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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검詩劍
왜, 나는 시에 혹하는가. 천지만물이 나와 불이不二한 까닭이다.병病은 생사의 면벽 수행이다. 하여, 이승과 저승 사이 낀 풍경은 ‘환幻’이다. 어릴 때 나는 집 앞 바다가 우는 소리를 가끔 들었다. 달빛에 스민 혼령인 듯, 그 천길 물속에서 우는 곡소리는 슬펐다. 생에서 죽음이 싹트는 엄혹한 사실 앞에서, 죽음에서 생이 열리는 영감을 느꼈다. 내 시는 병의 문을 열고 바라본 앞마당 가득 핀 꽃의 이야기요, 피의 이야기다. 수만 생을 윤회한 나의 또 다른 환생의 조각보다. 하여, 나는 늘 흔들렸다. 바람에 흔들렸고 외로워 흔들렸다. 놓쳐 버린 물의 무늬로 흔들렸고, 불 속 그림자로 흔들렸다. 밑도 끝도 없는 기미와 기척에 흔들렸고, 불안한 목소리에 흔들렸다. 언제나 서정은‘나와 타자와의 동일성의 시학’이자 꿈꾸기다. 나는 법고의 뼈와 살을 발라 먹고 창신의 새 길을 연다. 만물의 음양을 받아들여 시의 형과 상을 빚는다. 전통의 불신과 전복이 아니라 계승과 성찰을 통해, 시의 요체를 꿴다. 현실 공간인 몸과 시의 공간을 하나로 본다. 격물을 궁구하여 치지로 나아간다. 직유를 통해 사물의 극을 치받고, 은유를 통해 물아가 된다. 하여 밤낮없이 비극과 역설, 아이러니와 모호성, 풍자와 해학의 행간에 바장였다. 시의 급소, 그 사랑과 이별의 통증은 신명과 지극으로 풀었다. 소리를 쫓다 숲을 잃었고 언어를 쫓다 시를 들었다.‘이름이 없는 천지의 처음, 무명無名’과 ‘이름이 있는 만물의 어미, 유명有名’(도덕경 1장) 사이를 헤맸다. 어둠에 손을 넣어 달을 만졌고, 바다에 머리를 넣어 해를 먹었다. 공을 뚫다 색을 얻었고, 색을 품다 공을 보았다. 하여, 시는 ‘천하에 천하를 감추는 작업’(약부장천하어천하若夫藏天下於天下(장자)’임을 알겠다. 하늘은 감추고 시인은 들춘다. 간절히 묻고 또 물었다. 세상을 향해 가장 아파하는 자만이, 가장 아름다운 시를 얻는다. 하여, 나는「시검」을 뽑아 한바탕 천지무天地舞를 춘다.
천하를 갖고 싶으냐!
쉬지 말고 광활한 초원에 말을 달려라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어라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구나
바람만 칼끝을 보고 있다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직유는 결코 혼자 죽지 않는다
귀신도 모르게 은유를 쳐내는구나
불이 내렸도다!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구나
말이 말을 닫으니 일어나는 말이 없구나
달려도 달려도 이미 와 있는 말
검劍을 찾을 자者 영원히 없을 지니,
무無를 베라, 천지사방 색色을 베라
무덤은 산 자들의 퇴고가 아니냐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김동원,「시검詩劍」전문
「시검」은 천하를 베는 칼이다. 해와 달 위에서 무현금을 들으며, 한바탕 춤춘 검무다. 베고 베도 베이지 않는 무검이다. 심연의 현이자 혼의 가락이다. 하여,「시검」을 빼들고 날마다 새벽까지 말馬을 타고 말言의 목을 베었다. 오! 천하에 뿌려진 말의 비린 흰 피여! 지칠 때까지 “칼을 쳐들고 불의 행간을” 뚫었다. 말馬과 말言의 동음이의를 부려 천의무봉을 꿈꿨다. 바람의 심장을 상징의 끌로 각한 음영이, 나의 시다. 말의 그림자를 잡아 다겹의 이미지로 허공에 매달았다. 하여「시검」은 “아무도 흔적을 남길 수” 없다. 사람의 혀끝은 검이다. 몸을 베는 섬뜩한 저잣거리의 말들. 독언毒言은 세상의 귀를 썩게 한다. 하여 “눈을 파내어라, 귀를 묻으라” 일갈하였다. 귀신도 모르는 바람의 은유. 말 한마디로 천하 마음을 움직인다.말言은 창조의 기물. “시시각각 말은 휘황찬란”하다.입을 막고 혀를 감추면 천하의 명시가 숨는다. 말을 잘 쓰면 검을 피하고, 옳은 말은 무언행이다. 하여 “검을 찾을 자 영원히 없을 지니,” 시검이여!“무를 베라, 천지사방 색을 베라” 정녕, 천하를 갖고 싶으냐, 시인이여!“번개처럼 단칼에 놈의 목을 베라!”
