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전경들을 보면 수족이 굳어
증언자 : 이종남(남)
생년월일 : 1954. 5. 15(당시 나이 26세)
직 업 : 양화점 경영(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8. 11
개 요
양동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던 이종남 씨는 5월 18일 거래처를 다녀오다가 대한극장 앞에서 공수부대에게 구타당했다.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중퇴하고
나는 1952년 5월 15일에 광주 봉주동(현 주월동)에서 가난한 농가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님이 45세 때 얻은 아들로 딸만 위로 둘을 낳다가 나를 얻어 부모님으로부터 귀염도 많이 받고 자랐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만 해도 밭 288평에 몇 마지기의 논을 나눠먹이(소작)로 경작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내가 국민학교 4학년 급작스레 돌아가셨고, 그 후로 집안은 점차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심한 해소기가 있어 고생을 하셨다. 여러 약을 쓰며 치료하던 어느 날 민간요법으로 옻칠개를 내서 개고기를 해잡수셨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그 뒤 3년을 시름시름 앓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밭을 한 평당 1백50원에 팔아 그 돈으로 생활하다가 돈이 떨어지자 더욱 생활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형(이동춘, 양2동 귀빈각 사장)은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전주로 양화 기술을 배우러 갔다. 형님과 나는 다섯 살 차이가 난다. 형님은 그 전에 중학교를 마치고 광주 충장로 럭키양화점에서 양화제조 기술을 배웠다. 그러면서 봉주동 집에서는 양계 50수 정도와 토끼를 길렀다. 그러나 그것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게되자 어머니는 형님을 나가 살라고 쫓아내다시피 했다. 전주로 가서 양화기술을 더 배우며 야간고등학교를 마쳤다. 전주로 간 형님은 2, 3년이 지나도 자기 살기에도 빠듯했던지 돈을 부쳐주는 일이 없었다.
아버지가 독자라서 친척도 많이 없었으나 그나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는 누구 하나 우리 식구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와 함께 고구마, 깨, 산(밭에 심는 벼), 호박 등을 밭에다 심어보았으나 별 큰 소득을 못 봤다. 계속적인 가난에 허덕이다가 결국 광주숭의중학교 2학년 때 나는 등록금이 없어 학교를 중퇴해야 했다. 학교를 중퇴한 후 집에서 마냥 놀 수만은 없었다. 어릴 때부터 힘이 좋았던 나는 민물고기를 잡으러 돌아다니는 동네 어른들을 따라다녔다. 주로 내가 하는 일은 어른들이 잡은 물고기를 들고 다니는 일을 했는데, 일당으로 70원씩 받았다. 같이 따라다니던 어른들은 50원씩을 받았는데, 나의 일당이 그들 보다 많았던 것은 내가 힘도 좋았고 나이가 어려 일을 시키기가 수월했기 때문이었다. 주로 낮밥은 굶거나 누룽지를 싸가지고 다니면서 먹었다. 내가 하는 일은 보통 사람이 3일을 버티기 힘들 정도로 일이 고되었다. 나는 형님이 안 계신 3년 동안을 이렇게 보냈다.
성실하게 일하며 가게 경영
내가 열여섯 살 때에 형님이 광주로 오셨다. 형님과 어머니와 함께 주월동 집에서 계속 지내다가 1967년 광주, 목포간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우리 집이 고속도로 터로 들어가게 되어 양동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그때 보상금으로 25만여 원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돈으로 양동에 방을 얻고, 형님은 외가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양2동에 제일양화점을 냈다. 형님이 남을 고용하는 것보다 집에서 놀고 있는 동생에게 기술이나 가르쳐주겠다고 하여 형에게 양화기술을 배웠다. 그로부터 1980년까지 10여 년을 일했다.
그때 아내 문순례를 만났다. 아내는 형수님 친구분의 양장점에서 일하던 아가씨로, 우리는 1977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할 때까지 나는 형님 밑에서 일하면서 월급을 안 받고 가끔 용돈만 타썼는데 형님은 그 대가로 통장과 함께 전세 3백만 원짜리 방을 얻어주었다. 결혼 후 아내와 함께 양2동에 유명양화점과 제일 양장점을 나란히 차리게 되었다. 두 가게는 그동안 저축해 놓은 돈을 모두 합쳐서 전세 1천3백만 원에 빌렸다. 아내는 양장점을 하면서 처제까지 4명의 재봉공 을 들여 삯일을 했다. 아내의 한 달 수익은 세를 주고도 2백여만 원씩 떨어졌다.
그러나 내가 하는 양화점은 겨우 25만 원 정도였다. 결혼 후 2년을 열심히 일한 결과 집을 장만했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조금은 여유있는 생활을 하던 중 5·18을 경험하게 되었다.
