과 북한은 대외적으로 두개의 정부가 존립하게 되었고, 서로의 정권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정부가 유일한 합법정부라고 주장했다. 이는 민족적인 비극의 씨앗이 되었다.
정부 수립이 어느정도 마무리 되자, 북한 지도부는 소련 방문길에 올랐다. 김일성 수상을 단장으로 하고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을 비롯해 6명의 공식 수행원이 동행한 소련 방문단은 3월 3일 모스크바에 도착해 5일과 17일 두차례에 걸쳐 스탈린과 회담하고, 양국간에 <조-소 경제문화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조소간의 상품유통,차관, 기술원조, 문화교류에 관한 세부협정들이 맺어졌고, 기계와 기계부속품, 원유, 콕스탄 등의 수입과 금속 및 화학제품 등의 수출에 관한 조소 무역문제, 소련 기술자의 대우문제, 유학생과 연구생들의 소련 파견등을 합의했다. 그리고 소련은 북한에 2억 1천 2백만 루블의 차관도 제공했다. 이것은 2개년경제계획을 추진할 수 있는 재원이 된다.
도시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3월 30일에 실시되었다. 11월 24~25일에는 리(동)인민위원회 선거가 12월 5일에는 인민위원회 선거가 각각 실시되었다. 헌법과 정부 수립, 지역마다의 인민위원회 선거가 치루어짐으로써 사회주의정치체제를 마무리 질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의 경제 멘토는 자립경제건설이었다. 북한은 해방 직전 일본이 북한의 청진체철, 수풍발전소, 평양화학공장을 비롯한 47개의 주요기업과 공장, 472개에 달하는 탄광과 광산이 파괴되었다. 이때문에 해방이 되고나서 북한은 간단한 농기구나 연필조차 제대로 만들 수 없을 정도로 산업이 파괴된 상태였다. 그러다보니 북한은 파괴된 경제를 복구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경제였다.
자립경제 건설이라는 목표 아래 공업과 농업 부문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당시 일제에 의해 상당부분 많은 것이 파괴되어 절대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자와 농민들의 열정적인 노력과 소련의 원조를 통해 해방 이전의 수준으로 거의 회복하게 되었다. 특히 농업생산의 경우에는 해방 이전의 최고 수준인 1939년 수준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밖에도 교육사업에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해방 전 북한 지역은 1496개의 교육 기관에 91먄 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는데 1949년 5,224개의 정규학교에 270여명으로 늘어났다. 대학은 15개나 생겼다. 문맹퇴치운동이 계속돼 1949년 3월까지 문맹문제도 거의 해결되었다. 1950년 9월부터는 초등의무교육제를 실시하기로 했으나, 한국 전쟁으로 인해 연기되었다.
-조선노동당 탄생-
외교관계와 내부 정비를 완료한 북한은 남북 정치역량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남북 노동당으로 나뉘어졌던 노동당을 통합하는 일이었다. 이런 정치역량의 통합은 유일 주권국가임을 내세웠던 북한으로서는 당연한 정치적 수순이었다.
남북노동당 통합은 이미 북한 정권 수립과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1948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앞두고 남북노동당의 연합중앙위원회가 구성돼 상부는 통합된 상태였다. 10개월뒤 1949년 6월 30일 북로당과 남로당은 정식으로 통합되어 조선노동당으로 출범했다. 이로써 남북의 좌익세력은 하나로 통일되었고, 북한은 통일된 정치적 힘을 바탕으로 통일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조선노동당에서는 김일성의 북로당계가 이전보다 약화되었다. 내각 구성때 소외되었던 남로당과 소련계가 합당과정에서 자기 몫을 충분히 챙겼기 때문이다. 북로당 3차 회의(48년 9월 24일)에서 소련계가 약진해 조직부장을 맡고 있던 허가이가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돼 당을 총괄하게 되었다. 상무위원와 조직위원회 역시 소련계가 장악했는데 소련계의 포진은 북로당이 내각에 참여함으로써 남로당을 견제하기 위한 하나의 포석이었다.
조선 노동당 지도부는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박헌영, 당비서에는 허가이, 이승엽, 김삼룡이 임명되었다. 정치위원에는 김일성,박헌영, 김책, 박일우,허가이,이승엽,김삼룡,김두봉,허헌(뒤에 박정애), 초칭익,김열을 포함되었다.