말귀
하이데거의 시〈라이헤나우에 석양이 저물 때〉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내면이 느껴진다. 내면적인 사람이어야 풍경을 보고 풍경의있음을 본다. 남부 독일 콘스탄츠 호에 있는 섬 라이헤나우에 저녁놀이 내려앉는다. 하루 중 가장 깊고 아름다운 시간이 일몰이라면, (「라오콘 군상」에서 보듯이) 가장 숭고한 인간은 고귀한 단순이거나 고요한 위대가 아닐까. 은수자隱修者는 모든 것과 결별했지만 모든 것과 결부되어 있다고 믿는다. 하여 시와 철학의 사이에는 단절이라는 이음의 보다 승화된 국면이 있다. 여름밤이 깊어가고,어스름한 둑길 쪽/ 호수로 흘러나가는 등대의 불빛이 억새처럼 은은하다. 그것은 귀향자에게 주어지는 은총이자 대지에 머무르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존재의 표지標識다. 어둠의 장막이 내리고 달빛이 뜨락을 비출 때면 저 멀리 산마루가 바라다 보이는 낡은옥탑 지붕 위에 마지막 새소리가 종鐘과도 같이 걸려 있다. 고요한 흐름이다. 대지는 시간들보다 오래되고 신들보다 위에 있다는 말씀. 시원의 시원, 유래의 유래다. -김상환 산문「하이데거를 읽는 밤」중에서
달밤에 고요히 꿇어앉아 매화차를 마신다. 황병기 선생(1936~2018년) 의 가야금 연주곡 침향무는 다향의 선미禪味를 법열로 승화시킨다. 겨울 끝머리 스산한 바람이 불 때 이 곡을 듣고 있으면, 절로 풍류객이 된다. 침향무는 명상의 황홀경이 좋았다. 중모리, 엇중모리, 중중모리의 리듬도 좋거니와 애절한 계면조의 흐느낌을 지나, 급박한 휘모리장단으로 막음하는 연주는 묘오하다. 특히 고수의 추임새에 얹어 명인의 손가락 끝으로 현을 부비는, 그 바람 소리의 시적 느낌은 몽환적이다. 어쩌면 슬픈 무희의 비극적 삶을 떠올리게도 하는 이 소슬한 무곡은, 천년 신라 불교를 음악으로 옮긴 서사시에 비견된다.
속을 떠나 성聖에 들어가는 것이다선일여의 경지라하였던가. 달빛과 나, 그리고 다악은 삼생에 무슨 인연인가. 창밖 바람과 청담을 나누는 저 그림자는, 가야금 열두 줄이 풀어내는 심회이겠다. 고적하구나, 시여!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것 같아 설레는 이 밤. 입 안 가득 타고 내려가는 매향梅香에 적막이 풀린다. 말과 사물의 관계는 필연적이지도, 불변한 것도 아니다. 음악이 시가 되는 이 어둠 속에서, 홀연, 한 생각이 일어난다. 언어는 마음이 부리는 나룻배다. 우주의 주인을 태우고 건네주는 순간, 언어의 허상은 사라진다. 보기는 하되 보지 못하고, 듣기는 하되 듣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이미 와 있는 시를 직관한 자가 명시를 얻는다. 이승의 문밖에서 일렁이는 말들을 보라. 말은 허공을 떠도는 바람의 은유이다. 아니, 음양의「말귀」를 담는 기물이다.
