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불 갈비집. 롱런하기 어렵다. 요즘처럼 입맛 까다롭고 라이프 사이클이 짧아진 시절엔 10년 버티기 힘들다. 대구에도 지난 40여년 세월 속에 숱한 갈비집이 명멸했다. 30년 이상 역사를 간직한 갈비집은 취재결과 겨우 3개 정도밖에 없었다. 1957년 태동한 계산 땅집 불고기 붐은 동산동 진갈비·태동갈비·사리원 등으로 인해 대신동 갈비시대를 연다. 이 기류는 즉시 70년대 동인동 찜갈비, 80년대 북성로 돼지고기와 양념돼지갈비 시대를 파생시켰다. 현재 진갈비와 함께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숯불갈비집 신성·대창가든은 본식으로 나온 고기 못지않게 불판 볶음밥, 김치와 된장 등 후식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선구자들이다.
# 등심 로스구이 원조 신성가든
1971년 동구 신암동 육교 근처에 막강한 로스구이 집이 생겨난다. 신성가든(현재 SS패션)이었다. 신성은 의성 출신의 초대 사장 장문상(72)·김옥난(72) 부부한테서 외아들 장성운(50)에게로 명맥이 이어진 대구의 첫 등심 로스구이 집이다. 신성은 양념갈비시대에 도전장을 냈다. 77년 쯤 대구은행 신암동 지점 근처, 86년엔 수성구 시대를 겨냥해 수성구 대구은행 본점 동편으로 옮긴다.
신성의 히트작은 생 등심구이와 불판 볶음밥이다. 신성 전만해도 대구에선 곁반찬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불고기국물에 밥 먹는 게 고작이다. 밥에 된장을 곁들인 건 80년대 버전이다. 그런데 신성은 한발 빨랐다. 불판 볶음밥 요리법은 간단하다. 파와 잘게 썬 김치, 참기름이 가미됐을 뿐인데 식당 복인지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불판에 눌어붙은 누룽지 긁어 먹는 맛도 특별했다. 나중엔 불판 볶음밥이 등심보다 더 유명(?)해질 지경이었다.
신성이 등장할 무렵 국내엔 한우 등급시스템이 전무했다. 그 때문에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신성에서 발생한다. 그땐 마블링에 대한 일반인들의 이해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다수 손님들은 기름이 많이 박혀 있으면 저급한 줄 착각했다. 지방이 박혀 있지 않은 사태살류가 고급으로 취급됐다. 하지만 신성은 손님들이 머잖아 마블링 위력을 실감할 것이라 확신하고 일반 정육점이 꺼려하는 지방 가득한 등심을 독점 매입했다. 신성은 불고기와 양념갈비 시대가 곧 끝날 것이라 확신했다. 생등심 하나만 특화시키기로 맘 먹는다. 일반 정육점도 지방질 많은 고길 팔지 못하면 신성에 전화를 걸었다.
신성은 초창기 유행했던 석쇠를 사용하지 않고 구멍없는 무쇠 철판을 사용했다. 또한 숯불을 사용하지 않고 프로판 가스(1974년 대구에 프로판 가스 등장)를 사용했다. 초창기엔 기본 반찬이 지금처럼 풍부하지 않아서 갈비집 꾸려나가기가 무척 쉬웠다. 고작 깍두기, 물김치, 겉절이가 전부였다. 여종업원이 별도로 테이블 서빙을 하지 않았다. 손님 알아서 잘라 먹었다. 하지만 2000년부터 일본식 서비스를 원했다. 고기를 뒤집고 자르고 먹는 것까지 챙겨주길 원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신성의 주 단골은 동국무역, 경북광유, 한진섬유 기사, 경북대 교수 등이었다. 주인 장성운씨는 지금껏 잊지 못하는 단골 한명을 기억해냈다. 바로 얼마 전 타계한 백욱기 동국그룹 회장이었다. 70년대 어느 날 전체 직원 200명 회식 장소가 신성으로 정해진다. 비좁아 동국 전직원을 두 파트로 나눠 2일간 고길 구웠다. 가격이 235여만원이 나왔다. 장인 정신을 앞세워 신성은 고기값을 단 십원도 깎아주지 않았고 그것이 장인정신이라 인정한 백 회장은 애써 비서한테 십원짜리를 얻어 칼같이 계산해 버린 것이다. 백욱기의 스케일과 세심함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고 신성측도 여태껏 그 감동을 기억하고 있다.
이춘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