지도부 구성은 전체적으로 북로당계가 남로당계보다 약간 앞서 있었지만, 각 파벌로 보면, 항일유격대 출신, 연안독립동맹계열, 소련계, 남로당계 계열이 고르게 안배되었다. 더구나 항일유격대 출신은 김일성을 제외하고 김책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김일성이 약화된 것이었다.
따라서 초기 조선노동당은 각 계파들의 정치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김일성의 유일적 지도력은 아직 확보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남로당의 조직은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거의 괴멸된 상황에서 남로당의 간부들은 북한에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조선노동당은 북로당이 남로당을 흡수한 셈이다.
조선노동당이 통합되기는했지만, 각 계파가 여전히 당 내부에 살아있었기에 갈등요소가 없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종파투쟁으로 인해 각 계파들은 지리멸렬하게 되고, 김일성파만이 홀로 살아남아 김일성장기집권에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천년동안 하나의 국가와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온 남북한 입장에서 분단이란 여간 불편한 장애물이 아니었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단이 되기는 했지만, 일부 정치세력을 제외하고는 대다수 국민들은 통일을 원하고 있었다. 비록 지금은 정부가 분단되어있지만, 언젠가는 하나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정부은 국민들에게 있어 단지 하나의 통일정부로 만들기 위한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통일이라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었다. 분단이 남북한이 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해도 5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적은 시간이 아니었다. 분단이 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5년 동안 다시 하나로 뭉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 서로가 거부했고, 그 기회를 놓쳤다. 비록 분단이 미소 양국에 의해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그것을 고착화시킨 것은 남북 양측에 있었다.
더구나 남북 양측은 서로를 부정했다. "국토완정론"과 "북진통일"이라는 구호 아래 그들은 무력을 통한 남북통일을 제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바로 전쟁을 임할 수는 없었다. 전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현실적 가능성을 검토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호들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하나의 정치적 성격이 강했다.
이런 가운데 남북을 화해시키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하던 김구가 1949년 6월에 피살당했다. 민족간의 비극을 막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마지막 위인이 결국 사라짐으로써 남북은 서로 대결모드로 돌입했다.
끝나지 않는 전쟁, 한국 전쟁
-국민보도 연맹-
한국전쟁을 시작하면서 국민보도연맹에 대해서 먼저 다루는 것은 쌩뚱맞은 듯 하지만, 한국전쟁 와중에 수많은 시민들이 "빨갱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한국 군인에게 무자비하게 대학살당한 역사가 있다. 국민보도연맹에 대해서는 <이제는 말할수 있다.>(mbc)같은 방송프로그램이나 언론 잡지에서 많이 다루었지만, 영화 <태극기가 휘날리며>에서 여주인공 영신(이은주)이 국민보도연맹원으로 몰려 총살당한 사건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좌익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한 좌익전향단체였다. 제주도 사건과 여순사건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좌익(남로당)세력에게 일격을 맞게 되자, 좌익세력을 괴멸시키기 위해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사범을 보호하고 지도한다는 뜻의 단체인 셈이다.
그런데 이 단체는 원래 일제시대때 군국주의자들이 조선인사상범 또는 정치범들을 묶어두기 위해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시국대응전선 사상보국연맹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적어도 일제는 법령에 근거해 조선인 사상범을 탄압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법에 근거하지 않고 오로지 정권의 편의에 의해 사상검사들 주도로 만든 임의단체였다.
보도연맹단원들 대다수는 혼란스러운 해방정국에서 좌익단체에 가입한 것이 빌미가 되었다. 좌익세력에 가입한 경력만 있으면 어느 누구라도 보도연맹원에 가입하도록 강요받았다. 그렇게 모인 것이 무려 30만 명이 넘었는데 <향수>로 유명한 시인 정지용, 김기림, <소나기>로 유명한 황순원, 염상섭, 국문학자 이병기, 만화가 김용환, 평론가 백철, 국회의원 원장길, 김익로,김중기등이 있었다.
