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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역사] 한국노동조합운동사
한국노동조합운동사 1 (87년 이전) 1.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제 1강의에서 확인하였듯이 노동자란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댓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하는 사람이며 노동조합이란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과 복지증진 그리고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조직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개별적인 노자관계를 넘어서서 그 나라의 총자본과 총노동과의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에 관한 역사이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의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동시에 민주주의 발전의 우여곡절과 수준이 깊게 반영된다. 곧 노동조합운동이 갖는 세계적인 보편성과 그 나라의 정치 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특수성이 양 측면을 이루며 한 나라의 노동조합운동사가 엮어지게 되는 것이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이다. 일제 하와 해방정국의 노동조합운동은 물론 제 1공화국에서 제 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노동조합운동은 항상 정치적 격변의 종속변수였으며 그 결과는 이전 운동과의 단절이었다. 실제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나이테만큼 굵고 진한 검은 줄을 여러개 갖고 있는 경우도 드물다. 거의 주기적으로 찾아 온 노동조합운동의 겨울은 그만큼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을 위축시켰으며 이 운동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대중운동으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한 것은 1987년 여름의 전국적인 파업투쟁 이후부터이다. 80년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운동이 정상적인 발전의 궤도 위에 오른 것은 불과 6년 전의 일인 것이다. 한국노동조합의 역사를 87년을 분기점으로 전사와 후사로 나누는 것도 이 때문이다. 2. 일제 하의 노동조합운동 (1)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경영이 출현한 것은 18세기 후반 광업분야에서 였다. 그러나 임금노동자의 투쟁으로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투쟁은 1887년 6월 함경도 갑산군 초산역에서 일어난 광업 노동자의 투쟁이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노동조합은 1898년 함경도 성진에서 세워진 성진본정조합이다. (2)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는 조선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중요한 계기를 이루었으며 한반도를 대륙침공의 병참기지로 구실하게 하기 위한 식민지 정책은 공업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임금노동자의 수도 크게 늘어났다. 통계조사가 이뤄진 첫 해인 1911년 조선의 공업 노동자 수는 1만 2천여명에 불과 했으나 1942년에는 52만여명으로 늘어났으며 1944년의 전 산업 노동자의 수는 212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3) 산업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도 확대되었다. 한일합방 직후인 1912년 6건이었던 노동쟁의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84건, 대륙침공을 위한 조선 북부 공업화가 이뤄지던 1931년 205건으로 늘어났다. 부두, 인쇄, 신문배달 등의 분야에선 비교적 일찍부터 노동조합조직이 만들어졌으며 노동자의 단결도 강하였다. 그러나 조직성이 약한 자유노동자가 근대적 공장노동자보다 많은데다가 그 공장노동자도 여성이 많은 정미, 섬유 분야 위주이며 숙련과 기술을 요하는 중화학공업의 노동자가 적었던 관계로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은 주로 광업, 부두, 우편배달, 인쇄, 제사, 고무, 양말공장, 면옥(냉면집) 등의 분야에서 활발하였다. 