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박철영
로 시작된 나의 영어 단어 외우기의 시작은 6학년이 끝나기 전에 시작되었다. 알파벹을 외우고 영어 대소문자를 선이 그어진 노트에 연필이 아닌 펜에 잉크를 찍어 쓰기 연습을 했다. 우선 잉크의 향기가 싫지가 않았다. 난생처음 암기한 단어가 “에이 피피 에루 이”였다. 그 애플은 내가 알고 있는 명절이면 몇 개씩 맛보던 홍옥처럼 맛난 과일이 아니었다. 이브가 따 먹었다는 선악과가 있다면 바로 apple일 거라고 생각되었다. 영어란 것이 나처럼 성질이 느긋하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서서히 지쳐가기 좋은 과목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래도 공부깨나 한다는 친구들이 나와 인철이하고 춘청이었다. 웃골에 인철이는 평소에도 말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동네에 살았어도 자주 어울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동로골 춘청이 와는 한 골목이라 수시로 만났고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는 영어 단어를 외우고 와서는 서로 경쟁적으로 영 단어를 누가 더 많이 외우고 있는가를 요즘으로 치면 꼬리말 이어가기처럼 게임을 했다. 번번이 이기던 내가 한 번씩 밀렸다. 자존심이 상해 더 열심히 하면 금방 앞서기도 했다. 춘선이네 누나 귀자는 4년 선배다. 춘청이 네하고는 집 대문이 약간 어긋지지마는 거의 골목을 두고 마주 보고 있었다. 거기다 같은 박 씨라도 춘청이네와 집안이 더 가까웠다. 그래서였는지 둘이서 암기한 단어를 이어가다 막히면 춘청이 편을 살짝 들어주곤 했다. 춘청이랑 다른 놀이를 하면서 놀고 있으면 사립문 안쪽 확독이 있는 곳에다 불러 놓고는 자기는 담벼락에 지긋이 몸을 기댄 채 시합 붙이기를 즐겼다. 내가 약간 밀리는 듯하면 눈빛이 환해졌고 춘청이를 힐끗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그 의미는 은연중 안도하는 미소였을 것이다. 귀자 선배는 나보다 4년 위였고 그때만 해도 여중을 다녔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좀 아는 때였을 것이다. 그런 귀자 선배가 가끔 미워질 때가 있었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동네에 중학교 시험에 떨어져 진학을 못 한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삼 년 전부터 시험이 없어지고 무시험으로 중학을 진학하면서 우리 때가 동네에서 가장 많이 중학교를 진학했다. 남원에는 중학교가 남원 용성중학교하고 남원중학교 두 곳이 있었다. 학교를 배정하는 방법은 은행알을 돌려 적힌 숫자로 학생을 나누었다고 들었다.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은행알이 내 인생행로에 중요한 변화를 주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것마저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하고 싶다. 만약에 그렇게 배정 받은 중학교에 춘청이와 인철이랑 같이 내가 배정되었더라면 하는 가정 같은 상상을 해볼 때가 있다. 지금의 내 인생살이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면서 인철이와 춘청이 와는 알게 모르게 공부에 대해 경쟁을 하고 있었기에 그런 아쉬움이 있다. 그런 생각은 나이 들어 동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우연히 어릴 때 이야기를 하던 중 그 친구들도 그런 생각을 가졌음을 알았다. 나만 남원중학교로 떨어졌고 둘은 용성중학교에서 함께 다녔다. 그 둘은 이후 공부를 꾸준히 해서 의사를 하고 있으니 핑계 같지만, 그런 긴장 관계가 알게 모르게 해이해졌을 것이다. 학교가 다르다 보니 만나는 횟수도 줄었고 조금씩의 차이가 삼 년 후는 큰 차이가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나이 들어 생각해보니 참 소중한 시기를 너무 여여실실如如失失하게 보낸 것이 후회스럽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입학 통지서를 받고 며칠 후 예비소집하는 날은 각처에서 모여든 아이들로 학교가 북적거렸다. 개중에는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고 온 아이들도 있었고 초등학교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아이들도 있었다. 시내권 아이들은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는 듯했다. 우리 마을 친구 동인이 상훈이 종덕이 넷은 뿔뿔이 흩어져 어디에 있는지 정신도 없었을 것이고 아예 볼 수도 없었다. 