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에 돌아보는 5.18 광주항쟁
우리사회 2013.05.08 14:40 http://blog.daum.net/oursociety/127
박근혜 대통령이 한미정상회담 차 미국을 순방중이다. 대통령의 미국순방은 한국정치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일정으로 평가받는다. 특히나 이번 순방은 이른바 “한미동맹”이 60년을 맞이하는 것을 계기로 더욱 주목받고 있다.
역사적으로 한미관계는 이른바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존재해왔다. 지구반대편의 미국은 유라시아 대륙 진출의 발판이 되는 한반도에 커다란 정치군사적 의의를 부여하고 한미동맹을 통해 동북아에 정치군사적 개입통로를 확보하고 이에 의거해 세계패권을 누려왔다.
한국의 친미보수세력들은 한미동맹을 앞세워 군대를 증강하며 국내 민주주의 요구를 탄압하고, 정치적 반대세력들에게 색깔론 이념공세를 들이밀어 제거해 친미보수세력들의 정치독점을 60년째 이어오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한미동맹은 한국과 미국정치세력들의 동맹이며 우리 국민들의 요구가 배제된 동맹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국민들이 한미동맹의 실체에 대해 비로소 인지하게 된 역사적 사건이 바로 5.18 광주항쟁이다. 광주정신이란 바로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계엄령 확대에 맞서 목숨바쳐 투쟁한 광주시민들의 숭고한 저항의식이다.
광주항쟁을 계기로, 우리 국민들은 미국이 우리 국민들 위한 세력이 아니라 한국정치배들을 위한 세력이라는 점을 똑똑히 인지하게 되었으며 1980년 5월을 계기로 한국사회는 반미투쟁의 무풍지대에서 반미투쟁의 치열한 열점으로 전환되었다.
1. 광주항쟁 경과
5.18 광주항쟁의 직접적 원인은 하루 전 1980년 5.17 비상계엄령 확대에 있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술파티 도중 측근 김재규의 저격에 사망하자 한국사회는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당시 억눌린 민주화의 요구가 봇물 터지듯 분출되었던 이른바 “80년 서울의 봄”이란, 박정희 정권의 유신독재의 온갖 억압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그러나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위시한 일당의 무리들은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도 없이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 등을 체포하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군부권력을 장악한 전두환은 이듬해인 1980년 5월 17일, 시국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일체의 정당 및 정치활동을 금지시키고 국회를 폐쇄했으며 영장없이 학생, 정치인, 재야인사 2699명을 구금했다. 당시 신군부의 군정은 1980년 8월 29일, 전두환이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회에서 대통령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80년 5.18 광주항쟁은 전두환 신군부의 5.17 비상계엄령 확대조치에 맞선 민주화투쟁이었다. 5월 18일을 기해 전국의 대학은 일제히 휴교 조치되었지만 광주 전남대학교 학생들은 교문에서 계엄군과 대치하였으며 300여명의 학생들은 가톨릭회관에서 “5.17 비상계엄령 확대를 규탄하는 집회”를 가졌다.
그러나 비상계엄령으로 광주시내에 주둔한 군부는 집회를 가로막아 이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였다. 5월 18일 오후 4시부터는 공수부대가 집회에 참여한 대학생 뿐만 아니라 일반시민까지 무자비하게 폭행, 살상하게 되자 광주시민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광주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1980년 3월부터 이른바 “충정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1979년 부마항쟁부터 학생시위가 과열될 가능성에 대비해 군부는 강경진압 준비를 이미 마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엄군의 과도한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들과 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5월 19일 오후 집회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증가했으며 20일에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이미 계엄군은 개머리판 가격, 대검을 착검해 갈로 찌르는 등 유혈집단으로 변모해있었다. 급기야 5월 21일, 계엄군은 광주시민들을 향해 무차별 발포를 자행하기에 이르렀고 분노한 시민들은 무장을 찾아 전라남도 화순, 나주 지역에서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해, 시민군을 결성했다.
시민들의 무장은 흉악무도한 계엄군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자위적 조치였다. 청년들은 총을 들고 무장을 하였으며 학생들은 방송을 하고 아주머니들은 주먹밥을 싸 날랐다. 5월 21일부터 광주는 사실상 시민들의 자치상태로 전환되었지만 이 기간 광주시내의 범죄는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
결국 전두환 신군부는 5월 27일, 무려 2만5천명의 계엄군을 광주에 들이밀어 시민군을 진압하였다. 이들은 무려 1만여발의 탄환을 전남도청에 집중시켰으며 마지막까지 항거하던 시민군을 살상하였다.