사무전문직등 정신노동자의 수가 적고 이들의 사회적 지위가 비교적 높았던 일제 하에서 은행원 노조와 이들의 파업을 제외 한다면 정신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은 극히 미미하였다. (4)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서 노동조합운동은 주로 비정치적인 분야로 제한되었으며 경제투쟁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본가가 일본인이며 소수의 조선인 자본가도 친일세력이었던 만큼 자본가에 대항하는 노동조합운동도 자연스럽게 민족해방운동의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1929년 초 전 조선인의 성원 속에 84일 간 계속되었던 원산총파업은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편 1923년 7월 서울 시내 네 군데의 고무공장 여성 노동자들이 임금인하 반대와 악질감독 해고를 요구하며 ‘아사동맹’을 결성하고 동맹파업을 벌인 예에서 드러나듯이 민족적, 계급적 차별과 착취에 신음하던 조선 노동자들의 처지는 단순한 경제투쟁조차도 초기부터 격렬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하였다. (5) 1929년 원산총파업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은 점차 강화되었으며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은 전면 금지되었다. 통제가 강화되자 노동자들의 투쟁은 경찰서 습격등 전례없는 격렬함을 보였으며 30년대 중반 이후 비합법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비합법 지하운동으로 들어선 노동조합운동은 적색노조등 지하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기 위한 민족해방운동에 본격적으로 가담하게 되었다. 동시에 일제의 가중된 탄압과 착취를 피해 노동자와 농민들의 국외 이동이 대량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해외 무장독립운동의 주요한 보충대가 되었다.
3. 해방정국의 노동조합운동 (1) 미 군정청 노동부 발표에 의하면 1946년 11월 30일 현재 노동조합 수가 남한에서만도 1,179개의 노조, 조합원 304, 005명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 산하의 노동조합 수가 1,111개, 조합원 246,777명이며,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 산하의 노동조합 수가 68개, 조합원 57, 228명이었다. (2) 전평은 1945년 11월 5일 전국 13도의 50만 조합원을 대표하는 505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결성되었다. 해방 4개월만인 45년 12월 전평은 1,757개의 노동조합 약 55만명의 조합원이 금속, 화학에서 사무원노조에 이르기까지 16개 산업별 노조의 총연합체로 발전하였다. 해방정국의 노동조합운동은 그 위세에서 보여지듯이 전평이 주도하였으며 전평 간부진의 대부분은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을 겸하고 있었다. 이같은 노동조합운동의 좌익적 경향과 좌익의 주도성은 일제 하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노동운동이 일제의 극심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지하에서 비합법투쟁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 때 이러한 비합법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한 세력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이었다는 점, 또한 해방 직후 감옥에서 풀려난 많은 사회주의 노동운동가들이 즉각 전국적인 규모에서 노동조합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는 점 등에 기인한다. (3)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이하 대한노총)은 우익 청년조직인 대한독립촉성청년총연맹을 모태로하여 1946년 3월 10일 결성되었다. 대한노총은 처음부터 전평의 확대강화를 저지하고 반공투쟁의 일익을 담당하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우익진영에서 정치활동 혹은 청년운동을 하던 정치적 야망을 품은 반공청년들이 노동조합의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상층 지도부만 먼저 조직한 것이었다. 이러한 대한노총이 전국적인 노동조합을 총괄하는 조직으로 되는 과정은 이미 산별조직에 뿌리를 박고 있었던 전평 산하 노조를 축출,분쇄하는 반공투쟁 과정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4) 해방 직후 일제의 농업정책을 계승한 미 군정의 공출제도, 저농산물 가격정책, 미봉적인 농지개혁 등은 농가경제의 피폐와 이농을 속출시켜 농업생산의 급격한 감소를 가져왔는데 이것이 노동자 대중에게는 식량부족 및 그 입수의 어려움이라는 노동자의 생존 그 자체를 위협하는 위기적 현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당면 요구는 식량보급이었으며 악성 인플레에 따른 실질임금 인하 반대도 주요한 요구였다. 해방 직후 최초의 노동쟁의는 친일자본가 박흥식 축출요구등을 내세운 화신백화점 700여 종업원들의 투쟁이었다. 이 쟁의는 장택상 경찰부장과 전평의 중재로 요구가 관철되는 원만한 타결을 보았으며 쟁의비용 10만원을 회사에서 부담한다는 요구도 받아들여졌다. (5) 미 군정 하에서 전평에 대립하고 있었던 것은 이미 개개 공장의 공장주만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대립하고 있었던 것은 기업주들과 이에 유착한 우익 정치인 및 미 군정이었다. 따라서 개별 자본가에 대한하여 일상적인 이익을 확보하려는 경제투쟁도 그 발전과정은 정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전평은 산업별 노동조합의 연대 하에서 행해지는 파업 즉 총파업을 무기로 사용하였고 전평에 의해 주도된 총파업들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통일에서 한층 더 나아가 무장폭동으로 발전되곤 하였다. 