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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21 원문보기 글쓴이: 편집실
20세기 영화계 거장의 망명 … 독일은 울고 미국은 웃었다. | ||||||||||||||||||||||||||||||||||||||||||||||||||||||
세기의 풍경, 망명 지식인을 찾아서(독일편)_ 22. 프리츠 랑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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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치 선전부장관 괴벨스는 영화감독 프리츠 랑(Fritz Lang, 1890-1976)을 불렀다. 그는 ‘영화제작 경위서를 제출하라는구나’라는 생각에 잔뜩 겁을 먹고 괴벨스에게 갔다. 영화 「마부제 박사의 유언」(1933) 초연 상영 금지처분까지 내려놓고, 직접 소환까지 하는 것을 보면 무슨 일이 더 벌어질 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각오는 하고 있었다. 프리츠 랑은 어려서 로마-가톨릭교회 세례를 받고 가톨릭 교육까지 받고 자랐지만 어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는 프리츠 랑을 1/2 유대인이라고 명기해 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화상영 금지 처분까지 받았으니 모든 것이 끝장이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에 너무나 놀랐다. 누구도 배석시키지 않고 프리츠 랑과 괴벨스 단 둘만이 앉은 자리에서 괴벨스는 (나치)제국선전부에 대한 설명서를 만들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히틀러가 프리츠 랑을 독일영화산업의 중요한 직책에 임명하라고 괴벨스에게 직접 지시까지 했다는 말까지 전하면서. “지도자(총통)께서는 당신의 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 (1927)를 보시고는 우리에게 나치영화를 선물하게 될 사람은 바로 이 사람이야!”라고 지목까지 했다는 것이다. 괴벨스 독대 후 무일푼으로 프랑스행
부인 테아 폰 하르보(Thea von Harbou, 1888-1954)는 나치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남편은 감독으로, 부인은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를 공동 제작하며 명성을 날린 세상 사람이 다 아는 영화인 부부였다. 영화배우이기도 했다. 독일영화를 개척했지만 나치 선전영화제작에 직접 참여한 이력으로 독일영화사에서 논쟁의 중심에 서있는 여자배우 레니 리펜슈탈(Leni Riefenstahl, 1902-2003)을 제외한다면, 그 다음 정도로 손꼽히는 초기 독일영화사의 저명한 여류 영화인이 하르보였다. 그런데 나치 집권 후인 1933년 4월 말 둘은 이혼한 후 남편은 망명의 길에, 부인은 나치의 품안에 안겼다. 부인만이 나치 편에 선 것이 아니었다. 프리츠 랑의 영화에 출현했던 수많은 다른 배우들도 나치 선전영화 선두에 섰다. 「메트로폴리스」에서 노동지도자 역할을 했던 하인리히 게오르게(Heinrich George, 1893-1946)는 히틀러 유겐트에서는 ㅤㅋㅞㄱ스 역으로 둔갑해 있었다. 게오르게는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후 나치영화, 선전영화, 반유대인 영화에 적극 가담했다. 배우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자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나치에게 쫓겨난 인물들이 남긴 빈자리를 꿰차고 앉으며 극장장이 됐다. 괴벨스에게 2급 공로훈장까지 받았다. 게오르게 말고도, 영화 「M」(1931)과 「마부제 박사의 유언」(1932)에서 로만 경감역을 맡으며 최초로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경감역을 연기해 명성이 자자했던 오토 베르니케(Otto Wernicke, 1893-1965)는 「나치돌격대 브란트」(감독 프란츠 자이츠, 1933)의 주연으로 출연했다. 부인이 유대인이었는데도 나치 문화청의 특별 허가를 받으며 연기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유대인 학살하면서 유대인 감독 기용한 히틀러 영화의 아키텍처 오토 훈테, 세팅의 칼 폴브레히트, 카메라맨 프리츠 아르노 바그너 등 프리츠 영화에서 명성을 날린 수많은 스탭들도 나치 영화에 동조했다. 대표적으로 프리츠 랑의 부인이었던 테아 폰 하르보는는 시나리오 작가뿐만 아니라 감독역할까지 맡으며 나치사상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지도자원리와 민족공동체 이데올로기에 대해 충성맹세를 하며 국가정치와 예술을 빛낸 공로로 1937년 국가영화상까지 수상했다. 당시 나치는 영화산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렇게 유대인을 증오하는 자들이, 유대인 피가 섞였더라도 웬만하면 눈감아 가며 영화에 참여시킬 정도였다. 나치 영화를 담당한 선전부의 정식명칭은 ‘민족계몽과 선전 제국부(서), RMVP’로 나치가 정권을 장악하고 6주 만에 급조된 장관급 행정부서였다. 정권유지를 위한 핵심 부서였다. 체제유지를 위해 민족을 계몽하여 내부결속을 다지고 대외적으로는 정권을 선전하는 나팔수 부서였다. 괴벨스 스스로가 천명하듯 ‘우리의 권력을 정신적으로 공고히 하고 국가행정부서뿐만 아니라 민족까지도 점령하여’ 나치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확고히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 된 것이 선전부였다. 선전부는 모든 문화 분야를 중앙에서 조정했다. 그 일환으로 선전부 내에 영화과를 설치했다. 