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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스크랩 조선시대 붕당史 : 1. 선조조 (3) 기축옥사와 호남사림(下)(1589-91년)
어등산나무꾼 추천 0 조회 110 15.03.25 18:0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조선시대 붕당史 : 1. 14대 선조조(1567-1608년)의 붕당정치 -

 

 

 

1. 14대 선조조(1567-1608년), 붕당 小계보도

 

┌ 훈구/척신파(기호) ㅡㅡ

 |                                 :

 |                                 :

 |                   ┌ 기호사림파(경기/충청도) : 서인

 |                    |

└ 사림파(영남)

                      |

                     └ 영남사림파(경상도) : 동인 ㅡ>┌ 조식계열(남명학파, 경상右도) : 북인 ㅡ>┌ 대북

                                                                |                                                      └ 소북

                                                                |

                                                                └ 이황계열(퇴계학파, 경상左도) : 남인

 

 

1-3.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와 호남사림의 분열(下)(1589-91년(선조22-24))

 

       동인(경상右도 영남사림파) : 내암 정인홍, 아계 이산해(화담학파), 최영경

여당 ┤  └ 동인계열 호남사림(전라右도) : 정여립 / (화담학파) 이발, 이길, 정개청

      동인(경상左도 영남사림파) :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야당 - 서인(기호사림파) : 우계 성혼, 오음 윤두수, 월정 윤근수, 사암 박순(화담학파), 송익필

            └ 서인계열 호남사림(전라左도) : 송강 정철, 고경명, 김천일

 

 

ㅡ> 조선시대 붕당史 : 1. 선조조 (2) 기축옥사(정여립 역모사건)와 호남사림의 분열(上)(1589-91년)에서 이어짐

 

 

7. 화담-남명학파 구원에 소극적인 퇴계학파

 

기호사림파 송강 정철(좌의정) 주도의 대대적인 수사정국이 이어지자, 영남사림파의 지도자였던 아계 이산해(영의정)는 공동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던 서애 유성룡(우의정)에게 급히 도움을 청했다. (1589년末 영의정 유전이 세상을 떠나면서, 1590년부터 아계 이산해가 영의정으로, 송강 정철이 좌의정으로, 서애 유성룡이 새로이 우의정으로 임명되었다.) 이미 죽은 정여립이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호남지역 내의 영남사림파 지지가문들이 도륙나는 사태는 막고자 했기 때문이다.

 

특히 전라右도 호남사림들의 상당수가 화담학파와 연결되어 있었던 지라, 그 자신이 화담학파 출신이었던 아계 이산해의 정치적 입지도 심히 곤경에 처해 있었다. (아계 이산해의 숙부이자 스승이,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진 토정 이지함이다. 그런데 토정 이지함의 스승이 바로 화담 서경덕인지라, 아계 이산해 역시 화담학파로 분류된다.) 아계 이산해의 생각에, 영의정과 우의정이 뜻을 모은다면 옥사가 어느 정도 선에서 진정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서애 유성룡의 태도는 무척이나 애매모호했다. 무엇보다, 그는 선조에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정여립發 역모사건에 끼어들고 싶지가 않았다. 더구나, 퇴계학파는 (정여립의 급진적인 사상과는 달리) 왕권강화를 적극지지하는 비교적 보수적인 사상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임금이 보기에 불온한 것이라면, (퇴계 이황의 수제자이자 정치적 계승자였던) 서애 유성룡이 보기에도 불온한 것이었다.

 

여기에 퇴계학파는, 이번 옥사를 이발, 이길 형제로 대표되는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과 송강 정철로 대표되는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 간에 벌어진 일종의 호남사림간 내전으로 보았다. 그리고 호남사림 내부의 문제라면, 영남사림파가 끼어들 이유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중립적 입장의 배경에는, 정치적 극한대립 상황이라면 일단 그 자체를 피하고 보는 퇴계학파 특유의 성향이 깔려 있었다. 퇴계학파의 종장인 이황의 호 퇴계(退溪)는, '물러나는 시내'란 뜻이다. 퇴계 이황은 1534년(중종29) 과거에 급제했으나 13대 명종조 원년 을사사화(1545년)를 지켜본 뒤, 명종조는 출사할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북 안동군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인생의 40-60대를 보낸 퇴계 이황은, 14대 선조즉위(1567년)와 함께 중앙정계의 분위기가 쇄신되었다고 판단되자 비로소 다시 출사하여 대제학(정2품, 문형(文衡))을 맡았다. 이러한 퇴계 이황의 처신은 이후 그의 제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쳐, 퇴계학파 출신들은 정치적 극한대립 상황에서 대개 중립을 지키거나 차라리 출사를 보류하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8. 기축옥사의 정치史적 의의

