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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시인의 말
절실히 살아가는 삶의 길목에서 비 맞은 낙엽처럼 추운 인생을 떨구며 잃어버린 인연을 찾아 詩를 쓴다
언제나 내 마지막의 언어를 기억하며 詩集을 내어 놓는다.
2015년 사월에
글쓴이 최정순
[차례]
제 1부 세월의 강
삶 다독여 주던 하많은 사람들
강물 따라 속절없이 흘러가고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았네
1.사랑 ☆
2.당신
3,님
4.님의 뒷모습
5.이별 ★☆
6.너
7.나
8.마음
9.6월의 노래
10.무정
11.여로 (旅路 ★
12.회자정리(會者定離) ★
13.세월의 강 (1)
14.세월의 강 (2)
15.솟대와 나
16. 말풍선
17.아, 대한민국
18.백골송 (白骨松)
19.삼화당 (三和堂)
20.쌈지골목
21.축시 ★
22.나의 쉼터에서 ☆
23.풍속도
24.홀로 가는 길 ☆
25.말 ★
제 2부 이름 없는 들꽃에게
너 사랑하는 나 있고
너의 씨 산화하여
새 봄 맞으면
사지 넓게 펴고 활짝 웃으며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하리라.
26.성황목(城隍木)
27.나비
28.모란
29.민들레 ★
30.불심 (佛心)
31.꽃무덤
32.두견새
33.망부석
34.백합 (1)
35.백합 (2)
36.는개
37.구름꽃
38.구름과 나 ★
39.야생화
40.이름 없는 들꽃에게 ☆
41.막걸리
42.파초
43.언사(言寺)
44.시(詩)
45.상여집
46.우리 옷
47.낮달
48.혜성
49.둥지
50.낙락장송
51.금강송
52.보따리
제 3부 그리움
당신은,
그리움이라는 올가미 하나
튼실하게 걸어 두고 저 멀리 떠났네.
53.그리움 (1) ★
54.그리움 (2)
55.꽃불
56.자유로에서 ★
57.어머니
58. 어머니의 꿈
59.아버지
60.모녀
61.고향의 유월
62.핏줄의 끈
63.하얀 카네이션 ★
64.이복 언니의 사부곡(思父曲)
65.빈집의 꽃들
66.동구 정자나무
67.고향 저수지
68.방앗간 ★
69.산국화를 보며
70.울 엄마
71.종이학
72.망부의 한 ☆
73.낮에 나온 반달
74.손자
75.막내동생 결혼식
제 4부 만추에
성근 별 창백한 그림자 희미하고
반쪽 푹 썩어 문드러진 야윈 반달
허무에 순응하려는지 이별마저 붉다.
76.봄 (1)
77.봄 (2)
78.봄꽃
79.헤이리의 봄 ★
80.칠장사에서
81.부처님 오신날에
82.스승의 날 근처에서
83.농촌 풍경
84.위도의 꽃
85.청산도에서
86.천수만에서
87.간월암에서 ★
88.안성 바우덕이 축제에서
89.만추(晩秋)에
90.낙엽 (1)
91.낙엽(2)
92.가을비
93.가을바람
94.가을밤
95.중앙탑에서
96.석상(石像)
97.귀부(龜趺)
98.전시장에서
99.첫눈
100.겨울비 ★☆
제 1부 세월의 강
사랑
博川 최정순
꽃 시들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몸은 죽어 가도 향기는 남는 것
눈 감을 때까지 온전한 생명체인 것을.
당신
博川 최정순
둘레둘레 사위 살펴보아도
지금은 당신의 모습 없어
매순간 포개지는 슬픈 음조들
햇살에 반짝이는 풀잎
바람과 소근거리는 나뭇잎
의자 몸 길게 펴 누워 있는 길목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도
당신은 변함없이
그곳에서 오롯이 웃고 있는데
갈색 마음의 여백 채우고 채우면
성큼성큼 달려와 줄 것만 같은
향기롭고 상큼한 당신은
욕망의 잔혹한 묘사 비밀스레 그리다
조각조각 맞추는 능란하고 능란한 붓질
내 마음의 붉은 종피種皮 속
알알이 폭죽처럼 터트린다.
님
博川 최정순
터지고 찢긴 영혼 감싸 주며
사랑하고 미워하더니
오늘도 뜨겁고 차가운 정
가득 담은 사연 접었다 폈다
당신은 이 꽃 저 꽃
찾아 나는 한 마리 나비던가요
이제 그만 날개 접고
내 그늘에서 쉬세요.
님의 뒷모습
博川 최정순
까닭 없이 그리운 사람이여
세월 앞에 등 떠밀려도
까닭 없이 보고프네
칡넝쿨인가 어울더울
내 몸과 마음으로 파고들어
찬란한 보석 빛깔 만들었던
눈부신 그리운 사람아,
흔적 없이 내밀히 물들어 가는
아픈 사랑이었더구나!
이별
博川 최정순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 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너
博川 최정순
늘 부대끼며 살아도 알지 못하듯
서로 간 살길 찾아 무심할 때
나 위해 두 발 포근히 감싸 주었어
내가 어디를 가거나
긴긴 날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늘 곁에서 위로해 주었지
어느 섬 모퉁이 돌아가거나
산비탈 억센 길 팍팍하게 오를 때
아무 조건 없이 옆에서 지켜 주었어
내 얼굴 파도 같은 주름살 늘고
흰 백발 서리처럼 내릴 때에도
나 위하여 늙은 몸뚱이 된 너였지
씻기는 은하의 별무리 찾아 떠나면
눈 시린 아침 파란 편지 빼곡히 쓰고
나는 수줍은 새색씨처럼 반겨 했었어.
나
博川 최정순
시멘트 바닥
우울의 그림자 길게 눕고
어둠 멈춘 곳
궁기 질벅하게 흐르는 여인
맨발로 중앙선 서성이는데
여인의 짚북데기 머리카락
자동차 홀지게 건드리며 내달리고
갈 길 잃은 동공
무서리 맞은 듯 희뿌연 채
수많은 인파 속 밀리고 밀리다
차량 한가운데 내몰린 여인
어린애처럼 깔깔 웃으며 서 있다.
마음
博川 최정순
소리 없고 형체 없어
어디 있는지 모르는 너
몸 안 있는지 몸 밖 있는지
가슴 있는지 머리 있는지
항문이나 요도에 있는지
휘휘 둘러보아도 보이질 않네
망원경 현미경으로도
흔적의 실마리 찾을 길 없는 너
너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오늘도 너를 찾아 먼 길 떠나네.
6월의 노래
博川 최정순
고열로 뒤척이던 길고 긴 밤 갈 때
밤하늘 수놓던 별 부풀어 터지고
아침 햇살 병실 가득 툭툭 던져
창문 활짝 열고 밖을 보니
찔레꽃 아카시 꽃 물푸레나무 꽃
하얗게 하얗게 웃고 있는 길
그래, 저 길 어느 즈음이던가
저렇게 웃고 살던 내가 있었지
청옥빛으로 활개 치며 붓질하던
덜 익어 풋풋한 내가 있었지
알 수 없는 아릿한 그리움에
발목 하얗게 적시고
어머니 젖무덤 같은 동산 서면
농부 희망 심어 놓은 연초록 진영
빈 논물 채우듯 나는
죽어 가는 육신 영혼 채워야지
몸은 6월 향기 잃어 갔어도
하얗게 하얗게 웃으며 살아야만 하지.
무정
博川 최정순
이별 한 장단 튕기며
하늘 휘몰아 운다
춤추는 등나무 등줄기 바람
어설프게 휘어지도록 붙잡고
우웅웅 한스럽게 후두둑 터지는
다시 못 올 가락이던가
서해로 천길만길 서해로
두메 계곡 휘돌아 울며불며
한 서린 중중가락 신명내다
크고 작은 분화구마다
당신의 행성
매몰차게 부숴 버리고
애간장 녹이고 녹이다
사라지는 은결스런
당신의 무정.
여로 (旅路)
博川 최정순
땅 끝에서
또 다른 땅 끝
잃은 것 어느 하나
메울 길 없는 마음으로
여명黎明의 새벽길 허청이며 달려
청갈치빛 서늘한 하늘에
이별의 필무가筆舞歌 튕기우며
헐떡이며 울렁거리는 가슴
흰 보자기 가득 담아 두고
서먹하게 서먹하게
모두를 잃고
모두를 얻으러
다시 가야만 하는 발길
나그네 족적足跡.
