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역사속의 철령(鐵嶺)이라는 지명에 대해 식민강단사학의 설명을 보면 함경남도 안변군 신고산(新高山)면과 강원도 회양군(淮陽郡) 하북면(지금의 강원도 고산군과 회양군) 사이에 있는 고개를 말하며 고개의 북쪽을 관북(關北)지방, 동쪽을 관동(關東)지방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1330~1374)은 원(元)의 힘이 약해지고 남방에서 명(明)의 주원장이 일어나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위치했던 요동땅과 그 이북지역을 수복하게 되는데 이후 강력한 대포의 발명으로 원(元)나라를 패퇴시킨 주원장(朱元璋)이 이 천부(天府)의 땅인 요동(遼東)을 탐내어 이를 빼앗고자 철령위(鐵嶺衛) 설치문제가 거론되고 최영(崔瑩)장군은 우리 조선민족이 수천년을 경영해온 요동에 대한 확실한 문제를 매듭짓고자 1388년(우왕-禑王,14) 이성계(李成桂)를 보내 요동정벌을 위해 군사를 보내게 되었다고 역사통설은 말하고 있다.
어찌되었든간에 주원장(朱元璋)이 설치하려한 철령위(鐵嶺衛)라는 명칭은 바로 고려의 지명인 철령(鐵嶺)과 관계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이로인해 변조된 반도조선사에서는 위 지도에서와 같이 철령이 자리함으로 인해 이 철령(鐵嶺)위쪽의 조선땅을 주원장이 철령위(鐵嶺衛)를 통해 모두 차지하려 했다는 황당한 강역사(疆域史)가 소설처럼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제 제대로 된 올바른 역사속의 철령(鐵嶺)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2.
철령위(鐵嶺衛)는 고려시대에 명(明)나라가 설치하려던 70개소의 병참 군영으로 우리나라 함경도 철령에서 만주 요양(遼陽)에 이르는 곳에 설치하려 했던 군사기지를 말한다고 역사일반은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1556-1618)은 철령을 소재로 하여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긴 바 있다.
철령(鐵嶺)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우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九重深處)에 뿌려본들 어떠리.
이 시는 백사(白沙)가 광해군 5년에 일어난 계축옥사(癸丑獄事)와 관련되어 5년후 삭탈관직 당해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을 때 철령(鐵嶺)고개를 넘으면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다.
이를 비교해 보면 명(明)나라 철령위와 백사(白沙)가 넘어갔던 철령은 서로 다른 곳임을 알아챌 수 있다. 즉 이전의 글에서 우리는 역사속의 남만주(南滿洲)가 정확히 어디였는지를 살펴보았다. 주원장(朱元璋)이 설치하려 했던 철령위(鐵嶺衛)는 현 신강지구 천산(天山)북쪽에서의 일이고, 이항복(李恒福)이 넘어갔던 철령은 현 황하의 북쪽 즉 역사상 북륙조선의 강역에서 찾아야 할 일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살펴볼 글이 있는데 아래에서 설명되는 강역이 도대체 어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의아한데, 바로 필자가 밝힌 역사상의 남만주 요동과 백두산을 떠올리며 맞추어 보면, 아래 글은 분명 조선역사의 백두산(白頭山) 현 알타이산에서 아래로 역사의 철령(鐵嶺)인 현 천산(天山)까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음을 간파해 낼 수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155권, 地理志 咸吉道地理志 / 咸吉道
동쪽은 큰 바다(大海)에 임하고, 남쪽은 철령(鐵嶺)에 닿고, 서쪽은 황해도와 평안도에 접(接)하였다. 준령(峻嶺)이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기복(起伏)하여 남쪽으로 철령(鐵嶺)까지 뻗쳐 있어, 천여 리에 긍(亘)한다.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은 철령으로부터, 북쪽은 공험진(公險鎭)에 이르기까지 1천 7백 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으로 큰 산과 큰 바다 사이에 끼어 있어서, 〈그 땅의〉 넓고 좁은 것이 같지 아니하여, 어떤 데는 수백여 리가 되고, 어떤 데는 6, 70리가 되는데, 오직 갑산(甲山)만이 큰 산의 서북쪽 바깥으로 쑥 들어가 있다.