즉 당시의 총파업들은 예외없이 전국적 규모의 농민투쟁, 학생데모, 동맹휴학 등으로 파급되거나 이를 수반하였던 것이다. (6) 전평은 47년 미 군정에 의해 불법화 되고 48년 5월 총파업을 끝으로 사실상 와해되었다. 그리고 노동운동의 주도권은 대한노총으로 넘어갔다. 해방정국 즉 45년에서 48년 사이의 노동운동은 전평의 투쟁과 대한노총의 파업파괴 활동이 서로 대립하며 전개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노동운동은 노동운동의 좁은 틀로 해석될 수준을 이미 넘어선 것이기도 했다. 1945년 8월에서 1953년 7월에 이르는 8년간은 일제로부터 해방된 한반도에 어떠한 국가를 세울 것인가를 둘러싸고 각 계급, 계층, 주변 민족 등이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던 시기였다. 이 대립은 50년 6월에 이르러 전국적인 무장대립 즉 내전의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53년 7월 내전의 종식과 함께 남쪽에는 자본주의국가, 북쪽에는 사회주의국가가 지배하는 것으로 일단 종식되었다. 4. 195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1) 산업의 발달수준이 낮았던 1950년대의 노동조합운동은 중화학 금속공업 분야보다는 철도, 항만, 전기 등 기간산업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전평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대한노총이 주력을 기울인 곳도 이 기간산업분야였으며 정부수립 이후 대한노총이 조직력의 확대를 위해 활발히 활동한 곳도 광산, 부두, 전기, 철도 등의 기간산업과 섬유공업이었다. (2) 1950년대의 노동조합운동은 대한노총의 내분의 역사였다. 1953년 노동법 제정 이후 노동조합운동은 다소 활기를 띠었지만 노동쟁의에 대한 개입 역시 내분의 연장선에서 이뤄지곤 하였다. 정부수립 직후 교통부가 공무원법 제정을 계기로 철도 노동조합연맹의 단체교섭권을 부정하고 노동조합을 해체하려고 시도했을 때 대한노총 지도부의 일파는 교통부의 책동을 지지하고 나섰으며 다른 일파는 철도노조연맹을 존속시키기 위해 이승만을 방문하여 읍소하였다. 대립은 치열하였다. 연맹사무실에서 ‘대한노총 만세’를 부른 한 연맹간부는 다른 간부에 의해 ‘인민공화국 만세’를 불렀다고 고발되어 구속되기도 했다. 49년 8월 이승만은 “반공에 공이 큰 철도노동조합은 공무원법 공포에도 불구하고 해산되지 않으며 종전과 같이 계속할 수 있다”는 담화를 발표하고 사태를 종식시켰다. 조선방직회사는 일제 때 창립되었고 부산에 있는 귀속기업체로써 당시 남한 최대의 방직공장이었다. 1951년 이승만은 이 회사의 사장으로 개인적 연고가 있는 강일매를 임명하였다. 강일매는 동화백화점 관리사장으로 종업원 대량해고등으로 악명이 높은 자였다. 강일매의 입사조직이 전해지자 조선방직노조는 취임거부운동울 벌였으며 일방적으로 사장이된 강일매는 즉각 노조에 대한 탄압을 개시했다. 전시 하에서 벌어진 이 투쟁은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으며 각지역의 노조는 이를 성원하였다. 그러나 내분 중이던 대한노총은 실질적인 지원을 해내지 못했으며 결국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6개월에 걸친 조방노동자들의 투쟁을 패배의 길로 인도하였다. (3) 탄생 배경에서 보았듯이 대한노총은 노동조합의 정의에 따른 노동자의 자주적 단결조직이 아니었다. 김두한과 김말룡이 함께 대한노총의 간부를 역임한데서 드러 나듯이 대한노총은 서북청년단류의 정객과 ‘순수’노동운동가가 혼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전자가 다수였으며 후자는 소수였다. 이 양자 간의 대립, 각 부분 내부의 분란- 이것이 대한노총의 역사를 만들어 갔다. 전체적으로 대한노총은 통치권력이 효율적인 집권과 노동통제를 위해 노동자대중 내부에 심어 놓은 준 권력기관으로 행세하였다. 1948년 5.10선거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며 실력행사를 감행한 바 있는 대한노총은 56년 5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승만이 대통령 선거 재출마를 하지 않으면 교통부문 노조에서 총파업을 하겠다는 중대결의를 하고 실제 우마차노조의 우마차까지 동원한 시가행진을 벌였다. 1959년 대한노총 제 12차 전국대의원는 이승만과 이기붕 지지를 결의하고 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하였다. 이어 각 단위 노조에 득표공작분과위원회, 선거공작위원회를 설치하고 정.부통령 선거대책위원회의 간판을 걸라는 지시를 보냈다. 노총의 사무총장은 연락위원이라 하여 자유당에 파견되었다. (4) 대한노총은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야심가들의 출세기반으로 기능하였다. 대한노총은 제헌국회에 1명, 제 2대 국회에 4명, 54년 제 3대 국회에 6명의 당선자를 내었으나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의 발전에 따른 정치활동의 증대와는 전혀 무관한 상층 간부들의 입신출세였다. 5. 6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1) 오랜 기간동안 정상적인 노조운동을 전개하지 못한 불만이 4.19혁명으로 그 분출구를 찾았으며 임금인상과 해고반대라는 일차적인 근로조건개선을 내세운 노동쟁의가 고양되고 미조직분야에서 활발한 노조결성활동이 나타났다. 특히 4.19 직후의 노동운동은 종래의 틀을 넘어서서 운동의 지평을 넓혀내는 진전된 양상을 보였다. 