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시인의 시집 '물들다'(168쪽, 9,000원)가 리토피아에서 출간되었다. 전체 작품 67편을 5부로 나누어 수록한 이 시집은 시인의 ‘간절한 치유와 구원의 기도가 지상의 비루한 세계와 맞섰던 뭇존재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한 것이며, 우리시대의 타락하고 부정한 것들에 대한 단죄와 심판을 위한 것이며, 수억만년 우주의 시간을 농락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과 그에 대한 반성’으로 가득하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었음에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워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 생애 가장 큰 죄였음을 이제와 알게 되었다. 다시 옷깃을 여미는 시간이다.’는 말로 자신의 시에 대한 치열한 생각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시집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고명철 광운대 교수는 ‘김영미의 시집 물들다를 통독하면서 새삼 시를 에워싼 근원적 물음들과 마주한다. 자기의 민낯을 대해야할 뿐만 아니라 알몸을 응시해야 하는 저 뻔뻔함과 두려움,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새 탐닉하게 되는 나르시시즘 속에서 시는 특유의 존재 가치를 얻는다.’라는 말로 그의 시가 던지는 시적 질문에 동의를 표시했다.
리토피아포에지․51
물들다
인쇄 2016. 9. 25 발행 2016. 9. 30
지은이 김영미 펴낸이 정기옥 펴낸곳 리토피아
출판등록 2006. 6. 15. 제2006-12호
주소 402-814 인천 남구 경인로 77(숭의3동 120-1)
전화 032-883-5356 전송032-891-5356
홈페이지 www.litopia21.com 전자우편 litopia@hanmail.net
ISBN-978-89-6412-072-9 03810
값 9,000원
1. 약력
김영미 시인은 제주 출생. 제주작가, 문장21 시부문 신인상으로 등단. 에세이스트 수필 부문 신인상. 한국작가회의, 제주작가회의 회원. 시집 달과 별이 섞어 놓은 시간이 있다.
2. 자서
참으로 오소소한 날이다
사는 동안의 얼룩으로
더러는 어지럽고 더러는 무뎌진 채
나의 한부분이 된 무늬들을 꺼내어
업으로 각인 된 것들을 껴입는다.
삶을 한참 건너왔는데도
아직도 알 듯 말 듯 한 것이
오히려 눈만 끔벅거리는 시간들이
더 많아졌다.
가도 가도 다 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으로 지새는 날들이 먼지처럼 쌓여간다.
죽을 것 같은 날들이 있었음에도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그리워해야 할
대상이 없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내 생애 가장 큰 죄였음을
이제와 알게 되었다.
다시 옷깃을 여미는 시간이다.
-찬비 오는 첫날에
김영미
2. 목차
제1부 날개
날개 15
경고 16
귀가 가렵다 18
그러므로 말하지 않아도 20
그냥 22
그림자‧1 23
그림자‧2 24
나무들의 울음 26
낮잠 28
눈 먼 시간들에게 30
대설주의보‧2 33
독백 36
막걸리가 간절한 날 38
매일매일 사랑했다 40
달이 본 풍경 42
제2부 옹이
가을의 직설화법 47
겨울 애상‧1 48
겨울 애상‧2 49
나의 가을 50
산수국 52
무정 53
서귀포에선 밤을 기다린다 54
압화 56
오늘을 그대라 하겠네 57
알작지바닷가의 별들은 58
이별 후에 60
옹이 62
허술한 저녁이 저무는 시간 63
흔적 64
제3부 폭우
산자고 69
먼지가 되어 70
머귀나무 72
목말을 타다 74
바람이 몹시 불어오는 날 76
무연고 묘지에서 78
새의 기억을 기억해야 하는 하루 81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 84
춤을 추자, 삶이 미워질 때 86
배꼽 88
시간을 세는 시간 90
태풍전야 92
폭우 94
순댓국밥집에서의 연가 96
제4부 추상화
어쩌지101
미역이 있는 저녁 풍경102
불면, 꿈을 재단하다105
비가 궁시렁궁시렁 오는 날에108
새벽에 고기국수를 만들어서110
수묵담채112
숨비소리114
장마116
입맞춤118
한 판 승부119
물들다120
한파122
추상화124
화엄126
제5부 폭설
도륙되는 시간들129
그 사내의 이름132
사랑하는 것은 너무 멀리 있다134
사월의 기도136
독거, 삶의 안을 들여다보다139
아카시아 잎142
수다가 있는 우리들의 저녁144
치졸한 시대의 자화상146
환지통148
폭설 2011년 겨울150
해설/고명철153
자연스러움을 넘는 자연스런 삶의 비의
―김영미의 시세계
4.작품
날개
새가 살았을 때는
바람을 품어 허공을 날더니만
새가 죽었을 때는
바람이 불어와 몸을 흔들어도
허공을 알지 못한다
경고
김규동 선생의 경고란 시를 필사하다가
나도 경고를 받는다
펜을 잡은 손이 가늘게 떨리고
글씨는 삐뚤빼뚤
펜 끝이 파르르 성을 낸다
비우지 못한 마음속에
깊이 잠겨있던 이기심이
나를 밟고 일어선다
불가뭄이 들어 메마른 가슴
생각할 줄 모르는 영혼
하나를 향한 거침없는 집착
버려야 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와
깊은 수렁이 되어 발목을 잡는다
펜을 놓고
멍하니 필사하던 종이를 바라본다
늦은 하루가 송곳이 되어
가슴을 겨눈다
귀가 가렵다
바람이 길을 내려는지
바람 부는 날엔 귀가 더욱 가렵다
묵은 침묵을 깨고 달팽이관이 움직인다
고막 속에서 맴도는
모르스부호의 타전, 게슈타포의 걸음, 심장이 떨리는 소리
바람을 타고 오는 고주파의 변형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너무 많다
경직과 전율 사이를 옮겨 다니는
나의 위기와 의지 사이에서
까닭 없이 흔들거리는 가벼운 중심은
합리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생활과 격리된 적분과 미적분을 나누는 통계는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였고
오래된 관습으로 마모되어 설레지 않는 감각 중에
여전히 뜨거움으로 해독할 수 없었던 난제는
세상을 향한 뜬금없는 두근거림
돌아눕지 못하는 한밤의 신들린 고통
나와 다른 것들에 관한 두려움의 보고서
마찰이 마찰과 부대끼는 소리
상처의 이름 뒤에 붙은 단절에 대한 수많은 견해
맞물리지 못하는 생각들의 부정교합
듣고 싶지 않았던 말들의 반란
귀가 가렵다, 바람의 귀가 아프다
달라서 낯설었던 너의 이야기가
귓속을 후벼 파는 밤엔 깨질 것 같은
줄탁에 관한 설레임의 보고서를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