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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1월 9일, 경주문화원 소속 경주문화해설사 박선택님과 함께 경주 안압지를 시작으로 반월성 석빙고 계림 첨성대 경주최씨고택 최치원선생의 상서정까지 걷고 이후부터는 남산산행에 나섰다. 남산에는 남산산성의 흔적과 국보급 불상들이 즐비한 말그대로 불교유적 그자체였다.
KBS 예능프로 해피선데이 1박2일 경주 남산편에 방영된 경주 남산코스를 엇비슷하게 돌았는데 문화재 소개알림판에 나와 있는 내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을 듣다보면 머리에 속속 들어오는 것이 참 재미지다.
토함산 송창식
사람들이 묻는다. 산악회는 산에만 가면 되지 왜 자꾸 산에다 뭘 더하냐고.
산은 자연이고 지리학의 한영역이다. 사람의 발자국이 없는 산의 경우 산 그자체가 전부이지만 사람이 가꾸고 살고 살았던 산의 경우 이야기는 달라진다. 문화와 역사가 풍부하다.
지리학은 크게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나눌 수 있다. 학문적으로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자연지리는 한마디로 속세를 벗어난 자연 그 자체를 자연지리라 하고 인문지리는 자연은 기본이고 사람 문화 역사 그리고 종교까지 포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금오산에 올라가서 법성사에서 물 한모금 마시고 대혜폭포에서 사진찍고 할딱고개지나 정상에서 현월봉 비석 배경으로 사진찍고 약사암에서 사진찍고 내려오는 것을 자연지리라 한다면 법성사는 언제 누가 창건했고 언제 불타 소실되었는지 알아보고 약사암은 또 언제 누가 지었고 마애보살입상은 누가 언제 만들었는지 임진왜란때 6.25전쟁때 구미사람들에게 금오산이 어떤 산이었는지 하나씩 알아보는 과정을 인문지리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세상산악회는 자연지리 영역을 뛰어넘어 인문지리까지 포괄하는 산악회가 되었음하는 바램이 있어 익숙치 않음에 계속 문을 두드려 본다.
‘산행은 짧게, 답사는 길게’ 하다보니 산행을 오래 하고픈 회원들에게는 어필이 안되고 하루 머리 식히고 스트레스 풀려는 회원들에게는 복잡한 학문적 스트레스(?)를 주다보니 또 어필이 안되는, 그래서 의도와 기획은 좋았다는 평가는 받지만 너무 이상적인 접근(?) 아니냐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한마디로 산악회에서는 안맞는거 아니냐다.
그래도 우리들세상같은 별난 산악회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각으로 다시 익숙치 않음에 도전장을 내밀어본다.
문화해설사와 떠나는 경주불교문화유적답사 그 두 번째
산행은 짧게, 문화답사는 길게!!
불국사→토함산→석굴암→기림사→골굴사→감은사지3층석탑→이견대→봉길해수욕장→문무대왕릉→주상절리(8시간)
유홍준선생은 저서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답사의 시작과 끝을 불국사라 했다. 답사의 시작은 불국사에서 시작하고 끝맺음도 결국 불국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순천 선암사와 영주 부석사 그리고 경주 불국사를 뛰어난 절집이라 평가한다. 순천 선암사는 건물과 건물 간의 공간 운영이 탁월해 일본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고 영주 부석사는 백두대간을 앞마당인 양 끌어안는 장엄한 스케일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며 불국사는 돌축대의 기교와 가람배치가 정교해 서양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라고 한다.
구한말 불국사 대웅전, 귀신 나올까봐 겁난다
하지만 부석사나 선암사같은 기풍의 절은 비슷한 예를 지닌 절이 많지만 불국사처럼 자연과 인공을 대비하여 조화를 이룬 절은 달리 예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하고 독창적인 건축으로 대단히 훌륭한 절이라고 했다.
지금은 불에 타 터만 남은 황룡사 감은사같은 안압지나 반월성 근처 평야지대에 건립된 절과는 달리 불국사는 토함산 경사지에 자리 잡다보니 자연석과 인공석으로 축대을 쌓아 절 마당을 평지처럼 만들었는데 자연석 돌위에 인공석단을 놓는데도 자연석을 정으로 깍아 인공석단을 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석은 살리고 인공석을 마치 칼로 도려낸 것으로 정으로 깍아 끼운 석공들의 기법과 솜씨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하단부자연석은 살리고 인공석은 깍아 서로 빼도박도 못하는 끈끈한 사이로
불국사의 가람배치계획도 기막히다. 대웅전 입구에서 석가탑 다보탑간의 거리와 자하문과 석가탑 다보탑간의 거리, 마치 건축사가 CAD프로그램으로 디자인한거마냥 정확한 치수와 가람과 탑의 앉은 반듯한 위치에 학을 기린다.
