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나 기뻐합니다.
여호와이레, 여호와이레
주님 내 길 예비하시니 여호와이레
나는 탈북하였으나 인권과 신앙의 자유가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12년간 다시 광야
를 헤메게 되었습니다. 내 몸이 자유로울 때나 갇혔을 때나 이 찬송을 즐겨 불렀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는 누가 들을새라 입속으로 조용히 불렀습니다. 많은 수용자들이 절망에
빠져 죽음을 기다리는 때에도 이 찬송을 부르면 주님의 빛이 내 맘을 비추시는 것 같아
마음이 밝아지고 즐거웠습니다. 비록 철창에 갇힌 몸이었으나 내 마음은 자유했습니다.
무시무시한 고난의 뒤편에 주님이 예비하신 크고도 놀라운 축복을 믿고 바라보았기에 원
망과 불평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들을 수없이 넘고 넘었으나 그때마다 기도와 찬송, 말씀 묵상이
나의 무기가 되어주었습니다. 지난날 나의 삶 속에서 고난은 축복의 통로였습니다. 고난
도 축복도 모두“여호와이레”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시편 119편 71절“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
우게 되었나이다”다윗의 이 고백은 나의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
님을 경외하는 자를 천사들이 둘러 진치고 보호하게 하십니다.
내가 1998년, 8월 처음으로 탈북하여 어린 딸을 어느 교회에 맡겨놓고 흑룡강성 호림
시 어느 시골로 일하러 가던 때의 일입니다. 그곳은 러시아 국경지대여서 국경경비대의
조사가 심한 곳 이었으나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떠났습니다. 목단강역에서 오후 4시
30분에 떠난 열차는 새벽 3시에 호림역에 도착하였고 역 대합실에서 시간을 보낸 우리는
버스역에 가서 목적지까지 가는 버스표를 사려 했으나 한족 매표원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 우리에게 화를 내며 표를 주었습니다. 8시 10분
차를 타려 하는데 차장이 우리를 못타게 했습니다. 지나가던 조선족 청년이 우리를 보고
와서 도와줬는데 알고 보니 우리의 표는 오후 2시 10분표 였습니다. 매표원 처녀가 너무
원망스러웠습니다. 차를 기다리며 공안이 지나갈 때마다 불안했습니다. 오후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듣게 된 이야기는 우리를 놀라게 했습니다. 얘기인 즉슨“8시 10분의 그 차는
대로를 달리는 차인데 오는 길에 국경경비대 초소 검문을 받는 차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탄 2시 10분 차는 마을버스여서 농촌마을을 다 돌아오다 보니 검문을 피할 수 있
었던것이었습니다. 조선속담에“화가복이된다”라는말이있지만,“ 여호와이레”의하
나님께서 안전한 길을 예비하시고 인도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조선족 청년과 함께 여러가지 힘든 일에 내몰렸고 봄과 가을에는 30-40명의
밥을 하루3-4끼씩 해야 했습니다. 너무 바빴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성경을 읽고 쓰기 시
작했습니다. 일꾼들의 대부분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내가 예수를 믿는다며 존경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20-30일씩 일을 하고 떠났는데 떠날 때는 내가 불쌍하다고
자기 집에 놀러오라고 놀러오면 맛있는 음식들을 대접하겠다는 말을 해주기도 했습니다.
말은 안 통하지만 나는 그들을 열심히 전도하였고 그들 중 교회에 나가겠다고 약속한 사
람도 있습니다.
겨울이면 벽은 하얗게 얼어붙어 추워서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조선족 관리인은 우리
가 북한사람이라고 업신여겼습니다. 더럽고 힘든 일은 모두 우리에게 시켰고 3형제의 집
안일도 시켰습니다. 겨울이면 몇천 원씩 도박에 쓰면서도 우리의 품삯은 주지 않았습니
다. 조선족 청년은 우리에게 도망치라고 했으나 시내까지는 수백 리나 떨어져있고 길도
외길이라 도망갈 엄두도 못 내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보
러 도망가라던 그 청년이 패혈증에 걸리게 되었는데 우리의 기도로 치유되는 역사가 일
어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뒤로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는 형제가 되었
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어 우리는 그 청년이 떠나는 날 함께 도망칠 수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영원히 주님 앞에 정직하게 살 것을 다짐하며 시내에서 헤어졌습
니다.