東濱大海, 南界鐵嶺, 西接黃海。 平安道有峻嶺, 自百頭山起伏, 南走鐵嶺, 緜亘千餘里, 北連野人界面。 南自鐵嶺北至公險鎭一千七百餘里, 東西介大山大海之間, 廣狹不同, 或數百餘里, 或六七十里, 唯甲山斗在大山西北外
막스 폰 브란트(Max August Scipio von Brandt,1835-1920)는 독일의 외교관이자 동아시아 전문가로 1883년 조독(朝獨)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였으며, 그의 조선방문기인 <격동의 동아시아를 가다>-2008-을 남겼는데 그는 이 책에서 만주(滿洲)수도 묵덴(Mukden)은 조선(朝鮮)의 안주(安州)에서 직선거리로 약400km떨어져 있다고 말함으로써 역사상의 심양(瀋陽)인 현 우루무치에서 필자가 고증한 부온현 (富蕴县-안주비정지역)까지의 거리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위의 세종실록지리지 글을 고찰하면서 위대한 오천년 조선역사를 반도역사로 둔갑시키는 일등공신(?) 이었던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가 손을 여섯 번이나 수술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닌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있다.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한족(寒族)과 조선민족의 모든 사서(史書)를 섭렵해 현 반도에 맞추어 후세가 알아낼 수 없도록 새롭게 교열하고 재배치하는 작업을 금서룡(今西龍)은 해 냈고, 그의 충직한 제자인 이병도(李丙燾, 1896~1989)는 현 화폐가치 100억원을 받고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을 만들어내고 다시 그의 후학들은 친일파들의 압도적인 지지속에 조선사오천년의 광대한 역사를 이 척박하고 좁디좁은 한반도속에 억지로 구겨넣어 버렸던 것이다. 그로인해 우리 후학들은 아직까지도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안개속에서 상고역사와 근세역사까지도 마치 이 반도와 그 위쪽 그리고 기껏해야 대륙의 산동(山東)까지 밖에 강역사를 펼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 니, 사서(史書)속의 강역과 현재의 강역이 일치하지 않고 또한 구한말 조선을 방문했던 수많은 서양인들의 기록속에 나오는 조선의 강역과 현 반도의 강역이 일치하고 않고 있는 것임을 현명하게 알아들어야 할 일이다.
3.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은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만주(滿洲)방면에는 그전부터 조선에서의 유민이 많이 건너갔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전후에 만주 방면에 큰 세력을 가졌던 철령이씨(鐵嶺李氏)가 그 하나이다.
명나라 원군의 대장이던 이여송(李如松) 역시 조선계임은 모두 다 아는 유명한 이야기다. 임진왜란 때 왔던 명(明)나라 군대(軍隊)는 돌아갈 때 따라다니던 우리나라 사람을 데리고 갔다. 그중에는 산해관(山海關)동쪽의 남만주 방면에 살면서 자손이 번성해서 스스로 부락을 이룬 사람 또한 많았다. 이들은 고려촌(高麗村)이란 말을 내세우기도 했다. 오늘날 만주 곳곳에 혹은 몽고 일부에 고려촌, 高麗屯(고려둔), 高麗庄(고려장) 高麗堡, 高麗營, 高麗城이라고 일컫는 지명이 많다.
위 글에서 <산해관 동쪽>은 <산해관 서쪽>의 교열로 보아야 하며, 남만주에 철령이씨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이후 많은 조선인들이 살았다는 내용인데, 바로 남만주(南滿洲)에 아주 견고하고 강고해 넘기 어려운 고개 즉 철령(鐵嶺)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현 반도위쪽의 심양에서 북쪽으로 60여km지점에 철령현(鐵嶺縣)이 있다, 그러나 철령이라는 단어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평지에 위치한 조그만 지역일뿐이다. 역사변조를 위해 억지로 갖다 붙인 지명인 것이라 볼 수 있다.
4.
이전의 글에서 일제(日帝)의 관동군(關東軍)이 활동한 만주 즉 남만주를 고찰해 보면서 박정희가 천륜을 거스르는 민족반역의 패륜을 저지른 지역 또한 남만주였음도 밝혔다. 여기서 문제는 왜 일제가 자기들 군대이름을 관동군이라 칭했는지가 매우 의문스러운 부분이 되었는데, 산해관(山海關) 동쪽에 주둔한 부대라 해서 관동군이라 칭했다고 말하여지고 있으며 또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의 조차지를 인수하는 형식으로 청나라에서 전리품으로 받은 요동(關東州)에 1905년 남만주철도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관동총독부를 설치한 후 약 4만의 병력을 주둔시킨 것이 일제 관동군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를 토대로 분석한다면 현 천산(天山)은 역사의 철령(鐵嶺)이 되어야 타당하며, 그 험준함으로 천산(天山)의 정중앙이라 할 현 우루무치를 똟지 못하는 한 천부(天府)의 요동을 거머쥘 수 없었고, 이에 따라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우리 조선민족의 북방상고역사는 이 지역에 강고한 성곽을 쌓아 한족(漢族)의 북방진출을 철저히 차단해 놓았던 것임을 알아낼 수 있다.
구한말 남만주의 심양(瀋陽)이었던 현 우루무치가 역사상 철령(鐵嶺)의 관문으로 일제는 남만주에 진출하면서 심양(瀋陽)의 우측에 군사기지인 관동총독부(關東總督府)를 만들어 놓고 이후 관동군(關東軍)이라 칭했음을 올곧이 간파해 낼 수 있는데 이는 또한 이후에 남만주철도 노선을 고찰하게 되면 그 타당성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으며 다음으로 남는 풀어야 할 숙제는 그렇다면 역사속의 천산(天山)이 어디인가 하는 부분이 된다.
다음의 글에서 천산(天山)을 고찰하겠으며 이 부분은 영국인 학자의 도움을 받아 찾아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다.
2023.03.02.松溪
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