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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풍경사진 하면 자연풍경, 아니면 사람이 없는 풍경, 뭔가 유토피아적인 풍경, 경치 좋은 풍경만을 생각한다. 그러나 왜 그런 풍경만 있는가. 길거리의 풍경, 집안 실내의 풍경, 도시와 인간이 얽혀 있는 풍경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풍경사진에 맞추는 초점의 심도가 얕다는 것이 문제다. 즉 항상 아름답고 신비하고 장대한 풍경이라는 그 면에만 초점이 맞춰진다는 것이다. 즉 한국에서의 풍경사진에서는 심미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문제다. 풍경사진의 초점심도를 더 깊게 잡아서, 풍경의 다른 면, 다른 범주로 확장해 보면 어떨까. 즉 지질조사 같은 풍경이나, 도시의 인구동태조사 같은 풍경, 산에 나무가 얼마나 죽었나 조사하는 풍경 등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나 아름다운 풍경에 몽롱하게 칠한 채로 있을 뿐이다. 생경한 풍경, 지겨운 풍경은 어떨까. 아니, 이런 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풍경으로부터의 거리 두기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제1회 서울 포토트리엔날레)에 나오는 사진들은 우리에게는 풍경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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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주 새로운 것들이라기보다는 서구나 일본에서는 그동안 많이 했던 작업들인데 우리가 감각의 차이, 풍경에 대한 생각의 차이 등으로 말미암아 수용하지 않고 있던 부분들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정 시아오 췬Zheng Xiao-Qun은 흙을 거대하게 파낸 공사장의 풍경을 보여주는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그 현장의 기괴함이나 초현실적인 면도 있지만, 사진가가 주목하고 있는 요소들이 다. 즉 그는 흙이 깎여 나간 자국, 지질, 경사도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이상한 관심이 이상한 사진을 낳은 것이다.
그에 비하면 다른 중국작가 쉬 용Xu Young이 찍은 북경의 골목은 좀더 전통적인 풍경사진에 가깝다. 장난 삼아 그를 중국의 외젠 앗제라고 부른 적이 있는데, 그는 정말 앗제같이 사람이 보이지 않는 베이징의 골목들을 마치 범행현장처럼 찍었다.
다른 서구 사진가들에게서는 좀 다른 풍경의 전략들이 보인다. 그 중의 하나는 생경한 풍경 만들기이다. 생경하다기보다는 드라이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 들어가고 싶은 풍경, 아름다운 가상으로서의 풍경이 아니고, 거꾸로 이 세상의 저런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 풍경으로서, 그것을 보는 이가 풍경으로부터 거리를 두게 하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헨리 워셀의 사진이 그것이다. 그는 가뜩이나 건조한 남부 캘리포니아를 정말로 건조하게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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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사진 속의 건물이나 나무가 사막의 모래처럼 말라서 부스러질 것 같다. 그런 '정서 없음'의 정서가 워셀 특유의 성격인 것 같다. 그렇다고 그의 사진에 아무런 맛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생경함과 메마름으로 인해 그의 사진은 볼수록 신기하다.
또 다른 전략은 독특한 원근감의 구성이다. 그것은 김영길과 비토리오 그라치아노에게서 드러난다. 김영길의 사진은 아주 가까이 있는 것과 아주 먼 것을 하나의 프레임 속에 파노라마로 잡아서 이상한 거리감을 연출하는데, 그 공간감은 일반적으로 광각렌즈로 찍은 사진에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것이어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그것은 단지 파노라마라는 포맷의 특성으로만 돌릴 수 없는 어떤 것이다. 그의 사진 속의 원근감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것은 분명히 일상의 공간은 아니다.
