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엔 울릉도에서 뭍으로 나와 충남대에서
연수하다 포항 댁으로 내려오신 이동선 전임회장님을
최희범, 하억찬 선생님과 함께 만나 오랫만에
따뜻한 밥 한그릇과
곡차 한 잔 나누며 밤늦도록 정담을 나누다 시원하게
내리는 밤비 속에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18일 토요일엔 포항에 귀한 발걸음 하신 법륜 스님을 아쉽게도
못 뵈고, 오전부터 어제 일요일 오후까지
1박2일 동안 울진교육청 주최의
가족 야영대회에 다녀왔어요.
먼곳의 쪽빛 가까운 곳의 비취색 바다, 부서지는 파도가 있고,
잉어가 물결 위로 파다닥 솟구치고,
불영사계곡에서 바다로 흘러드는
왕피천 맑은 물 속에서 노를 젓기도 하고,
하이킹 하며 본 깔끔한 남보라빛 산도라지꽃, 붉은 패랭이,
동그란 패랭이, 술패랭이, 익모초, 인동초, 담장 아래의 채송화,
논두렁의 콩잎과 이삭이 굵기 시작하는 벼이삭,밭두렁의 수수,
고구마 줄기, 누렁 호박, 큰 별 모양의 주황색 호박꽃,
붉은 고추와 푸른 고추가 사이 좋게 달린 고추밭,
알이 제법 굵어 가는 밤톨, 바위를 타오르는 담쟁이 넝쿨,
"마을을 다 차지한 매미소리,
하늘을 다 차지한 햇님"(포항의 농부 황보태조 씨의
<<꿩새끼를 몰며 크는 아이들>>, 올림,2001에 나오는
지은이와 막내아들이 같이 지은 동시.)
관동팔경의 하나인 望洋亭, 진복리의 고인돌과 300살 드신
느티나무 아래의 성황당, 산포리의 성황당이란 문화유산도 있었어요.
알차고 의미있고 즐거운 야영 끝나고 나오며
딸아이 녀석은 교육장님 얼굴을
처음 뵈었고, 또 교육장님 손을 두 번이나 잡아 보았다며
마냥 행복해 하더군요.
또 밤새 으르렁 대며 몰려오는 야영장 바다의 파도소리는
太古의 세계로 들게하고,
모닥불과 촛불과 별빛은 어둔 밤과 가족의 얼굴을
聖化시키더군요.
하지만 수련회에 가면서 본 평해 越松亭 앞 아스팔트 길바닥에
차에 치여 쓰러져 경련하며 고통스러워 하는 청설모의 모습이
눈에 밟혀 야영이 끝날 때까지 얼마나
가슴이 아렸는 지 몰랐습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무지막지한 폭력에 쓰러진
그 애의 극락왕생을 관음보살님께
염하다가 텐트 속의 잠자리에 들었지요.
수련은 더러 보았지만 연꽃은 막상 제 평생 처음 보았지요.
평소에 집사람이 발령난 聖留窟 옆의 울진 梅花골로
어링불 포항에서 오르내리며,
선조 임금 때 임진왜란 발발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되어
平海 고을 箕城 땅으로 귀양온 鵝溪 李山海 선생이
고을 북쪽 5-6리 떨어진 곁의 한적한 산골에 연꽃이
가득 핀 연못을 다녀와서 남긴
<梧谷蓮塘記>란 글이 생각나 오곡리의 연당을 찾아가
옛사람의 자취를 느껴보려던 참이었지요.
그러다, 막상 학교 운동장 2-3배 넓이의 호수에 가득 핀
수 천 수 만 송이의 홍련을 대하고 얼마나
환희심이 일던지요.
야영에 지친 몸을 잊고서
호수를 한 바퀴 돌며 가족사진도 찍고,
연밥과 연잎을 관찰하고, 물속에 들어가
활짝 핀 것, 꽃 잎이 오목한 봉오리, 봉긋하게 개화하려는 봉오리,
꽃잎이 지고 난 연밥, 꽃잎 속에 비밀 스럽게 감추어진 수술과 암술,
홍련 가운데서 드물게 보이는 백련, 새벽녘 소나기가 지나갔는데
아직도 넓적한 연잎 위를 구르는 옥구슬 같은 물방울
을 보고 탄성을 질렀어요.
또 꽃잎 속의 노오란 연밥을 보고 비로소 절에서 만나는
연화무늬의 탄생 비밀을 짜릿하게 감지하기도 했어요.
꽃잎을 잡고 코를 벌름대면서 벌이 잉잉대는 향기를
맡기도 하고, 한걸음 물러나 언덕 위의 '蓮湖亭'에서
솔가지 사이로 연못 끝 저 쪽 호안 버드나무까지
점점이 아련하게 켜진 연꽃등불을
햇살아래 바라보며 가슴 가득 얼마나 환희심이
피오르던지요.
망원랜즈 없는 카메라에 담느라 글쎄 사진 1 통을 다 찍고
또 1통을 사서 넣었지요.
마치 부처님을 다시 뵈옵는 듯한 감흥이 일었어요.
이즈음이 전국의 연못에 피오른 연꽃을 만나기 좋은
철이거든요.