영화야 말로 ‘대중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가장 현대적인 매체’라는 사실을 괴벨스는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전부가 설치된 2주후 괴벨스는 영화관련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영화인들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공동작업’을 할 것이라는 요지의 시정연설을 했다. 괴벨스는 새로 들어선 정부는 ‘진심으로 영화에 호의적’이라고 소개한 뒤 본인 자신은 ‘열정적인 영화예술 애호가’라고 못 박으며 이루 형언할 수없이 감동을 받은 네 영화 「전함 포템킨」, 「안나 카레니나」, 「폭도」, 「니벨룽겐」을 상영했노라고 말했다. 「전함 포템킨」은 1925년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Sergei Eisenstein) 감독의 소련 무성 영화이고, 「안나 카레니나」는 1927년 에드먼드 굴딩(Edmund Goulding) 감독에 그레타 가르보와 존 길버트가 출연한 미국 무성영화이다. 「폭도」는 오스트리아 출신 루이스 트렝커(Luis Trenker) 감독 작품으로 1932년 인스부르크에서 초연됐고, 「니벨룽겐」은 1924년 프리츠 랑의 작품이다. 듣는 사람들은 아연 실색했다. 공산주의자 한 작품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도 그랬고, 이 영화를 만든 네 명의 감독 모두가 유대인들인데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이 뜻밖이었다. 게다가 “예술은 자유이고, 예술은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해야한다”라는 말까지 붙였다. 사상이나 인종에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괴벨스의 속셈은 뻔했다. 최고의 영화인을 끌어들여 최고의 영화를 만들고, 고도의 영화수법을 통해 정권을 강화하고 선전하려는 것이었다.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전형적이고도 고전적인 수법이었다. 정치와 영화인, 이들 간에 만들어진 암묵적인 공식과 어둠속에서 자행되는 일들은 지금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만연하고 있다. 프리츠 랑은 괴벨스에게 최고의 독일영화 감독이었고, 독재자들이 즐겨 찾는 그들의 먹잇감이었다. 괴벨스가 영화인들을 모아놓고 시정연설을 한 다음 날 「마부제 박사의 유언」은 금지처분이 내려졌다. 이 영화는 국가의 폭력독점과 권력독점에 의문을 제기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M」도 금지되었다. 나치제국이 금기시하는 충동적 성범죄자들과 정신병자들을 다뤘다는 것이다. 수년간 이 두 작품은 영화관련 서적에 자취를 감췄다. 랑의 다른 작품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프리츠 랑의 작품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잘 훈련시켜 나치선봉에 세운다면 써먹을 만 할 것이라는 것이 괴벨스의 계산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프리츠 랑은 조용히 독일을 빠져나와 도망쳤다. 정치 편에 서기 보다는 예술을 택한 것이다. 프리츠 랑의 망명은 독일영화뿐만 아니라 세계 영화사에서 새로운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장르의 기본 도형 만든 불후의 감독 프리츠 랑은 1890년 빈에서 태어나 1976년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할 때 까지 세계영화사와 맥을 같이한 인물이다. 1922년 독일 시나리오 작가 테아 폰 하르보와 결혼 후 독일 국적을 취득하고 베를린에서 활동한 것이 프리츠 랑과 관련된 전반기 영화사라면, 미국으로 망명한 후 1939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여 할리우드에서 활동한 것이 후반부에 속한다. 프리츠 랑의 망명은 개인적인 영화이력의 전환점이기도 하지만 좀 거칠게 표현해보자면 세계영화사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그 전환점의 시발이 망명이다. 지역적으로는 독일영화에서 미국영화에로의 전환, 영화사적으로는 초창기영화에서 현대영화에로의 발돋움이다. 오늘날 서스펜스영화나 SF영화 등 현대영화를 보면 각각의 출발점이 있는데, 프리츠 랑의 경우는 독일에서의 영화가 그 출발점이다. 오늘날의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할리우드로 대표되는 세계영화를 이해하기 위해-바이마르 공화국시절의 영화를 한번쯤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다.
프리츠 랑의 무성영화는 대부분 유토피아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를 내용으로 삼고 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강렬한 표현력을 동원하여 영상화하는 것이 특징이다. 유성영화는 일상생활이나 언론에 보도된 사건사고를 중심으로 개별인간들과 그들의 내적 움직임 추적에 중점을 두고 있다. 1927년 작 「메트로폴리스」와 1931년 작 「M」이 프리츠 랑의 무성영화와 유성영화의 대표작으로 독일은 물론 세계영화사에 이정표를 놓은 불후의 명작이다. 「메트로폴리스」는 독일표현주의 영화로 미래 대도시의 두 사회계층을 등장시키고 있다. 상류계층은 완전히 호화판에 살고 있다. 엘리트 젊은이들은 클럽에서, 운동장에서 젊음을 구가하며 영원을 즐기고 있다. 이와 반면에 노동자계층은 미래나 희망도 없이 지하에서 10시간씩 기계에 매달려 죽도록 일하고, 그들이 생산해낸 생산품은 그대로 부자들의 수입이 된다. 지상에서 아름답고 풍요롭게 놀고 즐기는 자들이 기계와 더불어, 아니 기계가 되어 두더지처럼 햇빛도 보지 못하고 일하는 하류계층의 노동의 대가를 흡혈귀처럼 빨아먹고 있다. 상류계층은 하류계층을 인간취급은커녕 기계처럼 부리고 대하는 것이 일상화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하류계층은 기계를 다루는 도구이고 생활을 보장하는 수입원일 뿐이다. 고층건물이 하늘을 찌르는 대도시에서의 정신적 삶은 상류층에만 허용된 유희일 뿐이다.