매화 꽃잎은 천천히 허공을 여네. 말귀는 열어 두고, 찻잔 속에 향을 머금네. 대숲 바람이 눕는 사이, 부드럽게 모음이 구르네. 말은 오므라 드네, 아니, 벌어지네. 그래, 그래, 조여지는 말의 체위. 달빛은 바람의 샅을 핥고 있네.
구름은 또, 허공의 귓등 새로 말이 흐르네.
색의 자음들이 올라타네. 홍紅, 홍紅, 홍紅, 베갯머리에선 색 쓰는 소리가 깊네. 노랑 말귀를 알아듣는 노란 단풍. 산이 풀리고 노을이 닫히고, 사이사이 말귀가 트이네. 겨울 눈 내리고 봄꽃 피고, 돌아보니, 문득, 말들이 사라지고 없네.
―김동원,「말귀」전문
시「말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의 향기를 음표로 전해들은 악시일여樂詩一如의 세계다. 삼라만상은 그 자체가 악기요, 리듬이다. 허공 위에서 해가 걷고, 달이 거니는 율려의 경지는 황홀하다. 첫날 밤 음양합궁의 소리는 신비로운 몸의 음악이다. 물 위에서 바람이 걷는 경지는 환상이다. 시에 스며든 이런 우주 리듬은 단순한 소리의 반복이 아니라, 신명이다. 차 한 모금에 따뜻해져 오는 이 아름다운 가슴. 살 수만 있다면 한 오백 생이라도 살 것 같은 밤이다. 한 백 년은 시도詩道를 이야기하고, 한 백 년은 저녁노을 구름 속에서, 대금과 가야금을 들으며 사랑하는 정인과 붉은 신방을 꾸밀 것이다. 또 백 년은 붓을 들어 물속 보름달을 치고, 또또 백 년은 저 시선 이백처럼 대취하여 첨벙첨벙 환幻 속에 들어가도 좋으리라. 남은 백 년은 폭설에 갇혀 겨울 설중매의 향기를, 이 밤처럼 시음詩音으로 음미할 것이다. 백자 찻잔 속에서 “매화 꽃잎”이 천천히 몸을 여는 것을 지켜볼 것이다. 어쩌면 그 향기는 달뜬 여인의 “홍紅, 홍紅, 홍紅” 색 쓰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아니, “대숲 바람이 눕는 사이, 부드럽게 모음”에 올라탄 자음의 힘쓰는 합궁의 묘음인지도 모른다. 그 색의 말들은 오므렸다, 벌어졌다, 끝내 “조여지는 말의 체위”처럼, “바람의 샅을 핥”을 것이다. 언제나 내게 있어 시는, “문득” 돌아보면 다 사라지고 없는 몸들의 환幻이자, 귀鬼의 은유이다.
칸나
몸은 시대마다 다르게 읽힌다. 몸은 시대의 프리즘이다. 누가, 어떤 시선으로 비추는가에 따라, 변화한다. 몸은 유리이고, 거울이고, 무성한 숲이다. 그러나 현실 속의 몸은 파편이고, 대상이고, 간혹 주체이다. 몸은 거듭난다. 새롭게 해석된다. 그렇기에 몸은 변화하는 사건이고, 기록되는 감정이다. 현대의 몸은 알레고리적 건축물이고, 생물학적 기관이자 종교적 사원이다. 몸은 미술관이고 문화적 소모품이다. 몸은 완전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가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가 도구가 되었다. 몸은 상품이자 브랜드이다. (…) 21세기 몸은 젠더, 나이, 인종, 사회적 위치와 경제적 역할, 권력에 따라 새롭게 해체되어 구성된다. 몸은 모니터의 화면이자 모바일의 액정과 같은 감각적 사물이다. 몸은 촉감이 있는 껍데기이고, 촉감의 무한한 상상력을 동반하는 꿈속의 이미지이다. (…) 몸은 (역사적으로) 질문을 품은 화두이다. 몸은 주체이며 객체가 공존하는 모호한 전류의 장(場)이다. ― 금은돌「대화, 불길한 몸으로 시작하는」 / 2020 『시와 사람』 봄호