회자정리(會者定離)
博川 최정순
푸른 옷 걸치고 팔다리 활짝 편
나무 겨드랑이 튼 축구공 둥지
음습한 자궁 박차고 나온 어린 새
밝은 세상 노래 불러 찬미하며
어미 물어다 주는 음식 받아먹고
날마다 날갯짓 익혀 어미 사냥 배워
세상 온 몫 하려다 천적 물려
어미 가슴속 먹구름 물들이다
겨드랑이 피멍 들며 폭우 속 날아가면
어미 새 낙엽 위 주둥이로
장문의 작별 편지 쓴다.
세월의 강 (1)
博川 최정순
대기 중 부유하는 먼지만큼이나
많고 많은 상처 속으로 잠재우며
야속히 흘러가는 세월의 강물
처연한 마음으로 뒤돌아보니
삶 다독여 주던 하많은 사람들
강물 따라 속절없이 흘러가고
이제는 추억으로만 남았네
그리운 마음 고독이 덮어 버리며
무심천無心川 따라 굽이굽이 흘러가니
가슴 가득 졸밋졸밋 저려 오는 아픔
저 멀리 흘러가네.
세월의 강 (2)
博川 최정순
지천명 넘도록
가슴에 묻은
비밀 한 올 한 올 풀어
내가 살아온 만큼의 황금빛 빛나는
등신불로 경건히 단장하려 했던 강
상수上壽 못 누릴 바
쉬었다 흘러도 좋으련만
저 혼자 불길 태우고 태워
꿈꾸는 기암단애 에돌고
수문 머물러 지친 몸 뒤척이다
바다로 스며들어 작별하니
지나온 길이 하나, 하나 그립구나.
솟대와 나
博川 최정순
긴 악몽에서 벗어나자마자
아픈 몸 끌고 병실 나가
정원에 무연히 섰다
희뿌연 안개 숲 덮고
비구름 몰고 달려온 바람
냉기 가득한 비 흩뿌린다
여기저기 망가져 가며
정원 한 켠 우두커니 서 있는
솟대와 나에게도 찬비가 내린다.
말풍선
博川 최정순
말풍선! 자영업 소상공인 오십 프로 이상 부채 가구당 오천만 원 이상 부채의 대졸공화국 대한민국 티브이 염치없이 세계 경제 몇 위 자랑하네. 말풍선! 실직자 부랑자 노숙자 오늘도 기하급수로 늘어만 가는데 말풍선! 국민 대표 국회의원 살신성인 환골탈퇴 물 말아 드셨나 저희 밥그릇 챙기느라 혈안 부끄러움 모르고 온갖 비방 폭력 욕설 난도질에 국회 몸싸움 방지법 대안으로 내놨다나 말풍선! 고매하신 자칭 국민 심부름꾼 백성 피골 뽑아 매달 천만 원에 엄청난 알파 챙기면서 서민 한 끼 음식 값도 안 되는 최저 임금 사천오백팔십 원 책정하셨다나 말풍선! 대선 때만 되면 국민 섬김 떠버리들에 어떤 후보 참일꾼인지 모호하기만 하네 말풍선! 의뭉스럽기 너구리 뺨치는 선량들 매년 혈세로 필요치도 않는 쓸데없는 일에 이리저리 혈세 퍼부으며 떡고물 챙기네 말풍선! 서민 경제 어려울수록 지갑 열기 쉽지 않을 터인데 지자체 사철 축제 홍보 에라, 나도 먹고 망하자 고속도로 이동 차량 정체 정체 어디 가나 인산인해 그 많은 빚 무엇으로 갚나 말풍선 국민들!
아, 대한민국
博川 최정순
대학들 학문이랄 수도 없는
각종 학과 부지기수 신설하더니
하나 둘, 모든 학문 중심이어야 할
국어국문과 국사과 폐지한다네
학원서 가르쳐도 될 기술들
돈 되니 앞다퉈 대학서 가르치고
민족 국가 얼 혼 지키는 기초 학문
국학은 어디로 가야 하나
하기사 어미 조사 빼놓고
온통 영어투성이인 나라에
국어국문학이 무슨 소용인가?
중국은 국가에서 돈 들여
동북공정인데 국민 세금 비슷한
시청료 받아 만든 각종 역사 드라마
우리 역사 엉터리로 만들어
스스로 동북공정 앞장서 주니
국사학이 무슨 소용이더냐
언어 역사 없어져야 확실한
미국 식민지 되니 그런가?
엉터리 자본주의 물든 나라
사대주의 오염된 나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백골송 (白骨松)
博川 최정순
산야 초근목피 찾던
가난한 잡초의 보릿고개
쇠심줄보다 더 질긴
목숨 하나 부지하려
소나무 껍질 벗기고 벗겨
하얗게 맨살 드러내니
있는 자들 배 두들기며
곡물 썩어 나가도
살 도려내는 추위에
유랑걸식하다 굶어 죽어도
눈 돌려 외면하네
허물 벗고 선 백골송만
끈적한 눈물 흘리며 굽어보네.
三和堂
博川 최정순
한수漢水 이북 척박하고 척박한 터
부모 오초午樵 혜림惠林 붓길 따라
불초자不肖子 어버이 사랑 찻잎 묻혀 흘러
아름아름 꽃피운 찬란한 예술
꼬리 없이 달려온 목단꽃 그늘 아래
모든 생각 소금에 묻어 버렸다
이승의 짧은 만남 긴 이별 앞
철쭉 아래 두견새 피 토하며
몸서리치게 울던 서러운 날
숯덩이로 쏟아지던 눈물 훔치며
강물의 수레바퀴 뿌리 내린
나의 서예가 삼三, 화和, 당堂.
쌈지골목
博川 최정순
우리네 전통 거리 인사동
수많은 골동품 수예품 미술품
눈으로 손으로 이어진 고아한 맵시
골목골목 화려하고 찬란한
꽃으로 만발하였었지
외국인들마저 눈에 불을 켜고
끊임없이 소리 높여 감탄하던 곳
무계획 무차별 신개발
사랑방 터전 허물어져
세월의 칼날 팔다리 잘려 나가고
액세서리 잡화점만 매소부처럼 늘어섰네
주머니 골목이라 쌈지 골목
명맥의 맥박만 겨우 헐떡이며
오가는 사람 처량한 눈길 주니
나이 들어 내침 당하는 나의 모습 같아
애처롭기 그지없네.
축시
博川 최정순
금강의 빛나는 든든한 나의 아들
오늘 소중히 맺어진 물오름 달
환한 인연 꽃 폭죽처럼 터뜨려
서로 서로에 기둥 되어 의지하고
서로 서로에 지붕 되어 덮어 주며
끊임없이 샘솟는 새물뿌리 되어
험난한 파도와 골짜기
외눈박이 비목어比目魚처럼
둘이서 서로의 눈으로
영겁永劫의 세월 멈춤 없이
외날개 비익조比翼鳥처럼
함께 서로의 날개 되어
이제 두 사람 한몸 약속하였으니
천년 한결같은 연리지連理枝로
항상 서로의 반쪽으로
사로思路 언로言路 소통
자기 수련 통해 마음 비움 배우고
매사 서로 보탬 되는 지혜 찾아
인생살이 여러 갈래 있으나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늘 서로 배려하는 동행되어라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며늘아,
항상 더 높은 곳을 향해 약진하며
건강하고 행복해 다오.
나의 쉼터에서
博川 최정순
세파에 허우적거리다 찾은
자연지형 살린 친환경 별똥카페
녹슬어 흑석 같은 외벽에
사위가 컴컴하여 그냥 산속
화전민 소원하던 성황당
전통 민속 공연장
설치작가 규화목
세월의 검은 이불 덮었네
잔별 무리 져 나무지붕 아래 쏟아지고
반딧불이 박꽃 주위 원무하는데
아득한 산골짜기 계곡 물소리 청아하여
돌계단 따라 야트막한 공원 오르니
저 멀리 의림지엔
월신月神이 은가비 소요하고
신선이 잠자는 원시림 속
피톤치드 세로토닌 음이온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내뱉으며
세속의 앙금 말끔히 씻어내니
내 잠자는 육신에서 날아오르는 새
요부의 춤사위처럼
현란한 오색 형광 폭포수에 춤추다
눈 먼 어리석은 이슬 되어 내 찻잔에 빠진다.
