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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인도의 스님 광유가 세워 임정사라 불렀고, 그 뒤 원효대사가 새롭게 고쳐 지어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절은 천년에 한번 핀다는 한약초 ‘우담바라’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한 곳이다.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되고 있다.
기림사 함월산은 달을 머금은 산이다. 월성. 월지. 단석산(월생산) 경주 지명에는 月자가 많다.
기림사의 이름 유래 석가모니 생전에 인도 왕사성에 급 고독 장자가(급고독이란 뜻은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 준 사람이 란 뜻) 기타 태자의 땅에 부처님을 위한 절을 처음 세웠는데 그것이 기원정사다.
기원정사의 숲이 기림 기림사를 처음 세운 광유스님은 과거에 왕이었는데 왕위를 버리고 왕비와 함께 출가해 나중에는 왕비까지 종으로 팔아넘기고 수행자의 길로 접어들어 도를 구한다. (기록에 나와 있는 것으로는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어 이절 뒤편의 시냇가에서 머물렀다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신문왕 이전에 이절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 기슭에 있는 기림사는 선덕여왕 12년 643년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라 부르던 것을 뒤에 원효가 중창하여 머물면서 기림사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기림사란 부처님 생존 때에 세워졌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즉, 석가모니가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승원 중에서 첫손에 꼽히는 것이 죽림정사와 기원정사이다.
특히 기원정사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가 20년 넘게 머무른 곳이다.
이와 더불어 불자들의 수행도 점차유랑 위주에서 정착 위주로 바뀌었고 정사도 점차 수를 늘리게 된다 . 그 기원정사의 숲을 기림이라고 하는데 함월산의 기림사는 그런 연유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기림사는 오정수(五井水)가 유명하다.
오미정수(다섯가지 맛을 내는 물) 명안수( 천왕문 앞) : 천왕문 밖 절 초입의 명안수는 기골이 장대해지고 눈이 맑아지며 오탁수(천왕문 안) : 물맛이 좋아 날아가는 까마귀도 마시고 간다. 장군수(3층석탑곁) : 이 물을 마시면 힘이 세져서 장군이 된다 (변방에서 장군이 나면 역적밖에 안된다고 샘을 묻어버렸다고 한다) 화정수 :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물 감로수(북암) : 하늘에서 내려온 단 이슬같이 물맛이 좋다.
장군수 = 장군수는 기개가 지고 신체가 웅장해져 장군을 낸다는 물이고, 마시면 힘이 용 솟음 친다 하여 인근에 널리 알려졌는데 조선 시대 어떤 사람이 이곳에서 역적모이를 하다가 발각되니 그 뒤 나라에서 샘을 메워 버렸다고 한다. 장군의 출현을 두려워한 일본인들이 막아버렸다
진남루(鎭南樓) 이 건물의 기능이나 용도 및 건립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진남루란 명칭은 "사적지(寺蹟記)"에 의하면 "무량수전야차유진남루(無量壽殿也叉有鎭南樓)" 라 하여 위치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다.
임란(壬亂)때 기림사가 수군과 승병활동의 근거지로 활용되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할 뿐이다. 정면 7칸, 측면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면 `사람 인(人)` 모양의 맞배지붕이다.
일반적으로 누(樓)라고 하면 중층건물이나 다락집의 형상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형태를 벗어나 있다.
전통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고 판벽에 창호를 설치하였으나 현재 사용용도가 바뀌게 되면서 창호가 개체되어 원형을 알 수 없다.
정면이 긴 건물에서 목조구조의 허약성을 보완하는 구조 수법이 돋보이는 건축이다.
맞배지붕
기림사삼층석탑(祇林寺三層石塔) 시도유형문화재 제205호 (경주시)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석탑으로, 전체적인 모습이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 있다.
현재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 있고, 위층 기단은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놓았다.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도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고 네 귀퉁이에서 약간 위로 올라가 있으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복발(覆鉢:엎은 그릇모양의 장식), 앙화(仰花:활짝 핀 연꽃모양의 장식)로
이루어진 머리장식이 완전한 형태로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의 일반적인 석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 기둥 조각이 2개에서 1개로 줄어들고,
지붕돌받침이 4단인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것으로 보인다.
대적광전 : 보물 833 기림사 대적광전에 봉안되어 있는 소조비로자나 삼존불상으로 삼신불이다. (삼신불 : 보물 958) 중앙에 비로자나불, 좌우에 각각 노사나불과 석가불이 배치된 형식이다.
바랜단청은 오랜 역사를 말한다.
다포 양식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 12년(643)에 처음 건립된 것으로 전한다. 그 후 조선 인조(仁祖) 7년(1629) 에 크게 중수하였다.
