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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 목장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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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개인이 소유한 마필을 제외한 국영 목장의 마필 상황을 살펴보면 <연산일기(연산 8년)>에는 3만필, <성종실록(중종 17년)>에는 2만필, 1678년(숙종) <목장도>에서는 2만213필로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았을 때 전국 목장의 마필수는 점차 감소되기는 했으나, 전국적인 상황에서는 상당히 많은 마필수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부터는 전국의 마필수가 급감(急減)하게 된다. 이것은 사회경제적 상황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효종이후 국방력 강화와 관련하여 피폐한 목장에 대한 관리를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목장이 회복되어 가기는 했으나 조선후기 삼정(三政)의 문란과 지방관의 부정부패 등으로 제 기능을 하기에는 부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상황은 사복시에서 국왕에게 보고된 <일성록>의 자료를 바탕으로 1792년에서 1892년까지 100년간의 전국목장의 마필관리 상황을 살펴보면 각 읍에 분양하여 말을 관리하게 했던 ‘분양마(分養馬)’ 제도는 1796년에 최대 269필이었으나 이후 감소를 하다가 1807년에 10필로 굳어지며 이후 4필로 줄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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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승지도상의 울산부 |
반면, 1807년 이후에는 각 읍의 분양마 제도는 전국 국영 목장 가운데 남양목장과 인천목장만이 분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각 지방의 분양마는 1807년 이후는 거의 없어지게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각 지방 목장에서 중앙의 사복시에 올린 봉진마(封進馬)는 100년간 보고가 기록된 56회의 총합계는 2492필이었다.
이것을 평균하면 44.5필로 해마다 전국의 각 목장에서 봉진한 마필 수는 모두 44.5필 정도의 봉진마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해마다 태어난 말의 총수 즉, ‘생마(生馬)’는 보고된 48회의 총합계는 4만5274필이었다. 이것을 평균하면 943.2필로 해마다 전국의 각 목장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말의 총 숫자는 943필 정도였다.
말의 무역과 관련해서는 평안도 철산·선천의 3개 목장에서 ‘달종마(撻種馬)’라는 말을 무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1798년 25필과 1799년 암말 20필과 수말 5필로 합계 25필, 두 차례 동안 총 50필의 말을 무역한 기록이 보인다.
이것은 조선초기의 수 만필의 마필을 수출하였던 것에 비하면 너무 적은 숫자이다. <일성록>과 <승정원일기> 등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1798년 이전까지의 말의 무역에 관한 기록은 찾지 못했으나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1873년 10필을 수출했을 것으로 보이나, 일반적으로 1799년 이후에는 말을 공식적으로 무역하는 것은 흔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양란 이후에 말의 품질을 향상시키기 위한 종마(種馬)는 함경도의 온성목장에서 해마다 2필씩의 ‘취종마(取種馬)’를 구했다. 시기적으로는 1799년부터 1821년까지 22년간의 기록만이 나타나고 그 이전과 이후의 기록은 찾지를 못했다.
마필의 증가와 관련하여서는 1795년 전국의 총 마필수는 6876필이었다. 그 후 해마다 조금씩의 증가를 보여 1858년 이후부터 1만필을 넘게 되었다. 그리고 1868년이 되면 최대 1만4129필이 된다.
그러나 이후 1868년과 1870년 사이에 전국의 국영 목장 중에서 급격한 마필의 감소를 겪게 되는 목장들이 있었다. 평안도의 ‘철산·선천목장’의 3개의 목장은 선사포 첨사가 겸감목관을 하는 곳으로 <일성록>의 기록에 의하면 철산·선천목장은 1868년도에 새로 태어난 말이 318필이고, 전년도의 마필수를 포함한 총 740필에서 중앙으로 올려 보낸 봉진마 3필, 사고나 기타 이유로 없어진 고실마(故失馬) 5필을 제외한 실제로 방목한 총 마필수는 7732필이었다. 그런데 이듬해인 1869년에 7306필의 말이 다치거나 쓸모가 없어진 흠축마(欠縮馬)로 분류하면서 그 해에 실제로 방목한 마필수를 435필로 보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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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성록에 기록된 1868년(사진 위)과 1870년 울산목장의 마필상황. |
조선시대에 목장의 마필 관리와 관련해서는 매우 엄격해 당시 전국의 모든 목장에서는 연간 흠축마가 거의 생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상황임을 고려해 볼 때 너무나 특이한 일이다. 이는 몇 년간의 기록을 빼고는 100년간의 전국의 목장에서 발생한 흠축마보다 훨씬 많은 숫자이다. 이는 단위 목장의 상황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은 급격한 마필감소와 관련, 해당 목장의 감목관은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철산·선천목장의 겸감목관선사포첨사였던 박원식은 1870년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으며 처벌을 받는 등의 특별한 기록은 없었다.
1870년에는 경상도의 동래목장과 경기도의 강화도 목장과 장봉도 목장이 급격한 마필수의 감소를 보이고 있다. 당시 경상도의 동래목장의 겸감목관 다대포첨사였던 류정노와 경기의 강화겸감목관초지첨사였던 명석준, 그리고 장봉도 겸감목관장봉별장 장도환의 경우도 특별한 처벌을 받지 않았다.
1870년 동래목장의 겸감목관 다대포첨사는 당시 1103필이었던 말을 한 해에 무려 89.4%인 975필의 유실(遺失) 하고, 11필을 고실(故失)해 111필의 마필만을 목장 내에 방목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강화목장도 945필의 말에서 44%인 398필을 유실하고 7필을 고실해 540필만 목장 내에서 방목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장봉목장 역시 목장의 261필의 말에서 무려 89%인 233필의 말을 유실해 33필의 말만 방목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역시 처벌은 받지 않은 것을 확인됐다.
이같은 상황은 당시의 기후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지만 몇 목장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따라서 당시 중앙과 해당 지방 감목관과의 유착관계 등 정치적인 부분과 지방 민란 등과의 연관성 등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울산 목장의 경우도 급격한 마필수의 감소를 보인 해가 있었다. 울산 목장은 시기적으로 다른 지역 목장과는 달리 1809년에 한 차례 있었고, 1861년에서 1864년 무렵에도 갑자기 마필수가 급감하게 된다.
<일성록>의 기록에 의하면 1809년 실제 목장에 방목한 마필수는 1285필이었으나 그 해에 475필이 급감, 실제 방목한 마필수는 810필에 불과했다. 감목관의 처벌이나 기타 그렇게 줄어들게 된 이유에 대한 기록도 없다.
울산 목장의 마필수는 이후 꾸준히 증가하다가 1861년 1450필로 최고의 마필을 보유하게 됐다. 1862~63년에 대한 마필수 기록은 없다. 이는 해마다 사복시에 보고되는 상황으로 볼 때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이후 1864년의 기록에 의하면 59.5%에 해당하는 863필이 갑자기 급감, 실제 방목한 마필수는 587필로 줄어들게됐다.
이는 시기적으로 살펴볼 때 당시 울산 민란과의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다. 앞으로 울산을 비롯한 전국 목장의 마필수의 감소 등과 관련해 지방과 중앙 및 사회·정치·경제적인 측면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