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금수사(金水寺)의 모든 것
금수사(金水寺)는 부산광역시 동구 초량4동 843번지 구계산(龜溪山)에 자리한 한국불교원효종의 본산이다.
금수사는 16세기 말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나고, 잡혀간 조선인 포로들의 귀환을 협상하기 위해 조정을 대표하여 사명(四溟, 1544~1610) 대사가 일본에 건너가게 되었다. 그 때 대사가 구계산에 하루를 머루르게 되었는데, 이곳의 물맛을 맛보고 주위를 둘러보고는 실로 수도할 만한 자리라고 감탄하였다. 이 때 대사를 따르던 한 제자가 그로부터 얼마 뒤 초암을 짓고 수도하니 이것이 바로 지금 금수사의 전신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인가 폐사 되어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는다.
근대에 들어와서의 역사는 「금수사사적비」를 통하여 어느 정도 자세히 알 수 있다. 1910년 전라남도 구례 화엄사의 동호수홍(東湖銖洪)스님이 이곳의 옛 사적을 추모하여 몇 동의 전각을 짓고 금수정사(金水精舍)라는 이름으로 중창하였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동호 스님의 제자인 석봉(石峰)스님이 1923년부터 주석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혜은(慧隱) 스님이 피난 와 이곳에 머물렀는데 함께 내려온 피난민 여러 세대가 금수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석봉 스님은 합천 해인사(海印寺)에 있던 법홍(法弘)스님에게 주지를 위임하였다. 법홍 주지는 피난민을 위하여 피난민 수용소를 절에 설치하여 이들이 안정되게 생활 할 수 있도록 했다. 1952년 대방(大房)을 중수하는 한편,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설호(雪?)강백을 초청하여 100일 화엄법회를 베풀었으니 부산 지역과 이곳에 피난 온 사람들의 고단함을 불법으로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게 되자 경내가 좁았으므로 교육청 소유 산림 12,000평을 불하 받고, 그 외에 주변지역 1,000여 평을 매입하여 지금과 같은 규모로 경내를 확장하였다. 이어서 노인들과 법랍이 높은 스님들을 위하여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개최하였다. 염불만일회란 반드시 법회를 통한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을 통해서라도 1만일 동안 매일같이 염불수행을 함으로써 극락정토 왕생을 발원하는 수련을 말한다. 이 염불만일회는 우리나라에서는 금강산 건봉사에서 처음 시행되었는데 금수사가 그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무렵 금수사에서는 출판을 통한 포교에도 적극적이었는데, 1957년 이종익(李鐘益)의 역사소설 『사명대사』를 출판하였고 1958년 잡지 『정토문화(淨土文化』를 발간하여 이후 16호까지 간행하였다.
1961년 대광명전을 완공하고 미타삼존상을 봉안하였으며, 1966년 무렵에 지금 종무소로 사용하는 불교회관을 지었다. 1966년에는 해인사 팔만 대장경을 인출(印出)하는 불사를 이루기도 하였다. 1971년에는 국토통일과 세계평화를 발원하여 일본에서 3,000근 무게의 범종을 만들어 금수사에 봉안하였다. 1981년 대광명전 안에 2,000불을 봉안하였으며, 1982년 불사리탑을 건립하고 1983년 청왕문을 지었다. 그 뒤 크고 작은 불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금수사에서는 손병희ㆍ한용운 선생 등 1919년 독립선언의 민족대표 33인과 안중근 의사, 김좌진 장군 등 애국지사 22인 등 모두 55인의 위패를 보안하고 이들을 위한 추모법회 및 수계법회를 매년 봉행하고 있다.
금수사에 민족대표와 애국지사의 위패가 봉안된 것은 법홍 스님이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초대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박사와 맺은 인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이 금수사는 한국전쟁 때 피난민들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는 등 도움을 주면서 이름이 알려졌고, 이시영 박사가 법홍스님을 만나 애국지사의 위패를 모셔달라고 간곡한 부탁을 했던 것이다. 또한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일본군과 벌인 청산리 전투의 영웅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환 전 국회의원이 김 장군의 제사와 위패를 모셔줄 것을 부탁했고, 법홍 스님은 이때부터 항일운동으로 순국한 윤봉길ㆍ안창호ㆍ안중근 의사 등 애국독립지사 22인의 위패를 모시기 시작했다.
