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교회의 자립과 성장기
제29대 한봉배 전도사
한봉배 전도사
한봉배 전도사(1967년9월20일)님이 부임하여 전임자로부터 분파된 교회에서 중학원을 계속 운영합니다. 당시 교사로는 한귀손,유기연,정은택,한봉배씨등이 봉사하시게 됩니다.
교회 또한 제자리를 잡고 교인수가 증가하여 50여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한귀손,최순이,김정훈씨등이 1967년12월에 기관장회 발기인이 되어 금당회를 조직하여 분파된 중학원을 재건 국민운동본부의 협조로 교장을 민승익 당시 면장님으로 모시고 통합하여 1968년 6월에 중학원의 모든권한이 감리교회로 이관되어 같은해 약간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됩니다. 점차 학교도 발전하여 각 기관의 협조로 교사가 15명 학생은 백여명에 이르게 됩니다.
1969년3월에 학교를 신축하려는데 자금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립의 조건이 좋아 다시 중학원을 국가에 넘겨서 학교의 규모를 키우려고 하는중에 서울에 김이배 이사장이 약5억을 예상으로 서울에 학교를 세우려고 하자,그 분을 설득하여 김이배씨의 고향인 여주에 학교를 세울 것을 권유하여 성공하여 지금의 여강중.고등학교가 세워지게 됩니다. 여강중학교는 1971년에 신학생을 받습니다.
1968년 2월 지방회에서 가장 부흥된 교회로 교인은 90여명에 이르렀고 교회학교는 250명으로 교회가 비좁아 운촌리 운암학교 교실을 빌려 이용할 정도 였다.
1970년4월에 교회 창립후 최초로 교회에 전기설비를 설치하게 됩니다. 총 13만원의 예산이 소요되었는데 군청에서 6만원과 국가보조 4만원,교회에서 3만원을 모아 전기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미등기 상태의 토지를 정리하여 1200평을 등기 이전하였고 모든 사무행정에 밝은 한봉배 전도사님이 하셨습니다. 또한 이때에 교회 오르간을 처음 구입하였는데 서독에서 귀국하신 박갑용씨가 2만 5천원에 구매하여 헌납하십니다.
또한 교회 화장실이 오래되어 냄새가 나고 비위생적이어 남.녀 두칸으로 나뉘어 만들었는데 차용복,김남철,목형균,권영수씨와 장년부와 여선교회 청년부의 협조로 완공합니다.
1969년 유치원 졸업생을 23명 배출하였고,원감에 유기연,교사에 김정희,조병식,이정순보모가 수고했습니다. 교회에 휘장과 커텐을 달았는데 유사부장 김남철 속장과 여선교회 강천순 속장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동안 암반이 많아 교회 우물사정이 좋지않아 차용복씨 논을 통해 관정하여 전기시설을 하고 수도를 만들게 됩니다. 김남철 속장과 외부로는 최지복 목사님과 정선생님이 수고하여 완성하게됩니다.
우물공사
교회에서 상을 당해도 당시엔 교회에 행여를 도울 행상이 없어서 상주용 상복(김남철 증)2벌을 준비하였고,교회 살림이 없어서 주방 기구와 일체를 여선교회주최로 구입하였습니다.
또한 교회 부지에 21주의 밤나무를 심었는데 주당 200원에 김남철 권사님이 이포교회 이장로님께 구입하여 그 당시 차가 없어 손수 지게로 운반하여 심었는데 고생이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프린트기구는 청년부 조직으로 마련하였고,목재와 톱밥을 쓰던 난로는 3,000원을 들여 석유용으로 개조하였고,낡은 창문등을 6,100원을 들여서 유리로 교체하였고 내부 또한 수리하였습니다.
창틀공사
1967년12월21 유아세례
하지만 1971년1월9일 실로 많은 업적을 남기시고 한봉배 전도사님은 3년5개월간 많은 일을 하시고 수원시 파장동 파장 감리교회로 부임하여 가십니다.
