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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신 어른 김학수 선생님을 그리며
세상에서 내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나를 지켜줄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갖게 해준다. 오죽하면 병석에 누워서 온 몸을 쓰지 못하는 부모라도 있어봤으면 좋겠다는 말들이 있겠는가. 어렸을 때는 부모님과 형들이 그런 일을 해왔는데 이제 부모님은 세상에 안계시니 내겐 형제들이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형들도 이제 나와 같은 반열에서 사회인으로서 살기에 바쁘다보니 옛날의 내 보호자가 될 수 있는 형편은 아니다. 함께 살아가고 함께 걱정하고 세상을 탓하고 자식들 보듬기도 힘들어하는 한 가정의 가장일 뿐이다. 이제 그나마 자식들도 사회생활을 할 정도로 세월이 흘렀으니 우리 마음속에는 이제 세상을 정리하며 남겨야 할 것들이 무엇이 있을까 챙겨봐야 할 때가 저멀리 다가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어르신들에게 배운 것으로 삶의 끈을 이어가는 마당에 화단의 어른이자 후소회의 고문이시며 내게는 아버지 같던 혜촌 김학수 선생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사건은 어떻게 정리하려 해도 도무지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이다. 3월 9일 생신날 아침에 머리가 어지럽다시며 검사를 받으러 병원에 가신 것이 영영 못올 길로 가시는 길이었으니 그토록 건강하고 그토록 맑은 정신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던 그 모습을 이제는 어디서 뵐 수가 있을까. 625때 피난 내려오신 뒤로 그토록 그리워하시던 가족들의 모습이었건만, 어디에 살고 있는지를 알면서도 얼굴 한 번 못보시고 그냥 떠나셨으니 그 안타까움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으랴. 해마다 6월말이 되면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신문사 잡지사에서까지 찾아와서 60년의 외로움을 한 번 두 번 곰씹어보게 만드는 일도 이젠 없겠지만 그 어려운 이별의 기억들을 되씹을 때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로서는 이렇게 허무하게 가실 거라면 차라리 중국으로 가서라도 한 번 쯤 가족을 만나고 오실 걸 하는 후회가 업습한다. 중국어 교수까지 되고 중국에 오고가는 것이 전혀 어려움이 없는 입장에서 선생님의 그 외로움을 조금도 덜어드리지 못한 못난 제자로 평생을 살아가야하니 이제 와서 후회한 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마는 장례를 모신 5월 9일이 벌써 한 달 전이고, 다시 또 선생님을 외로움에 젖게 하던 6월이 된지도 여러 날이 지났다.
그간에 전직 대통령의 뜻밖의 서거로 온나라가 비통한 나날들을 보냈지만 정치라는 것은 옛날부터 본래 종잡을 수 없는 세계이니 그 안타까움은 또 그렇게 다른 길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해보지만, 혜촌선생님의 그 가르침이며 주변의 하많은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은혜를 헤아려 볼 때 가족이 있어 가족에게 갚을 것인가 친척이 있어 감사의 인사를 할 것인가. 생각하면 할수록 그 분의 인간으로서의 삶이 가엾기도 하고 그보다 교계와 화단에서 너무나 훌륭한 스승을 잃었다는 안타까움은 나를 어쩔 수 없을 만큼 힘들게 한다. 사심없이 후배들을 도와주시며 새 삶을 살게 해주신 일들과 제자들을 한 가족처럼 챙겨주셔서 사회의 커다란 동량이 되도록 이끌어주신 일들은 이제 다시 누가 해줄 수 없는 일들이라고 생각한다.
정계에는 대를 이어 4대의 국회의원을 지낸 경민대학 설립자 홍우준 박사, 교계에는 미국 교회협의회(NCC)회장까지 역임한 이승만 목사, 미술계에서는 후소회의 동학외에도 일랑 이종상화백 형제 등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고 도와준 사람들 중에는 그 분야의 최고의 자리에 오르거나 박사 교수 목사님의 위치에 올라서 성공한 사람이 수십명에 이른다. 전쟁시기에 갈 곳이 없는 피난민이 된 평양에서의 제자들을 한집에서 먹여가며 대학공부를 시켰고, 서울에서는 주변의 어려운 이웃 자제들을 집에서 돌봐가며 대학공부를 시켰다. 그림으로는 나 외에 가르친 제자가 없으니 선생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은 셈인데 그렇게 십년 가까이 한 집에 살며 지켜봤으면서도 선생님의 그 놀랄만한 부지런함을 배우지 못한 것을 보면 나는 정말 불효한 제자인 것이다. 나도 대학교수가 될만큼은 애썼다고 변명을 하기엔 선생님의 작품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대단한 것이어서 선생님 앞에 앉기만 하면 나는 한없이 작아져 있었다.