김영길에 대하여 평론가 김승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사진 밑에 작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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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메우고 그 위에 도시와 공장이 건설된다. 광활한 지평선 위에 어느날 아침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이 솟아올라 신기루처럼 떠오르는 광경을 본다. 황량하고 불가사의한 광경이 그의 눈앞에 현실감을 가지고 전개된다. 인간이 자연에 순응해서 살던 시대는 지났고, 모든 것은 서양의 합리주의에 근거한 과학과 경제의 원리에 의해서 지배되어 왔다. 그 결과로 우리에게는 지구 온난화와 산성비, 열대림의 파괴, 주체할 수 없는 양의 폐기물, 오존 홀과 사막화 현상이 돌아왔다. 생태계는 물론, 지구라고 하는 혹성 자체가 다른 별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일이다. 그것은 악몽이다. 그는 이런 위기적인 상황을 피해 가려고 하지도, 그렇다고 정면으로 맞서려 하지도 않는다. 그의 사진에서는 도시계획이나 환경개발에 생태계적 순환기능을 부여해야 한다는 에콜로지스트의 높은 목소리도 둘려오지 않는다. 모든 인공적으로 변형된 자연을 '고향으로 받아들이려는', 체념과도 같은 눈길을 그 지평 위에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서정적인 태도로 그려내려 한다. 문명과 자연환경과의 그 엄청난 단절에도 불구하고 그의 흑백사진이 아름답게 보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자연이 인공적인 것과의 대비를 통해서 정의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진가와 대상, 그 이항적 대립 구조는 사진의 기본적인 구조다. 우리가 사진을 인식의 도구라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풍경은 그것을 보는 사람의 시선에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비록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존재해 있었다 할지라도 보는 사람의 의식에 의한 추출이 없다면, 그들은 무의식의 저편에서 아무런 이름도 없이 무의미하게 떠돌 뿐이다. 4년의 공백(유학)을 거쳐 돋아온 그의 눈앞에 지금까지 가슴에 담고 있었던 고향의 땅이 난폭하게 유린당해 있는 모습이 펼쳐졌을 때의 심정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것은 미지의 대륙, 미지의 혹성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가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고향은 이미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그는 그곳에 카메라를 겨눈다. 하늘을 가리고 서있는 거대한 교각과 굴뚝, 송전탑, 가스 저장시설,이전에는 곡식이 자라는 논이었던 넓은 대지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콘크리트 파편, 컨테이너‥‥ 그러나 그가 말하려는 것은 물론 이런 것들이 아니다. 그 파노라믹한 풍경은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사이에 그 공간을 넓히고, 우리는 그 안으로 들어가 풍경에 둘러싸이게 된다. 그것은 즉, 대상이 아니라 환경이 되는 것이다. 그 개간지는 보통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른 색을 하고 있을 것이다. 또 한여름의 태양을 받은 땅, 비가 쏟아진 다음, 활짝 개었을 때의 광선상태, 흐린 날이나 석양 무렵에도 전혀 다른 색채를 띠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혹백사진은 우리에게 상상력으로 그 세계를 보도록 강요한다. 세계에 대한 많은 생각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만 사진에서는 비평적인 시각이 느껴지지 않는다. 공사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이지한 요소들은 그의 풍경사진에서 의도적으로 배제되고 잇다. 요컨대 현실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읽을 거리들이 카메라 앵글이나 프레이밍, 프린트의 프로세스에 의해서 사라지고, 어떤 각성된 의미로도 표현될 수 없는, 그냥 떠도는 것을 가두어 놓음으로써 서정성을 높이고 있다. 회화의 역사에서 풍경은 주제를 드러나게 만들긴 위한 단순한 배경이었다. 풍경이 풍경 그 자체로서 그려지긴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는다. 김영길은 주제로서의 이 풍경을 다시 배경으로 돌려놓았다. 그 풍경은 와일드 웨스트의 사진가들이 찍은 것과 마찬가지로 인화되지 않은 세계이지만, 대자연의 장엄함도 그림엽서와 같은 아름다움도 갖고 있지는 않다. 인간에 의해서 침식당한 자연을 다루고는 있으나, 그 자연을 볼츠나 아담스와 같은 싸늘하게 식은 눈길로 바라보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분명 그곳을 알고 있다. 저려오는 가슴으로 그 풍경을 바라본다. 우리는 그것을 향수라고 해도 좋고, 또는 상실된 것에 대한 비애감이라고 불러도 좋다. 언어에 의해서 바꾸어지지 않는 불가사의한 울림, 그것은 성년이 된 우리가 '고향'을 떠올릴 때 누구나 느끼게 되는 그런 감정이다. 그곳에는 이미 고유한 풍토의 분위기나, 그 토지가 가지고 있었던 땅의 정령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파헤쳐지고 길들여져 가는 광활한 땅이 끝없는 지평을 이루며 묵시록의 세계처럼 펼쳐져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는 곧 수많은 자동차들이 꼬리를 물고 달려갈 것이며, 높은 아파트며, 콘크리트의 건물들이 빼곡하게 들어설 것이다. 