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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근대민간 역학사상을 중심으로—
임채우**
Ⅰ. 서론 : 잃어버린 100년의 역학
Ⅱ. 조선말 새로운 역학사상의 모색
1. 근대민간역학 등장의 사상적 배경
2. 김항과 이병헌의 역학사상
Ⅲ. 也山 李達 역학의 사상과 체계
1. 야산 역학사상의 형성 배경
2. 야산 洪易學의 사상체계
3. 야산의 后天 역학
Ⅳ. 이달 역학에 보이는 근대민간역학적 성격
1. 탈 전통의 근대사상적 특성
2. 탈 성리학의 민간역학적 특성
3. 탈 중국의 한국 중심주의 사상
Ⅴ. 결론
* 이 논문 또는 저서는 2015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
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5S1A5A2A03047853)
* 이 논문은 국학연구원 제31회 학술대회((사)동방문화진흥회강당, 2016.9.3.)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한 것임
** 국제뇌교육대학원 국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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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이달은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에 이르는 근현대의
혼란을 역학을 통해 이해하고 세상을 구원하려한 역학자였다. 그는 서
경 「홍범」편과 주역과 대학을 특히 중시해서, 이 3편의 이름을 따
서 洪易學이란 자신의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해방이후 그는 주역에 대
한 여러 저술을 남겼고 특히 주역에 관한 도판이 상당수 전해지고 있다.
그는 근현대의 대변환기를 선천에서 후천의 변화로 해석하면서,
동시에 한국 고유의 윷판과 같은 민중들의 놀이를 빌려 그 수리를
설명하기도 했다. 또 주역의 괘효사를 우리 고유의 단군사상이나 당
시의 한국의 현실등과 연결시켜 우리식으로 설명하는 등 이전의 의
리⋅상수의 형이상학이나 우주본체론을 중심으로 한 주역과는 구별
되는 독창적인 역학을 수립했다. 한마디로 그는 일제강점과 한국동
란이란 격동기를 겪으면서 봉건시대의 종식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역학적으로 설명하면서, 중국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중심으로 주역
을 이해하고 응용한 역학자로서, 한국의 독자적인 근대민간역학을
완성한 역학자라고 할 수 있다.
주제어 : 주역, 홍범, 경원력, 선천, 후천, 김항, 개벽, 이병헌
Ⅰ. 서론 : 잃어버린 100년의 역학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주역을 깊이 이해했던 것으로 보인
다. 백제는 사신을 보내 일본에 효경 논어 등과 함께 易經을 가르쳐
주었다고 전한다. 신라의 瞻星臺나 月城의 구조 및 利見臺 등 경주에
남아있는 유물들을 보면 당시의 높은 역학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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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흥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사서에는 당 현종때 역학자로 이름을 떨
쳤던 邢璹(?-752전)이1) 新羅에 사신으로 왔었다는 기록이 나온다.2)
왜 하필 그가 왔을까?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분석해보면 주역을 비
롯한 신라의 학문이 발달했기 때문에, 자칫 당나라 사신이 무시당할
까 두려워서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3)
고려시대 인종때의 문신 尹彦頤(?∼1149)는 주역에 밝아서 易解
라는 주석서를 썼다고 전한다.4) 고려말에는 禹倬(1263-1342)이 주역
으로 이름을 떨쳤다. 고려사 禹卓列傳에 보면 우탁은 역학에 조예
가 있고, 卜筮을 치면 모두 적중했는데, 程頤(1032∼1107)의 易傳이
처음 전래되었을 때 아는 이가 없었으나 우탁 이 한 달여 연구하여
모두 해득하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로부터 고려에 理學이 유행하
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5) 우탁이 이렇게 정이천의 역학을 블과 한
1) 현종때 학자로 四門助敎가 되었고, 鴻臚少卿에 이르렀다. 저서로 周易略例
疏가 있다.
2) 劉昫, 舊唐書卷一百九十九上, 列傳第一百四十九, 東夷, 二十五年興光卒 詔
贈太子太保 仍遣左贊善大夫邢璹攝鴻臚少卿往新羅 弔祭并冊立其子承慶襲父. 太平廣記卷一百二十六, 報應二十五, 邢璹, 唐邢璹之使新羅也 還歸泊于炭
山 遇賈客百餘人 載數船物 皆珍翠沈香象犀之屬 眞數千萬. 璹因其無備 盡殺
之 投於海中而取其物 至京 懼人知也 則表進之 敇還賜璹 璹恣用之. 後子縡與
王鉷謀反 邢氏遂亡 亦其報也.
3) 劉昫, 舊唐書卷一百九十九上, 列傳第一百四十九, 東夷, 上謂璹 曰新羅號為君
子之國 頗知書記有類中華 以卿學術善與講論 故選使 充此到彼 宜闡揚經典使知
大國儒教之盛. 又聞其人多善奕碁 因令善碁人 率府兵曹楊季鷹為璹之副 璹等至
彼 大為蕃人所敬 其國碁者皆在季鷹之下 於是厚賂璹等金寶及藥物等. 참조.
4) 고려 인종때의 문신으로, 호는 金剛居士, 시호는 文康公이다. 1128년(인종 6)
에 예부시랑으로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국교 수립을 청하고 돌아왔다. 예
종⋅인종 양조에 걸쳐 문장에 능하여 이름이 높았고, 의종 초에 正堂文學을
지냈다. 특히 주역에 밝았는데, 1133년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고
윤언이에게 이를 묻고 논하게 하였는데, 이때 주역에 매우 정통하여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자 김부식이 대답이 궁하게 되었다고 한다. 저술로 易解가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5) 이외에도 우탁이 중국에 사신으로 갔는데, 중국 황제의 앞에서 주역을 줄줄
이 외워서 중국의 역이 동쪽으로 갔다(吾易東矣) 뜻의 易東이란 호를 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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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만에 독파해서 교육할 수 있던 것을 보면, 그가 뛰어난 역학자이기
도 했지만, 당시 고려의 학계에 수준높은 역학이 구축되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고려 역학의 수준은 여말선초 陽村 權
近(1352-1409)이 周易淺近錄이란 性理易學에 대한 연구성과로 이어
졌다.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은 조선에서는 程頤와 더불어 朱熹(1130∼
1200)역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대개 조선 중기이후에
나온 역학관련의 저술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退溪 李愰(1501∼1570),
栗谷 李珥(1536∼1584), 旅軒 張顯光(1554∼1637) 등을 위시한 여러
주석과 연구 성과들이 나왔고, 근자에 들어와서 역학총서 형태로 간
행되기도 했다.6)
조선시대의 역학은 程朱역학을 통해 신왕조의 건국을 정당화하고,
이를 수기치인에 적용해서 도덕수양의 덕목을 마련하고 나아가 국가
이념으로 정립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는 정주역학이 주
류를 형성했으나, 친명사대 정책의 영향하에 당시의 사상계가 성리
학에만 치우쳤던 탓에 역학 연구에 있어서도 사상의 폭이 그다지 넓
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중기 이후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명나라의 우산
속에 안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7세기초 북동쪽에 강력한 만주
족이 세운 청나라가 명을 대신하고, 임진⋅병자 양란 이후 조정의 권
위가 추락하면서 궁지에 몰린 백성들의 민란과 반역사건들이 국가
기강을 흔들고 있었다. 또 西學이란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서 18세기
에는 신앙운동의 형태로 발전했고, 급기야 1791년에는 양반집안에서
자기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전례문제가 발생하면서 유교의 강상명교
와 정면으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7) 이에 더해 19세기 말에는 제
주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6) 조선시대의 역학자와 그 성과에 관해서는 임채우, 주역과 술수역학, 동과
서, 26-28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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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주의 열강이 침탈해오면서 조선은 와해되고 있었다.
최근 한 연구에서는 19세기부터 서구 열강들의 위세에 눌려 무기
력했던 조선왕조가 한일합방으로 종말을 고하고 일제의 식민통치하
에 들어가게 되자 성리학이 기능을 상실하면서, 주역 역시 생명력을
잃고 관심에서 멀어졌다고 했다. 그래서 전통학문은 상실되어버리고
1980년대까지는 ‘학문의 공백상태’로서 전통사상에 대한 연구는 상상
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라고 규정했다.8)
봉건왕조의 몰락과 더불어 조선의 국교이자 이데올로기였던 程
朱學도 동력을 상실한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본 연구는 조선패망
에서 해방직후까지 ‘학문의 공백상태’로서 전통사상에 대한 연구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기라고 한 이 ‘잃어버린 100년간’의 시기
에 주목하려고 한다. 이 근백년동안, 조선 패망과 일제강점 및 동족
상잔의 비극속에서 구학문은 설득력을 상실했고 구체제는 붕괴되
어 버렸다. 이를 官學이나 程朱易學의 시각에서 보면 학문의 공백
상태이며 잃어버린 백년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보면 이전과는 전연 다른 새로운 차원의 역학이 민간에서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后天開闢’으로 묘사되는 이 대혼란의 시기에 정주역학을 배
경으로 조선왕조를 위해 龍飛御天歌를 노래하던 관방역학은 ‘공백상
태’에 들어갔지만, 조선왕조에서 소외당한 민간에서 우리나라를 중심
으로한 신경향의 역학이 자생적으로 등장하면서 버림받은 백성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면서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가고 있었다. 바로 ‘잃어
버린 100년’의 시작점인 1880년 경 金恒(1826∼1898)은 정주역학과는
7) 1791년(정조 15) 전북 진산에서 모친상을 당한 양반출신의 천주교 신자 윤
지충이 신주를 없애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른 사건(진산사건)이 일어났
다. 이로 말미암아 신해사옥이 발생해서, 윤지충 등은 사형을 당했으며 천주
교는 사교(邪敎)로 금지되었다.