풍속도
博川 최정순
오늘을 사는 우리
민속설 연휴 맞아
콘도 놀러가 인터넷 주문 제상
술 취한 가족들 꽃 멍게 얼굴로
오가는 욕설 끝 주먹다짐
위아래도 장손도 장남도
위계질서 무너지고
우리의 설 간 곳 없는데
준비해 간 영정들
자손 내려다보며
이제부터 뼈대 족보 일 없으니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너희 마음대로 살아라
눈망울 툭, 튀어나오네.
홀로 가는 길
博川 최정순
어느 닭 울던 날 새벽
빈손 울음 터트리며 세상 움켜쥐고
종달새 짝 찾아 하늘 교감하는 벌판 넘어
독사 대가리 치켜들어 독 품는 골짜기 지나
벌 나비 향기롭게 춤추는 장미 정원 가로질러
달 별 꽁꽁 어는 극지방 어둠 서성이다
지천명 고개 허위허위 올라 보니
저 멀리 이순 고개 운무雲霧 쌓여 아득한데
바위 달린 팍팍한 무거운 발걸음
오르다 뒤돌아보니 외로움만 길게 누워 있네
진애塵埃 고개마다 돌아보면 혼자인데
폭풍한설 사지 동강나며 위태위태 걸어온 길
저 고개는 또, 누구와 함께 갈까.
말
博川 최정순
눈에 보이는 것
다가 아니듯
입 뛰쳐나간 게
다는 아니지
아름다운 향기 품은
입바른 꽃잎들
거센 바람에 흩어지듯
허공에 뿌려지는 수많은 말
피지 못한 꽃
몽우리 터져 죽은 기억
가지야, 너는 아는가
뿌리야, 너는 그 슬픔 아는가
생각의 가지 마음의 뿌리
인고의 계절 견디며 너희들,
화신花神 만나 순리 배워
말의 꽃을 피워라.
제 2부 이름 없는 들꽃에게
성황목(城隍木)
博川 최정순
제주도 한라산 둘레길
구불텅 팍팍한 길
몸집 큰 성황당에
삼백 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
버팀대 몸 의지하여
벌거벗고 찬바람 견디며 섰는데
사람들 정성 사연 엮인 헝겁
바람결 저마다 한들한들 춤추며
가지에서 오방색으로 웃고 있네
북풍한설 의연히 다 보내고
가슴속 샘솟는 불꽃
몸통 통과하여 손발 찌르니
꿈으로 피어나네,
새파란 새순.
나비
博川 최정순
멀고 먼 고향 소식 그리워
화선지 앉은 너의 모습
붓길의 물감 마르기 전
핏빛 목단 사방에 덧깔면
꽃처럼 하늘하늘 여울지는
가는 봄의 설운 상념들
텅 빈 공백에 흩뿌리운다
그리움 가득 묻은 호수
저어 오는 작은 조각배 벗처럼
따뜻한 봄바람 되어 화선지
옷 주섬주섬 입혀 주니
거친 파도 갇힌 질긴 인연들일랑
싸늘한 빛에 모두 묻어 버리고
너는 홀로 고독한 혼 되어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는구나.
모란
博川 최정순
태백산맥 준령 넘어
비탈길 따라 내려오던
뜨겁고 칼칼한 풍염風炎의 이향異香
대지 가슴 사무치게 붉어지며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이고 쌓이는데
부질없이 붉어진 고개 떨구니
나 두고 가는 급한 바람
잠시 더 쉬어 가면 좋으련만.
민들레
博川 최정순
임진강변 철조망 날아가
싹 틔운 눈부시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꽃 아니더라도
다소곳이 고개 숙이고
북녘 향해 북바라기하며
피어나는 외줄기 그리움
매일 새로이 꽃을 피우며
개화開花의 아픔에
눈물 흘리며
잔잔히 미소 짓는
철조망의 민들레.
佛心
박천 최정순
부처님 오신 날
마을 산속 절 가보니
구름처럼 모여든 많은 인파
수행정진 관음보살 불심佛心 아니어도
빈자貧者의 소박한 축원 한 자락
사해四海 처처處處 부처님 자비 얻고자
기와불사起臥佛事 시주 소원 성취 기원하네
부처님 찾아 지붕 올라가려다
복 짓지 못하고 모질게 산산조각
처참히 부서져 나뒹구는 무더기
공양물 용처用處 죽어 버린 기와들
이리저리 구석구석 처박혀
발에 밟히고 밟혀도 불심佛心 아니던가.
꽃무덤
博川 최정순
비 오면 비 와 울고
바람 불면 바람 불어
온몸 뒤채며 흔들리다
불타는 열병 소진 못해
탁탁, 희나리 튀는 듯
쓸쓸함 가슴 적시는 밤
님 향한 그리움
보름달처럼 휘황한데
꽃눈개비에 부서진
결별의 발자국 멀고 멀어
당신의 잔혹한 뒷모습
처연하다 못해 외로웁고
죽어 가는 모습으로
오늘도 몸부림치며 꽃보라
하롱하롱 분분히 흩날리다
동살 덮는 애절한 나의 꽃무덤.
두견새
博川 최정순
님의 숲에서
목 터져라 피 토하며 우는 밤
한때 걸쳤던 진주홍빛 옷 벗고
벌집처럼 시커멓게 구멍 난 시간들
주체할 길 어찌할 길 없어
튼실한 이음줄로 지배했던
지난날의 특별함 속으로
걸망 하나 둘러메고 날아가니
버리고 싶지 않은 수많은 단상들
오로지 너 향하던 님의 선연한 눈빛
어디에도 꼬리 감췄네
무섭게 몰려드는 갈증 떨치려
이슬에 술 타 마시는 밤
눈물의 꽃가람에 홀로 닻 내리고
저 멀리 멀어진 님의 곁 그리워
목이 타도록 너는,
울고 울더라.
망부석
博川 최정순
삭풍 해송림 붙잡고
징징 울어 대는
인적 끊긴 안면도 꽃지 해변
허위허위 달려가니
백사장 갈매기 한가롭고
할매바위 할배바위
서로 그리워 눈물 짓고 있네
표표히 먼 길 떠난 님
해무 갇힌 질곡의 장구한 세월
못다 한 정情 모래 위 쌓고 쌓으니
된바람 달려들어 흩어 놓고
사무치게 헤적이다 어디론가 날아갔네
할배 그리워
밤이면 빈 가슴 달빛 먹고
올동백 피눈물 뚝뚝 흘리다
바위로 환생하여 수평선 바라보니
님 망망대해 건너와 곁에 섰네
할매 할배 망부석
발치 아래 뿌리내린 천년송千年松
할매 할배 굽어보며
길고 긴 세월 감싸 안고 있다.
백합(1)
博川 최정순
병상 누운 언니
족쇄 달린 걸음걸음
거북같이 더디 가는데
시절은 거침없이 내달려 초여름
언니가 마당 한켠 심어 놓았던 백합
이제 별처럼 도톰한 입술 내밀고
외줄기 순결한 향기 독하게 뿜어내네
탈북 길 올랐던 언니
이념은 사정없이 무너지고
붉은 눈물만 흘렸지
오늘도 언니의 백합
신부마냥 곱게 피어나는데
당신은,
하얀 날개 찢겨 결박당한 채
그늘 속에서 통곡하네.
백합(2)
博川 최정순
처녀처럼 순결한 영혼
순정한 사랑 밖에 몰라
하얀 눈물 흘리다
흘러가는 강물에
님 떠나보내고
흰 백합 시들어
향기 독기 되어 퍼지며
검은 눈물 흘리네.
는개
博川 최정순
오랜 시간 강렬한 햇살 들볶이다
대지가 토해낸 뜨거운 숨결
하늘 맺히고 맺히다 몽우리져
아래로 아래로 내리는 실비
피멍 맺히도록 이 악물어 참고
참았던 젊은 날의 초상
설움 복받쳐 응어리진 가슴에
예리한 칼날 결결 난자당하며
오는 듯 안 오는 듯 내리는 너는,
가슴 헤집으며 쓸쓸히 속삭이다
사라지는 나의 눈물이던가.