한봉배 전도사님 시무시 당회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967년 11월20일 당회 기록*
사회:담임자 한봉배 전도사
직원 선정
1.권사:최순이,한귀손,김정훈
2.속장:박만수,박영례,김양순,김남철,목형균,김오분
3.주일학교장:목형균
담임자 보고:금년에 폐지한 예배처와 그이유를 설명 하였고,지내리 교회를 철거 합니다. 2월 기관장회가 발기인되어 금당회를 조직하고 분파된 중학원을 재건국민운동본부 협조로 교장 민승익 면장을 모시고 통합하는데 성공합니다.
1968년 4월17일 김영창 감리사님 인도로 학습세례를 거행합니다.
원옥순외 2명의 남자와 8명의 여성분이 학습세례를 받습니다.
*1968년 12월15일 당회 기록*
사회:담임자 한봉배 전도사
직원 선정
1.권사: 김정훈,최순이,한귀손
2.명예권사:조명옥
3.속장:김양순,박영례,목형균,김남철,이봉하,김오분
명예속장:박만수
4.주일학교장:권영수
담임자 보고:6월 중학원의 모든 권한이 감리교회로 이명되고,약간명의 졸업생을 배출합니다.
*1969년 12월7일 당회 기록*
사회: 담임자 한봉배 전도사 서기:이봉하
1.신천 속장:이봉하,김남철,김양순,강천순
2.주일학교장:김남철
3.여선교회장:최순이
4.청년회장:박갑용
5.장년부회장:김영건
담임자 주례로 1970년 5월7일 장성숙외 여성4명 남성1명이 학습예식을 거행합니다.
*1970년 12월6일 당회 기록*
사회: 담임자 한봉배 전도사
1.권사: 최순이
신천권사:박영례,김남철
2.속장: 김봉하,안음전,김영란,장정순,김양순,신금산,박갑용,허 관
3.주일학교장:이호수
또한 같은해 12월7일 김영창 목사님을 모시고 구역회를 갖습니다.
제30대 최지복 목사
최지복 목사님
최지복 목사님 부임(1971년1월22일)
한봉배 전도사님의 갑작스런 전임으로 교회는 어수선하고 교회 재정은 전기공사와 우물공사로 인하여 궁핍하였고 거기에 교회 또한 부채도 있고 하여 교인들은 실신할 정도의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주택은 비가오면 물이 떨어져 양동이로 받아야 하고,교회 예배당 또한 비가 새어 예배를 드리기가 곤란할 지경에 이르렀다. 교회 우물공사는 했지만 음용수로는 사용이 불가능해 개울물을 받아다가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를 고민하던 최지복 목사님과 교우들은 후포리 교회 박병로 목사님을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어 교회 부흥의 불씨를 붙이게 됩니다. 그리하여 교회 수리헌금을 모금하여 20만원 정도의 자금을 모을수 있었고 교회 개,보수공사를 착수하였다. 예배당과 주택지붕을 개량하고 페인트를 칠하고 보수하여 교회는 어느덧 아담하게 수리하여 교인들은 생기가 돌기 시작하였습니다.
음용수로 쓰기에는 흙탕물에 가까워서 도저히 먹을수가 없는 우물을 다시 교인들은 삽을들고 당우리 이종환씨 소유의 논 가운데 있는 우물에서 물을 끌어오는 공사를 시작하여 드디어 1972년 12월에 우물을 완공하고 교회 이전후 10년간이나 고생하던 우물을 완공하였습니다. 당시 수고하신 분들은 김남철,김정봉,김동순,김용진,이종훈,우진화,허 관등이 밤낯으로 삽과 괭이를 들고 우물공사를 하셨습니다.