광주항쟁의 피해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5·18 민주 유공자 유족회와 부상자회, 5·18 기념재단 등 4개 단체가 공식 발표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5·18 사망자는 무려 606명으로, 이 가운데 165명은 항쟁 당시 숨졌고, 행방불명이 65명, 상이 후 사망추정자는 376명 등이다. 한편 광주광역시가 2009년에 5·18 광주항쟁 29주년을 맞아 당시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람을 집계한 결과, 사망자가 163명, 행방불명자가 166명, 부상 뒤 숨진 사람이 101명, 부상자가 3,139명, 구속 및 구금 등의 기타 피해자 1,589명, 아직 연고가 확인되지 않아 묘비명도 없이 묻혀 있는 희생자 5명 등 총 5,189명으로 확인됐다. 2007년 8월 기준, 5·18 피해자로서 사망한 376명 가운데 39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5·18 피해자의 자살률은 10.4%로 일반인의 약 500배에 달한다.
행방불명자 대다수는 계엄군에 의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1988년 광주 청문회 당시 진압군 부대 지휘관들은 암매장이 없었다고 진술한 것과 다르게,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에 의해 2001년 당시 공수부대원이 비무장 민간인을 사살, 암매장했다는 양심선언이 발표됐다. 현재 광주 망월동 묘역에 당시 희생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1980년 5월 25일 AFP 통신은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라고 전 세계에 타전했다. 프랑스 언론사 르 몽드 지의 기자 필립 퐁스는 1980년 5월 27일 아침의 광주는 죽음의 도시와 같았으며 그 때 당시 상황을 학살이라고 증언했다.
전두환 신군부가 자행한 5.18 광주항쟁은 부메랑이 되어 날아왔다. 1988년 시작된 5.18 청문회로 인해 전두환은 대통령직에서 나오자마자 설악산 백담사로 쫓겨 들어가는 신세가 되었으며 정호용, 장세동을 비롯한 신군부 핵심일당들은 구속되었다. 1996년, 결국 신군부를 주도한 전두환, 노태우는 체포, 구속되었으며 12.12 군사쿠데타와 5.17 비상계엄확대 등의 죄명으로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22년 6개월 형을 언도받았으며 각각 2205억원과 2628억원의 추징금을 선고받았다. 전두환, 노태우는 이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 17년형으로 감형되었다. 비록 1997년, 김영삼 대통령이 이들을 사면하면서 이들에 대한 사법처리가 집행되지는 못했지만, 역사는 영원히 이들 두 쿠데타 주동자들을 전직대통령이기 이전에 군부쿠데타 주동세력으로, 시민학살자로 기록할 것이다.
2. 광주항쟁 당시 미국의 역할
주목할 점은 광주항쟁의 과정에서 미국의 역할이 새롭게 드러났다는 점이다.
미국은 민주화 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전두환 신군부의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사전에 승인했다.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는 계엄령이 선포되기 전인 5월 8일, 한국 내 정세를 논하기 위해 전두환과 최규하를 만나기 직전에 워싱턴으로 다음과 같은 외교 전문을 보냈다.
“한국 정부가 군대를 투입하는 것에 대해 미국 정부가 반대한다는 암시를 주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워싱턴의 답장 또한 충격적이다.
“미국 정부는 법과 질서유지를 위한 한국 정부의 비상계획에 반대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주한 미군사령부는 포항의 해병 1사단이 대전과 부산지역으로 이동할 가능성에 대해 경각심을 갖고 있으며 해병 1사단은 한미연합사 작전통제권 아래 있으므로 병력이동에는 미국 당국의 승인이 필요하다. 아직 한국 군부로부터 병력 이동에 대한 아무런 요청이 없지만 만일 요청이 오면 미군사령부는 동의할 것이다.”
광주 항쟁이 5월 21일을 기점으로 무장항쟁의 단계로 들어서자 미국은 다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5월 22일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 소집하여, 미 국무장관 머스키, 국방장관 브라운, 안보담당보좌관 브레진스키, 중앙정보부 국장 등이 참가한 가운데 광주 진압작전을 의결하였다고 한다. 미국은 이 계획에 따라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 있는 E-3A 공중경보 통제기 2대, 일본 요코스카와 필리핀에 각각 정박되어 있던 항공모함 미드웨이호와 코럴시호를 한국으로 급파하였다.