국민보도연맹의 총재는 김효석 당시 내무부장관, 고문은 신성모 국방장관, 간부들은 대부분 대한청년회 같은 우익단체들이 맡았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이전의 좌익전과는 완전히 백지로 돌아가기로 해준다고 했으나 막상 전쟁이 터지자, 급변하는 상황에 정부의 말을 철썩같이 믿고 있던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경찰과 군인에 의해 끌려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잘 모른채 트럭에 실려 골짜기에 끌려가 총살되거나 바닷가에 수장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연맹원들, 특히 남로당이나 야산대에서 활동했던 게릴라 출신들의 연맹원들은 당황했다. 비록 전행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한 정부는 여전히 자신들을 지속적인 감시와 통제를 하고 있었고, 북한은 자신들은 변절자로 간주하는 공산이 컸다.
연맹원들은 비상 소집해 군대에 성금과 위문품을 보내는 한편, 재차 남한 정부에 충성을 다짐했으며 군입대에 앞장서는 등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목숨을 지켜주지는 못했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지만, 부산을 비롯한 경상도 지역이 가장 심했다.
3일만에 서울에 함락당하고 2주만에 낙동강 전선까지 전선이 밀려 다른 지역은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가 적은데 따른 것이었따. 특히 중부지방에서 맹원 중 일부가 인민군에 동조하여 우익 인사의 처형을 앞장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군과 경찰의 경계심이 극에 달한 상황에서 학살이 저질러졌기 때문에 수적으로 피해가 컸을뿐더러 학살과정 역시 잔혹했다.
하지만 학살에 대한 기록들은 과거 독재정권에 의해 파기되어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상황이다. 1960년 5월 27일 <부산일보> 기사에서 6.25 전쟁때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특무대가 동광동 일대의 집을 점거하곤 1만 여명에 달하는 시민을 공산당 혐의로 학살한 사건(민주당 박찬현 의원)을 조사해달라고 청원했다. 만명이 철사에 손에 묶여 트럭에 실려가 학살 수장당하였다고 주장하고 이로 말미암아 희생자의 유가족은 수 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이 일어나면서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갇혀있던 보도연맹원들이 임시수도였던 부산형무소로 이감되었다.형무소에 수감된 재소자들이 너무 많자, 잡범들은 가석방이나 특사로 풀어주기도 하고, 다른 곳으로 이송하다가 혹 탈출해도 잡으려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건 잡범들이 아니라 보도연맹원들이었다. 형무소마당에서 재소자를 조사한뒤 A,B,C,D로 나누고 40~50명 많게는 100명까지도 부산 서구 암남동 혈청소 앞바다나 사하구 하단동 다대포 앞바다, 해운대구 우동 달맞이 언덕 등지에 데려가 총살하거나 수장했다.
이런 학살은 임시수도 부산뿐만 아니었다. 양산, 울산, 김해,진영, 밀양, 거제,산청, 함양, 진주등지에서 대대적으로 학살 혹은 수장이 이루어졌고, 그 사체 일부는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까지 흘러들어갔다. 당시 어업을 주로 하던 대마도 주민들은 고기를 건질려고 보면 그물에 고기대신 시체가 걸려올려왔고 당시 국군에 의해 보도연맹원들이 대량살상당할 무렵, 대마도 거의 전역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일본인에 의해 구조된 시신들은 산속에 매장된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화장되어 사찰에 안장되었다.
미국 극비자료에서도 국군의 민간인 학살 기록은 나온다. 당시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 1포병사단 소속 프랭크 피어스 중사가 미 545헌병대에 보고한 사건 기록인데 한국 장교의 지시하에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헌병이 몇몇 여성이 포함된 2~300명을 학살했다는 기록이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학살을 주동한 책임자는 누구일까? 보련결성과 이후 조직을 본다면 정부 최고위층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당시 지휘계통은 대통령 아래 경찰을 지휘하는 내무부 장관(조병옥)과 형무소를 총괄하는 법무부장관(이우익), 국방부 장괸(신성모)이 있었다. 하지만 계엄상태에서는 군이 입법,사법, 행정 3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무나 법무는 학살에 직접적인 의사결정을 내렸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렇다면 국방장관 신성모인데, 신성모는 정치인이라기보다 이승만의 가신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당시 전쟁상황에서 유능한 군지휘관 대신 자기 측근을 임명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물은 특무대장 김창룡이다. 여순사건 이후 군내 좌익세력을 척결하고 김구 암살에 깊숙히 개입하여 이승만의 총애를 받던 인물이었다. 명령계통으로는 국방장관 휘하의 부대장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직속기관이었다. 전쟁당시 경남지구 등 각 지구 계엄사관을 맡았고 이승만을 아버지라고 불렸던 호랑이장군 김종원도 주동자중 한명이었을 것이다.