8) 김학권, 한국에서 주역연구의 회고와 전망, 「哲學硏究」 第95輯, 大韓哲學會
論文集, 2005. 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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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 맥락을 달리하는 ‘后天’이란 개념을 제시했다. 이로부터 많은 역
학자들은 이 후천을 이념으로 삼아, 놀라고 두려움에 떨던 민중들에
게 구체제의 몰락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설명했다. 이전의 역학과
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을 가진 ‘근대민간역학’은 이렇게 발생했고, 이
들은 근현대사의 이면에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세계관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민간역학의 완성자중의 한분이 也山 李達(1889-1958)이다.
Ⅱ. 조선말 새로운 역학사상의 모색
1. 근대민간역학 등장의 사상적 배경
본고에서 말하는 ‘근대민간’ 역학이란, 전통의 봉건사상을 벗어났
다는 의미에서 ‘근대’이고, 綱常名敎의 유교이데올로기와 국가통치를
위한 관학이 아니라 소외받던 민중의 시각을 갖고 있단 의미에서 ‘민
간’이다. 이는 1880년 경 충청도의 시골에서 시작되었으나, 필자의 생
각으로 민간역학의 먼 기원은 실학에 있다고 본다.
18세기 무렵부터 조선의 역학계에는 정주역학의 틀을 벗어나 공허
한 관념론적 시각을 버리고 당시 조선의 현실에 의거해서 주역을 이
해하려는 기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경상도 시골의 이름없는 선비 李
元龜(1750년경-1820년경)9)는 實事求是의 입장에서 주역의 陰陽을 인
륜(陽)과 산업(陰)의 유기적 조화관계로 재해석하므로써 주역에 대한
새로운 이해방식을 보여주었다. 李瀷(1681-1763)의 영향을 받은 丁若
鏞(1762∼1836)은 전라도 땅끝마을의 유배지에서 주희 역학을 낱낱이
9) 박종홍, 「人物과 産業과의 不可離의 관계를 역설한 이원구의 사상」, 心性錄,
국학자료원, 1983, 2쪽 인용. 이원구의 생애에 대해서는 이선경, 「일수 이원구
의 이기론과 역학적 의미」, 한국사상과문화 14집, 2001, 208-20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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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하면서 정주학과 다른 시각을 열었다. 이익의 易經疾書나 정
약용의 周易四箋 이원구의 心性錄등은 당대에 큰 영향을 끼친
저술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교조화된 정주학을 비판하고 도덕형이
상학에 치우치던 관념성을 탈피해서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주역관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근대 역학의 단초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양란 이후 누적되어온 사회적 모순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입까지 가세하게 되자 조선사회는 뿌리 채 뒤흔들렸다. 대포를 싣
고 바닷가에 나타난 鐵艦앞에서 사대부들끼리 고원한 형이상학을 논
하던 理氣⋅性情論이나 服喪의 형식과 절차를 놓고 건곤일척을 다투
던 典禮논쟁은 무용지물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민초들은 권력자들의
수탈에 더해서 걷잡을 수 없이 밀어닥친 외세의 격랑에 휩쓸렸다. 의
지할 곳 없이 소외된 민중들 사이에 정감록의 말세론이 파고들면서
피난지지를 찾아 유랑하는 백성들이 생기기도 했고, 탄압속에서도
완전히 다른 종교인 서학에 비밀리에 귀의하는 민중들도 늘어갔다.
우리 전통을 지키고 서학을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동학은 오히
려 세상이 완전히 뒤바뀐다는 개벽사상을 민중들 사이에 퍼뜨렸고,
관리의 수탈에 맞선 농민혁명운동으로 번지면서, 봉건왕조는 급속히
와해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자립능력을 상실한 조선왕조가 패망한 것은 필연적
인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5백년 왕국이 하필 우리에게 주역을
비롯한 학문과 문명을 배워갔던 일본에 의해 합병되리라는 것은 누
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동시에 하늘같이 의
지했던 중국의 청나라조차도 신해혁명으로 망해버리자, 중화주의에
기초했던 기존의 질서와 구체제가 천지개벽하듯 붕괴되어버렸다. 민
중들은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게 될 것인지, 혼란과 고통의 격변
의 시대를 설명해줄 수 있는 새로운 사상을 갈망하게 되었다.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조선을 구해줄 중국의 부활을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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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이제 정주학과 사대주의의 우산속에 더이상 안주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새로운 세계관과 역사의식에 눈을 뜬 지식인들이 등장하
게 되었다.
조선시대 입신양명을 위한 과거시험 공부는 언급할 가치도 없거니
와, 조선시대 역학의 주류는 무엇보다도 정이의 역전이나 주희의
주역본의 및 「역학계몽의 뜻을 정확히 이해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희와 조금이라도 해석을 달리했다고 사문난적
으로 모는 분위기속에서는, 아무리 조선역학이 중국역학을 발전시킨
성과를 낳았다고 하더라도, 정주역학의 패러다임 혹은 중화주의 세
계관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불행과 혼란의 연속에서 근대를 맞이하고 있던 한편 그 속
에서 서서히 새로운 역학사상이 민간에서 자생적으로 움트고 있었
다. 국교로서의 설득력을 잃은 정주학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당시
의 혼란을 설명하고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역학 사상을 찾게 되었
던 것이다.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라는 격변기 속에서 발생한 한국
의 민간역학은 이제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벗어나 우리를 중심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독자적인 시각을 열었고 지배층이 아닌 민중을 중
심으로 하는 새로운 지평을 개척했다. 이것이 조선의 ‘근대민간’ 역학
사상이 탄생한 배경이다.
2. 김항과 이병헌의 역학사상
이전 시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역학은 김항(1826-1898)으로부
터 시작된다. 김항이 밭을 갈다가 노래와 춤을 추며(詠歌舞蹈) 正易
八卦라는 새로운 팔괘도를 창안한 해가 1879년이고 정역을 완성한
시기는 1895년이다. 이 무렵은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갑신
정변(1884) 갑오경장(1894) 을미사변(1895)등 조선왕조를 근본으로부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91
터 뒤흔든 대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면서, 봉건 왕조가 급격히 붕괴되
던 시기였다.
김항은 정주역학의 도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우리나라를 중심으
로 하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다는 것을 역학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정역팔괘도는 기존의 선후천팔괘론의 이론적 연장선상에서 팔괘를
어떻게 배열하는가 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伏羲八卦와 文王八卦
의 抑陰尊陽의 선천시대를 끝마치고, 이제 새로운 正陰正陽의 후천
시대가 개벽한다는 의미를 상징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정역팔괘
도를 가지고 바로 혼란의 극을 보여주던 당시의 현실문제를 직접 관
련시켜 설명했다. 즉 천도의 변화로 말미암아 중국중심의 가부장적
봉건시대가 종결되고, 음양조화와 남녀평등을 원리로한 한국 중심의
신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이는 중국중심주의에 빠져있던
엄숙한 도학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자 사상이었다.
유승국은 정역이 종전의 한국역학사상과 다른 획기적인 차원을 개
창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과거의 가치관과 철학사상이 봉건사회로부
터 근대로의 변화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있었으나, 정역은 현대와
미래를 전망하는 근본적인 원리와 방향을 제시했고, 봉건적 상하관
계가 아닌 개개인의 독립된 人極(皇極)을 말하고, 抑陰尊陽이 아닌
만민평등의 調陽律陰 및 종교 간의 대립과 분열을 지양하는 후천의
원리를 정역팔괘도에 나타냈다고 했다.10) 김항 이후로 정역의 후천
사상은 혼란을 극했던 근현대의 교체기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서
많이 이용되었고. 후천시대의 도래를 주장하는 한국의 민족종교의
교리에 깊숙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김항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차갑게 닫혀있다고 한다. 곽신
환은 그의 “선천 후천 사상은 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황금 시대가 도
래하기를 꿈꾸는 민중의 희망을 담고 있는 종교적 접근”으로, ‘민중
친화적인 이상적 미래세계’를 담고 있어서, 소위 정통유학자들이 곱
10) 유승국, 한국역학사상의 특질과 그 문화적 영향, (이정호, 學易纂言, 대한
교과서주식회사, 1982.) 317-319쪽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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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생존 당시에서부터 순정한 유학자로 보
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정통의 역학으로 보지 않고 일종의 별파로 간
주한다고 지적했다.11)
일제강점기에 나온 또 한 분의 독특한 역학가로는 眞菴 李炳憲
(1870-1940)이 있다. 그는 조선의 패망을 목도하면서, 유교를 개혁해
서 다시 부흥하려고 시도했던 유교사상가였다. 그는 청년시절 동학
농민혁명과 을미사변을 목도하면서 출세를 포기했고, 뒤에 康有爲
(1858-1927)의 개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孔敎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당
시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시각에서 역경을 깊이 연구하고 재해석
하면서 今文易學사상을 수립했다.