대지는 온통 아스팔트 콘크리트로 뒤덮이고 그 황폐한 대지 위에 위생적인 도시가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이전에 그곳이 어떤 땅이었는지 생각해 보려고 하지도 않은 채 그 길을 지나갈 것이다. 그 대지는 그렇게 영원히 망각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풍경사진은 어떤 것이나 기록과 에콜로지의 문맥 가운데에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사진은 분명,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파괴되거나 변형되어 가는 환경에 대한 에콜로지컬한 기록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서 그가 구사하는 언어는 분석적인 것이나 비판적인 것이 아니라, 시적인 언어다. 그는 도시화, 현대화,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전면에 나온 것들이 초래한 환경에 대한 어떤 위기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풍경사진에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는 지각의 변화에 대한 '상황'을 찍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공적으로 파괴되어 가는 자연환경의 문제와, 원초적인 자연의 깊이를 가진 상징적 세계의 문제를 자신의 풍경론으로서 제기하고 잇는 것이다. |
그에 비하면 그라치아노의 사진도 독특한 원근감을 구성하고는 있지만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정도는 아니고 시각적 흥미를 가져다 주는 정도이다. 사실 원근감이라는 주제는 1500년도에 알베르티가 추구해 온 이래로 계속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각인해 온 체재로서, 풍경사진의 문제는 결국은 원근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한 가지의 풍경의 전략은 사람이 들어간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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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앞서 지적한 한국 풍경사진의 문제는 '풍경은 사람의 반대'라는 개념에 기초한 것이다. 그래서 초상사진과 풍경사진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것처럼 취급되었다. 그러나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코리 베셈스korrie Besems, 이태한, 앤 치와스킨Ann Chwatsky, 정영혁 등이 그런 전략을 취하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은 사람이 어떻게 풍경의 요소가 될 수 있나, 풍경에 사람이 개입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를 탐색하고 있다. 특히 베셈스의 사진에서는 사람은 비교적 작게 나와 있고, 건물이 주가 되어 있지만,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 뭔가 생각하게 하는 것은 빗자루질을 하고 있거나 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등, 뭔가 특정한 행위의 와중에서 포착된 사람들과 도시공간과의 관계이다. 포맷은 다르지만 이태한과 치와스키 사진도 이런 점에서 비슷한데, 그들은 노동자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노동현장이라는 공간, 건축물이라든지 공구 같은 노동 대상이 만드는 공간과 노동자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점에서 레이건 루이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루이에게 있어서는 중국 출신의 미국사람이 중국을 바라본다는, 문화적 정체성의 문제가 주가 된다. 즉 그의 풍경은 전형적인 중국풍경, 즉 중국인 자신들이나 서양사람들이 중국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 모습과, 거기에 연루된 정체성에 초를 치는 사진들이다. 즉 풍경에 대한 자부심, 감탄, 애착 등의 고리를 끊고 엉성하고 시큰둥한 중국을 보여주어, 풍경에 연루된 민족적이고, 문화적인 정체성을 과감하게 탈신비화한다. 그의 사진에서는 인물이 특히 풍경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풍경과 정체성이라는 주제는 한국에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 부분이지만 앞으로 좀더 좋은 풍경사진이 나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깊이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정영혁의 경우는 풍경사진의 또 다른 차원, 즉 인테리어의 풍경이라는 면을 보고 있어서 홍미롭다. 작가가 스스로 그것을 풍경사진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면을 떠나서 그의 사진이 실내라는 공간의 특성에 주목하게 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물론 인테리어 디자인의 보조수단이나 실내의 기록으로서의 인테리어 사진이 있지만, 일상적인 인테리어 공간을 낯설게 보게 하는 인테리어 사진은 우리에게 없다. 물론 정영혁의 사진이 낯설게하기의 전략을 적극적으로 채택하고 있지는 않다.