반듯한 불국사 가람배치도
1960년대 박통시절 석가탑을 원형대로 복원하기위해 해체하는 과정에서 요즘 같으면 크레인기중기로 돌을 메달아 해체할 수 있는데 1960년대 그당시에는 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나무로 만든 전봇대 같은 것으로 석가탑 옥개석을 들어올리다가 돌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가 부셔져 석가탑 옥개석과 3층 탑신이 깨지는 수난이 있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던 노승들이 울먹이며 비통해 했다는 이야기.
1966년 석가탑 해체작업 중 옥개석이 깨진다
조선건국이후 숭유억불정책으로 구한말 불국사에는 스님 두분만이 사찰을 지키다보니 도굴꾼들이 불국사를 농락했던 일, 사찰에 재정이 열악해 보수할 여력이 안되 흉물스러운 불국사가 방치되어야만 했고 스님들도 먹고 살기 힘들어 일본 도굴꾼들이 스님들에게 돈을 주고 국보급 문화재를 헐값으로 매매했던 구한말 사찰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조선왕조나 선비들이 숭유억불정책이 아닌 다종교정책으로 지금처럼 불교가 융성했더라면 국보급 사찰과 유물들이 원래 모습을 많이 유지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찐한 아쉬움을 갖게 된다.
방치된 구한말 백운교 청운교
복구한 현재 백운교 청운교
종교 과학 예술의 통일적 구현, 석굴암
유홍준교수는 나의문화유산답사기에서 우리가 전세계에 내세울 문화유산으로 한글, 에밀레종, 팔만대장경 그리고 석굴암을 꼽았는데 한글 에밀레종 팔만대장경이 없더라도 석굴암만 존재한다면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이 지금껏 살아온 문화적 긍지를 손상받지 않을 것이다고 했다. 그러면서 석굴암이야 말로 종교와 과학 그리고 예술이 하나된 최고(最高) 문화유산이라고 했다.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는 신라 제상을 지낸 김대성이 추진했지만 완공을 목전에 두고 김대성은 눈을 깜았다고 한다. 불국사와 석불사는 20년 이상 걸린 대형 공사다. 불국사는 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는 전생의 부모를 기리기위해 김대성이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복원된 석굴암
공사기간이 20년 이상 걸렸다고 하니 엄청 긴 것 같지만 지금은 불타 터만 남은 황룡사의 경우 공사기간이 100년이 넘었다고 한다. 석굴은 인도에서 먼저 시작된 사원으로 암석을 파고 굴을 만들어 굴속에 불상을 놓고 도량을 세우는 방법인데 인도의 경우 쉽게 굴착이 되는 사암(砂巖)임에 반해 우리나라는 화강암이 주류라 굴을 만드는 것이 엄청 어렵다.
그래서 굴착이 힘들어 군위 석굴암처럼 자연석굴에 도량을 만들거나 경주 남산처럼 바위에 불상을 새기는 방식이 대부분인데 반해 석불사(석굴암)는 인공적으로 석굴을 만든 케이스다.
석굴암 내부천정은 dome 형식
요즘같으면 거푸집을 만들어 레미콘차량을 불러 기계로 뿜어 넣어 다지기만 하면 공사가 끝나지만 신라시대 석공들은 자연과학과 기화학적 사고로 일일이 돌을 규격에 맞게 깍아 끼워 쌓았다. 특히 천정을 돔(dome) 방식으로 설계했는데 지금같은 최첨단시대에도 돌끼리 서로의 힘을 의지하게 하여 반구형의 돔을 형성한다는 것은 엄청 힘든 일인데 그당시 천정을 돔으로 만들겠다는 호연지기 자체가 대단한 구상이라 하겠다.
김대성은 석굴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눈을 깜았지만 반만년 한민족역사에서 석굴암은 가장 위대하고 찬란한 불교문화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구한말 일본의 문화재 침탈에 석국암은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 통감으로 발령받은 이또오 히로부미가 고려청자를 도굴해 일본천황과 귀족들에게 선물하고 사찰에 있는 국보급 불상 서적 등 각종 문화재를 탈취해 본국으로 빼돌렸으며 석굴암 내 불상과 석탑도 그때 사라졌다.