보도연맹원에 대한 민간인 학살은 전쟁초기인 1950년 7월에서 9월까지 지속되었다. 들어난 죄도 없는데 단지 좌익단체에 가입했었다는 이유로 무차별적인 학살을 당한 보도연맹원의 학살은 9월에 중단되었다. 8월 23일 유엔한국위원단 사무국장 대리 알프레드 카친이 "보도연맹원 학살이 유엔참전국에게 좋지 않는 인상을 줄 뿐더러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는 북한을 이롭게 하는 행위"라고 서한을 보내면서였다.
무초 미대사도 "군경과 청년단이 야산대(게릴라)를 처형함에 있어 법에 정한 절차를 준수하고 인도적으로 할 것을 강조했다. 이대통령은 이같은 행위를 저지르지 않도록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하겠다고 답변을 했고, 얼마 후 보도연맹원 처형을 중단하라는 명령이 일선에 전달되면서 잔혹한 처형은 중단되었다.
물론 양민 학살이 거기서 멈춰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도연맹원 학살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보도연맹 유가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란는 오명 아래 독재정권의 감시하에 살게 되었다. 4.19 혁명이 일어나면서 진상조사단이 만들어지게 되고, 이에 대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졌다. 보도연맹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와 위령비가 세워졌다.
하지만 집권당 민주당 역시 학살주동자가 있었고, 이로 인해 특별법은 제정되지 못한채 군사쿠테타가 발생했다. 쿠테타 세력은 유족회 대표 간부들를 반국가행위죄로 구속했고 피고인 28명 대구유족회 이원식 씨에 사형이 선고되었고, 최고 15년에서 5년까지 선고되었다. 유족의 한이 담긴 위령비는 군홧발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참고자료: 끝나지 않는 전쟁 국민보도연맹(부산경남지역) 역사비평서 2002년 저)
북진통일론 Vs 국토완정론
분단이 되고 한반도에 따로 정부가 새로 탄생하자, 북한과 남한은 무력을 이용한 대결모드로 돌입하게 된다. 주로 38선 부근에서 1949년 1월부터 한국전쟁이 일어날때까지 산발적인 충돌이 일어났다. 단순한 분쟁이기보다 874회나 되는 "작은 전쟁"에 돌입한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38선 경계를 맡고 있던 미소 양군이 남북한 군에게 인계가 완료된 1월 19일부터 시작된 "작은전쟁"은 이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3월 되면서 격화되었고, 5월부터는 대규모 충돌로 비화되었다. 최초의 대규모 충돌은 5월 4일에 있었다. 이 전투에는 대대급(약 천명)의 충돌이었는데, 1주일 동안 지속되었다. 미군측과 북한측 자료에는 남한이 공격한 것으로 되어있고, 남한측 자료에는 북한이 공격한 것으로 되어있다.
5월 초에 개성에 시작된 전투는 중순에는 의정부와 옹진지구로 확대되었다. 특히 옹진은 남북한 충돌이 가장 빈번한 곳이었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을때 가장 먼저 전투가 시작된 곳이었다. 남한은 옹진을 방어하기 위해 6월 5일 옹진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했다. 이런 과정에 쌍방에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투입된 부대 규모가 연대급(오천명)이 되는 곳이 있었다.
그사이 5월 5일 여순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14연대 반란사건 이후 국방경비대 내에서 불만이 높았떤 2개 대대 병력이 춘천 지역에서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투항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5월 6일에는 남한군이 개성에서 4킬로미터 지점까지 침입해 들어가기도 했다.
6월 7일에는 남한군이 북한군으로 가장하여 38선 북방 2킬로미터 지점 고지를 점령했고, 8킬로지점인 테탄을 공격하기도 했다. 18일에는 은파산을 점령했다. 일련의 전투에서 개인 화기뿐만 아니라 포까지 동원되었고, 남한에서는 반공의식이 투철한 서북청년단이 투입되기도 했다.
