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산골 순박한 교우들은 내 43년 선교사 생활의 '등불'이 되어 주었다.
1966년 초여름 한 여성교우와 행사장에서 찍은 사진(오른쪽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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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가난했다. 교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시골에서는 돈 구경하기가 어렵다 보니 신자들은 가을걷이를 끝내고 나면 곡식으로 1년 치 교무금을 내곤 했다.
1960년대 중반 홍천본당 성산공소(1976년 본당 승격)에서 선교사로 살아갈 때다. 자식 없이 홀로 남의 집 곁방살이를 하는 안 마리아 할머니가 쌀 한 말(약 8㎏)을 갖고 오셨다. 할머니는 "회장님, 미안해요. 하느님께 바치는 건데 쌀이 형편없어서…"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는 그게 어떻게 마련한 쌀인지 알기에 할머니의 거친 손을 잡고 함께 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도 감동하셨을 '과부의 헌금' 마리아 할머니는 동네 이집저집 허드렛일을 해주며 끼니를 해결하셨다. 70대 중반 나이인데도 겨울이면 산에 가서 손수 나무를 해다가 군불을 때고 사셨다. 농사꾼이야 수확철이 바쁘지만, 밭 한 뙈기 없는 할머니는 수확철이 끝나야 바쁘셨다. 서리 내리기 전까지 논바닥이란 논바닥은 다 뒤져 벼 이삭을 주웠기 때문이다. 이삭을 주울 때마다 일일이 허리를 굽혔다 폈다 했으니 그 연세에 오죽 힘들었을까. 그 무렵이면 할머니 얼굴은 퉁퉁 부어서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상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주워 모은 이삭을 손질해서 절구에 넣고 찧으셨다. 기계로 도정한 쌀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건 당연했다. 싸라기도 많고 때깔도 좋지 않았다. 할머니는 그해 늦가을에 이삭을 주워 쌀 서 말을 만들었다고 하셨다. 그중에 싸라기는 골라내고 그나마 깨끗한 걸로 한 말을 만들어 교무금이라고 갖고 온 것이었다. 나는 할머니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루카 21,1-4)를 들려줬다.
"마리아 할머니, 예수님이 어느 날 성전에서 부자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셨어요. 마침 가난한 과부가 동전 두 닢을 넣는 것을 보고 부자들이 비웃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하고 말씀하셨어요. 할머니는 몸과 마음을 다해 교무금을 봉헌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이 할머니 쌀을 얼마나 기쁘게 받으시겠어요."
사실상 교무금을 내고 남은 싸라기 두 말이 할머니에게는 전 재산이나 다름없었다. #남편 몰래 먹는 걸 줄여 교무금 내기도 가난했던 그 시절을 회상할 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교우가 한 명 더 있다. 그 여성 신자는 외짝교우였는데, 남편이 하루하루 날품을 팔아 다섯 식구가 겨우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사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좀 유별났다. 양식까지 한 번에 5일치씩 사갖고 들어오는 등 살림을 죄다 틀어쥐었다. 그걸로 식구가 정확히 닷새 동안 먹어야 했다. 생필품을 사야 한다고 하면 10원 단위까지 정확하게 계산해서 돈을 주기에 부인에게는 가욋돈이라는 게 땡전 한 푼 없었다.
부인은 주일헌금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무금은 내고 싶어 했다. 부인은 생각다 못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 쌀을 한 줌씩 떠서 모으기 시작했다. 쌀과 보리를 한 줌씩 덜어내니 밥 양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 밥을 푸고 나면 부인 밥은 반 사발 남짓했다. 부인은 남편에게 의심받지 않으려고 반밖에 차지 않은 밥그릇을 상 밑에 놓고 떠먹었다. 부인이 식사량이 부족해 김치를 많이 먹으면 남편은 그것 갖고도 타박했다고 한다.
먹는 게 형편없다 보니 젖이 많이 나올 리 없었다. 젖먹이는 어미 속사정도 모르고 늘 칭얼거렸다. 어쩌다 이웃집에서 밥을 배불리 얻어먹는 날이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만일 끼니마다 쌀을 한 줌씩 퍼서 모으는 것을 남편이 알면 그날로 불벼락이 떨어질 게 뻔했다. 그래서 부인은 쌀을 장독대 빈항아리나 나뭇단 속에 숨겨뒀다가 반 되쯤 되면 장에 가는 길에 성당에 들러 자신이 따로 갖다 놓은 항아리에 붓곤 했다. 한 해가 지나니 이렇게 모은 쌀과 보리가 두 말 정도 됐다.
나 역시 궁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홍천본당에서 월급을 받기에 밥 굶는 일은 없었지만, 어느 달인가는 조 필립보 신부님이 깜빡 잊고 월급을 챙겨주지 않아 고생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 참석하신 조 신부님이 뜬금없이 "회장님, 월급 받았습니까?"하고 묻기에 얼떨결에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돈 관계는 반드시 수첩에 기록하는 데 지출기록이 없습니다. 무슨 착오인지…. 이상합니다"하며 고개를 갸우뚱하셨다.
신부님이 돌아가신 뒤에 생각해 보니 그달 치 월급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 받았으니 달라고 하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 주님 머슴으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선교사 길로 들어선 터라 월급을 받을 때마다 죄송한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당장 수중에 돈 한 푼이 없으니 난감했다. 용기를 내어 홍천 큰댁엘 찾아갔다. 큰댁은 미신을 믿는 집안이었다. '거절하면 창피해서 어떻게 하나. 천주교에서는 사람 일만 시키고 밥도 못 먹여 주느냐는 핀잔만 듣고 나오는 건 아닐까.' 하지만 걱정과 달리 시아주버님은 힘없이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내가 가여워 보였는지 선뜻 도움을 주셨다. #고가품 소니 라디오를 선물로 받은 사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보좌신부님이 나를 부르셨다. 조 필립보 신부님께서 휴가를 가시며 전해주라고 하셨다면서 뜬금없이 트랜지스터 소니 라디오를 내밀었다(당시 라디오는 요즘으로 치면 최고급 TV에 버금가는 고가품이었다). 깨끗한 미색 라디오였다. 6ㆍ25 전쟁 이후 누군가에게서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라디오는 나의 좋은 친구가 돼주었다.
나중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신부님이 라디오를 사준 연유를 알게 됐다. 신부님은 월급을 준 것 같지 않은데 본인이 받았다고 하니 새삼스럽게 돈을 줄 수도 없고, 그래서 라디오를 사서 선물했다는 것이다. 종에 대한 품삯을 정확히 계산해서 주신 신부님께 감사인사를 드렸다.
조 신부님은 서양(호주) 분이라 그러신지 계산이 분명하셨다. 1950년대 말 시계가 없어 미사시간, 기도시간, 교리시간 맞추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당시 시계는 고가품이었다. 벽시계가 있는 집은 드문드문 있었으나 손목시계를 찬 사람은 동네에 한 명도 없었다. 시계 얘기를 간접적으로 신부님께 했더니, 신부님께서 서울에 가신 길에 2만 5000환짜리 세이코 손목시계를 사오셨다. 그걸 건네주시면서 월급에서 5000환씩 제하겠다고 하셨다. 내 월급이 그때 1만 5000환이었다. 다섯 달 동안 그 시계값을 갚느라 허리띠를 더 졸라매고 살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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