용감하게도 그는 유교가 우리 민족에게서 나온 종교라고 주장했
다. 그에 의하면 유교의 근원은 伏犧와 舜에서 시작되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복희는 동쪽인 우리나라의 백두산에
서 일어나 서쪽으로 중원 땅에 가서 제왕이 되었는데, 주역 설괘전에
‘帝가 震方☳에서 나왔다’는 구절에 근거해서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해석했다.12) 더 나아가 “사람들이 공자가 중국의 성인인 줄만 알고
우리나라의 동족임을 알지 못하고, 孔敎가 중국의 종교인 줄만 알고
우리나라의 종교임을 알지 못하는 것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탓이
다.”13)라고 해서 공자도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보았다.14) 이렇게 주
역의 작자로 받드는 성인들을 우리 민족으로 보고 유교를 본래 우리
종교라고 하는 것은 전통의 역학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으로, 그의
금문역학이 조선을 세계의 중심이라는 시각에서 쓰여졌음을 보여준다.
11) 곽신환, 일부 김항의 정역과 후천개벽의 비전, 조선유학과 소강절 철학,
예문서원, 2014, 353-365쪽.
12) 李炳憲全集-上, 369쪽, 「歷史正義辨證錄⋅吾族當奉儒敎論」, 참조.
13) 李炳憲全集-上, 254쪽, 「蹈海叢談」, “人知孔子爲支那之聖, 而不知爲東方之
族, 知孔敎爲支那之敎, 而不知爲東方之敎, 則殆未之思也.” 이외에도 「論孔子
爲東方之族孔敎爲東方之敎」편에도 같은 내용이 나온다.
14) 임채우, 근대 한국역학 사상 연구, 동방논집 제4권, 201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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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也山 李達 역학의 사상과 체계
1. 야산 역학사상의 형성 배경
李達(1889-1958)은 1889년 9월 16일 慶北 金
陵郡 龜城面 마들이(馬杜里)의 유서깊은 가문
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侚永이며 也山은 自號
이다. 야산은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金時習의
화신이라는 명성을 들었다. 15세 되던 해에는
대학이란 경전의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지적
하였다고 전한다.
야산이 태어난 시기는 조선이 붕괴되던 시
기였다. 6세 되던 1894년에는 갑오경장으로 과
거제가 폐지되었고, 이후 일제는 친일내각을 내세워 본격적으로 조
선 침탈을 자행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야산은 10대 후반이 되자 여러
명산을 다니며 修道하였으며, 세상에서는 거짓 미친 척 함으로써 사
람들에게 狂人소리를 듣기도 했다. 당시 일본경찰들도 주역에 미친
사람이란 의미로 야산을 ‘李周易’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전한다. 부
친상 중에 국치를 당한 야산은 3년상을 마치고 나서 28세 되던 해
(1916)에는 금강산에서 공부를 했고 나오면서 뜻한 바 있어 스스로
‘達’이라15) 이름을 고쳤다.
30대 초반(1918-1923) 무렵에는 지리산 등 전국을 周遊하면서 공부
했다 36세되던 해(1924)에는 사업을 통해 나라의 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으로 광산사업 등을 하기도 했다. 이 때 마련된 자금으로 41세
15) 통달할 達자는 학문에 통달했다는 뜻이 아니라, 달(月)을 음차한 記標이다.
야산이 三十而立의 시기를 앞두고 개명한 것은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
에 대한 통찰과 음양론적인 세계관이 확립되었음을 보인다.
<그림 1> 야산 이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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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때에는 강원도 철원지방에 수십만 평을 매입하여 농장을 크게
짓고는, 고향에서 貧民 20여 호를 이주시키고 5년여 공동생활을 하였
다. 이는 유교의 이상인 井田制를 모법으로 삼아 이상사회를 건설해
서 실천한 것이었다.
1944년 56세 되던 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皇極經世書 및 易
理에 기초해서 역사의 흐름을 정리하면서 후천의 시점을 분명히 밝
힌 새로운 역법을 창안했다. 해방 직전 1945년 (57세) 대둔산으로 이
사해서 이듬해부터 제자들에게 주역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59세때
1947년 12월 초 한국전쟁 발발을 예견하고 제자들과 함께 瑞山 安眠
島로 이사했다. 9⋅28수복 후 부여로 와서 제자들을 기르며 주역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69세 되던 1957년 어릴 적부터의 숙제였던 대
학을 考正하고 이듬해 70세를 일기로 작고했다.16)
그의 생애를 간단히 요약하면 그는 10대 후반에서부터 주역 연구
에 몰두해서, 2-30대에는 주역 공부에 전력을 기울였다. 40대에는 사
회 사업을 벌이다가, 해방 직전 50대 부터 경원력 제작을 시작으로
저술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고 할 수 있다.
2. 야산 洪易學의 사상체계
먼저 거시적으로 볼 때 야산의 사상적 특징은 유불선 삼교 합일이
란 점에서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는 유불선 삼교를 경계없이 넘
나들면서 융합적인 사상을 가르쳤는데, 비색한 선천의 시대가 지나가
고 태평한 후천 시대가 도래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후천에 이르기 위
해서는 유교 사상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삼교의 힘을 모아야한
16) 이응국,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야산 이달(李達)선생 기념사업을
위한 학술토론회 자료집>, (사)동방문화진흥회 및 국회의원이철우 주최.
2014. 11. 3. 30-50쪽 및, 이응국, 주역의 정신과 문화, 홍역사상사, 2010.
235-246쪽 참조.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95
다고 보았다.17)
야산은 삼교합일을 강조했지만, 유학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의 사
상은 한마디로 洪易學이란 개념으로 요약된다. 그는 1946년 洪易學
創立期成會를 조직했는데, 여기에서 홍역학이란 서경 「洪範」편의
洪과 역경의 易과 大學의 學을 하나로 결합한다는 의미이다. 다
시 말해 유학의 핵심을 요약해서, 箕子가 말한 洪範의 皇極王道사상
과 易經의 음양사상을 결합하고, 여기에 大學의 修己治人을 방법론
으로 삼아 ‘洪易學’이란 학문체계를 제창했다.
특히 그는 돌아가기 1년전에 마지막으로 대학의 순서를 교정했
다. 대학에 대해 程頤와 朱熹도 본문의 맥락이 잘 연결되지 않아서
착간이 있는 것 같다고 했고,18) 補亡章을 두어서 격물치지의 뜻을 부
연했었다.19) 이 문제는 야산이 15세 때에 錯簡을 지적했던 바와 같
이, 그의 평생의 숙제였다. 그는 대학의 착간 문제를 주희처럼 글
자를 보충하지 않고 원문의 순서만 바꾸어서 대학의 뜻을 통하게
했다.20) 그리고는 “대학의 글은 이전 유학자들의 설명이 명백하고
또한 극진하거늘 어찌 감히 덧붙이랴마는, 그러나 착간되었다는 말
이 있는 까닭에 격에 맞추어보니, 고정할 수 있는 길이 있었다. 비록
도통의 전함에 감히 망녕되게 의론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孔門의 전
수한 법도와 先儒의 후인을 기다린 뜻에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으므
로 간략히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21)고 했다. 다시 말하면 대학
17) 이응국, 주역의 정신과 문화, 홍역사상사, 2010. 236쪽 참조.
18) 朱熹, 대학집주, 右經一章 蓋孔子之言而曾子述之 其傳十章則曾子之意 而
門人記之也 舊本頗有錯簡 今因程子所定 而更考經文 別爲序次如左 凡傳文
雜引經傳 若無統紀 然文理接續 血脈貫通 深淺始終至爲精密 熟讀詳味 久當
見之 今不盡釋也
19) 朱熹, 대학집주, 此章 舊本通下章 誤在經文之下 間嘗竊取程子之意 以補之
...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참조.
20) 조선시대 박세당도 이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김태년, 박세당의 사변록 저
술동기와 대학 본문 재배열 문제, 한국사상과 문화 51집, 2010. 참조.