38선을 둘러싼 대규모 충돌은 8월까지 지속되었다. 9월부터는 간헐적으로 전투가 벌어졌고, 10월에는 잠시 격화되었다가 11월에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50년 봄에 다시 충돌했지만, 1949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충돌이었다.
이렇게 숱한 충돌속에서도 남북 누구도 자제하거나 피할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격화되면 격화되었지 충돌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했고,공격엔 더 큰 보복을 초래했다.
이렇게 38선에서 남북간의 무력충돌이 격화되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이승만의 "북진통일론"과 김일성의 "국토완정론"이 충돌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도 남북 군사 지도자들의 서로 판이한 경력과 경험 탓이었다. 남한 군사 지도자들은 대부분 일제시대 일본군이나 만주 관동군 출신이었던 반면, 북한 군부의 지도자들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던 인물들이었다.
일제시대때면 서로 일본군과 중국 공산군 자격으로 참가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면, 해방이 되고 나서는 남북한 군사지도자로써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다.또 북한 지도자들은 남북한 사이의 충돌과 갈등을 친일 대 항일의 구도로 보고 있따는 증거이다. 그들이 볼때는 남한 군부나 정치 세력은 친일 세력에서 친미 세력으로 옷만 갈아입었을 뿐이었다. 거기에 이데올로기가 개입되면서 과거보다 더 증폭되었다.
38선에서 무력충돌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서로를 향한 게릴라 침투도 빈번하게 벌어졌다. 호림부대와 같이 남한에서도 북한에 침투한 무장부대가 있었지만, 그것은 북한이 남한에 침투시킨 것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더구나 지속적이지 못했고, 대부분 좌절되었다.
반면 북한은 남로당의 지도 아래 해주의 강동정치학원에서 양성된 게릴라 요원과 정치 요원들이 계속적으로 남파되었다. 북에서 내려온 게릴라들은 대부분 남한 출신들이었고, 과거 남로당이나 그밖의 좌익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경찰과 군의 탄압을 피해 지하로 숨거나 산속으로 들어간 좌익유격대와 연결된 남한 내부를 뒤흔들려놓으려 했다.
남한에서의 게릴라 활동은 38선에서 무력충돌이 격화된 시기와 비슷하게 맞물인 6월에서 9월 사이에 집중적으로 벌어졌다. 북한은 남한에서의 투쟁을 고무하기 위해 상당수의 유격대와 지도자를 불러들여 재교육시킨 뒤 다시 남한으로 내려보냈다.
유격대 활동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9월이었다. 남한의 유격대가 정규군 편제로 개편되었꼬, 게릴라는 곳곳에서 경찰.군대와 교전을 벌였다. 군부대와 경찰서는 물론이고, 관공서, 형무소, 법원도 공격했다. 한동안 강원도,경상도, 전라도 산악지대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 불릴만큼 게릴라들이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좌익의 "9월 공세"도 결국 성공하지는 못했다. 좌익의 기대와는 달리 이승만 정권은 잘 버텨냈고, 남한 군경은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펼쳤다. 군경은 군사작전을 실시하기 앞서 주민과의 연대를 차단하기 위해 산간 부락에서 사람들을 소개시켜 집단촌을 세웠고, 좌익이 발붙일 근거지를 불태워벼렸다.
일제가 만주에서 중국공산당과 재만조선항일유격대를 토벌할때 사용했던 수단이 전부 동원되었다. 동시에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렇게 대대적인 토벌이 진행되면서 좌익 게릴라들은 수세에 몰렸고, 결국 몰락으로 치닫게 된다.
이승만 정권은 대대적인 게릴라 토벌과 더불어 사회적으로도 좌익을 옥죄는 통제장치를 만들었다. 여순 사건뒤 1948년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한 국가보안법이 있었고, 경찰과 우익 청년단의 감시망이 거미줄처럼 퍼졌다. 거기다가 좌익전향자들을 모아 만든 국민보도연맹이 가동되어 좌익세력은 괴멸되었고, 1950년 초반까지 남로당은 사실상 뿌리가 뽑혔다.(국민보도연맹은 이전 편에서 설명되어있습니다.)
