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어부생활로 돌아간 베드로와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와, 베드로에게 그의 사명을 다시 일깨워주시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의 직업이 어부였고 예수님의 다른 제자들 중에도 어부 출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비롯한 몇몇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디베랴 바다, 즉 갈릴리 호수로 갔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몇 시간 동안 고생을 했지만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 때 예수께서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져라.’ 하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했더니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의 기록은 서론에 불과합니다. 이제부터 진짜 중요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1장의 이 부록을 덧붙인 사람은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15~17절을 보겠습니다.
15 그들이 아침을 먹은 뒤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내 어린 양을 먹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16 예수께서 두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쳐라."
17 예수께서 세 번째로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 때에 베드로는 예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세 번이나 물으시므로, 불안해서 "주님, 주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을 먹여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세 번 질문하신 것은 아마도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고 반드시 그렇다고 확증할만한 근거는 본문에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베드로는 계속 같은 대답을 합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세 번째로 주님께서 물으셨을 때는, 베드로가 근심하면서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라고 대답했노라고 본문은 말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세 번이나 반복되는 이 질문과 대답의 차이가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성경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에게 물으셨을 때는 ‘베드로야, 네가 나를 아가페하느냐?’ 라고 물으셨고 이 물음에 대해서 베드로는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아합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아가페하느냐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왜 필레아한다고 대답했을까요?
아가페와 필레아, 둘 다 사랑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아가페는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사랑이 아가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 또한 아가페입니다. 잘난 자식이나 못난 자식이나 다 똑같이 사랑하는 부모의 사랑이 아가페고, 아무리 죄가 많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아가페입니다.
반면에 필레아는 친구를 사랑한다거나, 학문이나 예술을 사랑한다고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조건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니까 사랑하고, 아름답고 예쁘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필레아의 사랑은 매력이 없어지고 조건이 달라지면 언제라도 사라질 수 있는 그런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요구하신 사랑은 필레아가 아니라 아가페였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모든 조건을 초월해서 나를 사랑하느냐? 무조건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계속 필레아한다고 대답합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아가페하지는 못합니다. 필레아할 뿐입니다.’ 라고 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두 번이나 아가페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는 두 번 모두 필레아한다고 대답합니다. 베드로가 꽤 신중해졌네요. 전에는 큰 소리 잘 치던 베드로였는데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나서 정신을 차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요. 예수께서 세 번째 질문에서는 ‘베드로야, 네가 나를 필레아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으로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계속 필레아한다고 대답하는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져주셨다는 얘기입니다. 베드로의 부족함을 아시고, 필레아적인 사랑과 헌신이라도 기꺼이 받으시겠다는 예수님의 뜻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이 본문을 이렇게 자세히 설명하는 이유는, 오늘날 예수님을 위해 평생 헌신하겠다고 다짐하고 목사의 길로 들어선 젊은 목회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목회자가 되신 분들은 본문의 이 예수님 앞에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가페하지는 못할지라도 필레아는 진정으로 하고 있는지 자문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가페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어떻게 하면 필레아의 사랑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요? 이어지는 본문을 보면, 결국 베드로로부터 아가페한다는 고백을 포기하고 필레아의 사랑이라도 받아주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명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을 자세히, 잘 보아야 합니다. 특히나 성서의 한 점 한 획까지도 성령의 감동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목회자라면 더욱 그래야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네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목회자에게 맡겨진 성도들은 예수님의 양이라는 겁니다. 목사들의 양이 아니고요.
목사들이 교인들을 자기 양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중요한 교훈은, 교인들은 목사들의 양이 아니고 예수님의 양이라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주님의 양을 단지 맡았을 따름입니다.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해 달라고 주인으로부터 그 자녀들을 위탁받은 종과 같습니다.
종이 주인의 자녀를 돌볼 때는 주인을 섬기는 마음으로 돌보아야 합니다. 종은 주인의 귀한 아들딸들을 자기 마음대로 대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을 받들어 섬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예수께서 맡겨주신 교인들을 마음을 다해 섬기고 있는지 아니면 그들 위에 군림해서 자기 양으로 만들고 있는지 깊이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양을 먹여라’ 라는 말씀으로 베드로와의 긴 대화를 마치신 본문의 예수께서 베드로의 최후에 대한 예언을 해주십니다. 18~19절을 보겠습니다.
18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너의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것이다."
19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가를 암시하신 것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순교는 서기 60년대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집니다. 네로가 통치하던 시기에 일어났던 로마대화제사건의 방화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목된 후에 로마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정설입니다. 이 기록은 그로부터 이삼십 년 후에 기록된 것으로, 이미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초대교회 내에서 폭넓게 전해진 후의 기록입니다.
순교로 최후를 맞을 것이라는 예언을 들은 베드로가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예수께서 하신 대답을 보겠습니다. 22~23절입니다.
2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23 이 말씀이 그들 사이에 퍼져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였지만, 예수께서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고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씀하신 것뿐이다.
‘요한의 문제는 네가 알 필요 없다’며 마치 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신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부록의 글을 마치고 있습니다. 24~25절입니다.
24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또 이 사실을 기록한 사람이, 바로 이 제자이다.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5 예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어서, 그것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한 책들을 다 담아 두기에 부족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일을 증언하고 기록한 사람이 사도 요한이고 그의 증언이 참되답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의 부록인 21장까지 다 강해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강해를 마치기 전에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들의 공동체 수장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는 건 좋은데, 예수께서 베드로를 무시하고 면박을 주는 듯한 글을 굳이 요한복음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끼워 넣을 필요가 있는 걸까요?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0장도 그렇고, 부록인 21장에서도 그렇고, 어떻게든 사도 요한을 높이려는 요한공동체 사람들의 눈물겨운 노력이 이어졌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지난 2000년 동안 성서무오설에 세뇌되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처음부터 전 인류를 대상으로 쓰여진 완전무결한 책이 아니라, 저자가 살던 시대에 함께 살았던 같은 민족이나 같은 공동체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신앙을 나누기 위해 쓰여진 매우 사적인 책이었다는 사실을 요한복음 20장과 21장이 뚜렷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전 인류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해도 좋은 책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현대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성서비평학이 보편화되었고 많은 사람이 성서의 문자적 노예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건 개신교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 세계의 경우고,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여전히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는 잘못된 교리에 사로잡혀 있는 교인들이 많습니다.
이제는 벗어나야 합니다. 기독교는 객관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에게는 가장 위대하고 소중하며 유일한 종교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종교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불자들에게 부처님은 가장 위대한 성인이며, 유일한 구세주이며, 불교는 가장 위대한 종교일 것입니다. 무슬림에게는 이슬람교가 가장 위대한 종교일 것이고, 힌두교인들에게도 힌두교가 가장 위대한 종교일 것입니다.
그걸 이해하고 인정할 수 없다면 차라리 자기 종교도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종교적 광신자들에 의해 지구마을은 끝없는 미움과 증오와 테러 속에서 신음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