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평>, 2007년 겨울호.
■ 자료 발굴
김병욱과 김수영 /맹문재
바람
김병욱(金秉旭)
피 먹은 하늘에서 바람이 쏟아지고
쏟아지는 바람 속에 하늘은 자꾸 멀어진다
까마귀가 떨어져 왔다
거리와 거리 처마 처마가
모래 속에 묻혀갔다
헤아릴 수 없는 애증이여
밤이 등불을 헤쳐 내리듯이
모든 자본이여 이윤이여
내일 아침에는 전파(電波)가 나를 잡을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층계로 올라가리
나는 저 붉은 건축의 붉은 층계를 올라가리
정력학상(靜力學上)의 음악
끝임 없는 낙하에
내 주검이 층계 위에 쓰러질 것을 아리라
또다시 먼 내일이 오면
사람들아 연기와 같은 피를 토하면서
검은 벽에서 검은 창문으로 나아가거라
오 소리 없는 세월
도시를 묻은 사막으로
이지러진 목숨의 기억으로
발자국 소리 여름처럼 멀다
모래 위에 여름이 올게다
그 곁에 바람이 죽을게다
―(『신시론』 제1집, 1948. 4)
김병욱은 한국 시단에서 오랫동안 묻힌 시인이지만 김수영의 초기 시에 영향을 끼쳤기에 주목할 존재이다. 김수영의 산문 「연극을 하다가 시로 전향」을 보면 그 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병욱은 대구에서 올라오기만 하면 나를 찾아왔고 기식하고 있는 나의 또 기식자가 되었다.
그는 현대시를 쓰려면 우선 육체의 단련부터 필요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권투를 가르쳐 주려고까지 했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인간적으로 가까운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김병욱은 김수영의 시세계에 대한 든든한 지지자였다. 이는 김수영이 치질수술을 하고 방에 누워서 벽지에 써놓은 자신의 「아메리카 타임지」를 쳐다보고 있을 때 “병욱이가 어느 날 찾아와서 이 시를 보고 놀라운 작품이라고 하면서 村野四郞에게 보내서 일본 시잡지에 발표하자고까지 칭찬해주었다. (…중략…) 나는 그의 말을 듣고 눈물이 날 지경으로 감격했”다거나, 「거리」에 대해서 “병욱은 이 시를 읽고 이런 작품을 열편만 쓰면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기반을 가질 수 있다고 격려해주었다”고 토로한 데서 확인된다.
김병욱의 격려와 지지는 특히 경쟁관계에 있던 박인환이 ‘마리서사’를 근거지로 시단의 주도권을 형성해가는 상황이어서 김수영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그리하여 김수영은 「거대한 뿌리」에서도 김병욱의 존재를 높게 인식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 김수영, 「거대한 뿌리」 부분
김병욱은 식민지 시대의 제철소 노동자로서 일본 대학을 다닐 정도로 정신력이 강했고, 자신의 앉음새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지키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주체성이 강했다. 김수영은 그와 같은 김병욱에 비해 확고하지 못한 자신의 세계관을 반성한 것이다.
김병욱은 “또다시 먼 내일이 오면/사람들아 연기와 같은 피를 토하면서/검은 벽에서 검은 창문으로 나아가거라”(「바람」)라고 외친 데서 볼 수 있듯이, 해방기의 모더니즘 시인 중에서 문학의 정치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향했다. 그리하여 이미지의 구상을 통해 시의 예술성을 지향한 ‘신시론’의 동인 김경린과 헤게모니 논쟁을 벌인 뒤 김경희와 함께 탈퇴해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다.
김병욱은 대구 출신인데 출생 시기는 알 수 없다. 일본 게이오대학을 졸업했고, 일본 모더니즘 시운동 그룹 중 사회의식이 강했던 ‘신영토(新領土)’와 ‘사계(四季)’의 동인으로 활약했으며, 해방 후에는 신시론 동인과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다. 한국전쟁 중 월북해 주로 번역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