방치되어 천정이 드러난 구한말 석굴암, 일제는 시멘트를 발라 보수공사를 했다
일제에 의해 보수공사라는 명분으로 해체되는 불운을 겪은 석굴암은 해방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또다시 보수공사라는 명분으로 비전문가들의 입김에 농락당했다. 일제는 석굴암을 보수한다는 명분으로 해체하여 천정과 벽을 시멘트로 벽을 도배를 해 바깥과 실내 온도가 안맞아 생기는 결로현상으로 석굴암내부에 습기가 차 물방울이 생기고 이끼가 끼는 기막힌 상황이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고자 물로 쏴 이끼를 제거하고 보일러를 가동하여 말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제는 본존불이 동해앞바다를 보게끔 입구를 막지않았다
박정희군사정권은 일제보다 한단계 더 나갔다. 일제는 석굴암을 해체하고 보수하는 과정에서도 시멘트는 바르고 구조 일부를 변형했지만 열려있는 석굴암을 막지는 않고 그대로 두었다.
역사학자들이 볼때는 토함산 기슭 석굴에 앉아 있는 본존불의 시야는 동짓날 동해에서 떠오르는 일출라인과 정확히 일치했는데 석굴암을 설계한 김대성의 입장에서는 부처께서 왜구와 오랑캐로부터 신라를 지켜달라는 염원에서 동해바다를 응시하도록 했는데 결로현상과 이끼제거 등을 이유로 석굴암입구를 목조건물로 닫아놓고 본존불을 투명유리로 막아 보일러대신 에어컨을 틀어 실내온도를 유지하는 쪽으로 석굴암의 원형을 훼손했다.
본존불의 시선을 막은 현재 석굴암 입구
임진왜란으로 전국의 유명 사찰들은 왜구에 의해 불 타 전소되어 터와 주춧돌만 남았다. 이후 새롭게 사찰을 복구하여 찬란한 문화유산을 꽃피웠지만 구한말 일본의 강압적인 을사늑약과 한일합방으로 일본식민지가 되어 임진왜란 이후 탄생한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또다시 일본이 도둑질해 갔다고 생각하니 참담함을 넣어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불국사 한번 안가본 사람없다. 그러나 불국사에 다녀왔지만 우리는 석가탑 다보탑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찍고 온 기억이 전부다. 석굴암도 마찬가지다. 한번 입장해서 ‘저게 사진에서 본 석굴암이구나’ 하고 나온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왜 만들어졌고 어떻게 훼손되었고 복구되었는지 우리는 알지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우리 머리로는 상상이 안가는 20년여 년 긴 세월동안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든다고 청춘을 보낸 석공들의 불심, 불국사와 석굴암 공사 자체를 종교행위로 여겼던 석공들이 만든 석가탑과 다보탑 그리고 석굴암에서 뭍어나는 1400년 전 그들의 진지한 모습과 고된 땀방울을 나는 머리속에 그려보고 싶고 손으로 느껴보고 싶다. 그래서 나는 4월 19일 경주를 간다.
경주문화원 소속 박선택문화해설사, 설명을 너무 잘해 이번에도 또 부탁했다
토함산
경주에 위치한 토함산(746m)은 신라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이라고도 불리우며 신라 오악의 하나로 손꼽힌다. 문무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앞바다가 굽어 보이는 토함산은 옛부터 불교의 성지로서 산 전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유적지인 우리 나라 문화재의 보고이다.
정상 가까이에 석굴암이 있으며 기슭에는 불국사가 자리하고 경내의 석가탑, 다보탑, 청운교, 연화교 등 빼어난 유적들이 많다.
토함산은 동해의 일출을 보기 위해 수많은 인파가 몰려드는 곳이기도 하다. 감포 앞 바다를 붉게 적시며 토함산 위로 떠오르는 태양은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토함산은 자동차로 손쉽게 오를 수 있지만 가능하다면 불국사 담을 끼고 걸어 올라가 상쾌해진 몸과 마음으로 해를 맞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특히 12월 31일 밤이면 새해 일출을 보기 위해 전국에서 수만명이 찾는다. 그들은 경주박물관에서 자정에 에밀레종 타종을 지켜본 후 시내에서부터 석굴암까지 걸어 올라와 한해 시작을 알리는 일출을 지켜보면서 신년을 맞는다.