당시는 60명 이쪽저쪽으로 반편성이 되었고 우리 학년이 8반까지 있었으니 상당한 규모였다. 내가 입학한다는 말을 듣고 춘청이네 형 춘호 선배가 찾아왔다. 춘호 선배와는 중학교 교무실 뒤 우물이 있는 곳에서 만났다. 당시 춘청이네 형은 남원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고2 때 정도로 기억된다. 그때만 해도 남원중학교와 남원고등학교는 담이 없어 한 학교처럼 생활했다. 물론 교문도 하나로 같이 드나들었다. 모든 시설을 함께 사용했기에 동네 선배라고 학교에 대한 경험담으로 학교생활에 대한 당부의 말을 전했던 것 같다. 하기야 식정리 앞동산에서 진 돌이 놀이를 같이하고 놀았으니 놀이를 통한 어느 정도 유대는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그 또래 중에 고등학교를 진학한 것도 유일했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으니 잘 나간 사례에 속했다. 춘호 선배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감 선생님이라 본래는 교대 진학이 목표라고 했었는데 여의치 않았나 보다. 그 이후 뒷집 상태네 형 상석이 선배가 남원 고에 진학해왔고 학교를 오가다 만나면 운 좋게 자전거 앞에 태워주기도 했었다. 자전거 뒤 짐 실은 곳은 책가방을 묶었기 때문에 앞쪽에 걸쳐 앉아 탔는데 엉덩이가 무지 아팠다. 그것도 비포장도로의 자갈에 자전거 바퀴가 튕길 때는 참 곤욕스러웠다. 사실 불편해도 참을 도리밖에 없었다. 걷는 불편함과 자전거의 빠름과 편리성에 대한 득실을 따져봐도 자전거가 더 나았기에 참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상석이 선배는 나와는 친척 간이라 편했고 나에게 깍듯이 대했다.
같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갈 때면 나는 상석이 선배의 남원고등학교 배지가 붙여진 검정 교모校帽 쓰기를 좋아했다. 언젠가 비 오는 날이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내려 학교까지 상석이 선배와 이야기를 하며 걸어 들어가다 남원고등학교 기율부 선생님에게 걸려 혼난 적이 있었다. 아무리 봐도 고등학생 같지가 않은 키가 작은 꼬마 아이가 고등학교 교모를 쓰고 있으니까 내 신상을 물어왔고 나는 당연히 답을 할 수 없었다. 내가 봐도 철없던 시절 마냥 좋기만 한 어린아이 같았다. 여름 방학 때면 상석이 선배와 성동초등학교에서 공부한답시고 밤늦도록 같이 시간을 보냈다. 상석이 선배가 아무래도 학교 교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초등학교 교사인 아버지의 힘을 빌렸을 것이다. 그런 덕에 같은 또래 춘청이, 인호, 상근이 그리고 영심이와 옥녀도 간혹 나와 공부를 했다. 사실 공부를 한답시고 교실에 앉아있지만, 교실 바깥의 풍경은 감성이 풍부한 우릴 가만두지 않았다. 쉰다는 핑계를 대며 우선은 운동장으로 빠져나가 포플러가 키를 키우고 있는 한쪽에 버티고 있는 늑목을 오르내린다거나 공도 없이 축구 골대로 돌진하여 갖은 폼을 잡고 놀았다. 그렇게 공부보다는 여름밤의 정취에 빠져 철봉 아래에서 매달리기를 한다거나 턱걸이로 누가 더 많이 버티기를 하는가 놀기에 바빴다. 내가 다녔던 성동초등학교 뒤쪽은 산밭으로 이어져 있었고 앞쪽으로 아래로 계단처럼 층층이를 낮춰가며 논이 있었다. 논이 있는 위쪽으로는 큰 저수지가 있어 어지간히 가물어도 벼가 자랄 수 있었다. 운동장 옆으로 작은 저수지가 하나가 더 있었고 밤이면 개구리가 우는 소리와 어우러져 정취를 더해주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도 그 저수지는 낮에 봐도 왠지 나에게는 무섬기가 들어 꺼렸다. 친구들과 여럿이 아니면 주위에서 혼자는 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비라도 오는 밤이면 저수지가 온통 캄캄했고 무성하게 자란 물억새와 부들이 바람에 흔들릴 때는 나만의 소름에 떨곤 했고 그쪽으로 가는 것을 꺼렸다. 언제부턴가 아이들은 그곳에 가물치가 산다고도 했는데 난 가물치란 고기 그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이들이 설명을 해주었지만 어떻게 생긴 고기가 세상에 물 위를 날아다닌다니 황당한 말처럼 들렸다. 그만큼 나는 꽉 막혔거나 세상 물정을 너무도 몰랐거나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가물치란 놈을 그 이후 오랫동안 만나보길 소원했었는데 나이 들어서 그런 꿈을 이룰 수 있었다. 사람이나 물고기나 날려는 의지가 있어야 날 수 있고 끊임없이 나는 꿈을 꿔야만 한다는 것을 알았다. 진화의 법칙은 사람이 성장하는데도 적용되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중학교에 다니면서 우리는 영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습득하는 기회를 가졌다. 시골에서는 쉽게 구사할 수 없는 영어 문장 몇 개만 가지고도 무언가를 다 가진 듯 행동을 했다. 