1973년 12월31일부터 윤석주 목사님을 모시고 최지복 목사님 부임후 2번째 부흥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잠자는 상태에 놓여있던 교우들은 신앙의 잠에서 깨이고 십일조의 중요성을 일깨우게 되어 처음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교우가 생기게 됩니다. 당시 교인들중 유일한 개인 사업자인 최순이,탁완순,박영례 성도님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최순이 권사님는 포목점,탁완순 권사님은 사진관,박영례 권사님은 당우리 중심에 용진상회(1969년)를 개업하여 운영하셨는데 그후 박영례 권사님의 십일조는 교회 운영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 하였고 교회 발전의 초석이됩니다. 그리하여 교회재정은 급속도로 증가하여 40만원의 흑자를 내었고 20만원은 건축기금으로 저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종”이 일제시대 일본이 전쟁 물자로 빼앗아 간후에 마땅한 종이 없어서 산소통을 반으로 절단하여 치고 있던중 박영례 권사님의 성의로 엠프방식을 도입하여 주일이면 성가가 울려퍼져서 잠든 영혼을 깨우기 시작했고,새벽마다 울리는 음악종 소리는 모든 교우들의 새벽잠을 깨워서 기도를 드리게 되었다.(1974년2월) 또한 교회에 시계가 없어서 답답하던중 김동순씨가 시계를 구입하여 헌납함으로 교회에 큰 도움이 됩니다.(1974년 2월)
좌로부터김동순,최지복 목사,사모님,목사님 따님,박영례 권사
EXPLO 74‘ 세계복음화 대성회가 한국에서 열리다.
1974년 8월13일부터 17일까지 세계복음화대성회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로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렸습니다. 이 성회로 인하여 한국의 기독교는 큰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고 기독교 발전의 시금석이 됩니다. 저희 교회 또한 20여명이 집회에 참여하여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았습니다.
1974년 9월6일부터 11일까지 교회는 다시 여름부흥 성회를 개최하여 연양리교회 노창옥 전도사를 초청하여 지내리교회, 덕암교회와 함께 연합 부흥회를 개최하였는데 많은 은혜를 받고 교회 또한 부흥 발전하게 됩니다.
한편 중암리와 운촌리 일대에 신도가 없어서 안타까운 도중에 이천지방 오촌교회에서 문태분씨가 출가를 온 후에 전도가 시작되어 그의 남편인 조정제씨와 합심하여 전도의 불길을 붙어 10명 가까운 성도가 결집하여 북내교회에 출석하게 됩니다. 또한 운촌리 조정제 문태분 내외분들은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 교회에 조명이 어두운걸 아시고 조명등 3개를 헌등하여 교회가 더욱 밝아지고 아름다워지게 됩니다.(1975년10월27일)또한 같은 시기에 탁완순,이영순 내외분은 받은바 은혜에 감사하여 대강대1조와 소강대1조 대의자3개를 교회에 바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온 교우들의 모범을 보입니다.(1975년10월27일)
조정제,문태분 내외
박영례 권사님은 1976년 교회에 피아노가 없어 오르간으로만 연주되는게 아쉬워 당시엔 고가로 엄두도 못내던 피아노를 헌정하시어 아름다운 선율의 피아노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71년1월22일 부임하시어 교회를 두배 이상으로 부흥시키시고 1976년 4월27일 최지복 목사님은 교인들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연양교회로 전임하시게 됩니다.
최지복 목사님 시무 당시 당회 및 학습 세례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971년 12월5일 당회 기록*
사회:담임자 최지복 목사 서기 :이호수
임원 섬임
1.권사:최순이,박영례,김남철
2.속장:김영란,안음전,김양순,이용선,허 관,원옥순,이영순,신금산
3.주일학교장:이호수
같은해 12월10일 김영창 목사님 주도로 구역회 모임을 갖습니다.또한 12월25일에는 담임자 주례로 이은석외 여성5명,남성 1명이 학습세례를 받습니다.
*1972년 12월3일 당회 기록*
사회: 담임자 최지복 목사 서기:이호수
1.권사:최순이,박영례,김남철
2.속장:김영란,안음전,김양순,이영순,허 관,원옥순,신금산,이용훈,이호수
3.주일학교장:이종훈
12월31일 담임자 주례로 장정순외 남성2명 여성3명 학습세례를 받습니다.
1월27일은 김영창 목사님 사회로 구역회를 받습니다.
*1973년 11월25일 당회 기록*
사회:담임자 최지복 목사
임원 선정
1.권사:최순이,박영례
신천권사:탁완순,이종훈
2.속장:김영란,안음전,김양순,이영순,신금산,허 관,원옥순,이용훈,김은숙
3.주일학교장:이용훈
12월7일 김영창 목사님 사회로 구역회를 받습니다.