- 방문중에 마침 대불사 공사를 하고 있어 입구부터 매우 어수선 하였음-
■ 주요인물
●법홍스님
서울에서 태어난 법홍(法弘, 1915~2003) 스님은 안양 삼막사에서 출가, 1930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운학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1935년 영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1936년 건봉사에서 대교과를, 1940년 일본 동경 입정(立正)대학 종교과를 수료했다. 1950년 한국전쟁 중에는 해인사 원주로 있으면서 북한군이 시도한 팔만대장경 반출을 끝까지 수호하였다. 1951년부터 금수사에 주석하였으며, 1962년 원효종 초대 총무원장, 1976년 일본 보림사 주지, 1997년부터 입적 때까지 원효종 제2대 종정을 맡았다. 53세의 나이에 일본에서 천태종 전교대사 밀교수행을 120일 간 마친 후, 2년 뒤 다시 100일간 하루도 빠짐없이 280군대의 절과 불상을 참배한 회수봉행을 마쳐 일본 불교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금수사 조실로 있으면서 노구에도 불구하고 시자를 두지 않고 손수 빨래를 하는 등 청정 계행을 지켜왔다. 해동율맥 제10대 율사로, 2001년 담양 용화사에서 열린 율맥전수식을 위해 대전 보문사에서 100일 묵언수행을 마친 뒤 11대 율사 수진 스님에게 금란가사ㆍ의발ㆍ불자(拂子) 등을 전수하였다.
2003년 4월 10일 열반에 든 뒤 금수사에서 영결식을 하고 통도사에서 다비식을 거행하였다.
■성보문화재
금수사의 가람구성은 금당인 대광명전을 중심으로 대웅전과 삼성전ㆍ종각ㆍ청왕문ㆍ일주문, 그리고 요사인 관음전과 불교회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경내 입구 일주문에서 계단을 올라오면 석조 지장보살입상이 참배객을 맞이하며, 천왕문에 들어가기 전 오른쪽 산허리에 부도와 부도 탑, 그리고 비석 등이 가지런히 모아져 있다.
■ 대광명전
팔작지붕에 앞면 5칸, 옆면 3칸의 규모로 1961년에 지었다. 안에는 금동 아미타여래좌상과 관음ㆍ세지보살좌상이 보안되어 있다. 탱화로는 1962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으며, 불단 주위로 여러 소불상들이 봉안되어 있다.
- 대광명전-
●대웅전
천왕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있는 전각으로 시멘트에 기와를 얹은 건물이다.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석가여래좌상과 관음ㆍ지장보살 좌상, 근래에 조성한 후불탱이 봉안되어 있다. 그리고 1985년에 조성한 동종과 금고(金鼓)가 있는데, 금고는 1919년 동호 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조성한 것이다. 또한 불단 오른쪽 벽면에는 동호 스님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다.
●삼성전
대광명전 오른쪽에 자리하여 시멘트에 기와지붕을 얹었다. 안에는 최근에 조성한 금동 치성광여래좌상과 좌우 협시로 일광ㆍ월광보살을 봉안하였으며, 그밖에 여래좌상과 지장보살상, 그리고 독성각이 있다. 탱화로는 후불탱을 비롯해서 산신탱과 독성탱, 그리고 조사 진영이 있다.
-삼성전-
●보도 및 비석
천왕문 들어서기 전 오른쪽에 부도와 부도탑비, 그리고 비석 등이 모아져 있다. 부도는 묵담(?潭) 스님의 것이고, 비석으로 「금수사사적비」(1971), 「금수사범종불사시주절」(1971년), 「석존사리탑건립비」(1983), 「묵담당사리탑비」(1987년) 등이 있다.
이곳에는 부도와 비석 외에 가장 위쪽에 원효 스님의 동상이 서 있고, 그 밖에 석조 여래좌상, 1982년에 세운 불사리탑 등이 있다. 불사리탑은 1978년 법홍 스님이 석가부처님의 열반지인 인도 구시라 사원의 마하산타 스님에게서 기증 받은 진신사라 1과와 상아로 만든 불상 1위를 봉안하고 있다.
-석등-
-석탑-
-종각(공사로 인하여 사찰분위기가 어수선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