불국사
불국사는 경상 북도 경주시 동쪽 토함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시대에 만든 역사책《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라 경덕왕 때인 751년에 김대성이 세웠다. 그러나 불국사의 내력을 적은 《불국사 역대 고금 창기》에 따르면 이 절은 528년에 세웠다고 전한다. 또, 574년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 부인이 절의 규모를 크게 늘렸고, 문무왕 때인 670년에 무설전을 새로 지었으며, 751년에 낡고 규모가 작았던 이 절을 당시의 재상 김대성이 크게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자료를 참고로 할 때, 불국사는 처음에 작은 규모로 세워졌던 것을 김대성이 크게 늘려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보물로 지정된 현재 불국사 대웅전 모습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고쳐 지으면서 규모가 2,000여 칸으로 커졌으나,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왜군에 의하여 건물이 불타 버렸다. 그 때, 금동 불상과 옥으로 만든 물건 그리고 돌로 된 다리와 탑만이 불에 타지 않았다. 왜군의 방화로 불타 버린 불국사의 목조 건물들은 광해군 때인 1612년에 경루 · 남행랑 · 범종각 등이 복구되었고, 인조 때인 1630년에 자하문, 1648년에 무설전이 다시 세워졌다. 이어서 1659년에 대웅전이 세워지는 등, 순조 때인 1805년까지 40여 차례의 복원 공사가 계속되면서 안양문 · 극락전 · 비로전 · 관음전 · 나한전 · 시왕전 · 조사전 등이 다시 세워졌다.
석가탑 해체 작업중 많은 유물과 사리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이르면서 나라의 힘이 약해지자 복원 공사도 중단되었고, 이미 세워졌던 건물들도 낡고 파손된 상태로 방치되어 오다가 일제 침략기를 맞았다. 1924년에 대규모의 보수 공사를 하면서 다보탑을 해체 · 수리하였다. 그 때 탑 속에서 금동 불상 · 사리 장치 등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나 행방 불명되었고, 관련된 기록 자료도 모두 없어져 버렸다. 그 후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하였다. 이 때, 그 때까지 옛 터로만 방치되어 오던 자리에 무설전 · 경루 · 관음전 · 비로전 · 화랑 등이 복원되고, 대웅전 · 극락전 · 범영루 · 자하문 등이 새롭게 단청되었다.
석굴암
석굴암은 경주 불국사 뒤의 토함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석굴 암자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석굴 암자로 국보 제24호이다. 석굴암은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에 김대성이 부모의 만수무강과 나라의 평안함을 위하여 세운 것이다. 화강암을 석굴 모양으로 쌓아올려 그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 석굴의 길이는 14.8m이다.
기본적인 구조는 앞면이 모나고 뒤쪽이 둥근 형태를 이루고 있다. 네모진 전실과 둥근 주실로 나뉘어 있는데, 주실에는 높이가 약 3.3m인 본존상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굴 안의 천장과 밑바닥 둘레는 전부 연꽃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둘레 벽면에는 여러 보살상이 돋을새김(양각)으로 새겨져 있다. 간단하고도 기묘한 모양과, 조각의 아름다움은 세계 불교 예술품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힌다.
기림사(祗林寺)
기림사(祗林寺)는 경상북도 경주시의 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 때 인도 승려인 광유(光有)가 창건하고 이름은 임정사(林井寺)라고 했다. 643년에 원효가 중창한 뒤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기림사는 석가모니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기'자를 따와 붙인 이름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서 동해의 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선물로 받았다는 전설이 실려 있는데, 이때 신문왕이 귀환하는 도중에 기림사 서쪽에서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창건 연대는 적어도 신문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의 터나 문무왕릉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불국사보다 먼저 지어진 기림사. 대적광전 모습
임진왜란 때는 전략적 요충지라 승병 운동의 중심지였다. 조선 철종 14년인 186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 415호인 건칠보살좌상을 비롯하여, 소조비로자나삼존불, 기림사 삼층석탑, 목탑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불전 양식을 볼 수 있는 대적광전, 김시습의 사당인 매월당사 등을 보유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문적과 어필이 다수 남아 있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조계종에서는 불국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골굴사
신라문화의 뿌리가 불교문화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뿐더러 경주 남산과 토함산 그리고 함월산(含月山)은 그 대표적인 유적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골굴사(骨窟寺)는 경주에서 동해안(감포)으로 약 20km 상거한 곳에 위치한 함월산 불교유적지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신라시대 불교문화가 번창하던 6세기경 서역(인도)에서 온 광유성인 일행이 암반전산에 마애여래불과 12세 석굴로 가람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로 사용해 온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이다.