12월25일 담임자 주례로 손연화외 남성 2명과 여성8명이 학습을 받고 최정분씨가 세례 입교를 받습니다.
1973년 12월31에서 1974년 1월4일까지 윤석주 목사님을 강사로 부흥회로 모입니다.
1974년4월21 부활절에 담임자 주례로 김순주외 여성8명과 남성2명이 학습을 받습니다.
12월5일에는 또한 담임자 주례로 조정제외 여성9명 남성5명이 학습을 받습니다.
*1974년 12월15일 당회 기록*
사회:담임자 최지복 목사 서기:김을곤(당시 여강중학교 음악 교사)
임원 선정
1.권사:탁완순,최순이,박영례,김남철
2.속장:안음전,김양순,이영순,신금산,허 관,원옥순,한을순,문태분,피영자
3.교회학교장:강인제(당시 여강중학교 교장)
4.여선교회장:박영례
5.청년회장:표탁완
1975년 김영창목사님 사회로 구역회로 모입니다.
제31대 박종선 목사님(1976년5월19일)
박종선 목사 장경희 사모
박종선 목사는 1940년 1월1일 충남 당진군 장항리에서 출생하셨고 1968년 목원대 신학대학 신학과를 졸업하시고, 1972년 목사안수를 받으시며 남부연회 강경지방 신화교회에 시무하시다 1976년 북내교회로 부임하십니다.
박종선 목사님께서 새로이 부임하시어 그동안 최지복 목사님 전임으로 슬퍼하던 교인들의 새로운 희망이 되시었고 교회는 날로 부흥하여 새성전 건축의 소망이 일어 그 기초를 다지게 됩니다. 당시에는 교인들이 당우리 중심으로 교회를 옮기려는 소망이 커서 목사님은 교회 권사님들과 마땅한 터를 물색해 보셨습니다. 목사님은 옳 곧고 강직하시며 철저한 원칙론자 셨지만 반면에 장경희 사모님은 다정다감하고 자애로운 어머님 상이여서, 다소 권위적인 목사님을 상대적으로 보완하는 그런 분이셨고 찬양대로 때로는 교인들 농사일에도 잡일을 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후 박종선 목사님은 1978년 2월21일 청안교회로 전임을 가시게 됩니다.
제32대 최정덕 목사(1978년2월21일~1980년6월30일)
최정덕 목사님이 부임하시고 많은 분들이 현 교회 터가 너무 멀고 새벽기도 가기가 겁난다 하여 동네 중심으로 이전을 희망하던 중 새성전 건축이 본격화되어 1979년1월에 건축위원회를 조직하였고 북내면 당우리 마을 중심에 있는 복지관 건물의 매입을 희망 하던중에 박준희 감리사님의 중계로 군청에 계속된 요청으로 복지관 건물을 매입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십니다. 그리하여 구복지관 건물을 200만원에 매입(1979년2월)하는 과정에서 교인들이 너도 나도 10만원 20만원 크게는 50만원씩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하여 매입을 합니다. *(당시 복지관건물은 극장으로 쓰였던 건물인데, 1963년 10월 안양에서 수학여행을 온 흥안초등학교 학생을 태운 배 한 척이 신륵사 조포나루 앞에서 좌초돼 한 반 학생 대부분이 죽자 이듬해 여주대교를 건설했다. 이로 인하여 북내면은 여주읍과 지척의 거리가 되었고 당우리는 북여주의 상업과 생활의 중심 무대에서 소외되어 위축되게 됩니다. 그래서 극장은 자연 폐쇄되고, 극장은 마을 중심에 흉가로 변하게 되었다.)*
흉가나 다름 없었던 복지관 건물을 김남철 권사님을 건축위원장을 중심으로 온 교인들이 나서서 6개월간 고투가 시작되었습니다. 혼연일체가된 온 교우님들의 노력은 정말 대단했다. 특히 야간 작업의 연속은 마을 주민들까지 감동시켰으며 출애굽 히브리민족에게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함께 하셨던 “여호와 이레”의 기적의 연출로 드디어 79년 7월22일 첫 입당예배를 드렸다.특정 기술을 요하는 것 외에 모두 교인들의 땀과 노력으로 이룩한 교회는 명실공의 구원의 방주로서 그 자태를 드러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3일 봉헌예배를 드리게 되는데 훗날 이 교회 건물은 지금의 교회(당우리 92-10) 건축에 중요한 종자돈이 됩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거기에 교회도 부흥하게 되어 복지관 교회는 더 이상 가치를 잃게 되었고 새로운 넓은 터에 교회를 세우려는 욕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최정덕 목사님은 새 성전을 건축하시고 1980년 6월30일 여강원으로 전임하시게 됩니다.