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의 모양은 어떤가, 문틀이나 창틀의 색깔은 어떤가, 가구들이 놓인 자리는 이상하지 않은가, 나아가 인테리어라는 공간이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사진적 검토나 탐색이 없었다는 점에서 그의 사진을 주목해 볼 수 있다. 그의 사진 속의 누드도 인테리어의 한 요소로 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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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고고학적 풍경이라 할 티에리 위르벤의 사진도 우리가 풍경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옛날 유적지 비슷한 , 그러나 유적지는 아닌 모형 같은 건축물을 사진 찍고 있다. 그것은 풍경이 아니면서도 풍경인, 참으로 묘한 모습이다. 미국의 인디언이 사는 곳과 한국의 옛날 모습 (아주 옛날이 아닌 약간 옛날)을 사진 찍어 비교한 박병규의 작업도 고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쌓인 세월의 켜와, 거기 엉켜 있는 의미의 지식층들을 사진을 찍은 것이다. 이제 풍경사진은 고고학을 아우르는 데까지 나아 갔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사진들은 모두 다 풍경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근본적으로 도전하는 것들이다. 한국에서의 풍경은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존재하는데, 그 하나는 처녀의 속살처럼 차마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순결하고 신비한 어떤 것으로서의 풍경이다. 유명작가의 설악산에서부터 무명작가의 달력사진에 이르기까지 이 점은 공통되는 것이다. 즉 이는 사진이나 회화 등 대부분의 시각적 재현으로 나타나는 풍경의 모습들이다. 또 한 가지 풍경은 사진이라는 실천보다는 건설이나 토목 같은 행위와 연관된 것들인데, 그것은 풍경에 대한 적극적인 억압과 파괴로 인해 전자의 입장과는 정 반대되는 것이다. 산비탈을 깎가서 만든 골프장의 풍경, 주변환경과의 조화를 생각하지 않고 무조건 높이만 지은 아파트, 가게크기의 세배는 되는 간판과 글씨들이 이런 풍경들이다. 결국 한국의 풍경이란 까마득히 멀리 두고서 신비하게 바라보기와 아주 가까이 두고서 마음껏 농락하기라는 두 극단을 오갈 뿐, 사람과 관계를 맺고서 상호 소통하는 풍경은 아닌 것 같다.이는 마치 왕에 대한 지나친 숭배가 그에 대한 억압된 반항의 욕구를 불러일으켜, 왕의 목을 베는 쿠데타로 변하는 것과 흡사한 구조인 것 같다. 즉, 풍경에 대한 지나친 숭배와 거기에 상반되게 잠재되어 있던 풍경에 대한 소유와 파괴의 욕구가 분출되어 오늘날과 같은 풍경의 재난이 온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풍경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풍경을 인간사회와 문화의 한 요소로서 인식해야 하며, 나아가 자연이 인간의 사고와 실천에 의해 형성되고 , 인간이 자연에 의해 형성되는 바로 그 지점을 탐색해야 한다. 여기에 나오는 사진들이 한국의 풍경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해도,우리에게 인간, 자연, 문화, 사회의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면 좋을 것이다.
풍경사진(모든 사진이 그렇지만)은 자연과 대상의 외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했을때, 그것은 우리가 자연과 대상을 어떻게 인식하느냐를 보여주는 인식의 틀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사진적 형식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결국 풍경사진은 풍경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풍경에 내재된 이데올로기를 드러내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풍경은 자연의 영역을 넘어 사회와 정치, 그리고 문화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과 관계하는 것으로 그 의미를 넓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풍경사진을 통해 우리의 풍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의 문제에서 출발해야 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 '한국성'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할 때 이것이 여전히 상투적이고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그 논의의 틀이 여전히 한민족의 보편성이나 전통적인 것으로의 회귀라는 좁은 틀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풍경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 "우리의 풍경"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동양적 자연관(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신비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과 관습적인 풍경개념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자연과 대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해 풍경사진은 물리적 대상으로서의 풍경을, 관조의 대상으로서의 풍경을 넘고 "우리의 풍경"이라는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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