96 仙道文化 제 22 권
글장의 순서가 어긋났다는 程朱의 말을 듣고 경문의 문맥을 자세히
살펴보니, 나름대로 격에 맞게 바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보였고, 외
람되지만 유교가 사상을 발전시켜온 법도와 이전의 선유가 찾던 뜻
을 모른 척 할 수 없어서 이를 기록해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자
와 주자가 아홉을 해둔 일에 자신은 하나 정도만 덧붙인 것이라고
겸양의 뜻을 나타냈다.22)
야산은 대학이 바로 역을 배우는 관문이라고 보았다. 당시 야산
에게 직접 공부했던 대산 김석진 선생은 “유학의 입문서인 대학은
글 순서가 뒤섞여 있던 까닭에 많은 선유들이 이를 바로잡고자 심혈
을 기울였는데, 야산은 「大學錯簡考正」의 전문을 주역 64괘에 바탕
하여 64절목으로 조리정연하게 배열했다”고 설명하기도 했다.23)
주희는 대학을 매우 중시해서 서거하기 직전까지 대학의 주석
을 고쳤는데, 그의 대학집주에 성리학의 정수가 담겨있다고 평가
한다. 야산도 서거하기 직전에 대학의 착간을 고정했는데, 그의
「대학착간고정」에 중요한 사상이 담겨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야산은 유불선 삼교를 모두 중시하면서, 특히 유학의
「홍범」⋅주역⋅대학을 그 핵심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필자가 보
기에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를 역학자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하다.
야산은 평생 주역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의 사상을 미시적으로 분
석해보면, 「홍범」과 대학 등 유교의 가르침을 주역적으로 이해하
21) 이달, 也山先生文集, (부여, 야산선생문집간행위원회, 壬子年(1972)간행.)
坤冊, 卷之二, 大學錯簡攷定敍記 : 夫大學之書 先儒之說 明白且盡 何敢加疊
然而有曰 錯簡云故 寓格所致 有此攷正之道 雖於道統之傳 不敢妄議 其於孔
門傳受之法 先儒俟後之方 不可黙閉故 略記如左.
22) 이달, 也山先生文集, (부여, 야산선생문집간행위원회, 壬子年간행.) 坤冊,
卷之二, 大學錯簡攷定敍記 : 或問曰 大學之書 於宋朝 先儒頗多正錯 猶有補
闕 而今吾子訂定極詳 然則吾子 過程朱遠矣. 曰惡. 是何言也 不摧本而齊末
寸木 可使高於岑樓 譬之藏物於十階梯之上 程朱子已造九階段而予賴此着力
僅得一階則惡得有其一 以漫其九哉. 是皆推之於先儒末餘之力也. 참조.
23) 김석진, 대산 대학강의, 한길사, 2000. 68쪽.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97
고 해석했을 뿐 아니라 불교와 선도까지도 역학적으로 포섭하고 있
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주역의 이치를 관념적으로만 이해한 것이 아
니라, 당시 우리의 현실에 적용해서 해방과 건국, 한국동란같은 근현
대의 대변혁을 주역으로서 설명했고, 또 그 易理를 현실에 직접 실천
한 經世家이기도 했다.
3. 야산의 后天 역학
야산은 해방이전 53세 되던 1941년 「先后天攷定說」을 지어서 선천
과 후천의 시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1941년 辛巳년이 소옹이 말한
황극경세에서 午會(大過卦) 姤運 巽世 18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았
다.24) 그런데 그는 주역의 巽卦와 蠱卦의 괘효사에 등장하는 庚
과 甲이 바뀐다는 구절에25) 의거해서, 1944년 甲申년에서의 甲을 庚
으로 바꿔서 庚申년으로 고쳤다.26) 그리고 순차적으로 천간을 교체
해나가서, 1947년 정해년을 계해년으로 바꿔서 60 갑자를 종결시켰
다. 야산은 바로 60갑자가 종결되는 1947년이란 시점에서 선천이 종
결되는 것으로 보았고, 1948년 무자년이 갑자년으로 고쳐지면서 새
로운 갑자가 시작되는 이 시점이 바로 새로운 후천이 시작된다고 밝
혔다.27)
그리고 3년뒤 56세 되던 1944년에는 주역의 64괘를 응용한 새로운
역법을 제정했다. 선후천고정설에서 경을 갑으로 바꾼 예를 따르면,
24) 이달, 也山先生文集, 여강출판사, 1989. 119쪽 참조.
25) 山風蠱卦 彖辭에 “蠱는 元亨하니 利涉大川이니 先甲三日하며 後甲三日이니
라”했고 巽괘의 九五효사는 “无初有終이라 先庚三日하며 後庚三日이면 吉
하리라”했다.
26) 이달, 야산선생문집 「선후천고정설」, 以蠱之先後甲 與巽之蠱先後庚 度定
則辛巳當爲丁巳 而中虛三十六年.
27) 이찬구, 주역과 동학의 만남, 모시는사람들, 2010. 136쪽 참조.
98 仙道文化 제 22 권
1944년 8월 24일(음력 7월 6일)의 간지 갑신년 임신월 경신일 갑신시
의 연월일시가 모두 庚申으로 변경되는데, 이 날을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현행 12달의 역법체계를 天道가 주관하는 6周 360易(1周=60
易)과 地道가 관장하는 天空易(5와 1/4日)의 체계로 바꾸고. 이를 庚
元歷이라 불렀다.28)
야산은 갑을 경으로 바꾸는 근거를 주역의 괘효사에서 찾았다. 그
래서 주역 山風蠱卦 彖辭에 “先甲三日 後甲三日”이라 했고 巽괘의
九五효사는 “先庚三日 後庚三日 吉”이라 했는데, 巽卦 九五爻가 動
하면 蠱卦가 되니, 庚이 甲으로 바뀌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로써
실재하지 않은 채 말로만 전해지던 연월일시가 모두 庚申으로 통일
되는 四作庚申이29) 경원력에서는 실재하게 되었다.
경원력은 邵雍(1011∼1077)의 황극경세의 元會運世와 기본구조는
같지만, 4閏卦가 다르고 천공역을 두는 등의 차이가 있다.30) 야산의
역법은 황극경세서에 보이는 소옹의 선천역학을 응용하고 있으나,
소옹이 閏卦를 乾⋅坤⋅坎⋅離괘로 주역 上經에서만 취한 것과는 달
리, 야산은 상경의 坎⋅離괘와 下經의 旣濟⋅未濟괘로 교체하고 氣
朔盈虛數를 계산해서 36虛度數를 보완하며, 閏도수를 天空易에 두는
등 황극경세와는 다른 야산의 독자적인 역법이론으로 발전시켰다.
야산은 이렇게 당시 주요한 화두였던 先天에서 后天으로의 변화를
邵雍의 皇極經世를 근거로 乾卦 九五의 感應變化에 근거해서 원리적
으로 설명했고, 구체적으로 그 度數와 時點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
고 5 1/4이라는 閏數를 天空易으로 돌리고 360도의 周天常數로서 후
28) 이달, 也山先生文集, 여강출판사, 1989. 145쪽 참조. 경원력이란 후천시대
의 책력이란 뜻으로, 동방문화진흥회 홈페이지 http://www.dongbang.or.kr/
에 실린 이응문의 경원력 해설 참조.
29) 당시 민간풍속으로 경신년 경신월 경신일 경신시에 강태공이 내려와 방아찧
는 날이라고 해서, 이를 방아틀에 써붙이는 습속이 전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30) 이응문, 경원력, <야산 이달(李達)선생 기념사업을 위한 학술토론회 자료
집>, (사)동방문화진흥회 및 국회의원이철우 주최. 2014. 96-101쪽 참조.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99
천시대를 상징하는 표준달력을 삼도록 한 것이다.31) 이와같이 선후천
고정설과 경원력은 역학을 역법에 적용시켜 이룬 독창적인 이론이다.
그런데 필자의 생각으로 야산의 ‘후천’은 盈虛數를 추산한 天道 변
화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가 선후천을 고정하고 후천의 역법을 창
안하던 무렵이 해방전 태평양전쟁의 광기가 극에 이르던 시절이었다
는 사실과, 후천의 시점인 1948년은 외세의 통치를 벗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던 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이 중일전
쟁에서 동남아시아로 전선을 확대하고 다시 미국과 태평양전쟁을 무
모하게 벌려나가던 광란의 와중속에서, 야산은 황극경세등의 역리를
추산해서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미 일본 패망
과 정부수립 및 한국전쟁 까지의 일련의 시간적 프로세스를 미리 파
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제의 광분이 극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그는 냉정하게 이후에 전개될 일련의 변화과정을 선후천
의 교체과정으로 해석하면서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과연 야산이 그 시간의 축과 변화를 미리 언급할 수 있었
던 것은 曆法과 易理상의 추론에 의한 것일까? 아니면 직관적 통찰
에 의한 것일까? 필자는 야산의 선후천고정설이나 경원력등에서 보
이는 후천도수는 역리적 추산에만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직관적 통
찰의 결과를 주역과 황극경세서를 빌려서 설명하면서 그의 후천역
학 체계를 수립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무
튼 둘 중 어떤 것이라도 야산의 후천역학은 놀라운 수학적 체계를 갖
추고 있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야산의 뛰어난 수리논리적 사유를 볼
수 있다.