당우리 시내에 위치한 교회
*1979년 12월30일 당회 기록*
사회: 담임자 최정덕 목사 서기:이호수
임원 선정
1.신천장로:김남철,탁완순
2.권사:최순이,박영례
신천권사:최승자,조성심
3.속장:최승자,김양순,원옥순,허 관,조성심
4.집사:이영순,김양순,한을순,신금산,장옥순,원옥순,안음전,권영환,허 관
이호수
신천집사:김학배,임연심,김연자,이종섭
명예집사:한복순,박치매,유태복
5.교회학교장:이호수
6.여선교회장:김연자
7.청년회장:탁동주
제33대 김광순 목사님(1980년 7월1일~1981년 12월 )
김광순 목사님은 육군 대령 출신의 목회자로 사람이 좋아 보이면서 지엄하신 분이셨습니다.
길신애 사모 또한 전도사님으로 직접 많은 시간을 할애해 설교를 하셨고 따듯한 어머니의 상을 손수 보이셨습니다. 때로는 금식 기도를 하시며 교회 발전을 위해 기도를 하셨던 분이셨습니다.
김광순 목사 시무시 기록입니다.
1980년12월1일부터12월5일 까지 조영준 목사님을 모시고 부흥회를 개최합니다.
*1980년 12월28일 당회 기록*
사회: 담임자 김광순 목사 서기:이호수
임원 선정
1.장로:김남철,탁완순
2.권사:최순이,박영례,최승자,조성심
3.속장:최승자,김양순,원옥순,허 관,조성심
4.집사:이영순,김양순,한을순,신금산,장옥순,원옥순,안음전,권영환,허관
이호수,김학배,임연심,김연자,이종섭,한복순,박치매,유태복
5.교회학교장:이호수
6.여선교회장:김연자
7.청년회장:탁동주
1980년 12월25일 김광순 목사님 주도로 세례 학습 및 성찬식을 거행합니다. 세례인은 고창구외 15명이고,학습인은 허 송 외23명이며 입교인은 총 112명입니다.
제34대 임정덕 전도사(1981년12월30일부임~1986년 7월)
임정덕 목사
임정덕 전도사는 감리교 신학대학을 졸업하시고 이포 하오교회에서 시무하시다 1981년 12월 북내교회로 부임하여 오셨습니다. 작은 체구에 전도사님 이셨지만 부드럽고 자상하신 분으로 외유내강의 성품을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교회 학생부들에게는 특히 주일마다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셨는데 학생들이 지루하지 않도록 팝송을 해석해 주시기도 하셨는데, 임정덕 전도사님은 지적 열망이 높고 표현력이 좋아 인근 여강학교 학생들중 믿지 않는 학생들도 임정덕 전도사님을 따랐다.
1983년 3월16일부터 18일까지 중부연회가 수원매산교회에서 열렸는데 바로 이때 목사안수를 받으셨다.
또한 임정덕 목사님 안수와 함께 북내교회 최초의 장로님으로 김남철,탁완순 권사님께서 장로 안수를 받으셨는데 바로 이 시기부터 북내교회를 “북내중앙교회”로 변경 등록하여 부르기 시작하였다.
임정덕 목사님은 1986년 7월 이천 사동교회로 전임하시어 교회를 부흥시키고 서울 남연회 총무로 활동하셨습니다.
*1982년 1월10일 당회기록*
임원 선출
사회: 담임자 임정덕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