음악은 하늘에서 흘러나와 사람의 몸에 붙은 것이다. 바닷물 속에서 붉은 현을 켜며 올라오는 해는 그 자체가 악기이다. 한밤중 물속에 들어가도 젖지 않는 달은 얼마나 신비로운 선율인가. 하여, 천지 만물은 모두 소리의 악기통이다. 하늘과 땅은 음양의 리듬으로, 오행은 행간의 악보로 드러난다. 겨울의 흰눈은 봄의 들꽃 피는 소리에 숨고, 물의 음악은 초록의 여름 나뭇가지를 타고 허공의 생각을 만진다. 온갖 색채가 가을 단풍 속에 제소리들을 숨기고, 낙엽은 늙은 몸을 끌고 땅속 뿌리에 스며 은유의 소리로 부활한다. 강물은 스스로가 물의 연주자요, 바다는 강물들의 교향곡이다. 바람의 지휘자를 통해 천지는 한바탕 무위를 드러낸다. 하여, 자연은 형상을 창조하여 색의 음악을 만들고, 변화의 음을 통해 매 순간 무화시킨다. 때론, 화산 폭발과 번개의 리듬으로 불의 음악을 펼치기도 하고, 때론 해일과 폭우로 물의 음악을 선사하기도 한다. 삼라만상은 상징의 율을 통해 이미지로 드러나고, 구상과 추상의 악기를 바꾸어가며, 색과 공의 법칙으로 우주를 탄주한다. 하여 음악은, 지수화풍토地水火風土란 경이로운 음계를 버무려 일월의 조화음을 만든다. 그 사이 인간은 희로애락의 고저장단에 사주팔자의 추임새를 얹어, 한바탕 각자의 시공의 방식으로 몸을 통해 놀다 가는 악기인 셈이다. 하여, 시「칸나」는 홀연히 음악의 방식으로 내 영혼 속에 치고 들어왔다.
거울 속 꽃은 지는데,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돌아보면 부서져버릴 사랑
칸나, 칸나, 칸나
불이 붙어 다 타버려라지, 뭐
거울 속 꽃은 지는데,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빨강, 미쳐버려라지, 뭐
칸나, 칸나, 칸나
붉은 라인은 왜 그리 외로운 거야
꽃대에 젖어 빗물은 흐르는데,
흑 흑 흑, 왜 우는 거야 바람
―김동원,「칸나」전문
비극적 음색은 왜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걸까. 슬픈 음악은 가슴 속에 엉킨 감정의 비애가 악기의 현을 타고 나오는 색채 같다. 시인의 영혼은 존재의 처음을 만지는 음악이라도 되는 걸까. 시는 왜 가장 추악하고 비루한 흔적을 들추는 걸까. 비바람은 몰아치는데 “거울 속 꽃은 지는데” 그 봄날 나는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 1935~2007)의 그 장엄한 비감어린《카루소》를 듣다, 짐승처럼 설움이 북받쳐 올랐다. “돌아보면 부서져버릴 사랑”앞에서, “흑 흑 흑,”바람처럼 나의 기억은 울고 있었다. 순간, 초등학교 1학년 때 창문 너머로 반한, 그 예쁜“칸나”가 내 무의식 속에서 붉게 피었다. 빗속에 계속“첼로를 타고 카루소는 흐르고”, 붉은 라인의 외로운 칸나는 그 옛날 잃어버린 소녀처럼 은유로 서 있었다. 내게 어린 날 잃어버린 첫사랑은, 아무에게도 고백할 수 없는,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절대고독의 영역이자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참혹한 이별이 찾아온 건 12살 때였다. 소녀는 심장을 찔렀고, 버려진 나는 빨강을 죽였다. 하여 나는, 이 세계의 빨강은 다 사라져야 한다고 외쳤다. 아니“빨강, 미쳐버려라지, 뭐”라고, 독언을 퍼부었다. 그 당시 어린 영혼은 늘 위태로웠고, 다친 심장을 움켜쥐고 “흑 흑,”바람처럼 서성였다.《카루소》의애절한 비가를 듣는 순간, 한밤중 사랑에 미쳐“칸나, 칸나, 칸나”를 부르며 뛰쳐나갔던, 나의 내면 아이를 보았다. 