지금도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면 논어의 학이편을 들어서 "배우고 시간을 내서 반복하라"고 가르친다. 이는 공자님의 말씀이니 2,500년을 한결같이 따르던 동양의 학문에 대한 지침이라며 열변을 토하곤 하는데, 나는 이 귀절을 선생님의 그림책상 앞에서 무릎꿇고 낭송하며 배웠고, 대학에서 중국어 전공을 할 때 나와서 반갑게 하더니, 대학 강단에서도 금과옥조로 버릴 수 없는 귀한 말씀이라는 것을 날이 갈수록 실감하곤 한다. 문제는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 나 스스로는 정말 그렇게 열심히 시간을 내서 하고 있는가 하는 자문에 스스로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대학생 때 전국규모의 중국어 경시대회에서 대상을 타고 중국유학의 부상을 탔을 만큼 열심히 했다. 그것도 3,4핛년 선배들을 부끄럽게 만들며 2학년 때 대상을 탔으니 남들이 보기에 열심히 했다고 볼지도 모른다. 후배들은 항상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는 내모습을 보고 당시에 유명하던 '로보캅'이라는 별명을 지어 줄 정도였다. 졸업후에 최고의 중국어전문학원에서 나를 찾아 강의를 부탁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선생님처럼 먹고 자고 기도하는 일 외엔 늘 그림을 그리는 것 밖에 모르는 분 앞에서 나는 게을러도 한참 게을러서 선생님께 걱정을 끼쳐드렸었다.
교회에서 화단에서 큰 별이 지다
선생님은 제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 외에 교계에도 큰 족적을 남기신 분이다. 지금 625 때 피난민들 중심으로 세워진 교회 중에 성공한 교회로는 누구나 다 아는 영락교회가 있다. 한경직 목사님의 손으로 세워진 장로교회인 영락교회에서 사회에 끼친 영향은 더 말할 필요가 없고 감리교회로는 한승호 목사님과 안상현 전도사님의 시온 감리교회가 부산에 세워지고 감리교신학대학 학장이었던 변선환 목사님을 비롯해 많은 일꾼을 배출했다. 현재 김삼환 목사님을 중심으로 초교파적으로 큰일을 하고 있는 한국외항선선교회도 시온교회의 김의민 장로님 ․ 김용련 목사님 ․ 김학수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창립된 단체이다. 처음에는 1973년 일본 고오베에 갔다가 외항선교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돌아온 김의민 장로의 열정으로 추진되었고 1974년 창립총회를 거쳐 교파를 초월하여 외항선을 타고 들어오는 외항선의 선원들에게 승선 선교하는 것으로 시작이 되어 초교파적인 환영을 받았는데 김의민 장로님이 1975년에 58세로 타계한 뒤 김학수 선생님이 총무를 맡아 자리를 잡고 지금은 세계적으로 큰일을 하는 단체가 되어 선생님의 큰 족적을 남긴 결과가 되었다.
올해 6월초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44회 회원전을 개최한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도 1965년 1월에 서양화의 김인승 선생을 회장으로 모시고 시온교회에서 김학수 선생님이 동양화 부회장, 홍종명 선생님이 서양화 부회장, 황유렵 선생님 등이 주도적으로 창립하여 화단에서도 시온교회의 이름을 높였으며, 1979년부터 原谷 김기승 선생님과 김학수 선생님의 기금을 바탕으로 기독교미술상을 해마다 시상하고 있으니, 선생님은 기독교미술사나 기독교역사에서도 빠질 수 없는 귀한 분이라는 것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님이 은퇴 후에 남한산성에 머무실 때도 두 분은 개인적으로 종종 내왕하시면서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고 노년의 일상을 함께 하곤 하셨는데 어느 해에는 한경직 목사님이 김학수 선생님 자택 한 쪽 벽을 타고 올라 가득 피어난 나팔꽃을 보고 부러워 하셔서, 그 다음해 비오는 봄날에 나팔꽃 묘목을 몇 십 뿌리 캐가지고 남한산성 목사님 댁의 울타리를 따라 심어주고 돌아오던 기억이 어제일 같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평생 역사 풍속화를 그려 오면서 미술품으로 팔기 위한 그림보다는 대중이 볼 수 있도록 중요한 곳에 기증하신 그림이 더 많다. 연세대학교 루스채플은 1985년 혜촌선생님의 기독교전래 100주년 기념 성화전에 출품하셨던 예수님 일대기 33점으로 하나의 상설 전시관 겸 학습의 장으로 꾸며져 있고, 같은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한국기독교 역사화 66점이 양지의 순교자기념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혜촌선생기념관’이 있는 경민대학에는 교육의 자료로 우리 역사상 위대한 충신 효자 열녀 위인을 그린 충효위인도 150점이 상설 전시되어 있고, 김해의 인제대학에는 선생님이 평생 수집하셨던 고서화 골동품을 포함한 선생님의 유작들이 기증되어 혜촌선생 기념박물관이 세워진 후, 한강도의 일부를 몇 권 다시 그려서 기증해 상설 전시하고 있고, 숭실대학교 한경직목사 기념관에도 기독교 역사화를 기증하셔서 상설전시하고 있다. 성균관 대학교에는 공자님 일대기를 그려 기증하셨지만 몇 년째 전시계획이 들리지 않아 어찌된 일인지 몹시 궁금하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도 선생님의 그림이 기증되어 있는데 고려대에서 그에 관한 시청각 자료를 만들기 위해 쓰러지시기 며칠 전 선생님의 생애 마지막 취재를 해 갔었다.