나는 5·18 당시에 평상시와 다름없이 양화점 일을 계속했다. 그 전에 가끔 시내에 구두 윗부분에 덮는 갑피를 맡기러 갈 때 도청 분수대 앞에서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은 있으나 그저 학생들이 모여서 무엇을 하는가보다고만 생각했다. 사실 나는 결혼하여 아이도 한 명 있고, 더구나 아내가 임신중이어서 시위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공수부대에게 전신을 구타당하고 짓밟혀
5월 18일 오후 4시 50분경 계림동 박인천 씨 집 옆에 있던 귀조피혁상회에 들렀다. 양화제조에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러 간 것이다. 큰 물건은 배달해 달라고 하고는 구두끈, 본드 등 간단한 물품을 자전거 뒤에 실었다. 양2동 집으로 올라가면서 보니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길목이 온통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다. 나는 얼른 시외버스 공용터미널 부근 대한극장 있는 곳으로 자전거를 돌렸다. 그때 대한극장 앞에 군용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던 1백여 명의 공수부대 원 중 7, 8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철망이 처진 헬멧을 쓰고 있었다. 그들이 느닷없이 내 머리를 곤봉으로 내리쳤다. 순식간에 머리에서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자 그들은 손마저 곤봉으로 사정없이 때려 손가락 뼈가 부러져버렸다. 그들은 땅바닥에 쓰러진 나를 또 군화발로 지근지근 뭉갰다.
처음에 나를 구타했던 일행이 나를 땅바닥에 버려두고 가버리자 또 다른 팀이 몰려와 온몸을 정신없이 구타하여 나는 그만 정신을 잃어버렸다.
병원에 입원한 후에 들으니 그곳에 있던 미국인 3명이 나를 근처 민병휴의원으로 데려다놨다고 한다. 마침 내 몸에 주민등록증이 있어서 집으로 연락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병원의 연락을 받고 형님과 아내가 곧바로 찾아왔으나 나는 19일까지 의식불명 상태였다. 민병휴의원에서 대강 치료를 받고서 다른 병원으로 옮기려 할 때 원장 선생님이 형님에게 전남대병원 같은 큰 병원으로 가면 위험하니 집에서 가까운 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5월 19일 집 근처에 있는 월산동 성심병원(현 원광대 병원)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4개월 23일간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9월에 딸 현정이를 낳을 무렵 퇴원했다. 내가 퇴원할 때에는 허리에 깁스를 하고 손과 머리를 붕대로 칭칭 동여맨 상태였고 얼굴마저 퉁퉁 부어 사람 꼴이 아니었다. 퇴원 후 형수님께 치료비에 대해 물어보니 형님이 1백80여만 원 되는 것을 1백40여만 원으로 깎아 계산 했다고 했다.
5월 27일쯤으로 기억되는데 성심병원에 입원중일 때 동사무소 호적계 직원과 월산동 10통 통장이 찾아와 아내에게 학생이면 몰라도 일반인이니까 신고하지 말라고 하면서 만 원을 주고 갔다고 했다. 그들은 또 신고하면 끌려가 구속되거나 죽인다면서 돈을 전해 주고 어떤 용지에 인장을 찍어오라고 했다 한다. 그때는 죄가 없어도 불안했던 때라 신고할 생각은 엄두도 못 냈다.
부상후 좌절감 커
퇴원한 후 내가 공수부대원들에게 구타당했던 곳에 다시 한 번 가보며 민병휴 병원에 들렸더니 병원 사무장이 나를 반기면서 당시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내가 공수부대원들에게 세차례에 걸쳐 무자비하게 두들겨맞았으며 자기도 병원 셔터 문을 내리다가 그들에게 두들겨맞았다고 했다. 그 사람도 나처럼 5·18 때 다쳤다고 하면 모조리 잡아간다는 소문 때문에 자비로 치료했다고 했다.
5·18 이후로는 양화점 일을 하려고 해도 허리 통증으로 칼을 쥔 손이 떨려서 도저히 일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1984년에 양화점을 정리했다. 게다가 아내의 양장점마저 나의 약값 때문에 이듬해에 처분하고 말았다. 좋다는 것은 다 먹고 단방약도 써보고 다른 지방까지 왕래하며 침을 맞기도 했으나 차도가 없었다. 벌어놓았던 돈을 약값으로 모두 날리고 살던 집도 그곳에 여관(옥선장)을 짓는다기에 현재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 지금은 한 집에 9가구가 살고 있는 집 에서 사글세 40만 원을 주고 방 한칸을 얻어 다섯식구가 살고 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은 공사판 노동자, 노점상, 우유배달, 해외취업 노동자 가족, 관광버스 운전사 등이다.