들판에 버려진 소년의 심장을 타고, 그 노래는 전신을 불길로 휘감았다. 왜 나는 그때, 이별의 사랑을 가장 아름답고 슬픈 긴 음악으로 들었을까. 명곡《카루소Caruso》는 47세로 죽은 이탈리아 테너 가수 엔리코 카루소(EnricoCaruso 1873~1921년)를 추억한, 사랑의 비극을 담은 노래이다. 칸쏘네 가수이자 연주가인 루초 달라(Lucio Dalla, 1943~ 2012년)가, 죽기 전 카루소가 묵었던 소렌토의 비토리아 호텔 (Excelsior Vittoria)를 밤에 방문하여 작곡했다. 카루소가 묵었던 방에는 넓은 테라스가 있고, 그 테라스에 서면 나폴리만의 푸른 바다가 보이고, 그 너머 도시 나폴리 위에는, 사랑하는 여인이 달빛에 눈물을 흘리며 비가를 듣고 있다. 그 호텔 방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낸 카루소를 떠올리며, 루초 달라는 피아노에 앉아 즉석에서《카루소》를 썼다. 세계적인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의 전율하는 목소리와 스테판 하우저의 애절한 현弦의 첼로 연주를, 아! 사랑에 미친 독자여, 꼭 한 번은 들어보라!
이 시인 놈아
“하늘은 장차 큰 임무를 이 사람에게 내리려 할 때,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한다. 그 근육과 뼈를 힘들게 하고 그 몸을 굶주리게 하며, 그 몸이 행하는 것을 궁핍하게 하고, 그 하는 일마다 안 되게 하여 어지럽게 하나니, 그 까닭은 그 마음을 두드려 참을성을 생기게 하여, 그동안 할 수 없었던 것도 할 수 있게 함이니라. ―맹자「고자편구」
시인은 이름을 남기는 자가 아니라, 시를 남기는 사람이다. 역사의 길 위에서 현실의 욕망을 반추하는 거울이다. 그 욕망의 끝에서 상처를 돌아보고, 어떻게 이 세계를 인식할 것인지를, 묻는 자가 시인이다. 하여 시는너무 달면 행간이 썩는다. 행이 연에 아부하면 둘 다 죽는다. 홀연히 들리는 것이 시인의 귀다. 시력詩歷이 높아질수록 시마가 깊어진다. 시의 기세가 막히는 명치끝이, 시가 뚫리는 장소다. 불가능할수록 시의 몸을 뒤집어라. 비명을 지를 때까지 말을 찔러라. 시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서야 칼을 빼들고 덤빈다. 뒤태가 고울수록 앞이 산다. 명시는 척 보면 누구나 다 안다. 귀신처럼 연과 연 사이를 속여야 좋은 시다. 억지로 막은 행간의 감정은 터진다. 밤하늘 빽빽이 펼쳐져 있는 별의 수만큼이나 땅에는 시어들로 깔려있다. 형과 상들이 저마다의 상징과 은유로 이름을 불러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시인은 굳이 본체를 보려고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다. 흔들리는 사물의 그림자만 잘 보아도 그것의 기미와 기척을 낚아챌 수가 있다. 하여, 나만의 언어 감옥에 갇혀 살지 말고 꼿꼿이 면벽한 채 수행하라.집착은 종종 시인을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해학humor과 풍자의 다리를 넘나들 때 시적 상상력은 폭발한다. 말을 비틀면 화자는 희화된다. 꿈과 현실의 괴리는 낭만적 아이러니Romantic Irony를 낳았다. 특히 시에서 욕설은“나, 제발, 욕이라도 먹게 해서, 정신 차리게 좀 해줘”(김열규)라고 발버둥치는, 병든 개인이나 부조리한 사회의 구조 신호다.
