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신곰파의 레드판다, 그리고 시간의 양탄자)
돌출된 능선의 동네 툴루샤브루를 아침 8시 50분에 떠나 신곰파에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점심식사 시간을 포함해서 6시간 10분이 걸렸다.
툴루샤브루에서 신곰파 까지 1,140미터의 고도를 올렸으니 참 어지간히 올라왔다. 경사 길의 연속이었지만 오르는 도중의 포푸랑(Phoprang, 3,210m)에서 신곰파 까지는 그나마 완만하여 생각보다 힘들지 않은 코스였다.
툴루샤브루에서 드루사강(Dursagang, 2,720m)을 거쳐 포푸랑 까지는 숲길을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연속되는 급경사로 인해 주변의 풍광을 제대로 살피기 어려운 코스였지만, 포푸랑에서 점심을 먹고 신곰파까지 한 시간 동안의 길은 거목(巨木)들이 빽빽이 도열해 있고, 그 사이사이로 랄리그라스가 붉은 꽃을 탐스럽게 피우고 있는데다, 나무마다 이끼가 일정한 방향으로만 두텁게 혹처럼 붙어있어서 마치 환타지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우리는 그 거목들의 사열을 받으며 걷는 소인국의 나그네 같았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코스다.
포푸랑에서는 라우레비나(Laurebina, 3,900m)가 멀리 눈을 이고 있는 것이 빤히 보인다. 내일 저곳까지 올라야 한다니......
신곰파에 도착하니 여느 롯지들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히말라야 일대에서 본 롯지중 가장 규모가 큰 롯지 4개가 모여 있었고, 꽤 큰 곰파(사원)와 공영(共營) 치즈공장도 있다. 이 동네는 깊은 관록과 약간의 품격마져 느껴지는 분위기가 있다. 또한 랑탕계곡 쪽 루트와 헬럼부 트래킹 루트가 합쳐지는 지점이라 그런지, 아니면 샤브로벤시와 더불어 트래커들의 또 하나의 출발지인 둔체(Dhunche)마을이 지척이라선지 아무튼 여느 롯지들 과는 다르다. 롯지들 마다 나름대로 잘 정리 되어있고 꾸밈도 괜찮고 객실도 크다.
우리는 레드 판다(Red Panda) 롯지에 방을 잡았는데 주인은 의복만 바꾸면 완벽한 한국의 60대 초로(初老)의 할머니다. 몽골어계 산지민족인 '타망'족 출신인데, 외할머니가 티베탄 이라고 했다. 세련되고 여유있는 웃음과 사람 좋은 인상을 풍기는 이었는데 자꾸만 돌아보게 되는 품격을 풍긴다. 한국의 아파트 단지에서 너무도 많이 본 듯한 예쁜 할머니 같기도 하다.
신곰파의 롯지들 옆으로는 가파른 경사의 깊디 깊은 계곡으로 이뤄져 있는데 그 계곡의 아래 끝은 보이지도 않는다. 비탈은 산불로 몽땅 타버렸는지, 아니면 벼락으로 나무가 소실 되었는지 우리네 지리산 정상 근처의 고사목(枯死木) 단지처럼 타다 남은 나무들이 도열해 있다.
레드 판다 롯지의 발코니에 서서 먼 산을 본다. 이 여행을 떠나온 것이 불과 17일에 불과하고, 산행은 9일에 불과한데도 마치 몇달이 지난 것 같다. 너무도 먼 길을 걸어왔고, 너무도 높은 고도를 오르락내리락 헤맨 탓인 게다.
일주일 정도의 트래킹 일정은 입술이 터지고 입맛도 없어지고 잠자리가 익숙해지지 않더니 그 고비를 넘기자 그런 것 들이 슬슬 괴롭지 않다. 이래서 인간은 어느 곳에 던져지더라도 적응하며 살아가는 걸게다.
내일은 찰랑파티(Chyolangpati, 3,584m)를 거쳐 라우레비나 까지의 여정이다. 동절기엔 찰랑파티와 라우레비나의 롯지는 비워두는 경우가 많다고 들어, 레드 판다의 롯지 종업원에게 확인하니 찰랑파티의 롯지에는 이제 운영자가 왔지만 라우레비나의 롯지에는 아직 없어, 우리가 출발 할 때 운영자가 이곳에서 우리와 동행한다고 한다.
