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 박주병
울적할 때면 나는 가끔 피아노 앞에 앉는다. 밤이 깊었는지 골목이 죽은 듯이 적적하다. 창밖엔 반나마 고사한 늙은 장미가 겨우 꽃송이 여남은 개를 달고 있더니 다 지고 없다. 그나마 내년에는 꽃이 필지 안 필지도 모르겠다. 장미는 다 죽으려 하고 이 봄 또한 다 가려 하는데 그리움은 아득하고 봄밤은 저 홀로 깊어 간다. 나는 건반에 엎드려 실없이 운다. 문득 떠오르는 고인의 시 한 토막이 먼 산울림처럼 들리는 것 같다.
꽃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花落春仍在)
청대의 유월(兪斧)이 서른 살 때 복시(覆試)에서 써 낸 시의 첫 구라고 한다. 이 첫 구에 놀란 증국번(曾國藩)이라는 시험관[閱卷官]이 유월의 시를 복시 으뜸으로 올려놓았다.
자기가 지은 시가 우연히 자신의 미래를 예언한 것과 같이 되는 일을 시참(詩讖)이라 한다는데 출세작이라 할 유월의 이 시가 그러했다. 유월은 일흔이 넘어서 왕염손(王念孫) 왕인지(王引之) 부자의 고거학적(考據學的)인 학문 방법에 심취하게 되어 지난날 쌓아 온 자신의 학문을 반성하게 되었지만 그들과 같은 학문 방법으로 새 출발을 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심히 낙심했다. 이를 지켜본 친구 하나가 복시 때 써 낸 유월의 이 시구를 상기시키며 격려했다. 유월은 잠에서 깨어난 듯 발연히 일어나 여든여섯 살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씨 부자의 고거학적 방법에 경도하여 절차탁마(切磋琢磨), 괄구마광(括垢磨光) 끝에 드디어 도저한 학문을 이루었다. “꽃은 떨어져도 봄은 그대로 있다.”라는 그의 시어처럼 된 거다. 이 시를 끌어다가 자신의 서재 이름을 봄이 있는 집이란 뜻으로 ‘春在堂’(춘재당)이라 했다.
춘재당 서재에 가득히 쌓였을 그가 지은 많은 서책들을 내가 어찌 다 알겠는가만은 그의 『周易互體證』(주역호체증)이란 책을 펼쳤을 때 나는 너무 반가워 옛날 이덕무의 「간서치전」(看書痴傳)에 나오는 '간서치'처럼 방 안을 왔다갔다했다. 이 책 하나만으로도 적적한 나의 서재에 한 가닥 봄기운을 느낀다.
봄밤에 나는 흔히 턴테이블에 LP 음반을 건다.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듣는다. 볼륨을 적당히 올려놓고 담 밖에 나가서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우리집이, 낡았지만 그래서 나는 좋다. 오늘 밤은 어설프게나마 가곡 ‘봄처녀’를 연주해 본다.
*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간서치전」(看書癡傳)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심오한 경지를 만나면 기쁘기 그지없어 일어나서 돌아다닌다.”(得其深奧 喜甚 起而周旋) // 요즘 한다하는 어느 대학교수가 이덕무와 같은 말을 하는 걸 보고 우연의 일치겠지 하면서도 웃음을 참지 못했는데 어느 수필 쓰는 여성이 이 교수의 이 표현에 정신을 못 차리는 꼴을 보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떤 평론가는 소월의 「찔레꽃」을 고려가사 「가시리」의 상의 표절이라고 한단 말을 대구의 어느 원로시인한테서 들었던 게 생각나서 또 한 번 쓸쓸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