춘청이와 동로골 골목에서 놀다가 여자 동창 옥녀가 지나가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 러브 유를 목 간지럽게 읊어대며 즐거워했다. 사실 당시 시골 정서로는 여자아이를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말은 금기어에 가까웠기에 더욱 그랬다. 좋아한 여자아이가 있어도 속으로만 가능했고 그것이 누군가의 입에서 전해지는 순간 어린아이들 세계지만 왕따 같은 어려움이 따랐다. 즉시 놀림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시골에는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고 이야기가 돌면 담벼락이나 학교 화장실 벽에 실명을 거론하는 글자가 새겨져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렇지만 아이들이라도 막연하게 러브라는 의미를 알고 있고 Love라는 발성만으로도 순진한 아이들 가슴을 설레게 할 만했다. 그 정도로 요새 아이들과는 달리 순진한 시대였다. 그런 우리와 마주친 옥녀는 발갛게 얼굴이 달아올랐고 수줍어 어쩔 줄 몰라 하며 앞을 지나가곤 했다. 옥녀도 중학교를 진학했으니 그런 정도는 알아들었다. 이후에도 동네의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아이 러브 유를 한동안 우리는 남발하며 중학 1학년의 우쭐대던 시절을 보냈다. 당시는 영어라는 잉글리쉬가 선진문화라고 인식했고 그 자체가 매력처럼 느껴졌다. 이후에도 그랬던 기억이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았다.
그렇다고 옥녀가 좋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좋아했던 여자아이는 아랫물에 사는 영심이가 따로 있었다. 우리 동네에서 여중을 진학한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중에 영심이도 끼어 있었다. 하여간 학교에 다니면서 귀자 선배 때문에 영어 단어를 열심히 외워야 했다. 가끔 춘청이와 테스트를 시켰기 때문이다. 남원중학교를 걸어 다니면서도 손안에 들어가는 단어장을 갖고 다니며 영어 단어를 외웠다. 단어가 암기가 될 땐 스스로 대견해 했고 성취욕 때문에 머리가 쭈뼛거렸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영어에 대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단어 몇 개 외우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럴수록 더 많은 노력이 있어야 했는데 반대였다. 적당히 해도 어느 정도는 학년에서도 따라갔으니깐. 학기를 높여 갈수록 적당이란 것이 통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안타깝게 적당히 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지금에야 열심히 하지 못했던 지난 시절이 얼마나 소중한 시기였는가를 알았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내 생의 그토록 푸르던 봄날이 다 흘러가고 이제는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니 세월이 화살 같다는 말이 틀림없다. 지금껏 쏘아 올린 시간이라는 화살은 죄다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시간이라는 화살을 다시 활시위에 놓고 다시 당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지나간 세월을 마냥 탓만 할 수는 없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화살이 결코 부족한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이순신 장군은 절박한 상황에서도 "신에게 열두 척의 배가 있다"고 했다. 나는 그보다도 더 좋은 여건에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매사에 감사하자. 지금 보내고 있는 이 시간도 십 년 후나 이십 년 후엔 지금의 내가 어린 시절을 회상하듯 몹시 안타까워할지 모른다. 다행인 것은 고향을 생각하며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고 그 사람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내 과거였음을 알게 되었다. 아름다운 과거는 남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과거는 내가 살아가는 현재의 내 모습이기에 그렇다. 식정리에서 태어난 친구들뿐만이 아니고 모든 사람은 지금도 캔버스에다 아름다운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가고 있음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