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창권
블랙보드 외 1편
먼지를 북북 지운다,
더부룩한 면지에 흰 더께가 두툼하다,
결핵 같은 기침을 해 댄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공소 시효가 끝난 것처럼
그리움에 부대끼던 그 사람이 모른 척한다,
지우고 난 뒤의 평면은 새카맣거나 하얗다,
지우개 두 개가
서로 뺨을 치듯 부딪칠 때
지워진 것들이 만든 굵은 가루 분이 날아든다,
겉으로 보기에 순한 것도
내심 깔아뭉개고 싶은 행적이 남는 것처럼
손길이 부욱 지나간 자리에 긴 선로의 행간이 그어진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고장에서
아픈 사람과 빚을 낸 사람이 날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감당하거나 벌충할 수 없는
햇빛이 칠판 위에서 머물다 가곤 했다,
하얗게 눌러 써 봐도 신호가 닿지 않은
캄캄한 나의 바닥인,
칠갑의 심연에 빠져서라도
한 줄 꼬리를 남긴 너를 찾아서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신기루처럼,
아직 나, 여기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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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되지 못한 감정
1.
검은 우산이 접힌 새 날개처럼
출입구에 눕혀 있다, 축축하게 그을렸다
지표면 위로 10센티쯤 폭을 둔
어깨높이의 유리창 틀에는
비의 씨앗이 얇은 부피로 맺혀 있다
팬츠와 원피스와 티셔츠가 겹쳐 있는
행거에는, 팔이 늘어난 것과
철사 옷걸이 몇 개는 불쑥 솟구쳐 있다
2.
설근舌根과 내이內耳 사이를 오고 갔을 공기층의 부력이 입구 쪽을 몰아세워, 가엾은 치구恥丘에 닿을 듯 스칠 듯 손 놓쳤던, 그 탄성에 죽은 새의 부리처럼 움찔하며 길에서 묻혀온 바람의 진액을 튕겨낸다,
3.
벽에 걸린 우산은, 날개를 펼치려고 비 올 때를 기다렸다,
부드러운 살을 잇댄 등뼈를 세우면서 제가 내는 울음이 까마귀 같단 생각에, 플롯의 하강 국면과 흐린 날의 낙화 속에서, 뼛속에 울음이 몰아치며 살이 부러진다,
돌보지 못한 슬픔을 찾았으나
내이內耳를 거쳐 정신을 관통했던 소리와 울음은
색깔이 없다,
투명한 죽음이 새의 부리에서 흘러나온다.
염창권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한밤의 우편취급소』, 『오후의 시차』, 『일상들』 등이 있으며 시조집 『햇살의 길』, 『호두껍질 속의 별』 등이 있다. 평론집 『존재의 기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