우리가 도망 나올 때 다행히도 내 아들이 받은 800원이 있었는데 목단강에 도착했을
때 만난 문연선 선교사님에게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감격에 우리는 눈
물을 흘리고 또 흘렸습니다. 그리고 순교한 나의 남편이 이전에 몇 시간씩 기도했다던 그
곳에서 또 오랫동안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경말씀을 배우고 싶다고, 남편이 하지 못
한 일을 내가 하고 싶다고 날마다 기도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선교사님이 나를 탈북자들이 모인 신학교로 데려가셨습니다. 단속이
심한 시절이라 추울 때나 더울 때나 잠잘 때도 항상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고 보
초서는 사람이 신호하면 뒤도 안돌아보고 벌판으로 내달렸습니다. 그래도 예배하고 새로
운 찬송을 배우며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거기서 만났던 한 탈북자는 북한의 보위부 출신이었는데 어린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
고 부인과 함께 도망 다니느라 많이 지쳐 있었습니다. 그는 연길시 농촌교회에서 한국 선
교사님들과 며칠간 함께 지내다가 누군가가 신고하여 잡히게 된 상황에서 기적적으로 탈
출한 이야기를 하며 성경과 함께하면 주님이 지켜주신다고 간증하였습니다. 만약 보위부
였던 그가 북송된다면 그의 처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주요 수배대상이었는데 그 후로 어찌되었는지 아직도 소식을 모
릅니다.
우리는 좀 더 안전한 곳을 찾아 흑룡강성 영안시에 있는 가정교회로 옮겼습니다. 그곳
에서는 매일 밤 제주극동방송을 들었고 새벽 5시와 저녁 7시에 예배를 드렸으며 낮에는
한국 목사님들의 설교테이프를 들으며 쓰기도 했고 그 중간중간에는 여전도사님의 설교
를 들었습니다. 안전한 곳이라고는 하나 한 달 중 며칠은 공안이 호구조사를 하러 왔습
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급작스럽게 공안이 들이닥쳤습니다. 숨을 곳이 없어 두근거리는 마음
을 기도로 억제하며 그대로 앉아있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나와 아들은 상을 마주하고 성
경을 읽던 중 이었습니다. 전도사님과 경찰이 함께 들어왔고 내가 읽던 성경을 보자고 했
습니다. 뒷면에 한문으로“대경”이라고 써있는 출판사 이름을 보더니 신분증도 보자고
하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는 것 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2000년 1월초 한국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포항시 주찬양교회의 이
찬양 목사님과 강집사님을 보내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늘 암송하며 기도하던 시편 42편
1절“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
이다”의 응답이었습니다. 평소에‘남조선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겼을까?’하고 궁금했
었는데 만나고 보니 역시 한민족 이었습니다. 그 선교사님도‘북한 사람은 어떻게 생겼
을까?’하고 궁금했는데 우리는 역시 한민족이라며 함께 웃었습니다. 처음 선교사님들을
보는 순간 천사를 만난 것 같은 마음이 들고 마음엔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1주일간 그분
들이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하려 동북삼성에서 집사, 권사, 전도사님들이 60-70명 모였
고 매일 은혜가 넘쳤습니다. 하루 6-7시간씩 설교를 들어도 피곤하지 않았으며 선교사
님들은 가져오신 선물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겨울옷이 없던 나에게 내복과 솜옷을 사주셨는데 많이 주시고도 더 베풀지 못해 아쉬
워하는 선교사님들은 진정 주님을 따르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옷은 얼마 후 중국으로 팔
려와 아기를 갓낳은 18세의 소녀에게 주었는데 그 여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받는 복
보다 주는 복이 크다는 말씀을 깨달았고 우리에게 베풀면서도 기뻐하던 선교사님들의 마
음을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