어두컴컴한 지하에 노동계층은 로봇의 무리가 돼 작업반장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작업을 교대하고 작업장에는 무자비하게 돌아가는 기계들이 인상적인 영화이다. 미치광이 과학자가 등장하는 최초의 SF영화이다. 당시로는 가장 비싼 제작비가 든 영화이기도 하다. 1927년 1월 2시간 반 상연시간으로 개봉했지만 비평가들에게는 낙제점을 받았고, 관객들에게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래서 그해 8월 2시간으로 줄여 다시 상영했다. 하지만 당시의 비평가나 관객들의 호응과는 상관없이 이 영화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영화사적인 작품이다. 이 영화를 좀 더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요소 중 표현주의 관점에서 영화를 들여다보기로 한다. 독일 표현주의영화는 후일 할리우드 영화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는 양적이나 질적으로 초창기 독일영화의 전성기였다. 독일영화가 전성기를 맞이한 이유 중의 하나는 독일영화가 문예사조인 독일표현주의 스타일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표현주의 스타일도 그렇고, 불안요소와 공포요소를 지니는 광신적인 영화가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느 문예사조나 마찬가지로 독일표현주의는 시대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새로 도래한 시대, 불안한 독일의 생활과 불투명한 독일 사회가 표현주의 태동의 원인이었다. 표현주의영화는 바로 광신적인 영화에 이러한 불안정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주제나 모티브로 선택하고 있다. 현실도피 현상도 영화에 나타나고 있다. 미국 공포영화에 영향 끼친 독일 표현주의 표현주의 영화는 불안, 사랑, 증오와 같은 근본적인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영상화 하고 있다. 그래서 내적으로는 최고의 미적 가치를 추구했고, 외적으로는 완벽한 스튜디오 세트를 갖추게 되었다. 표현주의 스타일은 극단적이고 불균형한 조명을 사용했고, 세트를 추상화하여 재현시켰으며 일상적이지 않은 카메라앵글을 사용했다. 이러한 표현주의 요소들이 1930년대 미국 ‘공포영화 (horror film)’와 1940-50년대 ‘누아르 영화(필름 누아르, Film noir)’의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메트로폴리스>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SF영화의 원조라는 사실이다. 완전히 산업화된 도시, 사이보그들(Cyborgs), 미친 과학자, 계층분할로써의 수직적 주택 분할, 컴퓨터, 전화설비 등이 내용적으로 SF영화임을 말해주고 있다.
파리로 도주한 프리츠 랑은 1934년 6월 유럽을 떠나 미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미국 영화사 메트로-골드윈-메이어(MGM)와 계약을 맺고 떠나는 길이었다. 계약을 주선한 미국 프로덕션회사의 부사장은 “독일은 손실을 보고, 미국은 이득을 얻었다”고 언론에 알렸다. 프리츠 랑은 망명객 신세이긴 했지만 절대로 주눅이 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외교관으로 미국에 가는 태도였다. 격식을 차리고 우아한 품위로 유머를 잃지 않았으며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했다. 고상함과 권위를 지켰다. 미국에 도착했지만 ‘american way of life’와는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미국인들이 내세우는 생활태도였다. MGM 내에서 오만하고 불손하다는 수군거림이 곧 사내에 퍼졌지만 관심 없는 일이었다. 프리츠 랑은 한마디 영어도 모르고 미국에 도착했다. 영어로 말하기를 주저하며 가끔 독일어 단어를 쓰며 너무나 큰 상처를 입었다. 영어 때문에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내가 독일을 그렇게 사랑했고, 나의 뿌리인 독일이 저쪽 저 멀리에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놀라왔고 가슴이 아팠다.
1936년 사회비판적인 작품 「격노(Fury)」를 발표하여 독일에서의 성공을 이어 나갔다. 독일 표현주의영화를 필름 누아르로 발전시킨 것이다. 1943년 작 「사형집행인 또한 죽는다(Hangmen Also Die)」 역시 이 계열 작품이다. 이 작품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와 공동 제작한 반 나치 영화이다. 프리츠 랑은 1936년에 이미 ‘반 나치 동맹’을 결성한 바가 있다. 필름 누아르 하면 「Scarlet Street」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프리츠 랑의 누아르에 출연하면서부터 명성을 얻은 갈색머리의 팜파탈로 고혹적이고도 섹시한 천진난만한 금발의 소녀 조안 베넷(Joan Bennett)가 출연하는 그 영화…. 서장원 독문학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