구름꽃
博川 최정순
하늘에 덩실덩실 떠 있는
터질 듯 부풀은 구름
타래마다 사랑 행복 희망 담고
하늘하늘 몽실몽실
날이면 날마다
여기저기 정처 없이 떠다니다
억겁의 인연 찾아
오늘도 서로 어울리는데
저 하늘 집이던가 고향이던가.
청옥처럼 푸른 하늘의 하얀 꽃밭
해 서편 바다 빠질 무렵
붉은 구름꽃 활짝 만발한다.
구름과 나
博川 최정순
하늘이 제 집이라서
바람결 주춤주춤 흘러와
계곡 어느 외딴집
지붕 위 잠시 머물다
장독대 항아리 속
간장에 헤엄치며 놀다
물수제비 뜨는 개구쟁이
눈 속에 머문다
내 마음도 구름 같아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가
어느 날 무심히 돌아선
당신의 그림자에 내려앉는다.
야생화
博川 최정순
멀고 깊은 산길
명지바람 흔들리는 잡목 사이
너 고개 숙여 수줍은 미소 짓는데
잠깐 고개 숙여
이름 없는 너를 보며
제자리 종종 돌다
황망히 네 자리 떠나며
등 돌려 뒤돌아보니
아주 오래전
알았던 사람이던가 싶어
가던 걸음 멈추고
쉬이 못 가네.
이름 없는 들꽃에게
博川 최정순
천둥 비바람과 싸우며
날밤 새워 낙화 위해 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너
독기 어린 향기 품고
찬 이슬에 고개 숙이다
서리 맞아 떨어진다고
가슴 뜯으며 울지 마라
누군가의 발길질
어느 누가 던진 돌
머리통 산산이 깨어져도
너 사랑하는 나 있고
너의 씨 산화하여
새 봄 맞으면
사지 넓게 펴고 활짝 웃으며
이 산 저 산 향기 가득하리라.
막걸리
博川 최정순
우리 전통 명주 막걸리
막 걸러 탁하고 볼품없지만
영양 많고 암 덩어리까지 제압한다는데
부지간 슬그머니 틈입한
일본주 중국주 구미주에
설 자리 잃고 저 멀리 떨어져 서성이네
내 불쌍히 여겨
목로 차려진 탁사발에
희뿌연 막걸리 하강시켜 들이켜고
불콰해진 노을빛 얼굴로
태평가 한 대목 멋들어지게 부르니
천국이 따로 없네.
파초
博川 최정순
고향 멀리 떠나 반그늘지고 습기 많은 땅
뿌리 줄기 잎 밑동 감싸 헛 줄기 이루고
연노란 꽃 여름 가을 두 줄로 나란히 펴
장관 이뤄 기세등등 만산편야滿山遍野하였지
잎 하나 우산만 하여 얕은 돌담 덮고
거칠 것 없이 황금 꽃 피웠네
폭풍에 흔들리고 폭우에 고개 숙이다
삭풍 전선줄 붙잡고 울기 시작하면
자랑스런 황화黃花 푸른 잎 모두 떨구고
갈색 퇴물로 변하여 하늘 보면
맥없이 멀어져 간 아스라한 전설들
누구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
남쪽 향한 그리움에
복장 터지는 울음으로
온몸 부여안고
속으로 운다.
언사(言寺)
博川 최정순
말과 절
조화로이 악수하여
삿되고 거짓된
홍진紅塵의 옷
훌훌 벗어 버리고
하나의 탑塔으로 남은
너의 이름,
시詩.
시(詩)
博川 최정순
한 편의 너 얻기 위해
달 별 교감하고
풀잎 꽃잎 마음 나누며
사슴 강아지 대화하고
누옥에 누더기 걸쳐
한 지팡이 의지한 채
시선 저 멀리 던지나
아지랑이만 아롱아롱
네 모습 보이지 않네.
상엿집
博川 최정순
팍팍한 다리 두들기며
동네 모퉁이 돌아
비포장 신작로 지나
울퉁불퉁 패인 언덕길
명줄 다한 인생
눈물다발 가슴에 품고
저승길 올라타고 가는
서글픈 노래 감도는 상엿집
죽은 자 이야기
구름처럼 피어나는
꽃상여 집.
우리옷
博川 최정순
여인네 입으면 우아하고
남정네 입으면 학 같은
선 곱고 맵시 나는 한복
무명 직물 오방색
천연염색에 하늘 기운 들여
내자의 빼어난 바느질 솜씨로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우리의 고유 의상
애옥살이 궁핍하여
희미한 등잔 화로 옆
서방님 모시적삼 중이적삼
찹쌀 푸새 다듬이질로
인두질로 구김살 폈지
아내들이여,
당신네의 솜씨가 빚어낸 힘은
우리 민족의 혼이며
천만년 이을 영원한 문화유산.
낮달
博川 최정순
밤길 잃은 한 마리 흰 사슴
하얗게 빛바래 야윈 빈 껍질로
먹빛 어두운 기억 훌훌 털고
여기저기 잘려 나간 희망의 가지 모아
삿된 것 버리고 초연히 천공에 둥실 떠
시나브로 모든 고통 이리저리 흘려보내고
갖은 이념에 찢기우고 망가진 온몸 추슬러
어제의 그리움 목울음 삼켜 다시 퍼 올리며
중천에 하얀 꽃으로 눈부시게 피는구나.
혜성
博川 최정순
직선 서둘러 그으며 낙하하던
긴 꼬리 묻었던 눈물 털었나요
그 옛날 당신 떨어져 누운 자리
이제 발모가지 덮는 숲길로 변하여
시월의 어우러진 잡풀 붉게 태우고
동짓달 고추바람 서리 옷 둘렀는데
나 호올로 규화목硅化木 의자 앉아
당신 뒤따르는 자손들 보며
서글픈 별나라 전설 나누다
당신들처럼 세상사 모두 내려놓고 싶어
가이없는 서러움 울컥 토해내니
한별곡恨別曲 되어
모진 삭풍에 흩어지고 맙니다.
둥지
博川 최정순
둥지는 또 다른 한 누리
우리는 보이지 않는 어미가
알을 품듯 품고 있었음을
서로 어미가 되어
상봉하며 알았네
앞으로도 그렇게 어미는
우리를 한 둥지에 품어
하나로 만들 것이기에
실망과 좌절 딛고
아픔 다스리며 살 것이네
참을 만치 참아가며
사랑으로.
낙락장송
博川 최정순
고난의 산등허리
허위허위 바람결 타고 넘어
고래처럼 거대한 바위틈
씨 던져 튼실한 뿌리 내려
시샘하는 폭풍 맞서며
사지를 활짝 폈다
산기슭 산 정상 소요하는
운무에 온몸 목욕하고
고고하고 기품 있는 모습으로
천하를 굽어보며
주변 풍광 제압하던 낙락장송
지인들이여, 들리는가?
내가 가는 상여 주위 맴도는
귓가로 부서질 나의 푸른빛 풍금 소리
낙락장송 바람 소리.
금강송
博川 최정순
아버지 널 얻으려
젖무덤 안 자리한 유벽乳癖처럼
힘겹고 아픈 다리 멍울 참고
어릴 적,
뒷산 가득했다던 할아버지 말 믿고
고향 산 돌사닥다리 정상 올라
소나무 제왕 금강송 찾으니
일제 무차별 수탈정책
밤에도 관솔불 켜 도끼질
송진은 태평양전쟁
비행기 연료로 소진되고
마구잡이 근대화 개발
산업화 이면으로 사라져
어디에도 없네
촘촘한 나이테 많은 송진 젖처럼 흘러
천년이 흘러도 썩지 않을 너,
임금 사대부 관재棺材로
속은 황금빛 황장목黃腸木으로
천년 궁궐 고찰 대들보
천년의 영화 이어 가던 너,
이제 전설 속에 묻혔나
아버지 천년 편히 쉴 널감은
어디에도 없네.
보따리
博川 최정순
물건 안아 꾸린 뭉치
너 보따리라 부르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가슴 텅 빈 보자기를
사람들 너
싸고 들고 풀며
사연들 얼마나 많았더냐
책보따리 꾀보따리 익살보따리
하많은 추억 웃기도 많이 했어
피난보따리 삶보따리 이별보따리
상처 난 짐승처럼 울기도 많이 했지
얼마 남지 않은 내 삶의 여로
또,
어떤 보따리 싸 들고 가다 풀 것인가.