이것은 김항이 후천을 언급한 이래 한국 역학계의 화두였던 후천
개벽에 대한 야산의 역학적 답변이었다. 김항이 후천설을 제기한 이
후 여러 종교사상가나 역학자들의 후천개벽에 관한 이론들이 등장했
31) 이응문, 태극사상과 한국문화, 동방문화, 2015. 197-200쪽 참조.
100 仙道文化 제 22 권
지만, 대부분 선후천의 시점을 분명히 특정하지 못하거나, 체계적으
로 설명하지 못한채 이론만 분분했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야산의 분
명한 해석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는 근현대의 격동기를 몸소
겪으면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1948년이란 건국의 時點을 지목해서
后天의 시작이라고 분명히 하면서 역법체계를 제시했다.
여기에서 야산이 제시한 후천의 始點을 다시보자. 1948년은 우리
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時點이었다. 바로 대한
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로서, 근대의 민중들이 겪었던 고통과 고난의
역사를 생각해본다면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 완전한 해방과 자주독
립국가를 이루는 시점을 후천의 기점으로 삼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위에 눈을 돌려보면, 1948년은 2차세계대전이 종
료되긴 했지만 세계사적으로 아직 격동의 시기였다. 중국은 분열된
채 국공내전이 막바지를 치닫고 있었고, 일본은 천황이 인간선언을
한 채 미군정 하에 있었다. 인도에서는 간디가 암살된 해였으며, 중
동에서는 팔레스타인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야산
은 중국이나 다른 지역이 아닌, 우리의 현실을 중심으로 주역을 해석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Ⅳ. 이달 역학에 보이는 근대민간역학적 성격
1. 탈 전통의 근대사상적 특성
야산은 당시의 서양문명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그것이 우리
에게 미치는 영향과 의미에 대해 고민을 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문
집에는 1950년대에 지은 다음과 같은 시 한편이 전하고 있다.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01
或作衛星或月之 혹 위성을 만들고 혹 달나라에도 가는데
言論文字豈其時 말과 문자로 어찌 그 때를 알 수 있으리!
西來物化方電急 서양에서 들어오는 물질문화는 급박하기만 한데
神理如何極故遲 신묘한 이치는 무슨 연고로 지극히 더딘고
여기에서는 인공위성과 달탐사를 가지고, 서양의 발달한 물질문명
과 과학에 비해 동양의 문명이 뒤쳐지고 있음을 탄식하고 있다. 당시
우주개발경쟁은 1950년대에 시작되었는데, 미국보다 먼저 우주개발
계획에 나선 러시아는 1957년 10월 4일에 역사상 처음으로 스푸투니
크 1호라는 인공위성을 지구 궤도에 올리는데 성공헀고, 야산이 작고
한 것이 1958년 8월 3일이니, 이 시는 그 사이에 쓰여졌을 것이다.
당시에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소식이 야산이 거주하던 충청도의 시
골에도 알려지긴 했겠지만, 유리 가가린이 우주여행을 하기 4년 전으
로, 인류가 달나라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꿈같은 이야기였을 터인데,
야산이 어떻게 이를 언급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32) 아무튼 당시 스
푸트니크 인공위성과 달 탐사계획에 관심을 갖고 한시로 쓴 예는 다
른 나라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우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우연한 해프닝이 아니라, 야산은 오래전부터 서구문명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야산이 서구 과학문명에 관심을 보인 일화들은 여럿 있는데, 그 중
한 예를 들면 우주여행의 원리에 대해 언급한 것이 있다. 위 시를 지
었을 때인지는 확인할 수는 없지만, 1950년대에 그는 여러 제자들 앞
에서 “거울에 빛을 비춰 반사하는 원리로 우주를 여행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했다고 전한다. 신식교육을 받지 않은 야산이 우주여행은
빛의 속도에서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또
32) 달착륙프로젝트는 야산이 작고하고 3년이 지난 뒤에 발표되었다. 1961년 4월
에 유리 가가린이 탄 소련의 유인위성 발사가 성공하자,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이 급히 다음 달에 ‘달 착륙’프로젝트를 발표했으며, 실제로 달나라에
도착한 것은 야산으로부터 10여년이 흐른 뒤인 1969년 7월 아폴로11호이다.
102 仙道文化 제 22 권
한 거울을 이용한 빛 반사의 설명이 얼마나 물리학적으로 타당한 것
인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달나라에는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상식과 비교해볼 때, 당시 시골에 살던 한학자의 설
명치고는 매우 과학적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그는 간혹 선지자인 듯한 예언을 남겼다고 하는 다른
역학자들과도 구분된다. 그는 서구 문명의 본질을 이해하려 했고, 합
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또 그는 이질적인 서구문명의 침입
에 대해 일부 보수유림들처럼 탄식만 하거나 배척하는 차원이 아니
라, 당시 낙후한 동양사회에 발달한 서구의 물질문화가 보완해야 된
다고 보았다. 그리고 해가 지면 달이 뜨는 원리와 같이 동양과 서양
이 서로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야산은 여성교육문제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
는 제자들에게 조선이 패망한 이유중의 하나가 여자를 교육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직
여성차별이 심하던 시기, 여성도
배워야하며 그것이 사회발전의
큰 동력이 된다는 것을 야산은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의 井田圖
는 1954년에 그가 고대의 정전
제를 재해석해서 그린 신도시
건설계획(그림2)이다.33) 흥미로
운 것은 남쪽의 남학교와 대등
한 규모로 서쪽의 여학교가 표
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야산은 보수 유학자들의 비웃음
에도 불구하고 은산에서 강학할
33) 이응국, 야산선생 유묵유품 모음, 101쪽 인용. 이달, 也山先生文集, 151-
152쪽 참조.
<그림 2> 정전도에 의한 신도시
건설계획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03
때는 남학생 64명과 더불어 여학생 6명을 정식으로 받아들여 제자로
길러냈고, 그들은 평생을 주역을 연구하면서 최근까지도 후학 양성
과 역학 발전에 큰 공헌을 남겼다.34)
그의 서구문명이나 물질문화에 대한 관점은 그가 갖고 있던 세계
관과 역사관에 대한 전체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야산은
유불선 삼교를 아우르는 넓은 시야를 갖고 있던 한학자이자, 평생 주
역을 손에 놓지 않은 역학자였지만, 동양사상이 서양보다 우수하다
든지 우리의 전통을 고수해야한다는 식의 보
수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당시의 세계는 동
양과 서양이 서로 교류하면서 뒤섞이는 시대
로서, 서양문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야산이 단군 天符印을 연구해서 그렸다고
하는 五德地(그림3)를 보면, 중심에 있는 원의
서쪽 방향이 터져있는데,35) 원의 오른쪽이 틔
워져있는 것은 바로 서방의 기운을 받기 위해
서 서쪽을 틔워 놓은 것이라고 한다.36)
1946년 가을 대둔산에서 여러 제자를 배출하면서 洪易學會를 창립
하고, 야산이 그 취지를 담아 ‘敷文’을 썼다. 이 글은 야산의 사상을
잘 요약한 명문으로 평가받는다.
34) 당시 제자중 하나인 金玉姙(1930-2016)은 평생을 주역을 연구했고 80년대 중
반부터 제자를 양성했으며, 홍역학회와 (사)동방문화진흥회를 설립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35) 이달, 也山先生文集, 155-156쪽 참조. 위 도표에서의 왼편이 동쪽 오른편
이 서쪽으로, 서양식의 방위좌표와는 다르다.
36) 2016.7.19. 이응국과의 인터뷰에서 인용. 이응국은 야산의 손자로서 30여년에
걸쳐 야산의 친지 및 제자 들로부터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고 인터뷰하면서
야산의 생애에 대해 조사 연구를 해왔다. 야산 이달(한길사, 2017)이란 전
기를 집필 완료해서 발간할 예정이다.