경북에는 상주(상주 함창 공갈못-공검지의 연밥을 따는 아리따운
아가씨에게 청혼을 하는 효심 깊은 총각의 민요가 생각나네요.)
쪽에도 큰 연호가 있고,
경산의 영남대학교 근처에는 특히 연을 많이 재배 한답니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청도 운문사편에 유교수님이
운문사의 비구니 스님들을 누이처럼 생각하고 연꽃 만발한
학교 근처로 한 번 오라는 말씀을 하는 아름다운 장면이
나오데요.
연꽃의 원산지가 나일강 쪽이라서 연꽃이 이집트의 국화이고,
아마도 인도의 국화인지도 모르겠네요.
불교와 같이 중국으로 들어온 연꽃이
송대의 신유학(주자학)자 선비들에게도 사랑받았는데,
대표적으로 周濂溪의 '愛蓮說'이란 작품이 있지요.
선비의 모습(인품)을 연꽃으로 이미지화 하고 있지요.
신유학이 불교와 도교의 영향을 받으면서 불교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성립한 것을 감안하면 선비들의
연꽃사랑 속에서 신유학과 불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읽을 수 있겠네요. 말하자면 주자학은 불교의 세속화,
중국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라키겐고, 심경호 옮김, <<불교와 유교>>, 예문서원, 2000 참고)
아뭏튼 불교의 진리를 상징하고,
선비의 인품을 닮은 꽃이라 하여
연꽃의 재배와 완상은 억불의 조선시기를 거쳐
우리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어제 울진의 연꽃호수 옆의 蓮湖亭엔 연꽃의 그윽한 향기와
고결한 자태를 완상하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더군요.
그저 저처럼 사진에 담으려는 욕심(소유욕)많은 사람들이
몇몇 보이고, 뽕짝가락이 엠프소리로 흘러나오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생활의 恨을 디스코 춤으로, 노래로,
소주냄새로, 고기굽으며 연호정 정자를 압도하더군요.
백년 전 이 고을로 온 원님이 정자를 짓고
주렴계의 '애련설'에서 '향원정'('香遠益淸')이란 이름을 취했는데,
그 후에 다시 지으며 '연호정'이라 지은 것은 아무래도
그 격이 떨어지는 것인데,
어제 가보니 호수가에 온갖 식당이 들어서고, 거대한
아파트가 신축되고 있더군요. 그러면 온갖 생활폐수가 호수로
흘러들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니,
오늘 우리들의 문화가
얼마나 타락해 있는 지 알 수 있어
조금은 슬펐어요.
물질문화가 발달해 있지만 오히려 우리보다 더
자연을 잘 가꾸고 소중히 여겨 자연과 인간의 행복한 조화를
추구하는 서구인들에게서 정말이지 많이 배워야 하겠어요.
그들이 동양의 문화(불교, 유교, 도교, 힌두교 등)에서
자기들 문화를 풍요롭게 하려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전통문화의 풍부한 광맥을 우리시대의
문화창출의 원천으로 새롭게 캐내고 소중히 여겨야
하겠지요.
계곡의 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고, 사계절이
뚜렷하고, 산과 내와 들과 바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하늘이 내린 자연에 살다보니 오히려
이 자연의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우리시대의 폐단은
정말이지 통렬하게 반성하고 고쳐야 할 것이예요.
아무리 더러운 뻘 속에서 고결하고 환한 진리의 등불을
피워내는 연꽃이라도 어딘가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맑은 물줄기가 연못 속으로 흘러들어야
연꽃이 개화할 수 있듯이,
탐욕의 뻘밭에서 썩어가는 우리시대 사람들의 가슴에
우리 불자들이 부처님 진리의 맑은 물줄기를 드리워야 하리라는
마음이 일더군요.
호수가를 산책하며 초등학교 3학년 딸아이에게
'심청이가 용궁에서 왕비가 되어 서해바다 범피중류에
연꽃으로 떠올라 어부들이 임금님에게 바친' 이야기를
상기시켜 주었더니 이 녀석 대답이 걸작이었어요.
"아빠는 그 이야기를 믿어?"라 하더군요.
전 순간 과연 우리시대 아이들은 심청이보다 행복한 것일까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어요.
심청이보다 웅숭깊고 풍요로운 정서를 가진 꿈(낭만성-신화)을
우리부부는 아이들에게 키워주고 있는가를 생각하니
왠지 딸아들 아이에게 미안하고
연민의 정마저 일더군요.
우리교육이 추구해야할 방향이 진정 어디인 지를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겠어요.
예전 우리 어머니께서 눈내린 겨울밤
호롱불을 켜고 <<부모은중경>>을 낭랑히 읽어시던 모습은
영영 우리 세대만의 가슴에서 타오르다 사그라들고 말
불씨일까요?
"이 여름의 끝자락에 부처님의 얼굴을 뵈옵지 않으실래요."
해마다 여름방학 마지막 주인
8월 셋째, 넷째 주(15-25)엔
서로 연락하여 가족, 친지 동반하여 연꽃 호수의
연꽃 잔치를 보러 가면 좋겠어요.
카메라도 가져가시어
연꽃을 필름에도 담아오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