또한 정조(正祖) 17년(1793) 경주부윤 김광묵이 재물을 내서 불사를 일으키고 동종(銅鐘)도 조성하였다. 철종 13년(1862)에 큰불이 나서 경내 113칸의 건물과 동종도 소실되었다.
그러나 대적광전만은 화를 면하였고, 1878년과 1905년에도 보수하였다.
건물의 정면이 5칸, 측면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단층 맞배지붕으로 다포식(多包式)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겉모양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 있는 분위기를 자아재고 있다.
이 건물은 산사(山寺)의 건물들이 주칸은 좁고 지둥은 높은 성향을 지닌 것과는 구별된다.
견실한 구조와 장엄한 공간구성이 돋보이며 옛 모습을 보존한 조선후기의 대표적 불전 가운데 하나이다.
대적광전 솟을금강저꽃살문 솟을매화꽃살문
대적광전 솟을매화꽃살문
관음전 주련 백의관음무설설(白衣觀音無說說 ) 백의관음 말없이 말씀하시고 남순동자불문문(南巡童子不聞聞 ) 남순동자 들음 없이 들으시네. 병상녹양삼제하(甁上綠楊三際夏) 화병 위의 푸른 버들 늘 여름이요 암전취죽시방춘(巖前翠竹十方春) 바위 앞에 남색 대나무는 봄을 알리네.
백의관음은 여섯 관세음보살님 중 한 분으로 성관음이라고도 한다.
하얀 옷을 걸치고 계신 모습으로 우리가 대부분 인식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의 관세음보살님이시다.
관세음보살님은 그런 성스러운 모습으로 해안의 외딴 섬에 계시면서 말씀 없이 설법하고 계시는데, 오른손에 꽃병을 들고 계시고 그 꽃병에는 항상 푸른 버들가지가 꽂혀 있으며
왼쪽으로 있는 기암괴석의 앞에 비취빛의 대나무 역시 항상 푸른 모습으로 있으며, 좌보처로 남순동자가 우보처로 해상용왕이 항상 좌우에서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있다.
관세음보살님께서는 바닷가의 외로운 섬에 계시면서 항상 말씀 없이 온화한 미소를 띠고 계시지만, 말씀 없는 가운데 항상 푸른 버들잎과 대나무를 통하여 법문하고 계시며,
남순동자는 그 법문을 들음 없는 가운데서도 잘 듣고서 관세음보살님의 뜻을 잘 받들고 있으므로, 그와 같은 관세음보살님의 깊은 뜻이 가슴깊이 사무쳐서 한맘으로 돌아가 의지해 절하는 것이다.
천수천안관세음보살
삼천불전 (과거천불, 현재천불, 미래천불) 삼천불전 마당에 있는 샘이 오정수 중에 하나 남아있는 화정수(마음을 맑게하는 물)이다
삼천불전 양쪽끝 문살 날살문?
명부전
범종루
기림사 건칠보살좌상(祇林寺乾漆菩薩坐像) 보물 제415호 -사진. 문화재청
경상북도 월성군 양북면의 기림사에 모셔진 조선시대 건칠보살좌상이다.
건칠불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낸 불상을 말하는데,
우리나라에는 남아 있는 예가 매우 적어 이 불상의 가치가 더욱 크다.
타래머리 위에 보관(寶冠)을 따로 만들어 올렸으며 관 표면에는 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져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눈·코·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보살상의 특징있는 얼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양 어깨에는 천의(天衣)를 걸치고 있으며, 목에는 3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 있는 독특한 띠매듭은 조선시대에 나무로 만든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왼손은 대좌(臺座)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半跏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이런 자세로 보아 관음보살을 형상화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반적으로 얼굴 모습이나 체구는 비만한 편이나 손과 발이 작게 만들어져 비례감이 떨어진다.
보살상의 대좌에 홍치(弘治) 14년(연산군 7년, 1501)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유례가 드문 건칠불이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림사사적비
10호차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 성지순례 즐겁게 잘 다녀왔습니다. 고맙습니다_()()()_
정목스님/산빛 물든 노래-진흙속의 연꽃
성불합시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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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현진 스님이 동참 하셨군요 구경 잘 하고 갑니다 ,,,,,
꼼꼼하게 잘를 찾아 올리셨군요. 구석구석 따라 함께 순례한 느낌입니다. 나무관세음보살!
구석구석에 눈길을 주었고, 상세한 설명에 고마움을 느낍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공부 잘 했습니다. 사진 한장 감사히 모셔 갑니다. _()_
잘 보구 갑니다. 저두 갔었는데 사진으로 다시 볼 수 있어 좋네요! 어찌어찌 건칠관세음보살좌상은 못뵙구 왔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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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봤지만 제대로 못보고 왔나봐요 새롭네요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