<그림 3> 오덕지
104 仙道文化 제 22 권
하늘에 근본을 두는 자는 위로 친하고 땅에 근본한 자는 아래로 친하며,
불로 이루는 자는 마른 데로 나아가고 물로 이루는 자는 젖은 데로 나아간
다. 선천과 후천 사이의 가운데에서 그 종시를 바르게 하니 때의 用과 때의
뜻에 때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 동서는 혼합하고 남북은 나뉘어 지는데, 否
卦와 泰卦가 교합하는 곳에서 천지를 살피며, 姤卦와 復卦의 이
치를 유추하고, 咸卦와 恒卦가 합하는 곳에서 인사를 살피며 損卦
와 益卦의 씀을 정한다.37)
이는 복희팔괘가 문왕팔괘로 바뀌는 이치대로, 선천에서 후천으로
변함을 말한 것이다. 세상은 바야흐로 山澤通氣가 되어 동양과 서양
은 서로 만나 뒤섞여 이제 후천이 왔다. 천지자연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天⋅地⋅水⋅火의 상을 가
진 乾☰ 坤☷ 坎☵ 離☲라는 기본 주축괘를 통해서 설명하고, 때에
맞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는 주역의 이치를 통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해명하면서, 동과
서는 혼합하고 남과 북은 나뉘어진다고 했다. 이는 당시 국제정세를
지적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동안 서구 제국주의 침략전쟁으로 대립
되어있었던 동양과 서양은 서로 교류를 하지만, 대립하지 않았던 남
북간에는 오히려 분리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야산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 진영 대 자본주의 진영이 대립하게
된다는 시대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면서 생기는 현상을 말한 것인데, 특히 우리 해방정
국에 있어서의 좌우의 대립과 앞으로 한국전쟁까지 벌어지고 남한과
북한이 분열되는 상황을 예측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는 제국주
의 열강에 대한 대립과 투쟁의 근대 시기가 지나고, 현대에서는 동양과
서양이 서로 소통해야 하며 교류하게 된다는 새로운 시대인식이다. 당
37) 本乎天地者 親上親下 濟乎水火者 就燥就濕. 中於先後 正其終始 時之用時之
義 維時爲大. 東西混會 南北尙分. 觀天地於否泰之交而推姤復之理 察人事於
咸恒之合而定損益之用.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05
시는 해방직후로서 중국에는 국공내전이 한창이었고, 남북한 모두 신탁
통치체제하에 있었다. 앞으로 어떤 정국이 벌어질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감안해보면 야산의 견해는 시대를 통찰하는 선
견지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남북의 대립 역시 영원한 것은 아니다. 1954년 9월 야산
이 단군사상과 관련해서 쓴 「符印要義序」를 보자.
바야흐로 이 中天한 날에 萬邦이 한 울안이 되고 百家가 모두 길러져서
先天의 쌓인 體와 后天의 널리 베푸는 쓰임이 이에 판별되리라. 萬法이 歸
一하야 道가 본래 두 이치가 아니니, 오직 신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善惡 是非 長短 得失을 스스로 마침내 합하는 도가 있으리라.38)
이를 보면 야산은 동서남북의 분열과 갈등은 근본이 다른 것이 아
니며, 결국 하나로 융합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전통 학문을 강학
했지만, 보수적인 유학자들처럼 뒷전에서 변화하는 시대와 세태를
탄식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서구문명의 본질을 파악하려고 노
력하면서, 동서가 만나고 남북이 뒤섞이는 현상을 천도변화의 거시
적 안목으로 바라보고 역리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동양문명이나 서
양문명 어느 한쪽이 우월하다고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동서의 교
류는 필연적 추세이며 결국 중천의 때 능력을 갖고 있으면 동서남북
은 사해일가로 융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전통에 매인
국수주의나 보수주의자와도 분명하게 구별된다.
2. 탈 성리학의 민간역학적 특성
여성을 차별하던 시기에 주위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성
38) 方玆中天之日 萬邦同囿 百家咸育 先天之積軆 后天之博用 於斯焉辨矣 萬法
歸一 道旡二致 善惡是非長短得失 惟神惟人 自有終合之道.
106 仙道文化 제 22 권
을 존중하고 교육한 데에서도 알 수 있지만, 야산 역학의 기반은 소
외된 민중들이었다. 그는 양반가의 후손이었지만 평생 민중의 삶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양반행세보다는 佯狂을 한 경우가 많았고, 일경
앞에서 천황을 비웃다가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 사업을 통해 거금을
모은 뒤에는,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 심지어 가난에 시달리던 가
족들의 도움 요청도 거절해버리고, 고향의 빈민들과 공동생활을 했
고, 독립자금을 지원했다. 해방 직후에는 김구 이승만 등의 정치가들
이 명성을 듣고 비서를 보내 합작과 도움을 청했다. 중앙 정계에 진
출해서 권력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지만 모두 거절하면서 오
히려 警句를 보내서 경계했다.
1944년 야산 역학의 정수라고 하는 경원력을 창제하고, 기념으로
시 한수를 짓고는 제자들과 방아찧는 행사와 풀무놀이를 행했다.
見立舂有感 방아 세운 것을 보고
四作庚申獨見舂 연월일시 네 경신을 방아에서만 보나니
太公當日依形容 당시의 강태공이 의지해서 나타났네.
遺音飛鳥觀過處 새가 울며 날아간 곳 보노라니
誰識乾坤造化功 그 누가 건곤조화 자취를 알겠는가?39)
야산은 자신의 사상을 역법으로 집대성한 경원력을 완성하고는 제
자들과 어울려서 방아를 찧고 풀무놀이를 했다. 그는 유서깊은 명문
가의 후손으로 도학자인양 행세하거나 혹은 양반행세를 할 수도 있
었으나, 그는 민초들의 신산한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보이며
기꺼이 함께 했고, 지배층이나 양반들의 시각이 아니라, 일반 민중들
의 삶속에서 역학을 이해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다보니 때로는 상
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기행도 많이 행했음을 볼 수 있다. 다음의
예화를 보자.
39) 야산선생문집, 8쪽.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07
야산이 1947년 12월
26일 제자들과 계룡산
으로 가는 도중에 개태
사를 들러서는, 제자들
에게 오동나무 지게에
뽕나무 작대기를 들게
하고 무리지어 가게 하
였다. 마침 옥구에 사는
부인이 시주한 108개
의 바가지[瓢]가 있었
는데 이 바가지를 ‘달바
가지’라 하면서 다같이
밥을 담아 먹었다.40)
공부하던 글방의 선비들에게 지게를 지게 하고 바가지에 담을 밥
아 먹인 해프닝은 무슨 의미일까? 그 전에 개태사 화주보살이 부처
님 先夢으로 가져왔다며 뽕나무 작대기를 강학중인 야산에게 가져오
자, 뽕나무를 받으며 나라를 지탱하는 작대기의 뜻이라 해석했다. 즉
등에 짊어지는 지게는 艮方의 우리나라로 보았고, 이 지게를 지탱하
는 지게받이라는 것이다.41) 작대기를 맡은 야산은 후천의 권력을 누
리는 왕이 아니라, 힘든 짐을 지고 가는 일꾼이라는 뜻으로 해석했
다. 이렇게 야산은 제자들과 같이 지게를 지고 일꾼처럼 밥먹는 등의
역학적 해프닝을 연출하고, 방아를 찧고 풀무놀이를 하거나 윷놀이
고뉘놀이 같은 민중들의 놀이를 가지고 역학적으로 재해석하고 의미
를 부여했다. 다음은 지게를 지고 바가지로 밥을 얻어먹은 며칠 뒤
인, 1947년 섣달 그믐에 윷놀이를 하며 읊은 시이다.
40) 이응국,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26쪽 참조.
41) 이응국,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37쪽 참조.
<그림 4> 윷판과 후천팔괘 및 비괘(否卦)
108 仙道文化 제 22 권
先天除夕韻 선천의 섣달 그믐에 읊다
四千二百八旬筵 단기 사천이백팔십년 자리에
檀柶田田氣數連 단황의 윷밭마다 기수 이어졌네
殷夏禮因周損益 하⋅은의 예를 좇아 주나라 손익 했으니
中天戊甲紀元年 중천의 무자가 갑자 되니 후천 기원년이라42)
원래 섣달 그믐은 윷놀이를 하면서 守歲를 하는 것이 우리의 풍속
이다. 그런데 야산은 이 시를 지은 1947년을 선천이 끝마치는 해로
보았으니, 위 시는 선후천이 바뀌고 경이 갑으로 바뀌는 이치를 윷판
에 비유해서 설명한 셈이다. 여기에서 윷판의 기수란 무엇인가? 윷판
은 둘레는 28수요 가운데는 북극성을 뜻한다. 28수를 윷판에서는 밭
이라 하니 밭은 땅의 成數인 十을 쓴다. 28×10=280이 되고, 윷말을
‘동’이라 말하니 묶음 단위로 ‘한 접’이 100이 되듯이 ‘한 동’은 1000이
되니 넉동은 4천이 된다. 따라서 윷판 속에서 4,280의 수가 나온다.