공무원 및 교육공무원의 노조활동을 불법화한 규정을 거부하고 스스로의 권익옹호를 위해 일어성 교원노조운동, 실업자 구호대책문제를 들고 나선 전국실업자구호대책투쟁위원회의 발족, 노동쟁의의 정치적 성격의 강화와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옹호를 위해 현실적인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가두에 진출했다는 사실 등이 그것이다. (2) 봄은 짧았고 운동은 다시 단절되었다. 5.16군사쿠데타는 4.19혁명 이후 폭발적으로 고양되었던 정치, 사회적 제 운동과 함께 노동운동에도 제동을 걸었다. 군사정권은 포고령을 통해 모든 노동쟁의를 금지시켰고 노조조직을 해체하였다. 그리고 15개 산업별로 조직책을 임명하여 한국노총을 하향적으로 조직하였다. 4.19 후에도 채 청산되지 않았던 대한노총의 어용세력들이 재 기용되었다. 군사정권은 이들을 하수인으로 하여 보다 강력한 체제인 산업별 노조조직을 보다 효율적인 노동통제 기구로 활용하려 하였다. 집권여당에 종속된 권력의 하수인 노릇을 거부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직접 정당을 건설하고 국회로 진출하여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대변하는 것이 보다 실리적이라고 생각한 광산노조 위원장을 중심으로한 8개 산업별노조 간부는 1963 ‘민주노동당 창당발기위원회’를 구성하고 창당작업에 들어갔지만 이같은 노력은 당국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3) 박정희정권의 개발독재에 힘입은 자본가들의 노동관계법 개악 시도가 60년대 내내 행해졌다. 산업별노조의 해체, 수출산업의 쟁의제한, 각종 수당의 인하, 유급휴일의 축소, 월차, 생리휴가의 폐지, 귀책사유 퇴직자의 퇴직임 폐지, 노동시간연장 등을 요구하는 경제인연합회와 대한상골회의소의 요구가 거의 해마다 제기되었다. 결국 3공화국은 두번에 걸친 노동법 개악에 이어 지속적인 수출증대와 외자유치를 위한다는 구실로 1969년 12월 ‘외국인 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재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하였다. 6. 70년대의 노동운동 (1) 60년대 중반 이후 저임금과 가혹한 노동통제를 기초로 한 고도성장정책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씨앗을 잉태하였으며 7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것은 처절한 모습을 띠고 사회의 전면에 표출되었다.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제도적으로 개선해 보려던 노력이 벽에 부딪히자 1970년 11월 3일 근로기준법 책을 껴안고 분신 자살한 ‘전태일사건’이 그것이며, 노동조합 결성을 온갖 수단을 다하여 저지하려던 한 기업주에 의해 저질러진 청부살인사건인 1971년 3월의 ‘한영섬유 김진수 사건’이 그것이며, 열악한 노동시장에서도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화하지 못해 한계생활 유지조차 어렵게 된 도시빈민들이 일으킨 1971년 8월의 ‘광주대단지 만여 주민 폭동사건’이 그것이다. (2) 특히 전태일사건은 사건의 성격에 있어서나 그것이 미친 영향에 있어서 한국노동운동사에 커다란 분기점을 이룬 사건이었다. 평화시장의 한 재단사에 의해 행해진 이 사건은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한국자본주의의 발전이 낳은 모순의 격렬한 표현이었으며 산업의 발전에 따라 노동운동의 중심이 근대공업으로 이동하는 것을 예고한 것이었다. 동시에 이 사건은 양심적인 지식인, 학생, 종교인들에게 상당한 충격과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노동자의 상태와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를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또한 이들에 의해 주도된 반독재운동이 노동운동을 포함하는 사회운동으로 한단계 발전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3) 1970년 165건을 기록한 노동쟁의는 1971년 1,656건으로 폭발적인 증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군사정권은 보다 강력한 폭압통치로써 정치적, 사회적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1971년 12월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어 단체교섭과 단체행동은 행정당국의 감독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1972년의 유신헌법에 의해 노동기본권은 법률에 의한 제한을 받게 되었다. 1973년에는 노동법을 개정하여 행정기관의 개입을 강화하고 노사협의회의 기능을 강화함으로써 노사협조체제를 구축하였다. 1975년에는 긴급조치 제 9호가 발동되어 사회 전 영역이 무단통치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노동운동은 자본가, 경찰, 중앙정보부, 보안사까지 동원된 3중, 4중의 감시와 방해 속에서 전례없는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4) 1970년대의 노동운동은 스스로를 민주노조운동이라 이름 지었다. 그것은 국가와 자본가의 노동통제조직에 불과했던 대한노총 이래의 허구적인 운동노선을 배격하고, 자주적으로 단결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진정한 노동조합운동노선을 구현하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민주노조운동은 특히 박정희 시대의 수출위주 산업정책과 성적차별 속에서 가중된 고통을 받고 있던 섬유, 전자 등 경공업 수출산업의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전태일사건 이후 각성한 양심적인 지식인과 도시산업선교회, 카톨릭노동청년회 등 종교단체의 지원 속에 성장하였다. 