 

(1) 패자, 호남사림

 

(다른 역모사건들과는 다르게) 기축옥사로 인하여, 호남지역이 반역향(反逆鄕)으로 지목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옥사의 위관(委官, 최고수사관)이 같은 호남출신이었던 게 첫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점은, 옥사 이후 호남사림의 독자적인 성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참혹했던 지난 3년 간의 옥사는, 호남지역 재지(在地)지주들이 재통합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호남사림 내부를 갈갈이 찢어놓았다. (곧이어서 터진 임진-정유왜란(1592-98년(선조25-31)) 때, 호남지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던 일 역시 또다른 이유가 된다. 실제로도, 호남사림들은 기축옥사에 따른 중앙정계의 의심을 풀고자 의병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조선시대의 기축옥사는, 오늘날의 한국전쟁(1950-53년)을 연상하면 보다 더 쉽게 이해될 지도 모른다. 미-소 냉전의 대리전으로 시작되어 3년간 계속된 한국전쟁은, 기호-영남사림파의 대리전으로 시작되어 3년간 지속된 기축옥사와 묘하게 닮아 있다. 비극 이후에, 비극의 당사자들에 의해 불신과 갈등이 더욱더 격화되었다는 점에서도 두 사건은 서로 비슷하다. 이렇듯 내부의 적을 향한 끊임없는 반목은, 향후 호남사림이 (기호사림파나 영남사림파와 같은) 하나의 단일한 지역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 두고두고 장애물이 되었다.

 

특히 옥사의 와중에 제거된 세력이, 화담 서경덕 계열(전라右도)이란 사실이 전체 호남사림의 역량을 한층 더 후퇴하게끔 만들었다. 16세기末 조선유학의 학문적 동향은, 점차 조선전기의 유교문학(사장(詞章), 가사 및 문장연구) 단계에서 조선후기의 유교철학(경학(經學), 경전연구) 단계로 옮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면앙정 송순 계열(전라左도)은, 아직 유교문학 단계에 머물러 있던 보수적 학문그룹이었다. (오늘날에도 이들 스승과 제자는, 조선 가사문학의 대가들로서 국문학계에서 유명하다. 가사문학의 3대 거장이라 불리는 송강 정철의 물론, 그의 스승 면앙정 송순 역시 강호가도(江湖歌道, 조선 가사문학에 널리 나타난 자연예찬적 문학사조)의 선구자로서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국사학계나 한국철학계의 주목을 받진 못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반면에, 제거된 화담 서경덕(전라右도) 계열은 당시 학문 흐름의 최일선에 서있던 진보적 학문그룹이었다. 이렇듯 호남계열 화담학파의 몰락은, 옥사 이후 호남사림이 유교철학 단계로의 발전경쟁에서 기호사림파나 영남사림파에 비해 크게 뒤처지는 배경이 된다.

[면앙정의 전경, 전남 담양군 소재, 전남기념물 6호]  

 

곧이은 임진-정유왜란에 의한 지역인재의 손실 역시, 기축옥사로 인한 인재가뭄에 시달리던 호남사림에겐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 되었다. 왜란 중에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호남사림들 중의 상당수가 전사하면서, 면앙정 송순 계열(전라左도)에서 마저 학맥의 단절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전남 광주출신의 의병장 고경명이나 전남 나주출신의 의병장 김천일의 죽음 등이 그 예이다.

 

훗날의 인조반정(1623년) 또한 경기-충청지역 기호사림파의 주도로 이뤄지면서, 호남사림은 중앙정계 개편과정에서 다시금 소외되었다. 그리하여 기축옥사 이후 호남사림 내에서 주도권을 잡은 면앙정 송순(전라左도) 계열도, 경기-충청지역의 기호사림파에 의해 개별적으로 흡수되는 운명을 맞고 만다.