광주 진압 작전에 동원된 공수부대의 이동을 승인해준 결정적 인물은 주한미군 사령관 존 위컴이다. 아래는 존 위컴의 조치에 대한 198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 보도내용이다.
“존 위컴 주한유엔군 및 한미연합군 사령관은 그의 작전지휘권 아래에 있는 일부 한국군을 군중진압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고 이에 동의했다.”
당시 주한미군사령관이었던 위컴은 베트남전 참전을 계기로 전두환과 가까운 사이였다. 1980년, 주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위컴은 “한국인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 그를 따른다”는 망언을 남겼다.
3. 돌아보는 5.18
5.18 광주항쟁 당시 신군부는 미국측과의 긴밀한 조율 아래, 항쟁을 진압해나갔다. 그런 면에서 5.18 광주항쟁은 국민들에게 한국사회의 민주화는 미국의 정치개입을 끊어내어야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는 심각한 교훈을 알려주었다.
한미동맹의 그늘 아래에서 미국이 전두환 신군부를 지지하는 이상, 광주의 저항은 피의 살육으로 귀결되었으며 수백명이 목숨을 잃고 수천명이 오늘날까지 심각한 외상후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학생들은 80년 광주를 계기로 한미관계를 다시금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1982년 3월 18일, 부산지역 대학생들이 부산 미문화원을 점거, 방화하였는데 이는 한국사회에서 반미투쟁의 첫 신호탄이 되었다.
1985년 5월 23일에는 서울 지역 5개 대학 학생 73명이 소공동 소재 미국 문화원 2층 도서관을 기습 점거했다. 이들은 당시 주한 미대사 리처드 워커(Richard L. Walker)와 면담을 요구하며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광주 학살 책임지고 미국은 사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5.18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을 미국이 묵인한 데 대해 공개사과하고 한국 군부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철회하라고 요구했다.
1980년 광주항쟁을 계기로 한국사회 진보의 화두는 민주주의, 조국통일과 더불어 정상적 한미관계수립이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정상적인 한미관계를 요구하는 청년학생들은 급속도로 늘어나 1987년 전국대학생연합(전대협)을 결성하였으며 이들은 1993년 한국대학생총학생회연합(한총련)으로 확대, 강화되어 나갔다.
한 나라가 대외자주적 정책 없이 국제사회에서 올바른 위상을 정립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광주 시민들은 전두환 신군부의 참상에 분연히 떨쳐나섰다. 수많은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이들의 위대한 장거로 인해 한국사회는 비로소 30년을 이어오던 한미동맹의 위선적 실체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대등한 한미관계의 수립을 진보운동의 전면에 제시할 수 있게 되었다.
자주없이 민주없고 자주없이 통일도 없다는 것은 1980년 광주항쟁의 위대한 교훈이다. 국가수반이 재벌총수들까지 망라해 요란한 행차를 벌이며 더 강화할 여지도 남아있지 않은 한미동맹을 60년째 강화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다.
한미동맹을 생명선으로 간주하는 현 집권세력에게는 지금까지 한미동맹이 난세의 구세주였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시대가 변화하였다. 미국의 일방주의 패권정책은 세계 도처에서 깨져나가고 있으며 특히나 미국과 군사적 대치를 60년째 이어오고 있는 북한은 핵무장력의 확대를 공개천명하며 북미대결을 총결산하겠다는 태세로 나서고 있다.
분명한 사실은 2013년, 현 한반도 정국이 격동의 시기라는 점이다. 격동의 시기는 곧 위기이자 기회인 셈이다. 국민들은 33년 전, 1980년 광주항쟁이 남긴 피의 교훈을 가슴깊이 새겨야 한다. 자주없이 민주없다는 광주의 교훈은 오늘날, 한국사회 발전에서 대등한 한미관계의 정립이 얼마나 사활적인 문제인가 여실히 보여준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국민들은 80년 광주항쟁의 진실을 알고, 민주화를 향한 희생자의 투혼에 경의를 표하며 한국사회의 핵심사안인 대등한 한미관계와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길에 역사적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