남한에서 남로당 세력이 궤멸된 것과는 달리, 북한의 군사력은 날로 강화되고 있었다. 중국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굳어지면서 국공내전에 참가했던 한인 부대들이 속속 북한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1949년 7월부터 한국전쟁 직전까지 돌아온 한인 병사들은 북한 정규군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이들은 전쟁경험이 풍부했고, 사상무장이 잘되어 있어 전투역량이 뛰어났다. 또한 이들이 들어올때 개인 무기는 물론 중화기까지 갖췄기 때문에 북한의 화력은 한층 강화시켜주었다.
또한 북한은 모병제에서 징집제로 전환했고, 각도에 민청훈련소를 설치하여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조국보위후원회가 결성되어 인민군에 대한 지원 사업과 후방 가족에 대한 원호 사업도 전개되었다.
이로써 북한의 군사력은 날로 강화되었고, 더불어 한반도의 긴장은 점차 고조되어가고 있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고 만 셈이다.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한국 전쟁은 일어난지 어느새 환갑이 다 되어가고 있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루어졌지만,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전투행위는 멈춰진 것일뿐, 여전히 남북은 긴장속에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지금 현 상황을 보면 북한의 핵 문제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은 다시 재개되고 있다.
전쟁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해서 설명하기 앞서 전쟁이 무엇인가부터 얘기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전쟁이란 신채호 선생의 표현대로 하자면, 아(訝)와 피아(披峨)의 대결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평화적인 방법이 통할 수 없을때 일어나는 것이다. 단순히 아군과 적군의 총질이 아니라 "나"라는 주체와 "남"이라는 외부세력과의 극단적인 갈등이 무력과 결부되어 "네가 죽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라는 논리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인류가 생긴 이래로 계속 진행되어 온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시기가 일주일도 채 안된다고 할 정도로 전쟁은 끊임없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수많은 인명/경제적인 피해가 발생했다. 경제적인 피해는 전쟁이 끝나면 복구가 가능하지만, 인명피해는 전쟁이 끝나도 복구가 될 수 없다. 죽은 사람이든 남겨진 사람이든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라는 점이다. 적군이 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로도 죄가 되어 수많은 양민들이 죄없이 학살되었고, 이중에는 역사속에서 기록되지 않은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되고 있다.
6.25 전쟁은 한국 역사상 가장 규모가 컸고, 그만큼 물질적 피해또한 컸다. 3년동안 무려 300만명이 살해당했고, 그중 99만명이 남한에서 살해당했고, 대부분 좌익으로 몰려 남한 군대 혹은 미군에 의해 재판없이 학살당했다. (물론 우익인사가 공산군에 의해 학살당하긴 했다.)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한국전쟁에 대해서 북한공산군(예전에는 북한괴뢰집단이라고 불렸다.)에 의한 불법남침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소련군의 자료나 미군이 한국전쟁 동안 북한점령때 입수한 자료는 남침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것이다.
문제는 "엄연한 사실"을 가지고 싸우자는 것이 아니다. 북한공산군에 의한 남침은 어디까지나 현상에 불과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을 찾으려면 단순히 "북한공산당의 적화야욕"에서만 찾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앞서 보았듯 남북한은 그 이전에도 38선에서 숱한 작은전쟁을 하다가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확대된 것이다.
아무리 북한공산당이 적화통일에 대한 야욕이 강했다고해도 무려 3년이나 끌고 18개국(16개국 유엔군과 중소 양군)이 참전한 국제전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들은 한달내에 한반도를 통일할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던 것이고, 전쟁은 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었던 것이다.