제 3부 그리움
그리움(1)
博川 최정순
당신이 어느 날
뜬금없이 잊으라기에
먹구름 되어
찌푸린 하늘 떠다니다
시뻘건 바다에 풍덩 빠져
망각의 벌판
차가운 별무리 가득하고
인정 없는 기억들만 가혹한데
날마다 눈 뜨는 그리움 어쩌지 못해
당신의 굳게 닫힌 문
다가서다 무서움에 오그라들고
잊기 위해 골백번 악무는 어금니
조금도 그립지 않다 속다짐
당신을 하루에 한 줌씩 버리고
그도 안 되면 반 줌씩 버리다
그것도 안 되면 그냥 쌓아 두지요
쌓고 쌓다 보면
썩는 날도 올 겁니다.
그리움(2)
博川 최정순
문득 먼 아득한 하늘 쳐다보니
당신은 회색빛으로 거기 누워 있네
그날,
고개 떨구고 이별의 모습으로
묻어 두어야 할 사연 감추며
가슴으로만 감싸 안던 수많은 이야기들
내 가슴에 들어와 괴롭히던 속앓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무심히 그려 놓고
당신은,
그리움이라는 올가미 하나
튼실하게 걸어 두고 저 멀리 떠났네.
꽃불
博川 최정순
봄 오면 아름다운 꽃들 얼굴 내밀고
서로 반기며 눈웃음 짓지요
사랑스런 해맑은 미소로
봄버들 봄바람에 살랑거리면
하늘 어디선가 눈가 이슬 맺혀
북녘 바라보는 아버지
수없이 오가는 봄
아, 작별 인사 없이 남북으로 갈라져
부모 형제 그리며 산 모진 세월
그리움 꽃잎 되어
텅 빈 가슴에 겹겹이 내려
당신의 꽃무덤 적시니
아버지 꽃불로 환생하여
아지랑이 타고 북으로,
북으로 날아가네.
자유로에서
博川 최정순
자유로 달려
임진각 가는 길
평양 개성 77 표지판
언제부터 있었나
배꼽 걸려 숨통 끊긴
저 철책 꼬리 감추면
북으로 북으로 단숨에 달려
아버지 고향 박천 당도하여
혼이나마 해후하련만
말로만 자유로 가장자리엔
봄꽃 아우성치며 부서지는 임진강
속으로 울며 여울지는 피눈물은
고향 떠나 서럽게 살다간 아버지 통곡.
어머니
博川 최정순
허물 벗어던지고
떠난 자식
머리 하얀 눈 앉고야
어머니 마음 헤아리는가
검붉게 녹슨 기억 저 너머
닳고 닳은 고무신 신고
인생의 비탈길
허위허위 달려가던
팔순 근처 어머니
정리되지 못한
병든 생명줄 하나 달랑
모지락스레 붙잡는데
어머니 이마 위 떨어지는
어버이날 석양
카네이션꽃인 양 붉다.
어머니의 꿈
博川 최정순
어젯밤 우리 아이들 꿈꿨다 요즘 그런 꿈 자주 꿔 내 죽을 때 다 되었나벼 그깟 꿈이 뭐관디 꿈 빌려 생명줄 늘였다 줄였다 하노 어머니 눈물 마를 날 없는데 틀니 빠진 자리 쭈글하고 번데기 주름 밭에 저승꽃마저 피었네. 언제 저렇게 늙으셨지 곁눈질 슬쩍 훔쳐보는 마음 짠하지만 무슨 가당찮은 소리여 엄니는 아즉 끄덕없는디 어머니 고개 가로저으며 아니여, 느그 아부지도 운명 한 달 전부터 그런 꿈 자주 꾸었대 엄니, 쓰잘 데 없는 소리 그만하소 모두 개꿈이여 나는 알고 있지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하늘로 간 아버지 별 찾는 하얀 그리움이란 것을.
아버지
博川 최정순
흙 일궈 잡초 뽑아
채소 키워 솎아 먹으며
잘된 것 장에 팔고
자식들 골고루 나눠 주던 당신
그런 행복한 세월
영원이라 생각했지요, 정말
터밭 당신 그림자마저 없어지고
흰머리 덮는 할머니 되었는데, 이젠
심신마저 병들어 허공 보며
눈물 쏟는 날만 더 많아지는군요
당신 향한 그리움 사무쳐
별무리 청옥처럼 피어오르면
은하銀河에도 감출 수 없는 나만의 그림
당신의 초상화
당신은 분명 어디엔가 있는데
당신은 어디에도 없어, 여전히
다시 만나지 못하는
또 서러운 새날을 맞이합니다.
모녀
博川 최정순
가족 활동 시간 제각각
오늘도 늦은 밥 혼자 먹고
마당 가로질러 터벌터벌 걷다
구름 한 점 없는 창공 올려다보는데
바람 손님 머리카락 마구 헝클고
봄 잃어 가는 마음 허허로운데
잠시 쉬어 가는 길섶엔
뒤섞인 잡초만 파랗고 파랗다
아리게 스며드는 외로움
가슴 이리저리 서성일 때
나도 모르게 뒤돌아보니
덕지덕지 파스 붙은 손으로
빨랫줄 옷가지 탈탈 털어대는
홀로 된 울 엄니 두 눈
내가 콕 박혀 있다.
고향의 유월
博川 최정순
나이 들어 찾아간 고향
부모 형제 모두 떠나고
집터만 오롯이
두메 별꽃 필 때마다
목숨 걸고 기다리던 별 하나마저
흐린 눈 감고 고개 떨구네
닭 홰치는 소리 새벽문 열리면
농투산이 비질하며 헛기침에
개울가 물봉선화 눈떠 세수하고
강물 억세게 휘돌아 흘러 흘러
깎아 버린 바위벽에
이슬 먹고 자란 아기 별꽃
발길 잡아두는 꽃 가람
청개구리 무심한 디딤새에
걸음 멈추고 사위 둘러보니
아는 이 하나 없고
강산만 그대로이네.
핏줄의 끈
博川 최정순
아버지 혼불 북녘 하늘 날아가고
아버지 찾아 동토凍土 탈출한 이복언니
남쪽에서 한 편 드라마처럼 만났네
아버지 1·4후퇴 박천博川 허위허위 떠날 때
뱃속 생명 키우던 정혼녀 귀에 속삭여 두었던가
아들 나면 아무개라 이름 짓고
딸 나면 무엇이라 필히 이름 지으라고
끝없는 인연 필연의 꼬리 물고 물어
아, 언니와 이름마저 같을세
사랑의 마음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 되어
마음으로만 허우적거려 찾고 찾으니
아버지 흔적 어디에도 가뭇없는데
한 떨기 쓸쓸한 꽃이 되어
저 멀리 천상에서 지상에서
넓고 넓은 팔 드넓게 벌리고 벌려
우리를 얼싸안으며 기다리네
영혼으로 혈육血肉의 끈 이어 준
아버지는.
하얀 카네이션
博川 최정순
자식 농사 소박하나 구순하여
아이들 명랑하고 씩씩하니
저승 가면 조상님 뵐 면목 선다며
서쪽 하늘 보며 호탕하게 웃던 아버지
아버지 낳으시고 아껴 준 어진 은혜
염치없는 핑계로 피하고 피하다
창졸지간 이승과 저승으로 갈라지니
아쉽고 그립기 그지없어라
목매어 불러도 대답 없는 북녘 고향
그리고 그리다 지친 한 많은 세월
가슴앓이 하던 아버지 가신 지 몇 년 지나
하늘 계신 아버지에게 보내는 시
모으고 모아 어렵사리 시집 펴내니
북에서 온 혈육 언니 시집 보고
인연인지 기적인지 기별 닿아
어버이날 영전에 꽃 두 송이 바치니
부족하고 부족한 딸들의 회한
아버지 가슴처럼 숯덩이 같은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둥실 떠오르며
딸들이 올린 하얀 카네이션 달고
아이처럼 밝게 활짝 웃고 계시네.
