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보혜
‘한국신춘문예 2026년 여름호’ 시 부문 당선작
하늘 담은 물거울 외2
보행 수 4359,
흐르지 못한 하늘
조용히 잠든 동그라미 그릇 속
모든 세상이 꾸역꾸역 대열 맞춰
거꾸로 박혀 있네
웅덩이 속 작은 콩알 돌멩이가
큰 바오밥 나무 흉내 낼 때
단단하던 나의 네모난 성벽은
지나가는 구름 한 점에 와르르 무너진다
물거울 속에 차려진 지상 낙원
낡은 문장으론 다 담지 못하고
잠 깨운 새소리와 바람의 결을 받아 적으며
영원이라는 바다로
오늘 하루를 실어 보낸다.
녹명 鹿鳴*
우리의 멍든 소망들
하루 속에 다 익혀 정수로 축배 잔 채운다
두 어깨에 쇠 바위 걸머메고
황토 빛 저잣 길 누비며
다른 지체들의 아픔이
당신껜 온몸 고통 되어도
잔잔한 호수에 유영 펼쳤죠
끝없는 질곡
삶의 무게 절규하며
토해내는 사슴 울음소리는
가냘픈 다리 갈퀴에 숨겼죠
세상 뜻과 하늘의 뜻 하나임을 화두 삼아
진흙의 세속 사 하나로 뭉개어
큰 손가락 3개, 작은 손가락 5개
구름 위에 올려놓았네
기쁨이 있고, 없어도
감사함에 목이 메던 사슴의 울음소리
마중물 부어, 부귀의 용솟음
비처럼 뿌리는 세상 마음 밭에
고귀한 주파수로 남겨두련다
높은 곳에서도 여덟 손가락
배고픔 지키시는 녹명의 숨결에 얹어
산 자와 죽은 자의 운명을
나 오늘에야 눈물로 지우고
백조의 그리움 실은 연서 한 장
내 뜻 아는 하늘로 띄운다.
*녹명(鹿鳴): 사슴은 신기하게도 좋은 먹이를 발견
하면 울음소리를 내어 다른 동료들을 불러보아 함께 나눠 먹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8남매를 보살핀 오빠를 천자에 비유하여 돈독한 가족 간의 정과 큰 오빠를 기리는 시(詩)
경계에서 (Wormhole)
정답 없는 공식 같은 삶이었지
숨은 해답 더듬어 찾고
평생 헤매며 걸어왔네
이제 거대한 삶의 경계선에 서서
지나온 길과 갈 길을 고요히 헤아린다
머뭇거림 없이 안개 속 걷는 나는
희망 찾는 순례자
몸 짓누르던 무거운 갑옷은 이제 벗어두고
세상의 빛나는 말 씨앗들을
마음속에 소중히 버무려본다
부탁하는 말은 웜홀을 지나기 전에
감사하다는 말은 웜홀을 건넌 후에
받은 만큼 돌려주는 마음의 셈을 놓으며
쏟아지는 칭찬은 축복처럼 받고
부족함은 스스로 깎아내며
내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정성껏 갈무리한다
작은 물방울 하나에도
찬란한 무지개가 숨어 있음 깨달으며
못다 한 마음 담은 편지 위에
그리움 같은 우표 한 장을 붙인다.
[심사평]
‘한국신춘문예 2026년 여름호’ 시 부문 당선작으로 고보혜 씨의 시 ‘하늘담은 물 거울’ 외2 편을 선정한다.
우리는 ‘시’를 문학의 왕이라고 별칭하기도 한다.
그것은 그만큼 시가 문학의 기본이면서도 오래된 형식의 하나이고, 감정과 사상을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표현하는 장르이며, 문학의 모든 장르가 이 ‘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시는 짧은 구절 안에서 복합적인 의미와 강렬한 정서를 응축할 수 있고, 독자의 상상력과 공감을 자아내는 힘이 산문이나 소설 등에 비해 크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보혜 씨의 세 작품은 현대 자유시가 갖추어야 할 정서, 문맥의 흐름, 문체 그리고 아름다운 시어까지 오랜 시간을 시의 천착을 통해 시 짓기 작업에 노력해 왔음을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행과 연이 장시의 형태를 띄지만 그 흐름이 자연스럽고 특히 시어의 선택이 탁월해 응모한 작품 모두가 우수하다고 평가한다.
앞으로 더욱 천착하여 한국 시단과 지역문학 발전에 작품으로서 대성하길 기대한다.
(심사위원: 석정희, 신인숙, 윤노을, 엄원지)
[당선 소감]
정답이 없는 삶의 길 위에서 늘 헤매고 거듭 머뭇거리던 저에게 한국신춘문예의 당선 소식은 제 삶의 마지막 페이지를 정성껏 갈무리하는 축복이자,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마중물이 되리라 믿으며 여전히 서툰 몸짓이지만, 앞으로도 삶의 아픔과 기쁨을 온몸으로 안아들며 고귀한 주파수를 남기는 시를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낡은 문장으로는 다 담지 못할 지상의 낙원과 영원이라는 바다를 향해, 저는 이제 작은 물방울 하나에도 숨어있는 찬란한 무지개를 찾아 편지를 띄우려 합니다.
시를 쓰는 일은 제게 세상을 견디게 하는 힘이자 삶을 비추는 창이며 또 하나의 물거울입니다.
앞으로도 낮은 곳을 흐르는 물과 바람소리, 작은 생명들의 숨결에도 귀 기울이는 진실한 언어의 아름다운 무대에 춤을 즐기며, 웅덩이 속 작은 돌맹이가 큰 바오밥 나무를 흉내 내듯 거친 세상 속에서 온전한 나만의 성벽을 짓고 허무는 과정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부족한 제 삶의 궤적을 묵묵히 지켜봐주고 응원해 준 가족과 문우들, 그리고 앞으로 저의 문장을 만나게 될 분들께 감사와 평화의 인사를 전합니다.
사슴의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듯 세상의 작은 목소리에도 마음을 함께 공감해 주시고 귀한 인연의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고보혜 프로필
경남 진주 출생/ 이화여자대학 졸업/ 중등 영어교사 퇴직/ 한림야간중·고등학교 교장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