교회 밖의 일로도 세종대왕기념관의 이사로서 한국학의 연구에 일조하기도 하셨는데 세종대왕기념관에서 번역한 결과물들이 집으로 배달되어 오면 나는 그것을 가지고 선생님과 공부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의 경험들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세종대왕 기념관의 세종대왕일대기실에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세종대왕 영정이 여주 영릉으로 간 뒤에 선생님의 영정그림과 한글반포도 등 대작그림 14폭이 가득 채워져 있다.
선생님의 그림이 주로 역사 풍속화라는 것은 선생님의 어릴 적 호기심과 관심사가 사람사는 세상에 있었던 것을 말한다. 모태신앙이었던 선생님이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만나는 많은 일들과 학교에서 거리에서 혹은 할머니께서 말씀해주시던 많은 이야기들이 그림으로 옮겨지고, 그것을 반대하시던 아버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선생님이 가장이 되어 그림을 수단으로 하여 살림을 이어가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서는 엄두내기 어려웠던 기성서화회의 어른들과의 교류로 인해 본격적인 서예가 화가로서의 활동을 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차인태 아나운서의 아버지인 차영민 박사님의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하게 되었었다. 친구를 따라 철원까지 갔던 선생님과 그 동네 어른들이 한시를 놓고 한참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선생님의 한문 실력에 감탄한 동네 어른들의 대접에 차영민 선생은 덩달아 실력있는 신랑이 되어 돌아가실 때까지 두 분의 교우관계는 보는 사람을 부럽게 하고 있었는데 차영민 선생님도 노환으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신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선생님은 이렇게 당신의 생활에 충실하고 열정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 댁에서 살면서 공부하던 제자들에게도 많은 것을 나눠주시고 그 학문에의 부지런함을 나누어 주셨다. 매일 밤 11시에 주무시는 선생님은 밤 9시 반이 되면 예외없이 우리를 불러 앉히시고 경전을 가져다 읽게 하시거나 신문 혹은 읽어야 할 책을 내어 놓으셨다. 화가로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책을 좋아하시는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시는 옆에서 우리가 읽는 소리를 듣다가도 틀리는 부분이 있으면 바로 바로 정정하시면서 그 내용의 배경에 대해 설명해 주시면서 그림을 그리셨다. 나는 아직도 선생님의 학문의 깊이는 어디까지인지 확실히 감을 잡지 못한다. 논어 맹자 대학은 원문을 통째로 외우시고 계셨는데 글자 하나만 잘못 읽으면 거의 책 한권에 대한 설명이 이어져서 우리를 질리게 하셨다. 내가 서예공부를 할 때도 천자문의 어떤 글자는 왜 잘못되고 왜 이렇게 해야 하는지를 일일이 말씀하셔서 그 말씀의 깊은 깨우침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힘들게 하셨었다. 그러나 나는 그 때 알지 못했었다. 그 모든 것이 내가 대학에서 공부를 하거나 강의를 할 때 그대로 선생님의 흉내를 내며 남에게 전달하게 될 거라는 것을 ...
이제 나는 북한의 가족을 만나서 선생님을 대신해 그 분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서 곁에서 모시고 살던 가르침의 아들로서 선생님께 받은 사랑을 갚아야 한다. 크신 사랑을 전달해야 하고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하던 그 간절한 안타까움을 전해야 하고 선생님이 남겨주신 사랑의 크기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려야 한다. 비록 사모님은 돌아가셨지만 사남매의 손자들에게라도 그 고마움을 전하고 그 분의 생전의 모습을 닮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것이 선생님께 배운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실천하는 길일 거라고 믿는 것이니, 그 때에 가서 작은 미소를 띠고 꿈속에 찾아오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경민대학 교수 김 성 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