이복 언니의 사부곡(思父曲)
博川 최정순
어찌 여기 왔는가
반세기 넘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그저 자석 같은 힘에 끌려
인연의 등불 따라
남으로 남으로,
아버지 따라왔더니
아버지 간 곳 없고
시름없이 가신 아버지 빈 자리
비처럼 피눈물로 통곡하네
어찌어찌해서 왔는가
아버지 핏줄
이승과 저승 소통하며
철조망 꽉 막혔던 운명 앞
서로 주름져 얼싸안은 짧은 만남
저 멀리서 어느 날 바람 되어 찾아왔네.
빈집의 꽃들
博川 최정순
미숙이 돈석이 나와 함께 살다
떠나 버린 텅 빈 전설 같은 집
장독대 주변 이들이들 핀 꽃들
어제의 향기 아련히 꿈틀거리고
돌배나무 가지 위 참새 기웃거리면
허리 허물어진 돌담 아래
사금파리 무덤에선 조무래기들
재잘거리며 튀어나온다
미숙이, 돈석이, 나
미숙이 족두리꽃 머리에 얹어
시집갈 준비하고
돈석이 분꽃 목에 걸어
님 맞을 준비하였는데
미숙이 십팔 세 폐병
순백합화로 고개 숙여 다시 피어나고
반백이 다 되도록 돈석이 시집 안 가
허리 굽은 순할미꽃 되었네
도깨비 불꽃으로 살다가는 나,
심심산천 시들지 않는 도라지 꽃
마음에 가득 담았네.
동구 정자나무
博川 최정순
커다란 가지 쩍쩍 벌리고 잎 틔워
하많은 세월 품은 마을 정자나무
동네 어귀에 일백 년 말없이 서
오가는 사연 모두 안고 있었지
매미 소리 소낙비처럼 쏟아지고
태양 열탕에 숨 턱턱 막히던 날
전기톱 괴물에 굵은 허리통 잘려나가
몸뚱이 기둥 되고 팔다리 지붕 되어
팔각정으로 변했지
마을 정자나무처럼
세월도 인심도 변한 시골
옛것과 정 버리고
노닥이는 늙은이들 감싸 안고
매연 뒤집어쓰고 오는
마을버스만 망연히 바라본다.
고향 저수지
博川 최정순
설화산 허벅지 기산리 위
젖무덤 사이 작은 저수지
까까머리 단발머리
규섭이랑 춘심이랑 가재 다슬기 잡다
푸른 음모 우거진 수초 아래 더듬으면
송사리 피라미 참붕어 많기도 했지
매운탕 끓여 놓고 물수제비 뜨면
입 큰 개구리 깨금발로 걸어 나와
입 크게 벌리고 뱅글뱅글 함께 웃었지
우렁이 녀석 물방울 몽글몽글 만들면
쇠백로 눈길 피해 우렁이 잡아먹던
저수지 훼방쟁이 말썽쟁이 웅어
규섭이 한 손에 냉큼 잡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걀걀 웃었지
매운탕 먹고 장수잠자리 쫓으며 낮 보내고
밤이면 반딧불이 잡아
호박꽃에 가두고 마을 휘저었지
규섭인 판사 되던 해 등반 사고로 죽고
규섭이 좋아하던 춘심이
시집가서 한 달 만에
이 저수지 뛰어들었는데
그네들은 간 곳 없고.
저수지 담 아래
봉숭아꽃만 노을에 더 붉네.
방앗간
博川 최정순
참새 방앗간 들르니
아무도 없네
가족도,
이장도,
누렁이도 없네
곡물 옷 벗기려 피대 돌던 기계도
마차 쌀가마니 싣던 마부도
조강불포糟糠不飽 풍속화를
미덕으로 알던 인심도 없네
우리네 농부들 업 삼던
디딜방아 연자방아 물레방아
절구 공이 빻던 흔적 가뭇없어
이제는,
곡물 쪼아 먹던 참새 도시로 달아나
전봇대 위 누옥 짓고 사네
마누라 눈 가리고 쌀가마 빼내어
정 다방 김 양 쌍가락지 사주던 박 씨 없고
칼날 매운 시집살이 울던 아산댁도 없이
전설만 남겨둔 채,
텅 빈 방앗간 죽어 가고 있다.
산국화를 보며
博川 최정순
고향 그리워
인적 없는 산골짜기 찾아드니
너희들 무더기 져 황금빛으로 환하게 웃고 있구나
너의 얼굴 얼굴 속 드리운 그리운 흔적
꿈에도 잊지 못할 고향 얼굴들
아버지 밤나무 가지로
숟가락 만들어 줘 소꿉놀이하던 친구
어머니 헌옷가지 인형 만들어 줘
신랑 각시 놀이하던 저 세상 명구
구매박골 계곡 물 가둬
멱 감고 물장구치던 동무들
돌틈 엉금엉금 기어가는 앙증스런 가재 보며
개울물에 희희덕거리며 빨래하던 너희들은
모두 내 기억의 모퉁이로 돌아서고
산에 핀 국화에서
너희들을 찾고 그리는가.
울엄마
博川 최정순
호박잎 데쳐 쌈 싸먹고 싶은데 엄마가 만든 강된장 먹고 싶은데 곁에 엄마가 없다 허공에서 엄마가 말한다 강된장은 물 많이 잡지 말고 매운 고추만 들어가면 되여 나는 고개 절레절레 흔든다 근디 나는 안 되네 비빔국수 먹고 싶은데 엄마가 만든 김장 김치 먹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인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자식 엄마가 해주던 음식들 생각나 엄마 찾는데 엄마가 보이지 않는다 작달막한 체구 항아리 같은 체구 엄마 자식들 엄마 속 무던히도 썩혔지 여러 자식 입맛 챙겨 주던 엄마 장독 장맛처럼 곰삭은 애정으로 지켜 주던 엄마 잘 익은 묵은지 같은 엄마 그리워한다 천만년 끄떡없을 줄 알았던 울 엄마 벽시계처럼 시침 분침 망가져 가다 멈출 날만 남았네.
종이학
博川 최정순
종이학 접으며, 아버지
날개 있지만 세월의 무게
짓눌려 날지 못하는
주둥이 있어도 재갈 물려
목청껏 노래 못하는
텅 빈 가슴 활활 불태우고
속으로 잦아드는 울음 삼켜
반미치광이로 세상 버티다
종이학에 그리움 실어
북녘으로 날리며 살았지
살아서는 죽어 있었고
죽어서야 종이학 타고
고향으로 가셨다.
망부의 한
博川 최정순
천지 피로 물들이며
포성 목 터지게 울던 날
평북 박천 봉하리 막혀
말고개 숨 가쁘게 넘으며
가슴 터져라 통곡했지
남으로, 남으로 향하는
고독한 발걸음 눈물 흘리고
비마저 추적추적 내리는데
떠나는 사람 붙잡지 못하여
기적 소리도 목이 쉬도록 울었지
휴전선 허리 동강 나
아득한 망연자실
평생 속울음 안고 살았을 아버지의 한
철없이 산 내 가슴 적신다.
낮에 나온 반달
博川 최정순
아버지,
요람에 싸였던 손자 어느덧 청년 되어
한 쌍 원앙 거듭나 축복 받는 날
어머니 도라지꽃 빛깔 한복 곱게 단장하고
아버지 가신 빈 자리 대신하였습니다
아버지,
삼 일이면 되가겠지 두고 온 북녘 고향
남하하여 피붙이 없이 떠돌다 어머니 만나
북쪽 하늘 보며 현구고례見舅姑禮하던 날
북극성 통곡하는 향수의 밤이었다지요
아버지,
바닷물 깊이 몸 담근 몸뚱이 허리 동강 나
분단 신음하며 산하 철책서 서리꽃 피 흘리다
은하수 물에 하염없이 그리움 담금질하며
유경流景 그림자 베이고 있었지요
아버지,
노을 진 내밀內密의 숲 품고
보내지 못할 편지 썼던 아버지처럼
불꽃처럼 돋아나는 심혼 날마다 공책에 쓰며
그리움을 달고 사는 어머니,
손자 결혼식장에선
낮에 나온 반달이랍니다.
손자
博川 최정순
자궁 뚫고 세상 나온 지 달포
딸 가슴 달라붙어 꿀떡꿀떡 잘도 빤다
하품도 쩍쩍 방귀도 뿡뿡
사람 하는 짓 다한다
눈부신 배냇짓 이쁜짓
수시로 기지개 켜며
옹알이 입술 달싹달싹
주위 관심 줄 당겨
가족 사랑 손길 눈길 먹으며
사람 하는 짓 다한다
은방울 또르르 볼 타고 내리며
오줌 쌌다 기저귀 바꾸라
황금 변 봤다 씻겨 달라 울어
집안 가득 퍼지는 행복의 소리
한 솔기 푸른 기둥,
사람짓 다하는 천사이어라.