그런데 윷판에 담긴 4280수는 바로 단기 4280년 즉 서기 1947년을
지목하고 있으며, 이 해가 선천을 마치는 도수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또한 야산은 윷놀이를 단군시대의 神誌가 지은 것이라고 보고 있었
으니, 단군시대의 윷놀이에 후천도수가 담겨 있음은 우연이 아닌 셈
이 된다.43) 아무튼 1947년 섣달 그믐날 자리에서 사람들이 설맞이로
놀고 있던 윷판에 비유해서 선천을 마치고 후천이 시작되는 뜻을 담
은 시를 지었고, 그 시속에 후천의 도수를 설명했다. 다음도 야산이
윷판을 두고 지은 시이다.
42) 야산선생문집, 11쪽.
43) 필자의 견해로는 이 윷판이 원래부터 후천의 수리에 의거해서 만들어졌다기
보다는, 야산이 후천의 도수를 설명하기 위한 방편으로 가장 대중적인 민속
놀이인 윷판에 비유한 것이라고 본다. 갑을 경으로 고치는 선후천고정설과
경원력을 비롯해서, 윷판과 바둑판까지 이용한 도수를 일치시킨 것을 보면
야산 역학의 뛰어난 수리체계를 볼 수 있다.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09
馬田章 말밭 장
五極三才槿花熱 오극삼재 담은 무궁화
꽃 활짝 피었는데
誰人試手相對觀 누가 나와 상대해서
윷가락 던져볼까
윷은 고유한 우리 민족의 놀이지만,
사실 윷놀이는 조선시대의 완고한 양
반들에게 멸시의 대상이었고 금지의
놀이였다. 성호사설에 윷놀이는 군자가 손댈 만한 것이 아니라고
했고, 사대부가의 유교 예절을 다룬 사소절에도 “여자가 윷놀이를
하는 것은 뜻을 해치고 위의를 거칠게 만드는 나쁜 습속”이라고 하면서
남녀가 어우러져 놀면서 큰소리를 내게 되니 금해야 한다고 했으니, 조
선 시대 일부 양반들은 윷을 천시하고 금지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44)
그런데 야산에게 윷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그는 아녀자나 평
민의 놀이로 폄하되었던 윷판을 가지고 후천의 度數를 찾아냈고, 선
천을 마치고 후천이 다시 시작될 것임을 당당하게 밝혔다. 아마도 당
시 정주역학을 신봉하던 보수적 역학자들에게 이런 해석은 받아지기
어려웠음에 틀림없다.
왜 야산은 권력을 가진 자들과 합작하기보다 빈한하고 소외된 자
들과 가까이하려 했을까? 필자는 그것이 야산의 정신이기도 하거니
와 후천시대의 특성이기도 하다고 본다. 다시 말해 부와 명예와 권력
을 가진 자들이 득세했던 陽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소외되고 천시받
았던 陰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란 뜻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야산이 본명을 바꾼 일에서도 드러난다. 28세 무렵 금강산
에서 공부를 하고 나오면서 達이라 이름을 고쳤는데, 누가 그 이유를
44) 임채우, 유득공 경도잡지 윷점의 역철학적 해석. 동방학지 157집, 2012. 인용.
<그림 5> 윷판과 고뉘판
110 仙道文化 제 22 권
묻자 달로 이름한 뜻은 선천은 양이 주장하고 후천은 음이 주장하기
때문이라고 했다45) 즉 達의 記意는 달(月)로서, 양의 논리가 지배하
던 시기가 마치고, 음의 시기가 왔음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佯狂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야산의 양광은 삼
도봉에서 공부하고 나온 19세(1907년)부터 시작되어, 일제강점기 때
에 계속되었는데, 일제의 순사들조차 아예 미친사람으로 취급해버리
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아마 이것은 주역공부에 몰입한 그의 사상을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탓도 있었을 것이고, 일정치하라는
감시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한 苦肉策인 측면도 있었다고 본다. 양광
을 하지 않았다면 일제치하에서 그가 온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의 양광은 57세 때 광복되던 날까지만 발견
되고, 해방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여기에서 ‘달’은 태양을
상징으로 내세우는 日本의 반대말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양광은 국권을 잃은 암흑무도한 시대의 明哲保
身策이기도 하지만, 달이란 정체성을 가진 자신의 존재가 해가 져야 달
이 뜨듯, 운명적으로 공존할 수 없다는 뜻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산의 달 개명은 후천시대 그의 존재와 역할이 여기에 있음을 표
현한 것이다. 또한 태양이 아닌 달이란 것은 지배층의 시각에서 피지
배층의 시각으로의 변화를 함축한다. 야산은 후천시대의 새로운 주
인공은 소수의 영웅들이 아니라, 선천시대에 소외받던 민중들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민중들에게 축복을 기원했다.
井田觀碁 정전에서 바둑판을 보다
七二土回三六春 칠십이토 다시 돌아 온 세상 봄이 오니
堯何人也舜何人 요임금은 누구고 순임금은 누구인가
我亦有丹君信否 나도 지닌 붉은 마음 그대는 믿겠는가
用時還解壽斯民 때에 맞게 해방이 돌아오니 우리 백성 오래 살리46)
45) 이응국,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31쪽 참조.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11
이 시는 맹자에 나오는 顔淵의 말을 인용해서, 중국에만 요순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요순이라는 것이고, 우리 백성들도 다 요순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도의 순환법칙에 맞게 해방을 맞이한
우리나라 백성들 즉 이 땅의 민중들에게 행복하게 오래 살으라고 축
도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소외받던 여성을 존중했고, 윷판
고뉘판 등 천대받던 민속놀이속에서 후천의 역리를 지적했으며, 바
가지에 밥을 담아 먹는 지게꾼을 자처했고 민중의 시각에서 주역을
해석했다.
3. 탈 중국의 한국 중심주의 사상
야산의 역학적 관심은 義理나 象數의 해석에 매달리거나, 河圖洛
書 등의 추상적 논의에 참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그의 문집에는 이
들에 연관된 도판들도 등장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문제의식을 보면 기
존의 역학자들과는 시각 자체가 틀렸고 패러다임이 달랐다. 그는 조
선의 패망에서 한국전쟁까지 수난의 근현대를 몸소 겪었고, 이를 역
학적으로 해명하는데 그 중심에는 언제나 한국이 있었다.
선후천고정설이나 경원력을 보면 그의 관심은 일제식민으로부터
의 해방과 독립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제 강점기 양광을 하
면서 선후천고정설과 경원력을 창안했고, 깜깜한 그믐과 같은 때에
이미 해방과 더불어 후천이란 새로운 시대가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도래할 것을 예측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46) 이응국,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39쪽 참조. 이 시도 선천의 도수를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바둑판은 사방의 변이 18이니 한바퀴를 도면 72가
된다. 바둑판을 만든 요임금은 16세에 등극하였으므로 그가 태어난 해를 유
추하면 기축년[서기전 2372년]이 된다. 따라서 기축년으로부터 72갑을 마치
는 무자년[1948년] 까지를 셈하면 60×72=4320년이 되니 4320년은 바둑판의
한 판의 도수가 된다. 윷판이 4320의 도수를 가진 것처럼 바둑판의 수리도
후천을 시작하는 해가 단기 4320년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112 仙道文化 제 22 권
한국전쟁 직전부터 야산의 사상
은 단군과 연관되어 또한번 새로
운 양상을 보인다. 야산은 1947년
계룡산 인근에 있던 개태사의 海
印을 해독한 뒤에47) 개태사에 단
군을 모신 전각을 짓도록 30만원
을 시주했다. 당시로서 거금을48)
희사한 것은 단군각 건립에 주도
적인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
다. 9월 9일 상량식을 거행하면서 야산은 후천의 運을 開創한다는 뜻
으로 創運閣이라 명명했다.49) 이 뒤로부터 단군과 관련된 일련의 저
술과 행사가 말년까지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야산은 안면도에서
1951년 부여로 이사해서 聖住山에 제자를 가르치는 공간을 마련하고
서 「三一學院」이라 명명하고, 檀皇陟降碑를 새기고 매년 삼일단에서
개천절 행사를 거행했다.
또 이 무렵 우리의 역사에 등장하는 비기를 단군과 관련해서 새롭
게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 먼저 야산은 고려사에 등장하는 단군의
신하인 神誌가 지었다는 神誌秘詞를 풀이해서 五德印과 함께 삼일학
원의 벽에 걸어두었고 제자들에게 천부경을 공부하게 했다. 또 「서운
47) 당시 개태사의 화주보살이 우연히 얻은 도장에 새긴 篆文을 해독하지 못해
서 애를 태우고 있던 중, 야산이란 역학자의 명성을 듣고 1947년 해독을 의
뢰했다고 한다. 야산은 도장의 篆文을 “聖夢化領 賢氤梵光 敎道天師 玖妙亦
暎”의 16자로 해독하고 이것이 의상조사가 당에서 가져온 海印이라고 해석
해주었다고 한다. 이응국, 야산선생 유묵유품 모음, 2016.7.21. 71쪽 참조.
이와 관련된 내용은 시인 김지하의 기록에도 등장한다. 김지하, 사상기행
1. 실천문학사, 1999, 60쪽 인용.