「이 시인 놈아」는화자‘아내’의 방백aside을 통해‘시인’의 무능을 까발린 작품이다. 문청 시절 나는 시인이 되면 나라에서 월급을 주는 줄 알았다.이 글을 쓰는 아침 나는, 청상과부로 살다 저승에 가신 어머니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 결혼 후 어느 날 아내가 쌀독에 쌀이 떨어졌다고 했다. 순간 나는 ‘왜, 쌀이 떨어졌지?’라고 반문하며 아내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무능의 극치를 용서해주길 바란다, 사랑하는 아내여! 병病이 깊이 들고서야 나는, 두 여자가 철없는 나를 위해 얼마나 고행하였는지를 깨달았다. 아내는 어린 남매를 들춰 메고 압력밥솥처럼 팽글팽글 평생 힘겹게 돌았다. 희한하게도 그녀는 내게 한 번도 “시를 그만 두세요”라고 “빈말”이라도 말한 적이 없다. 하여「이 시인 놈아」는 ‘아내’가 그 말을 하기 전, 먼저 ‘나’를 꾸짖음으로써 남은 생을 비껴가고자 한다. 곰곰이 내 삶의 뒤쪽을 쪼개 봐도, 아무도 내게 “닥쳐요”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누구도 “입금 좀 제때” 하라고 지시한 적이 없다. 늘 나의 몸은 내게 있어 주체와 객체 사이에 놓인 환상이었다. 시인은 그 자체가 은유이자 알레고리Allegory이며 이미지이다. 하여 “집세”를 제때 내기 위해서 “노을”이 될 필요는 없다. 가족이 밤마다 배가 고파 “보름달”을 뜯어먹어도,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 나오지 않아야 시인이다.「이 시인 놈아」속에는 현실 공간과 꿈의 공간이 역설로 재배치된다. 아무리 아내가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 이 시인 놈아!” 하고 외쳐도, 이번 생에선 나는 ‘못 들은 척’ 시로만 살 것이다.
닥쳐요, 잊히면 좀 어때요.
진짜 시인이라면 구름에게 명령해요.
입금 좀 제때 하라고요.
집세가 없어요, 여보!
제발 노을에게 부탁이라도 해 봐요, 우리.
넷이서 밤마다 보름달만 뜯어먹을 순 없잖아요.
달무리라도 덮고 실컷 울고 싶어요.
당신이야 장미 년, 모란 년, 매화 년
끌어안고, 행간 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만,
시인의 아내는 뭐예요.
그만, 그만, 내일 바람이 송금한다는
허황한 그딴 소린, 집어치워요. 제발!
빈말이라도, 돈 좀 줘 봐라,
이 시인 놈아!
―김동원,「이 시인 놈아」전문
결국「이 시인 놈아」는 밥과 예술과의 관계, 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를 동시에 역설로 묻는다.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을 하기 전에 이 물음이 포괄하고 있는 원주가 바로 시에 있어서의 형식과 내용의 문제와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를 쓴다는 것―즉 노래―이 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성과 동의어가 되고, 시를 논한다는 것이 시의 내용으로서의 현실성과 동의어가 된다는 것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를 의식하지 않는다.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그림자에조차도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자유의 과잉을, 혼돈을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는 것이다. 모깃소리보다도 더 작은 목소리로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김수영,「詩여, 침을 뱉어라―힘으로서의 詩의 存在」에서)
그렇다. 시는 현실을 뚫고 나가는 시인의 관觀이다. 시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언어 예술이다. 궁극적으로 미완성의 노정이다. 끊임없이 산꼭대기에서 굴려야만 하는 시지프스의 고뇌의 바위다. 오직 이 순간만을 파고드는 집중이야말로 ‘미완성’의 길이다. 머무는 곳마다, 서 있는 자리마다, 시가 태어나는 곳임을 자각해야 한다. 하여 시는, 궁하면 변하고窮則變, 변하면 통하고變則通, 통하면 오래간다通則久’는, 주역의 그 미완성의 극極을 사랑한다. 그래서 나짐 히크메트(터키 출생. 1902~1963)는 이렇게 노래하였는지도 모른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 /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되지 않았고 /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불멸의 춤은 아직 추어지지 않았으며 /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 그때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이상 알 수 없을 때 /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여행의 시작이다”(시,「진정한 여행」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