막내동생 결혼식
博川 최정순
손잡은 오빠 손에
저승 아버지 내려와 인도하니
시월의 꽃으로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탐스럽고 예쁜 수련
깨끗 청순한 마음으로
피어나라 나의 축복 기도 속
금강보다 더 굳게 맺은 백년가약
축하객 천둥 우뢰 박수 소리
신랑 신부 반기는데
아버지 가신 빈자리
어머니 이슬로 채운다.
제 4부 만추에
봄(1)
博川 최정순
저 멀리서 여명 기웃거리는
청갈치빛 유리창 활짝 여니
깊고 깊은 대지 자궁 속
겨우내 숨었던 양기 기지개 켜자
온몸으로 봄 부르며 다가온 밤비
옷자락 길게 끌고 간 자리엔
나뭇가지마다 생명 아롱아롱
비둘기 빗물에 세수하며
웃구구구구 노래하는데
황홀하게 활짝 웃는 햇살
개나리 진달래 살포시 내려앉고
깊은 계곡 얼음장 녹이며
저 먼 언덕에서
봄 개화開花하여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봄(2)
博川 최정순
머리 헤치고 달려오다
바람 쉬어 가는 보갑골
하늘 눈물 뚝뚝 흘려
실개천 보태는,
호드기 불던 선돌
이남박 인 언년
남몰래 눈 얽혀
가슴 터지는,
백년해로 부뚜질 마주하며
씨앗 뿌려 울고 웃던
그림자 품은 언덕에
산벚꽃 흐드러지는,
온 산야 얼음 털고
알몸 드러내 네 활개 활짝 펴고
양광 악수하며 기지개 펴는,
그네들의 봄. 봄. 봄.
봄꽃
博川 최정순
어린 별 종종종 내려와
눈물방울 흩뿌려지는 밤
닫혔던 꽃잎 살며시 열며
여명의 길 숨가쁘게 달려온
눈부신 햇살 가득 먹고
전신 불태우며 가냘픈 날갯짓
붉은 얼굴 가득 미소 물들이고
독보다 더 짙은 향기 품어
섬세한 미소로 아침 인사하며
활짝 웃는 너의 꽃다운 모습
호수 같은 그리움 밀어 올려
온몸으로 벌 나비 유혹하여
자연을 재창조하는 너는,
신의 축복 어린 선물이구나.
헤이리의 봄
博川 최정순
명지바람 나풀나풀 춤사위
새초롬히 버들가지 애무하는데
감자 고구마 어린 손 슬그머니 벌리네
미소로 정다웁게 재롱떠는 꽃길
봄 햇살 자박자박 까치걸음
순진무구한 아기처럼 날아들고
쇼윈도 책 찢어 마구 던진 모습에
창작의 무늬 쑥쑥 발돋움질
작가의 고뇌 반추하며 흩어져 있네
헤이리 봄의 향연
여기저기 꿈틀꿈틀 속살거리며
생명의 꽃 피우고 있더라.
칠장사에서
博川 최정순
발길 천 근 나그네
잠시 쉬어 가는 칠장사
경내 둘러보니
험상궂은 사천왕상
눈 부릅떠 노려보는데
풍상에 상처받은 무명석탑 주위로
들꽃 활짝 펴 위로하는데
허허, 탱화에 궁예와 임꺽정이
뜬금없이 웬 말이련가
서글픈 전설 안은 칠장사 단청
빛바래 지쳐 있네
명당이 도대체 무엇이관데
세도가들 불 질러 뺏고 뺏겨
철당간 깃발 주인 바뀔 때마다
칠장사 동종 탄식하였다지
나그네 발길 옮기며
무심코 흘러나오는 소리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이제와 다를 게 무엇이더뇨.
부처님 오신 날에
博川 최정순
님께서 연꽃 즈려밟고 오신 날
각양각색 연꽃등 대롱대롱 불 밝혀
홍진에 물든 중생 마음 밝히니
삼라만상 모두 허공 보고 웃는데
무릎 관절 앓는 노모
거북처럼 어기적거려 내,
근처 나뭇가지 주워 지팡이 삼게 하니
노모 미소 꽃비처럼 퍼지고
종두 스님의 명종 108번 울어
자비 깨우쳐 연기緣起 알리니
노모 독실한 불자 아니어도
오늘만큼은 탐욕그릇 저 멀리 던지네.
스승의 날 근처에서
博川 최정순
스승의 그림자는 밟지도 않는다고 했던가 하필 스승의 날 다음 날 TV에 이런 프로가 방영되다니 구제불능의 학생을 어쩔 수가 없어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 착하고 순진한 어느 여교사가 언성을 높이며 회초리를 들었다고 악동 친구 학생이 스마트폰인가 뭔가로 녹음하고 촬영하여 당한 학생에게 건네서 학부형이 득달같이 찾아와 폭언 폭력을 과시하고 경찰에 고소하고 그야말로 난장판을 쳤던 게 아니던가. 사회의 잘못인가 학생의 잘못인가 선생의 잘못인가 스승의 날 근처의 마음만 쓸쓸하네. 창밖에는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봄비만 하염없이 내리고.
농촌풍경
博川 최정순
자식 키워 대처 내보내
둘 남은 산촌 노인네
척박한 손바닥 논
써레질하는 할아버지
못밥 나르는 할머니
염천 달래려
얼음 둥둥 띄워 마시는
막걸리 탁배기잔에
어리는 자식들
밤 오면 평상 누워
눈길 뜨락 돌리면
은빛 달 먹고
지천으로 피어나는 달개비꽃
개구리 개골개골
쓸쓸함만 더 하네.
위도의 꽃
博川 최정순
해무에 온몸 포박당한 격포항
잠시 갈 길 잃고 서성이다
핵 폐기물에 몸살 앓았다던
궁금하고 궁금하여 찾은 위도
허균의 이상세계 율도국
고슴도치 닮았다 위도蝟島라네
가파른 망월봉 비척비척 오르니
넓디넓은 해변 그림처럼 누워 있고
험준한 봉우리 내려가다 보니
자장율사 창건한 내원궁 내원암
나를 잠시 쉬어 가라 하네
암자 대청마루 앉아 눈길 멀리 던지니
망망한 푸른 물결 보며 퍼렇게 울다 지쳐
길마다 산등허리마다 꽃 피운 상사화
하얀 미소로 육지 향해 하늘거리며
포구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그리움 가득 안고 하얀 손짓하네.
청산도에서
博川 최정순
완도 저 멀리 남쪽
몇 마리 새끼 거느린
산 푸르고 물 푸르러 청산도靑山島
그러나 바닷길 요충지라 전란도 많았지
불쑥 솟은 매봉산 허위허위 올라 굽어보면
산에서 발원한 작은 하천들 진저리 치며
뱀처럼 구불거리며 좁다란 평야로 스며들다
아득히 펼쳐진 넓디넓은 바다에 발 적시네
고샅 고불고불 둘레길 어깨 마주하고 늘어서
산 찾아 물 찾아온 나그네 발길 끊임없이 이어지고
바람결 고개 끄덕이는 청보리 파도 속
파랗게 일어나 서글프게 일렁이는 그리움 하나
느리게 느리게 님의 초분草墳 넘어간다.
천수만에서
博川 최정순
운명이 된
쓰린 가슴 삭이며
안면도 영목항 떠나
효자도 지나는 뱃길
맥주 거품 하얀 길
꼬리 무는 선미파 뒤로
괭이갈매기 시김새하며 선회하고
수면은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거센 물살 몸 가누면서
이마 맞대고 속살거리는 조각섬들
옹기종기 동양화처럼 떠 있는데
거센 바람 외씨버선발로 뛰어가며
한 음 한 음 키운 처절한 한恨 소리
이 섬 저 섬 휘돌다 허망하게 부서진다
아득한 옛날의 지순한 사랑
가뭇없이 묻혀 가는 슬픈 전설
파도길 타고 슬그머니 흘러들어
팔작지붕 처마 끝 올라앉은 바다제비
목 놓아 소리하는 부침새 꺾음새는
미학의 절제 없이 제멋대로 출렁인다.