해골같이 구멍이 있어 골굴사라 했을까?
기림사를 크게 키운 스님이 원효대사라고 했다. 그러므로 원효는 기림사 근처인 골굴사에도 머물렀을 개연성이 높다. 골굴사(骨窟寺)는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의 왼쪽 골짜기에 있다.
삼국유사에는 '원효가 일찍이 살던 혈사(穴寺) 옆에 설총이 살던 집터가 있다'고 전한다. 원효가 골굴사에 머물렀다는 증거로 볼 만한 대목이다. 혈사는 곧 굴(穴)로 된 절(寺)이다. 혈사에 원효가 머물렀고, 원효가 죽자 아들 설총이 아버지를 기려 골굴사에 와서 살았다는 해석이다.
골굴사 홈페이지는 골굴사 역시 기림사를 창건한 광유성인 일행이 세웠다고 전한다. 그들이 인도의 사찰 건축 양식을 본떠 천혜의 석굴사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골굴암은 거대한 석회암 바위 꼭대기에 자연적으로 생겨난 석굴 벽면에 마애불상(보물 581호)을 새겨 사찰의 주불로 삼았고, 주변의 12개의 석굴을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했다.
골굴사는 한국의 소림사. 엣 화랑이 익혔던 선무도 무예를 스님들이 수련한다
석굴 속 마애불상을 거느린 천연 석굴사원으로 이름 높은 골굴사는 불교 무술인 선무도(禪武道)의 본도장으로도 유명하다. 일요일을 제외한 날에는 매일 오전과 오후에 '선무도와 문화예술'이라는 이름의 공연도 펼쳐진다.
골굴사는 또 전국 모든 사찰들 중에서도 템플스테이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유명 사찰이다. 선무도와 템플스테이를 체험하기 위해 외국인만도 연간 3000여 명이 골굴사를 찾는다. 겸재 정선이 < 골굴석굴도 > 를 남긴 골굴사,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산 304번지에 있다.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
국보 제112호. 높이 13.4m. 동서로 건립된 두 탑의 규모와 형식은 동일하며, 현존하는 석탑 중 거탑에 속한다. 기단은 상하 이중으로 되어 있고 지대석·중석·갑석은 12장의 석재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층기단에는 3개, 상층기단에는 2개의 탱주를 세웠다.
석탑 2동과 절터만 남고 불 타 소실된 감은사
탑신부의 1층은 우주와 면석을 다른 돌로, 2층은 각 면을 하나의 돌로, 3층은 전체를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옥개석은 비교적 넓고,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이 각각 4장의 돌로 되어 있으며, 상륜은 없어졌고 그것을 끼웠던 3.5m의 철간만이 남아 있다. 상하기단과 탑신부에 우주와 탱주를 표현한 것, 낙수면이 경사를 이룬 것 등에서 목조건축양식이 보이며,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에서는 전조탑파양식의 흔적이 보인다. 고선사지3층석탑 과 함께 통일신라 초기 3층석탑을 대표한다.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 표지모델 감은사지3층석탑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들인 해중왕릉 대왕암(大王巖)이 보이는 감은사지(感恩寺址) 앞에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이 절 안에 있는 기록에는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감은사를 처음 창건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죽어서 바다의 용이 되었다. 아들 신문왕이 681년 7월 7일에 왕위에 올라 682년에 공사를 끝냈다.
이견대에서 문무대왕릉을 볼수 있다
금당(金堂) 뜰 아래에 동쪽을 향하여 구멍을 하나 뚫어 두었는데,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뒤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고 한다. 682년 5월에는 왕이 이 곳에서 용으로부터 옥대(玉帶)와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관련된 「이견대가(利見臺歌)」라는 가요가 있었다고 하는데 작자는 어느 왕이라 하나 잘 알 수 없고 가사는 전하지 않지만,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는 “전설에 의하면 신라 어느 왕의 부자가 오랫동안 헤어져 지내다가 대(臺)를 지어 서로 만나보게 되었는데 그 이름을 이견대라 하고, 그 부자의 즐거움이 비할 데 없어 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무대왕릉(대왕암)
문무왕은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어 삼국통일을 완수한 뛰어난 군주(君主)이다. 이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문무왕이 재위 21년만인 681년에 승하하자,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으므로 이 바위를 대왕암 또는 대왕바위로 부르게 되었다.