여태까지 보았듯, 김일성이 소련의 등을 업고 권력을 잡긴 했어도 그에게 숱한 경쟁자들이 북한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세력이 우세했던 평양의 지도자였던 조만식을 비롯해 조선 공산당을 대표하던 박헌영, 해방한국에서 가장 인기많았던 좌익인사였던 여운형등 김일성이 아니라도 소련이 세울만한 인물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북한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갔고, 그의 나이가 불과 33살에 불과했다는 점을 본다면 그가 좌고우면하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는 멍청이는 아니었을 것이다. 역사에서도 어떤 하나 사건이 발생하면 학자들은 단순히 일어나는 자연현상이라고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얘기가 어렵다면 다른 것으로 설명해보자면 뉴스 기사에 소위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현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연구결과라고 기사에 뜬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이 왜 방구를 끼는가?에 대해서라도 학자들은 그저 사람들이 밥을 많이 먹어서 속이 더부룩해서 방귀를 꾸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체의 어떤 부분이 어떤 현상을 일으켜서 어쩌구저쩌구 하는 방식으로 연구하기 마련이다. 그걸 보는 독자들은 당연한걸 뭐 이렇게 복잡하게 쓰냐고 하겠지만 그걸 연구하는 학자에게는 단순히 넘어갈 수 없는 문제이다.
정치학자들에게는 전쟁을 정치의 연장선에서 파악한다. 국제정치가 갈등에 봉착할때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전쟁이 발발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을 계급투쟁의 하나로 보고 있다. 심리학자와 사회학자들은 한 사회 내부 또는 두 사회의 심리적인 적대감에서 전쟁의 원인으로 본다.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이 더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을때 전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 발생하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전쟁은 사회적인 갈등과 모순이 증폭되어 폭발하는 시점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갈등의 폭발이 내부에서 일어날때는 혁명 또는 시민전쟁의 형태(혹은 반란)이 된다. 하지만 내부의 갈등이 한사회에서 해결할 수 없어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해결할려고 할때 전쟁은 두 지역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한 사회 내부의 구조적인 갈등과 모순이 폭발한 것으로 모든 전쟁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전쟁이 왜 하필이면 1950년 6월에 일어났을까? 한반도에서 6월이면 장마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장마가 시작되면 공격보다는 방어에 유리할 수 밖에 없다. 왜 한국전쟁은 일어나야만 했던 것일까?
그동안 한국전쟁을 연구한 수많은 학자들은 단순히 정치적인 목적(반공)에 복무하는데 그쳤다. 냉전체제에 이루어진 수많은 연구들은 북한 남침의 불법성 혹은 북한의 적화야욕에 맞써 자유진영을 수호하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위한 선전도구로만 사용되었다.
6.25만 되면 걸핏하면 새로운 증거이니 문서가 발견되었다고 하지만, 정작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북한군의 남침을 뒷받침하는 식상한 증거들뿐이다.
이렇듯 다들 북한의 남침만을 집중 추격하고 있을 때, 한국전쟁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들고 나온 책이 있었다. 브루스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이 그것이다. 보수언론의 색깔론 속에서도 한때 대학생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던 <한국전쟁의 기원>은 한국전쟁을 한반도의 내부상황과 미국의 대한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후 미국과 소련, 중국들이 군대를 파견한 것이 사실이지만, 전쟁이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남북이 전쟁의 주체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한반도의 내부적인 요인들이 전쟁의 좀더 주된 요인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커밍스 교수가 미국의 대한정책을 설명하게 된 것은 한반도 내부의 갈등이 증폭되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이미 식민지 시기부터 정치 사회적인 갈등의 싹이 터온 것은 사실이지만, 갈등의 시작은 해방 직후 좌익 정치세력의 강력한 힘이 정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우익 정치세력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던 좌익세력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여기에 민중의 여망이던 사회개혁과 친일 잔재 청산에 좌익세력은 적극적인 반면, 우익세력은 친일파가 상당수 포진해있어 소극적이었던 점이다. 근데 미군정과 미군 주둔은 우익에게 큰 힘이 되었고, 38이선 이남은 좌익세력이 몰락하고 우익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하가게 되었다.
결국 38선 이남의 지역은 미국의 지원을 받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이북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이어져 단독정부 수립이 전쟁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전쟁은 한편으로 냉전의 대리전 성격을 가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한반도 내에서의 갈등으로 인한 시민전쟁의 성격을 가진다.
하지만 브루스커밍스의 연구에는 큰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의 시각으로 한국전쟁을 그리다보니 우리 한반도가 단순히 미국과 소련에 의해 정치변화되었다는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기때문이다.