동일방직, 종근당제약, 원풍모방, 대일화학, 해태제과, 남영나일론, YH무역 등의 노동조합과 그 투쟁은 당시의 민주노조운동을 대표하는 사건이었다. 한편 1974년 동아일보사와 한국일보사에서 각각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언론사의 사주는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노조간부들을 해고하였으며 서울시는 ‘현재 사원이 아닌 자가 임원이다’는 이유로 설립신고서를 반려하였다. 전평 산하 조선출판노동조합 신문사분회, 4.19 직후의 일부 지방신문사 노조에 이은 1974년의 언론사 노조 설립 노력은 정부와 사주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그러나 언론사 노동자들의 이같은 노력은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으로 이어졌으며 87년 이후의 언론노조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5) 기존의 허구적인 운동노선을 배격하는 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의 출현은 노동운동의 주도권이 한국노총에서 ‘재야노동운동’으로 이전되었음을 말해준다. 한국노총은 70년대 들어서서 강화된 노동통제에 맞서기보다 권력의 그늘 아래 안주하는 길을 택하였다. 10월유신에 대하여 ‘구국통일을 위한 영단을 적극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유신헌법제정 국민투표를 위해 각급 조직에 계몽유세반을 조직하고 노총위원장의 유정회 국회의원 진출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군사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조운동이 거세게 전개되자 한국노총은 이들 비노총 노조운동세력에 대한 노골적인 탄압을 자행함으로써 권력의 인정을 받고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민주노조운동은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 더욱 치열하게 맞서게 되었으며 그 상징적인 예가 바로 박정희정권의 몰락을 낳은 YH노동자들의 신민당사 점거투쟁이었다.
7. 87전야의 노동조합운동 (1) 80년 봄 사북의 동원탄좌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유신체제 하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인 투쟁이 고양되었다. 70년대와는 달리 주로 중화학 금속산업의 독점 대기업 사업장에서 일어난 투쟁이라는 점에서 80년 봄의 노동자투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한국 독점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산업의 중심은 70년대 중반 이후 중화학 금속산업의 독점 대기업으로 이동하였으며 노동운동의 중심 이동도 이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7년 후 현실로 나타났다. (2) 5.18 이후 군사독재세력은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였다. 동시에 이들은 노동자들의 원성이 높던 한국노총의 대표적인 어용세력도 제거하였다. 민주노조운동가들은 삼청교육대로 보내졌으며 한국노총의 지도부는 다른 어용세력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전두환정권은 81년의 노동법 개정을 통해 산업별 노조체제를 해체하고 기업별 노조체제를 도입함으로써 성장한 민주노조운동세력에 의해 노동운동이 대규모화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코자 하였다. 동시에 단위노조의 설립요건을 강화하고 노동조합의 활동력을 약화시키는 각종 규제조항을 신설하였다. (3) 80년대 들어서서 노동운동 내에서는 70년대의 민주노조운동을 계승하면서 동시에 근로조건개선등 조합 내부의 활동에 머문 조합주의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시도는 세계노동운동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위장취업자’들의 대량 현장유입으로 확산되었다. 대부분 급진적인 학생운동출신이었던 이들은 노동조합운동의 대중성을 과소평가하거나 정치편향적인 문제점을 드러내었으며, 80년대 들어서서 핵심노동자층으로 성장한 중화학 금속산업의 독점대기업보다는 취업이 용이한 중소기업에서 그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한계를 가졌다. 반면 이들은 노동조합동의 과학화와 선진노동자 양성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4) 극심한 탄압과 노동통제 하에서 80년대 중반까지의 노동운동은 위축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84년의 구로동맹파업, 85년의 대우자동차파업, 87년 초의 사무직 노조운동 등 보다 진정된 형태의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노동자교육이 확산되었고,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전국민적 반감이 무르익는 가운데 사무직, 전문직, 교사, 언론사 노동자 등 보다 넓은 노동자계층 속에서 노동운동이 모색되기 시작하였다. 출처 : 성공회대 노동대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