간월암에서
博川 최정순
넓게 팔 벌려 얼싸안은 모감주나무
섬 속 섬에서 달 보다 도 얻은 무학대사 도량처
물때 따라 열고 닫는 속세 이음길
갈매기 우웽우웽 소리치며 나그네 인도하니
소원 한 자락 소원 탑에 올리고
채움 비움 답 찾아 해탈문 올랐는데
몇백 년 풍상 견디며 살아온 사철나무
홀로 파란색 옷 입고 외로운 나그네 반기니
마음의 채움과 비움 바로 거기 있었네
경내 들어서 좁쌀만큼 비우고 좁쌀만큼 채우니
중생들 수복修福 기원하는 스님의 독경 소리
중생들 번뇌 씻어 줄 스님의 독경 소리
갈매기 날개 실어 멀리멀리 날아가고
간월암 황금빛 낙조 길게 누우면
나그네 하많은 응어리 풀어헤치고
얼굴 붉게 물들이며 활활 타고 있다.
안성 바우덕이 축제에서
博川 최정순
집안 무고 기후 순풍 풍년 들어
가축 무사 객지 나간 가족 건강
어름산이 빌고 비는 비나리 마치고
높으나 높은 삼줄 생명 걸어
신들린 공처럼 튀어 올라
흔들흔들 휘청휘청 줄꾼
양반네들 야유 허공에 흩뿌리네
신명나는 홍재비 풍치기
오방색 부채꽃으로 피어나는 창공
하늘 땅 사람과 교감하여
하늘 당기고 땅 일으키는 풍물재비
어름산이 배우씨 주고받는 재담
풍자 해학 가을 수놓는데
안성 바우덕이 남사당패
익살맞게 육실허게 잘도 논다.
만추(晩秋)에
- 박천 최정순
혼재된 적갈 가을빛 받으며
멀고 긴 자드락길 걷고 걸으니
잠자는 잡목들 침묵으로 덮고
구름 떠난 하늘은 시리기만 한데
앙상한 나목들 겸허히 고독 씹고
정령精靈의 고해만 대롱대롱
바람 따라 낙엽 쌓이다 흩어지고
알몸으로 험한 세파와 조우하는데
해 저무는 등허리의 검붉은 바다
성근 별 창백한 그림자 희미하고
반쪽 푹 썩어 문드러진 야윈 반달
허무에 순응하려는지 이별마저 붉다.
낙엽(1)
博川 최정순
개밥풀꽃 핀 듯
적단풍 버릇처럼 취하여
앵도라진 붉은 입술
중심 잃은 몸뚱이 꿈틀대고
낙하하며
세상을 씹어대며
넘어지고 자빠져
시체처럼 포개지고
치기 어린 항거도
거두지 못할 흑빛 무덤도
부질없는 인사만 겹겹이 쌓여져
죽음의 그림자에 쫓겨
절망 아래 널브러진다.
낙엽(2)
博川 최정순
여명 고개 드는 새벽
안개 덮인 계단 내려서니
소복소복 낙엽 진영
모두 날개 잃고 누웠네
밤새 먹빛 여의도록
달도 별도 울고
황금기 찬란한 전설
서릿발 아래 차갑기만 한데
사납게 흘러가는 세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디론가 흩어진다.
가을비
博川 최정순
가슴속 응어리진 한 북받쳐
만물 휘젓는 휘모리장단
넓고도 황홀한 풍악산 일만이천봉
층층 비단결 수놓은 만첩홍산萬疊紅山
바람 따라 절승경계絶勝境界 돌고 돌다
하염없이 무심히 내리고
묘향산 칠성골 반석 위
휘감고 휘감기어 몸부림치다
박천 떠난 최씨 가문 소식에
한스러운 피눈물 씻으며
쓸쓸한 청천강 서편으로
서럽게 울고 간다.
가을 바람
博川 최정순
가파른 하늘재 넘어
송림松林 사이로
다가서는 한 뭉텅이
감나무 부딪히고 사과나무 얽혀
열매마다 핏빛 멍울 짙게 남기고
단호박 짙게 드리운 주름살 펴며
필사적으로 머물다 간다
회갈색 깊디깊은 구렁이 계곡 따라
인고의 상처 눈물 발 밑 뿌리며
먼저 지나간 인연 허위허위 쫓아와
인적 드문 산등성이 골짜기
이리저리 소요하며 거닐다가
허수아비 혼자 하늘 보고 꺼덕이는
몸서리치게 외로운 텅 빈 들판에도 머물다
콩 줄기 비집어, 비집어 툭툭 건들며
석류알 터져라 사력 다해 불다
겨울로 간다.
가을밤
博川 최정순
나무 옷 훌훌 벗어
땅 위 포목布木 되어 눕고
서리 입은 꽃잎 남루한 소복만
담장 밑 서성이며 떨고 있는데
돌밭 호박 나체로 뒹구는
벼폭 다리 잘려나간 황금들판
허수아비만 허허로이 서
하얀 비닐봉지에 덮인 짚덩이
북녘서 다가오는 겨울바람 소리
풀벌레 마지막 노래 서글픈데
둘 곳 없는 마음 들녘 헤매면
먹빛 어둠 속 잡념만 무성하네
이슬 끊임없이 가슴에 내려
도둑맞은 잠 뜨개질로 달래며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짓하는
죽음 향해 한 발 한 발 걸어가네.
중앙탑에서
博川 최정순
한반도 한가운데 세워진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중원에 홀로 우뚝 서
한반도 치솟는 정기 모아
천하 굽어 살피고 있으니
나그네 잠시 발길 멈춰
인간사 무사무탈하기를
큰 절 올려 간절히 빌고 비니
저 멀리 찬바람 맞는 빨간 능금
알알이 옹골차게 영글어 가고
탄금호 핏빛 석양에
정겨운 우륵 가얏고 한 가락
갈대꽃 살랑살랑 흔들며 지나간다.
석상(石像)
博川 최정순
한반도 막내 제주
금능 석물원
땅 뚫고 나와 멈춘
곰보 용암석 깎아
여기저기 사람
얼굴 수놓았는데
각양각색 수없이
많은 인간 표정
환하고 밝은
얼굴 있는가 하면
일그러지고
어두운 얼굴도 있네
왜,
내 눈길은 자꾸만
어두운 쪽으로만 갈까
아무래도,
알 수 없는 노릇일세.
귀부龜趺
博川 최정순
중원 미륵리 미륵대원彌勒大院 터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한반도 최대
중원中原 미륵리彌勒里 사지寺址 귀부龜趺
비석 받치던 너의 모습
비신碑身 없어져 구멍만 달랑 남았고
석비石碑 세월의 강물에 흔적 없네
그래도 두 마리 새끼 거북
천년 칼바람 굽이치는 파도 견디며
어미 품 올망졸망 남아 있네
강산 옷 아무리 바뀐다 해도
누구도 갈라놓지 못할
거북이 가족.
전시장에서
博川 최정순
고원古原 유 화백
흘러가는 나그네 눈길
족자 속 수줍게 피어난
한 떨기 민들레꽃
나비 한 마리 날아오른다
고독의 쓸개 먹고
희열의 열매 먹으며
허공 중 표표히 유영하다
침묵하는 찻잔 속
마지막 발목 적신다.
첫눈
博川 최정순
사락사락 덮고 덮는 반가운 손님
포근한 하얀 솜이불 온 누리 덮고 덮어
나무, 지붕, 마당, 빨랫줄 잠재우고
쏟아지는 양광에 소년의 은빛 눈물 되어
하염없이 땅속으로 스며드는데
더럽고 추악한 세상살이 수정처럼 정화되어
삼라만상 오롯이 형형하게 빛나고
살아온 추억들 뇌리로 녹아드는구나.
겨울비
博川 최정순
아무 데도 쓰잘 데 없는 너
아무도 반기지 않는 너
외롭고 고독의 눈물 뿌리며
온다, 오누나
떨어진 낙엽 짓뭉개며
마른 가슴속으로 파고들며
온다, 오누나
네 마음 닮은 나
주방 부리나케 달려가
달콤 쌉싸름 청춘차
곰삭은 애통차
갇혀 버린 두메차
독한 망각차 끓여 내놓으니
섬돌 내려앉아
차 한잔씩 하고 가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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