물론 미소 양국 군대가 38선에 주둔하면서 분단이 되었고, 단독정부가 수립되었지만, 그 과정이 단순히 미소의 전략지원때문이라고 볼수는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미국의 대한정책이 항상 우익을 지원했던것만은 아니었다. 우익이 아니라도 한반도에 친미적인 정부가 수립된다면 중도세력과도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김구나 여운형 김규식등에까지 미국이 포섭할려고 했던 점을 본다면 미국의 대한정책이 일관되었다기보다 유동적이었음을 볼수 있다.
한국전쟁은 해방과 더불어 반제반봉건의 과제가 분할점령과 분단으로 말미암아 체제간의 대립으로 비화 발전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전쟁에는 계급투쟁이라는 "내전"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지만, 이보다는 민족적 모순과 진영 모순에 기인한 이데올로기 전쟁의 성격이 주된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전쟁의 전개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처음에 북한이 남한을 전면적으로 침공하면서 내전의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이내 북한인민군과 유엔군간의 대립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단순한 내전에서 사회주의 대 자본주의간의 체제대립 전쟁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브루스 커밍스 주장의 문제점은 소련군정과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관계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남한의 미군정은 인민위원회를 폭력적으로 제압했으나 북한 소련군은 인민위원회를 지원하면서 민주개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 수 있도록 했다는 점을 들어 인민위원회가 소련군에 대해 독자성과 자율성을 갖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이면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적인 측면에서만 보았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미국이 남한에서 물리력을 행사해 직접 통치를 했던 반면, 소련군은 북한에서 인민위원회에 자치권을 넘겨주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채택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련군이 정한 한계와 범위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율성이었던 것이다.
이는 신탁통치 분쟁과정에서 조만식이 철저하게 배제된 것에서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련측 자료들과 소련 군정 관련자들의 증언 등에서도 이런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북한 사회를 자신들의 범위와 한계 안에서 철저히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미군과 소련군의 상대적인 차이를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질적으로 성격이 다른 "점령군"과"해방군"의 차이가 아닌 것이다. 소련은 사회주의 이념에 근거해 대외정책을 추진했지만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해를 1차적으로 추구한 강대국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남침유도설"이다. 그의 주장은 미소의 비밀자료들과 한국전쟁 관련자들의 증언,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한 최근의 연구에 의해 설득력을 상실하고 있다.
브루스 커밍스의 주장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실증적으로 해결하고 있는 것이 박명림이다. 박명림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에서 커밍스의 주장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과 오류를 상세히 밝히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전후한 시기, 북한인민군의 동향을 면밀하게 추적함으로써 한국전쟁의 발발을 둘러싼 허점을 낱낱히 밝히고 있다. "남침유도설"의 한 근거가 되는 남한군에 의한 옹진 해주 침공에 대해서도 북한측의 자료들을 인용하여 매우 구체적으로 반박했다.
이런 실증적인 연구 결과를 통해 한국전쟁에 관련한 북침설 혹은 남침유도설은 더이상 객관적인 설득력을 갖고 있지 못한다. 한국전쟁은 북한 지도부의 치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전면전쟁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한국전쟁을 연구하는 대다수 학자들의 결론이다.
이런 결론에 뒷받침해주는 핵심적인 자료로는 <김일성명령서>가 있다. <김일성명령서>는 미군이 평양을 점령하면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집무실과 내각 최고인민회의등 북한의 주요 공공기관과 각 지역에서 가져온 "북한노획문서" 가운데 일부다. 북한노획문서는 총 수백만 페이지에 달하는데, 1945~1955년까지의 북한 정치,경제,군사,문화,법률,교육등 사회 전반을 연구하는데 가장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미국 워싱턴 근교인 메릴랜드주 수틀랜드에 있는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하고 있으며 1970년대 초부터 공개되고 있다.
이 명령서는 1950년 4월부터 1951년 1월까지 한국전쟁에 관련한 각종 명령들을 담고 있는 자료이다. 이들 명령서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분명히 북한의 남침에 의해 시작되었다. 북한측 문서로 북한의 남침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그 어떤 문서보다도 자료적 가치가 높다.
하지만 그것들로만은 한국전쟁에 대한 모든 쟁점이 해결된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은 북한에 의한 전면 남침이란 것은 밝혀졌지만 한국전쟁을 불러오게 된 원인과 한국전쟁의 성격에 대해서는 아직도 많은 쟁점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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