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5월 8일 아침
어버이 날 이라고 카네션꽃이 꽃집 문앞에 줄줄이 모여있다.
코로나로 고생한 흔적인지 과거 그 전처럼
가슴에 카네에션꽃을 단 어른들이 별로 보아지 않는다.
글을 쓰고 싶은 무료함에 짧고 긴 생각 없이 추구한 대로 꽁트를 쓴다.
백수 하셨던 아버지, 어머니 두분 모두 안방에서 작고 하셨다.
병원에는 거의 가시지 않는 아버지는 백내장 수술을 남원 조그만 의원에서 했다.
입원 가료 해야 할 연세인데 집에서 매일 왕복 자동차로 외래 치료를 받다가 실명 하셨다.
수술후 안정이 기본인데, 차를 타지 않해야 하는데 무리를 하셨다.
어두운 세상 보이지 않는 눈이 얼마나 갑갑 하셨을까? 어느 하나 모든 감각 기관이 중요하지만
보고 듯는 눈, 귀 없이는 정상적인 삶을 추구 할수없다.
백수까지 사신다는 것은 운명이고 퍽 고마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버지는 강력한 수단 이신지, 감각적으로 글을 써보시고 셈도 하신다.
그렇게 오육 년 고생 하시다가 따뜻해 지는 봄날에 문을 활짝 열어놓으라 하시고
아들,딸에게 연락하라 하신다.
두 마리 까치가 터를 짓고 살았는데, 까치가 감나무 위에서 급히 소리를 낸다.
10여리 길에 전주 고모가 오시면 항상 까치들이 요동을 치며 알리곤 했었다.
아들들이 급히 모여보니, 몸이 땅 바닥에 딱 붙어진 것 같다고 하신다.
아버지는 누운채로 형제간 우해하고 살라 하신다.
형제 끼리는 듣는 둥 마는 둥
슬피 우는 것은 간호를 열심히 해준 조카 메느리 뿐이었다.
오직 했으면 장수 군수가 친히 이곳에 와서, 장애자인 조카 메느리에게 효부상을 주셨을까?
조선시대 효부상은 100여 년에 한 번쯤 있었고, 비석과 사당을 지어주었다는데
현재는 수년에 한 두번 신문에서 수상하는 것을 본다.
조카 메느리는 할아버지 목욕을 서슴없이 매일 서둘르곤 했다.
비누로 몸 전체를 깨긋이 씻고, 수건으로 딲고 안방으로 모셔 옷 입히고 몸을 비틀면서 씩 웃는다.
"목욕 시키는 것이 뭐 대순가요"
"과거 똥 먹고 벽에 똥 칠 한 어른도 있었다고 하던데 우리 할아부진 정말 얌전해유"
아무튼 장애자가할 수 있는 요령이 대단 했었다.
조카 내외는 많은 수당과 연금을 받고 있다.
작은 아버지들이 예뻐 하니까 매달 송금이 통장에 들어가 그 아들 딸에게로 혜택이 있는 듯 하다.
과거 부모님 모두 안방에서 승천하시었고,
그 전날 초 저녁 마당 뒷 대나무 숲에서 환한 불씨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고
아랫 집 친척 아주머니가 말씀하시었다.
그뒤 어느 날 밤에 대나무 밭에 불이 환해서 가까이 가보니
오래된 대나무 뿌리에서 형광색의 불이 붙어있었다.
사춘 동생과 어둠 속에서 귀신불을 본 것이다.
만저 보니 뜨겁다거나 별 느낌도 없었다. 아마 인의 성분이 빛을 발휘하는 것 이라 생각했다.
선친의 장지는 바라 앞 선산인데 전주는 여기서 딱 사십키로 백리다.
전주 전북대병원 영안실에서 엠브란스가 산서까지 와주었다.
그리고 전북대 장례식장에서 장례식을 치루었었다. 장례식 끝난 뒤
장례차는 고향 동네에 와서 또 한번 절을 하고 장례를 하였다.
미리 준비한 꽃가마와 많은 인파 들이 모여 승천을 기원하며 절들을 했다.
아버지 상여
집신 신고 마른 풀섭에 쑥부쟁이 새싹 길
봄이 온다고 즐거워하는 제비 꽃길
대나무 주렁 잡고 곡하며 가는 아버지 상여길
곡망산천 아버지 상여 가는 길
아버지가 식구라며 생구(生口)라고 같이 살던 곳
큰 암소 그리고 송아지 따라 다니던 길.
그 길은 상여꽃 떨어지는 아름다운 길
대학 등록금 마련해준 고마운 소 음 메~~ 송아지 부르던 길.
형제가 우해하며 살라던 말씀,
모두들 들은 둥 마는 둥 상여길에 돈 뿌리네.
백수하신 길 그 길을 따라
지금 어느덧 지난 세월
우리 모두 그 길을 걷네.
인제 가면 언제오나 북망산천
구름이 오가는 통로 운상(雲上)으로
가마위에서 노래하며 인경소리 구슬프다.
돈만 주려 밟고 가라고 도 주려 밟고 가라고
주첨 주첨 쉬고 또 쉬고,
상여는 돈이 떨어질때 쯤 정오에야 내린다.
모두 엎드려 읍하고
꽃 가마는 불 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