랑탕계곡 코스 때에도 양진이 컁진곰파까지 동행하여 숙식을 처리해 줬는데 여기서도 그런 형태가 되는가 보다. 보통 겨울시즌에는(12, 1, 2월) 이런 방식이 상례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력이 대단하다. 신곰파에서 고사인 쿤다 까지의 길이며, 고도가 얼마인가. 그 먼 길을 손님 서너 명에서 나오는 수익을 위해 그런 수고를 하다니, 우리네 같으며 당연히 어림 반 푼어치도 없는 소리다. 더구나 그곳에 가면 자기네들도 그곳에서 숙식을 해야 하고, 우리가 반대편으로 넘어가 버리면 다시 그 먼 길을 되돌아 와야만 하는데도 말이다. 우리가 롯지 한곳을 이용하면 숙박비가 기껏 1,000 - 1,500루삐에 불과 한데(우리 돈 15,000원 - 23,000원)...... 하긴 자꾸만 머릿속의 계산이 돈의 값어치만으로 환산되고 있으니......
세련되고 여유있는 초로(?)의 롯지 주인 할머니가 따뜻한 햇살이 내려앉은, 그리고 아름다운 무늬를 이루고 있는 돌담에 기대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다. 그녀의 입가에는 잔잔한 웃음이 번져 있고 손은 부지런히 실을 따라 움직이나, 눈은 먼 골짜기를 내려다 보고 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소담스럽고 아름다워 발코니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녀의 그런 모습에서 문득 '시간의 개념'이라는 명제가 떠오른다.
문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는 인간과, 고립된 산속의 인간과는 시간의 개념이 다를 수밖에 없긴 하지만, 이곳 히말라야의 시간은 또 그것들과도 별개인 것 같다. 시선(視線)을 끄는 수많은 문명의 산물들 속을 헤매는 시간과, 묵묵히 버티고 선 자연 이외에는 인공적 요소가 전혀 없는, 이 광대한 공간 속에서는 그것들을 초월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하다.
상념에 잠긴 내 시선은 그녀 입가의 웃음자락을 읽는다. 그녀는 말하고 있다.
'그래, 잘 봤어. 시간은 항상 내편이야! 내가 마음먹은 대로 시간을 쓸 수 있지. 그렇지만 너희들은 안 될걸? 시간은 항상 너희들을 등 뒤에서 감시하며 막강한 파워를 휘두를 테지. 그래서 너희들은 언제나 시간에 쫒기며 허둥대지. 내가 쓰는 시간은 길고 부드러운 실이야. 그 실로 잔 시간의 부드러운 양탄자를 타고 골짜기를 유영하곤 하지. 그렇지만 너희들의 시간은 짧고 거칠어. 가끔은 그 거칠고 짧은 시간위에서 작은 성취를 맛보겠지만, 이내 그 성취로 인해 다시 시간이라는 괴물에 쫒기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살 테지. 난 아니야! 너와 나의 시간은 같지 않아! 시간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너희들과 시간의 산들바람을 타는 내가 같을 순 없지. 아무렴!'
나는 씁쓸히 웃었다. 그래, 알았수, 알았다고요!
이곳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고도의 문명국 보다 낮다고 하지만 그것은 의료혜택이나 영양의 불균형 등에서 기인한다고 들었고, 실제로 실감하는 수명, 그야말로 '누리는' 수명은 고도의 문명국 보다 몇 배는 긴 것임을 여기 와서야 깨닫는다.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이곳 히말라야 산속에서 새로이 정립된다.
레드 판다 롯지에서 저녁을 먹고 우리 둘과 치린이 난롯가에 앉았는데 주인여자가 와서 앉는다.
실례를 두려워하면서도 나이를 물었다. 마흔 여섯이란다. 깜짝 놀란 우리. 치린이 '미네'의 나이를 주인여자에게 말해 주는 성 싶더니 주인여자가 말끔히 미네를 쳐다본다.(집사람 '민애'를 치린이 '미∼네'라고 계속 불러 앞으로 그렇게 적겠다)
'그래! 니네들은 우리보다 젊게 보이더라구, 그게 어쨋단 말이야!' 하는 것 같다.
어쨋든 이 사람들은 '시간의 풍족한 쓰임새'에 비해 나이가 들어 보이는 건 사실이다.
내일은 힘든 일정이 될게다. 그만 일찍 잠자리에 들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