이 능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바위이다.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처럼 보인다.
문무대왕릉
대왕암에 올라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水路)를 마련한 것처럼 되어 있다.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이 안쪽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중발굴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이 판석(板石)처럼 생긴 돌 밑에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더구나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그러한 예가 없는 특이한 형태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주상절리 [柱狀節理]
마그마가 화구로부터 흘러나와 급격히 식을 때에는 부피가 수축하여 사이사이에 틈이 생기게 되는데, 오랜 시간 동안 풍화 작용을 받게 되면 굵은 틈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절리인데, 주상 절리는 단면의 모양이 육각형이나 삼각형의 긴 기둥 모양을 이루는 절리를 말한다. 주로 화산 지대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에 화산암인 현무암에서 주상 절리가 많이 나타난다. 제주도 해안에는 기둥 모양의 주상 절리가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정방폭포와 천지연 폭포가 주상 절리에 해당한다.
양남 주상절리
경주 양남 주상절리군은 발달규모와 발달크기 및 형태의 다양성에 있어서 이미 지정되어 있는 타 지역 주상절리 천연기념물과는 뚜렷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부채꼴 모양의 특이 주상절리를 비롯한 수평 방향의 주상절리가 대규모로 발달되어 있다.
화산암의 냉각과정 및 특성을 복합적으로 이해하는 연구 및 교육 자료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데에 부족함이 없으며, 동해의 형성과정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학술자료를 제공한다.
0419 경주 토함산 산행. 불교문화유산 답사일정
06:30 인동 새천년사우나 앞 탑승
06:45 옥계 신한은행 탑승
07:00 오성예식장 탑승
09:00 경주 불국사 답사
10:00 토함산 산행 시작
12:00 토함산 정상 도착
12:30 석굴암 주차장 도착 (점심식사)
13:00 석굴암 답사
14:00 기림사 도착 답사
15:00 골굴사 답사 선무도 무예 관람
16:20 감은사지 동·서 3층석탑 답사
17:00 이견대 문무대왕릉 답사
17:40 양남 주상절리 답사
18:40 저녁식사
21:00 구미도착
푸른 산과 바다가 있는
문/화/유/산/답/사/안/내
① 답사일자: 2015년 4월 19일(일)
② 답사장소: 불국사, 석굴암, 기림사, 골굴사, 감은사지삼층석탑, 이견대, 문무대왕릉, 주상절리
2시간 토함산 산행 후 버스로 이동합니다. 대신 절에서는 많이 걸어야 합니다.
③ 출발장소: 새천년사우나앞06:30/옥계신한은행06:45/오성예식장07:00
④ 답 사 비: 45,000원(불국사4,000원,석굴암4,000원,기림사3,000원입장료, 문화해설사초빙료, 아침 점심 저녁식사 포함)
⑤계좌번호: 농협:352-0463-6062-03 (김주현)
⑥문의전화: 010-8663-1775(회장:무소유) 010-2545-1201(카페지기:김주현)
⑦준 비 물: 산행에 필요한 개인장비(장갑.스틱,모자.고글.방풍의,여벌 옷)
⑧ 탑사코스는 당일의 일기와 현지 상황에 따라 변경될 수 있습니다.
⑨산행시 사고의 발생은 본인 책임이며 그 부주의에 대하여 본회에 이의 제기와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산행신청시 위 내용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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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두명신청합니다.
1 2번요
인원 모집이 안되 경주답사는 취소할까 합니다
3인분 참석
3 4 5번요
인원 모집이 안되 경주답사는 취소할까 합니다
@재임스본드&분석관(김주현) 확인!!
나는 6번
김애란외 1명 신청합니다.
7 8번요
사부 9번
경주 문화답사는 인원 모집이 원활하지 못해 취소해야 할 것 같습니다
ㅎ어델가야지??? 잘간다고 소문날까요???...^^^^
사량도 한번더 가입시더~~~
요번주 일욜 간만에 시간나는데 비온다구하고 산행 취소한다구 하고 그카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