 

 

(2) 또다른 패자, 영남사림파

 

3년 간 계속되었던 기축옥사의 또다른 결과, 호남지역 내에서 영남사림파 지지세력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이후, 호남지역은 조선말기까지 기호사림파의 안정적인 뒷마당으로 전락한다. 영남사림파는 호남에서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함으로서, 非영남지역에서의 지지세력이 사라졌고 결국 영남 안으로 고립되었다. 특히, 전라右도 호남사림들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던 화담학파의 (남명학파 역시) 좌절감은 깊고도 깊었다. 그리고 이 좌절감은 옥사가 끝나가던 무렵, 영남사림파 정권을 공동구성하고 있던 퇴계학파를 향해 터져나오게 된다.

 

 

(3) 유일한 승자, 기호사림파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더 중대한 변화는, 호남평야로 상징되는 거대한 경제력이 온전히 기호사림파의 소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때 호남평야는, 오늘날로 치면 삼성이나 현대 등의 거대기업집단과 마찬가지였다.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경제에서, 부가가치의 원천은 토지가 유일무이하기 때문이다.

 

경기지역 토지가 직전법(職田法, 현직관리에게만 토지를 주는 제도) 등으로 묶여 있어, 확실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던 기호사림파는 호남(평야)이 가지는 가치를 재빠르게 알아차렸다. 기호사림파는 호남(평야)을 장악하는데 당력을 집중했고, 이로써 가장 든든한 정치적 경제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남지역에서 나름대로 경제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그래서 경제적으로 절박하지 않았던) 영남사림파는 호남(평야) 상실이 가져다 줄 장기적 파급효과를 계산에 넣지 못했다. 이렇게 영남사림파가 판단착오를 겪는 동안,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성공한 기호사림파는, (30여년 뒤의 인조반정을 통해) 중앙정치권력마저 재탈환하게 된다.

 

그리고 조선말기까지, 두번 다시 영남사림파에게 그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19대 숙종 때 기호남인이 2번에 걸쳐서 집권하나, 이는 기호남인의 자체 역량에 따른 집권사례라 볼 수 없다. 당연히, 그 집권기간도 매우 짧았다.) 결국 기축옥사는, 기호사림파가 동/서인 분당 때의 패배를 딛고 일어서 본격적인 재기를 시작했던 계기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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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론 1 : 화담학파에 관하여

 

화담학파는, 화담 서경덕(1489-1546년(성종20-명종1))의 제자들을 일컫는다. 화담 서경덕 자신은 경기도 개성출신으로서, 송도3절(화담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진보성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 중 다수는, 동/서인 분당 때 초당 허엽(허난설헌, 허균(홍길동전의 저자)의 부친)을 필두로, 훈구/척신파 청산에 앞장섰던 영남사림파에 가담했다. (사암 박순을 중심으로, 일부는 기호사림파에 가담했다. 그러나 그 수는 많지 않았다.)

 

화담학파는 '행동하는 지성'을 꿈꿨다는 점에서 특히 남명학파 출신들과 뜻이 잘 맞았으며, 호남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기축옥사을 겪으며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인조반정을 거치면서 소멸되었다. 그리하여 화담 서경덕의 진보적 사상(= 기(氣) 1원론)은, 사암 박순을 통해 율곡 이이(= 이기(理氣) 1원론)의 기호사림파에서 계승된다.

   [화담 서경덕의 글씨, '명가필보'에서]

 

결국 화담학파는 구성원들 다수가 영남사림파에 가담했으나, 정작 화담 서경덕 사상의 계승은 기호사림파에서 이루어지는 등 심히 모순적인 내력을 갖게 되었다. 조선시대 학파와 붕당은 대개 일치했다는 점에서 볼 때, 화담학파의 이런 운명은 붕당史의 아이러니라 할 만하다. (본 조선시대 붕당史에선, 특별한 언급이 없는 한 화담학파는 남명학파에 포함시켜 서술한다.)

 

 - 보론 2 : 그밖의 지역들의 경우

 

조선시대 붕당史, 그 대부분의 시기에서 기호사림파는 주류(= 여당), 영남사림파는 非주류(= 야당)의 정치적 위상을 차지한다. 그리고 1-2, 3편 기축옥사와 호남사림의 분열에선, 호남사림이 기호사림파에게 종속되어 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그렇다면, 그 밖의 지역들에서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다시 말해 (1) 강원도 및 제주도, (2) 황해도, 그리고 (3) 함경도, (4) 평안도의 경우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들 지역에선 유의미한 정치세력이 형성되지 못했거나 또는 (형성되었다고 해도) 반역향 등으로 지목되어 지역인재등용이 조직적으로 저지되었다.