48) 대략 1년의 시차는 있지만 1948년 7월 쌀한가마니의 값이 127원이었다고 하
니, 30만원이면 2362가마의 값에 해당한다고 보면 현재 시가로 4억원이 넘
는 거금이었음을 알 수 있다.
49) 이응국,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37쪽 및 44쪽 참조.
<그림 6> 신지비사 한글과
정전도(井田圖) 및 정괘(井卦)
(야산선생 유묵유품 모음, 97쪽)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13
관 비기」속에 있었다는 震檀九變圖를 단군을 중심으로 역학적으로
해석해서 새롭게 그렸다.50)
이상에서 보면 야산은 창운각이란 단군사당을 짓고, 삼일단을 세
우며 천부경과 신지비사 등을 재해석하는등 1947년부터는 말년까지
단군과 관련된 일을 집중적으로 전개했다.
이응국은 이에 대해 유불선 삼교의 도움으로 후천을 넘어왔으니
앞으로는 國祖 단군의 기초 위에 삼교의 결실을 이루자는 것으로, 이
것이 바로 ‘三一’의 뜻이라고 보았다.51) 필자의 생각으로 한국전쟁이
란 민족의 비극을 생각해볼 때, 한민족의 시조를 숭상한 것은 골육상
쟁을 화해하기 위한 의미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아무튼 그의 이런
국조 단군 추숭에 대한 인식과 역학적 재해석 역시 이전의 중국중심
의 역학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이외에도 야산의 문집을 보면 주역의 卦와 辭를 가지고, 당시의 한
국의 현실이나 전래의 비결 및 당대에 민중들 사이에 떠돌던 讖謠등
과도 연결시켜 역학적으로 재해석해서 설명한 내용이 자주 보인다.
여기에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기존의 역학이 중국을 중심에 두
고 그들의 역사와 사상을 통해 주역을 이해했고, 중국식 주역의 학습
자였다고 한다면, 야산은 근현대의 시간적 좌표와 축을 우리에게 두
고 후천이란 개념을 정립했고, 과도기의 위난을 정리하면서 한국중
심의 역학을 전개했다. 야산의 역학은 우리의 시각에서 주역을 바라
보고 우리의 문제를 풀어가고 있다. 결국 우리나라가 역사의 주체이
며 후천시대를 열어가는 주인공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
것이 김항이 후천을 언급한 이래 한국 역학계의 화두였던 후천개벽
에 대한 야산주역의 답변이었다.
50) 이달, 也山先生文集, 148쪽 참조.
51) 이응국, 야산 이달 선생의 생애와 사상, 28쪽 인용.
114 仙道文化 제 22 권
Ⅴ. 결론
근대민간역학은 19세기말 조선의 구체제가 붕괴되어가던 격변의
시기에 봉건적 중화주의와 관학적 시각을 벗어버리고 우리 중심으로
주역을 재해석하면서 탄생한 한국의 자생적이고 독자적인 역학이다.
전통시대의 국교였던 성리학이 조선의 패망과 일제강점기, 해방 및
한국전쟁의 격변과 혼란에 대해 침묵할 때에, 근대민간역학은 기존
의 역학 체제와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면서, 후천이란 개념을
통해 민중들의 고통스런 삶을 위로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주었다.
특히 야산 이달이란 걸출한 역학자에 의해 근대민간역학의 전통은
새로운 차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중국중심의 시각을 완전히 벗
어버리고 우리의 시각에서 주역을 이해했고, 또 고유사상과 문화를
역학적으로 재해석하므로써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한
국역학의 전통을 완성했다.
야산은 일제강점기인 30대까지는 역학공부에 몰입했고, 해방직전
50대 무렵에는 독자적인 후천역학을 수립했으며, 한국전쟁 이후 60
대에는 한국 고유사상과 융합된 근대민간역학을 완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중국의 주역이나 주석들을 수동적으로 공부하는 학습자
가 아니었고, 관념적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만도 않았다. 그는 주역을
독창적으로 이해했을 뿐 아니라, 역학을 이용해서 봉건⋅사대의 전
근대적 울타리를 벗어나서 당시의 혼란을 극복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업을 몸으로 실행한 실천역학가였다는 점에서 기존의 역학가들과
는 차원이 달랐다.
또한 그는 권력과 결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지
배층이나 민중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로서의 시각이 아니라, 직접 지
게를 짊어지고 일을 하는 농사꾼이나 방아를 찧는 일꾼의 입장에서
주역을 해석했다. 이런 점에서 야산의 역학은 ‘근대적 민간 역학’이라
고 부를 수 있다.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15
이상의 연구결과를 통해 야산 이달의 역학의 사상은 크게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전통시대에서 현대로
의 탈바꿈을 ‘후천’이란 개념을 동원해서 역학적 시간축에서 설명했
다는 점이다. 둘째는 조선시대 세계관을 규정했던 중화주의라는 울
타리를 벗어나, 한국중심의 새로운 역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점이다.
셋째는 윷놀이나 고뉘 한글이나 단군 등을 결합한 민중의 시각에서
역학을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암울했던 일제식민을 벗어나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과
더불어 새로운 후천세계가 열리는 것으로 귀결되었고, 이 시점을 중
심으로 새로운 시간적 좌표를 정했고(경원력) 공간의 형식을(정전도)
구상했다. 야산은 이렇게 한국주역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고, 이 점에
서 야산의 역학의 특징을 한마디로 한국중심의 후천역학이라고 명명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런 야산 역학을 민족주의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야산의
근대민간역학적 특성은 그동안 중국중심으로 닫혀있던 폐쇄성을 우
리의 시각으로 열어젖히면서 드러난 한국적인 역학인 동시에 역학의
본질적 구현이라고 본다. 왜냐면 주역이란 절대 불변의 도를 정립하
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다양한 시각을 열어주는 것이
본래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야산은 주역을 中國이나 程朱
에 고착화 절대화하지않고, 당시 우리의 현실에 근거해서 ‘근대’와
‘민간’이라는 생동적인 시각에서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었다. 우리
의 특수한 역사적 경험속에서 발생하고 성장한 한국의 근대민간역학
은 한 대 관방역학이 왕실의 신비화를 위한 어용학문이 되었을 때,
비직(費直) 등의 민간역학이 등장해서 역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처럼, 한국역학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었으나, 그동
안 그다지 주목받지도 못했고 제대로 평가되지도 못했던 것이 사실
이다. 그러나 우리의 독자적인 역학전통이자 새로운 주역학으로서,
앞으로 좀 더 관심을 갖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116 仙道文化 제 22 권
【參考文獻】
원전자료
이달, 也山先生文集, 부여, 야산선생문집간행위원회, 壬子年.
이달, 也山先生文集, 여강출판사, 1989.
이응국, 야산선생 유묵유품 모음, 대전, 홍역사상사, 201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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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투고일 : 2016년 12월 13일 심사완료일 : 2016년 12월 31일
게재확정일 : 2017년 02월 20일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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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Characteristics of Korean thoughts in
Changeology of Yasan Lee Dal(也山 李達)
-Centered on modern civilian Changeology-
Lim, Chae-Woo
(Univ. of Brain Education)
The study focuses on Zhou-Yi (周易) in the confusion and the
contradiction of the modern society which spans from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to the period of the Korean War, Japanese colonial era.
Lee Dal particularly emphasized Seokyeong Great Plan(洪範) Zhou-Yi(周
易) Great Learning(大學); thus, he established his own philosophy
“Hongyeokhak (洪易學)” and named it after the three publications. He
started publishing his work as to Ju-Yeok before and after the
independence; a considerable number of illustrations covering Ju-Yeok
have been descended.
He explained the period of the great change in the modern times with
the concept, so-called Post-Heaven(后天). He interpreted the change from
Pre-Heaven(先天) to Post-Heaven based on Changeology while explaining
mathematics (數理) with the folk play such as the Korean traditional play,
the yut board. He also established the unique Changeology, which is
different from Ju-Yeok focusing on the ontology and metaphysics-dealing
也山 李達 역학의 한국사상적 성격⋅임채우 119
with fidelity (義理) and the outer appearances and numbers (象數); he
attempted to explain Hexagram words (卦爻辭) of Zhou-Yi in the
Korean way by associating it with the reality in the country and the myth
of Dangun. He is a changeologist who understood and applied Zhou-Yi
based on the reality in Korea rather than China by explaining the advent
of a new era and the end of the feudal age from his experience in the
Korean War, the turbulent era, Japanese colonial era based on
Changeology; In short, he was the changeologist who completed the
modern civilian Changeology.
Key Words : Zhou-Yi, Great Plan(洪範), KyungWon Calendar(庚元歷),
Pre-Heaven(先天), Post-Heaven(后天), Kim Hang(金恒),
Re-Beginning of Heaven and Earth(開闢), Lee Byunghon
(李炳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