양화점을 그만두고 그저 놀 수만 없어서 가든백화점 신축공사장에 나가 잡부로 일하기도 했으나 3일 정도 일하고 나니 허리가 쏟아지는 듯 아파 더 이상 일할 수 없었다. 내가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아내가 1985년부터 가든백화점 앞에 있는 유패션에 취직했다. 밤늦도록 일하며 변비로 고생하다가 작년(1987년) 8월에 전화통이 손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손을 다쳐 일을 못 나가게 되었다.
우리 부부가 이처럼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에게 양화점을 차려 준다고 했다. 이제는 내가 양화점을 한다고 해도 손수 일을 할 수 없으므로 구두 제품을 미리 사다놓고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돈이 무척 많이 들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내가 양화점 대신에 아내에게 양장기술이 있으니 양장점을 차려 주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1987년 10월 22일 내게 보상비가 나오면 갚는다는 조건으로 안기부(정중권, 교보빌딩)에서 7백만 원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집 전세권 을 자기들 명의로 해서 8백만 원에 가게를 얻었다. 남은 1백만 원은 월세로 2만 원씩 지불하기도 했는데, 천과 미싱 등을 사고 가게를 인수하면서 오히려 빚만 2백만 원이 되어버렸다. 양장점 장소가 변두리지역이라 손님도 별로 없다. 한겨울에는 30여만 원 정도의 수입이 있어 그런대로 괜찮으나 여름, 가을은 매달 15만원 벌이를 하기도 힘들다.
1987년 3월에는 부상자동지회원(김용대)이 운영하는 성인오락실(무등오락실)에 고용되어 45일간 근무하여 25만 원을 받았으나 일에 회의를 느껴 그만두었다. 몸은 비록 병신이지만 마음만은 병신이 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서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그곳을 나와버렸다.
88년 6월에 아내가 부엌에서 야회용 석유 버너에 아침밥을 하다가 버너불을 살리기 위해 알코올을 붓다가 불이 붙어 얼굴, 허벅지 등에 화상을 입었다. 월산동 대창주유소 앞에 있는 성인병원에 약 한 달 정도 입원 치료를 했는데, 치료비는 특수 이재민 카드가 있어 무료로 했다. 아내는 화상당한 흉터뿐 아니라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나 또한 허리 통증과 수족경련으로 몸이 가끔 마비되며 밤에는 잠을 자려 해도 공수부대원에게 구타당하는 꿈, 아내가 화상당하는 꿈 등 악몽으로 불면증에 시달린다. 전남대병원 내과, 신경외과, 신경정신과 등을 다니며 통원치료하고 있다.
부상 후에 가끔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망치로 장농, 방바닥 등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리고 홧김에 애들까지 때릴 때도 있다. 그런 것 때문인지 종종 애들 일기장을 보면 "아빠는 왜 신경질만 내실까?"라고 씌어져 있다.
고통에 못 이겨 자살을 기도
1984년에는 이런 세상 살아봤자 뭐 하냐는 생각이 들어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대성여고 앞산(옥천사)에서 자살을 기도한 적이 있었다. 나무에 목을 맸는데 나무가 부러져버렸다. 그러자 갑자기 죽음에 대한 공포심이 생기면서 늙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고 처자식이 있는데 나 혼자 편하려고 죽을 수 있으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고통당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런 고통을 내 자식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현재 어머니는 양2동에서 귀빈각(여관, 온천)을 경영하는 형님이 모시고 있다. 형님은 귀빈각이 생기기 전 그곳에 건물을 지었다가 불이 나는 바람에 빚을 많이 졌다. 그래서 생활정도가 우리보다 낫지만 형님께 도움을 청하기도 미안하다. 아내도 척추와 허리를 못 쓰는 병신이기에 부부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을 그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었다. 마음은 낫고 싶은데 몸이 점점 더 나빠 지기만 한다.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보다 몸이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1986년 7월에 부상자동지회(회장 박옥재)에 가입했다가, 부상자회가 1988년 2월에 둘로 나뉘게 되자, 이지현 회장이 맡고 있는 5·18 광주민중항쟁 부상자동지회에 가입했다. 지금까지 월례회에는 빠지지 않고 나가나 시위를 할라치면 5·18 당시 계엄군들이 나를 구타하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다리와 손이 굳어져버린다. 5·18은 전두환, 노태우가 자기권좌를 위하여 무자비하게 광주시민을 대거 학살한 것 때문에 발발한 것이라 생각한다. 광주시민의 학살자들은 남의 눈에 눈물나게 하면 반드시 제 눈에서 피눈물이 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5·18 부상자와 유족들이 정부에서 준다는 보상금 때문에 병신 위의 병신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조사정리 옥유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