 

(1) 강원도 및 제주도

 

우선 강원도 및 제주도의 경우, 평야가 적은 지리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평야가 적다는 건, 농업기반경제에서 농경지가 적다는 걸 의미한다. 그에 따라 이들 지역에선 부양가능 인구수준이 매우 낮았고, 이는 곧 지방사림형성의 경제적 바탕이라 할 수 있는 재지(在地) 중소지주층의 발달에도 어려움을 가져왔다.

 

오늘날에도 강원 및 제주지역의 인구규모는 적으며, 그에 따라 배정된 국회의원수도 상대적으로 적음을 볼 수 있다. (18대 국회(임기 2008-12년)의 경우, 전체 지역구 국회의원 245명 중에서 강원도는 8명(3%), 제주도는 3명(1%)일 뿐이다. 이를, 영남권 67명(27%) 및 호남권 31명(13%) 등과 비교해 보라.)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개별관료들은 꾸준히 나왔으나 (가령, 기호사림파의 종장 율곡 이이는 강원도 강릉출신이다) 이들 지역을 근거로 하는 독자적인 정치세력의 형성까진 이르지 못하였다.

 

(2) 황해도

 

다음으로 황해도의 경우, 경기도와 인접해 있는 지리적 특징에 주목해야 한다. 이로 인하여, 황해도는 자연스레 凡기호사림파의 영역권에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기호사림파의 지리적 범위는, 경기도 및 충청도(특히 충청남도) 그리고 황해도(특히 황해도 남부지역)까지 포함되는 개념으로 이해하여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3) 함경도

 

세번째로 함경도의 경우, 잦은 반란으로 인해 반역향으로 지목되면서 지역인재등용이 차단되어 버린 케이스이다. 본래 함경도는 1대 태조 이성계의 고향인 함흥이 있던 관계로, 조선왕실의 각별한 배려를 받았던 곳이었다. 그런데 3대 태종 때 조사의의 난(1402년), 6대 단종 때 이징옥의 난(1453년), 7대 세조 때 이시애의 난(1467년)이 연이어 터지면서 그만 반역향으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사실, 중앙정부는 함경출신들의 무골(武骨) 성향을 자못 부담스러워 했다. 고려왕조를 무너뜨린 태조 이성계가, 바로 대표적인 함경출신 무인(武人)이 아니던가? 그런고로, 함경출신들을 바라보는 중앙정부의 시선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시애의 난 이후, 함경출신들은 무과(武科)를 통해 중/하위직에 일부 등용되었을 뿐이다. 그나마 이들 역시 함경-평안도 등 여진족의 침입이 잦던 북쪽 변경에 집중 배치되었던지라, 중앙정계에서 일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문치주의 국가였던 점도, 무인 중심의 함경출신 관료들에겐 불리하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4) 평안도

 

끝으로 평안도의 경우, 조선왕조의 지배사상인 유학(儒學)의 발달이 지체되었다는 점이 가장 큰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평안도는 평야가 넓었고, 그에 따라 인구 및 물자도 풍부했다. 그러나 경기도 및 하3도(下3道, 경상/전라/충청도)에 비해 지역유학의 발달이 더뎠고, 이는 평안지역 사림형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가져왔다.

 

특히 16세기 이후 붕당정치(사림정치)가 자리를 잡은 이후부턴, 중앙정계를 장악한 기호사림파에 의해 평안출신 인재등용이 조직적으로 저지되었다. 중앙정계를 통한 입신양명이 차단된 평안출신들은, 평안도가 중국대륙과 인접해 있다는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明나라(후의 淸나라)와의 무역에 종사하며 거상(巨商, 특히 의주상인)이 된 사례가 많았다.

 

그러던 한편으로,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평안도에서 역시 본격적인 지역사림세력이 형성된다. 그러나 기호사림파의 보이지 않는 차별정책은 지속되었고, 이는 평안사림들에게 크나큰 박탈감을 안겨다 주었다. (특히 정묘(1627년(인조5)) 및 병자호란(1636년(인조14)) 때, 중앙정부가 평안지역의 수비를 거의 방기하다시피 해버린 일은 이 지역의 민심을 비장하게 만들었다.) 이는, 훗날 23대 순조 때 홍경래의 난(1811년)의 역사적 배경으로 이어진다. 홍경래의 난 이후 평안도 역시 반역향으로 지목되면서, 조선 말기까지 평안출신 인재등용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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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하교길가 옆에서(http://blog.daum.net/platanus2005/15535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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