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쟌 그레스햄 메이첸(John Gresham Machen;1886-1937)
메이첸
웨스트민스트 신학교 창설자 그레함 메이첸 박사는 총각으로 일생을 지내 자손이 없다. 하지만 그의
영적 자손은 미국 도처에 깔려 있다. 그래서 20세기 미국 보수 복음주의 개혁신학자들의 스토리는 메이첸의 영적 아들들의 스토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 이첸은 존스 홉킨스 대학교와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독일에서도 공부했다. 그곳에서 독일 성경 비평 신학자들의 자유주의 성향, 특히 Wilhelm Herrmann에 충격을 받았다. 프린스턴에서 가르칠 때 찰스 핫지, 워필드, 게르할더스 보스와 같은 불굴의 보수신학자들이 가르친 고백적 장로교리를 강력하고도 설득력 있게 방어했다.
메이첸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론', '바울 종교의 기원'에서 신약의 역사적 진정성을 논하며 독일 성경 비평가들을 공격한다. 1923년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출판하면서 미국과 독일 비평학에서부터 배태한 자유주의와 모던니스트들을 공격한다. 자유주의가 잘못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라는 것. 신론, 인간론, 성경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에 있어서 자유주의와 기독교는 전혀 반대라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교리가 경험보다 앞서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구원하고 상관없는 아버지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인간들의 증거일 뿐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단지 도덕적 본으로 삼을 분이란다. 구원이란 도덕적 본을 따르기만 하면 된단다. 교회는 이러한 자유스런 복음을 정통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프린스턴 신학교가 PCUSA 총회 산하 신학교였다. 1928년 총회가 당시 교회들이 수용하고 있는 폭넓은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신학교를 재편하기로 결정한다. 물론 메이첸이 저술과는 상반되는 자유주의 내용을 수용하는 거다. 이에 대응하여 메이첸이 신학교를 떠나면서 동료 교수 Robert D. Wilson, Oswald T. Allis와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운다. 곧 젊은 교수인 R. B. Kuiper, Ned B. Stonehouse, Allan A. MacRae, Paul Woolley, Cornelius Van Til, John Murray도 합류하게 된다. 새 신학교 웨스트민스터는 고백교회 장로교, 즉 Old Princeton 전통을 잇는 것이 메이첸의 뜻이었다.
1936년 당시 장로교 해외 선교부의 독립 이사회에 간여했다는 이유로 교단이 메이첸을 정직시키자 그는 PCUSA 교단을 떠난다. 메이첸과 같이 했던 이사들은 자유주의와 일체의 타협 없이 성경적인 복음 증거를 한다고 믿을만한 자를 선교사로 보냈었다. 메이첸은 교단이 내린 정직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탈퇴하여 새교단, OPC를 창설한다. (원래 PCA였으나 그 이름을 법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보수 개혁주의자들 중 많은 이들이 PCUSA에 남아 있었던 관계로 메이첸이 주도한 운동은 미국내 개혁진영 안에서도 숫자상 아주 미미했었다. 전통은 더 있지만 작은 교단인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RPCNA), 스코틀랜드 언약파 후예들의 Associate Reformed Presbyterian Church (ARP)에 속한 이들도 메이첸 운동에 꽤 있었다.
미국 내 중요한 날개를 담당하는 화란 후손들의 칼빈주의자들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 (RCA)는 1626년 New Amsterdam (나중에 New York)을 세운 뿌리이기도 하다. Christian Reformed Church (CRC)는 1822년 RCA에서 분리한 교단이고 당시 상당한 기간 더 보수적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하지만 지난 40년 사이 성경무오설, 여성안수, 동성애 문제로 교단 내 몸살을 앓다가 보다 보수적인 인사들이 탈퇴하여 새 교단 Orthodox Christian Reformed Church (OCRC)과 the United Reformed Church (URC)을 만들었다.
PCUSA 안에 남아 있던 보수적 인사들과 함께 이런 스코틀랜드와 화란 계통이, 각기 소속된 교단 신학교를 지지하기는 했어도, 메이첸과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하는 일을 주목하고 존경하게 되었다.
독 일 계통의 작은 개혁 교단, Reformed Church in the U. S. (RCUS)은 목사 후보생들을 훈련하는 학교로 수년 동안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택했다. 또 개혁주의 성향을 가진 회중교회, 독립교회, 성공회교회, 침례교회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웨스트민스터에서 훈련을 받으며 그 영향을 받아왔다.
메이첸이 이탈한 PCUSA와 닮은 남부지역 장로교 Presbyterian Church U. S. (PCUS) 교단에 분리가 있었다. 본질상 메이첸 때와 같이, 자유주의 신학 문제 때문에 분리가 일어나, 1973년 PCA가 탄생한다.
물론 메이첸 운동이 이 모든 개혁주의 진영을 대변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지대한 영향을 끼친 데는 그 운동이 신학적으로 선도했기 때문이다. 메이첸 자신이 미국과 스코틀랜드와 화란 전통을 웨스트민스터에서 묶으려고 노력했었다. 1세대 교수인 R. B. Kuiper, Ned Stonehouse, Cornelius Van Til가 모두 화란 계통의 CRC 출신이고, Geerhardus Vos도 비록 프린스톤에서 가르쳤지만 웨스트민스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스코틀랜드 계통으로는 John Murray가 1967년 은퇴하기까지 가르쳤다. 머레이는 비록 OPC였지만 RPCNA 같은 스코틀랜드 언약파의 영향을 받은 미국 교회에 독특한 면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예배 중 시편 구절만 찬양에 사용했던 것이다.
메이첸 운동에 신학적 다양성이 또 있다. 아마 메이첸이 의도한 바 같은데, Allan A. Macrae는 전천년론자로서 나중에 New Scofield Reference Bible (1967) 편집 책임을 맡기도 했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은 세대주의 신학의 핵심 출판물이다. Paul Woolley도 전천년론자이지만 세대주의에는 냉담했다. 메이첸은 자신이 후천년론자인데, 구 프린스턴 교수 대다수의 입장이기도 하다. 머레이는 나중에 후천년론으로 돌아섰지만, 나머지 웨스트민스터 교수들은 대부분 무천년론자들이었다. 전천년론자들은 메이첸의 독립선교부 이사들이었는데, 고백적 장로교회주의와 폭넓은 미국 복음주의 흐름과 연계자들로서 역할을 한 셈이다.
메이첸 운동은 출신과 교리에서부터의 다양성은 웨스트민스터와 OPC를 아우르는데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웨스트민스터가 개혁진영 단체와 복음주의에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구 프린스턴이야말로 저들에게는 신학적 선도자였던 거다. 심지어 칼빈주의자가 아닌 사람들도 워필드, 윌슨, 메이첸의 저술을 성경 권위와 무오 방어에 학술적으로 사용했다. 달라스 신학교의 Lewis Sperry Chafer는 메이첸과 교류하면서 두 신학교가 긴밀한 공조를 원했다. (메이첸은 원하지 않는 교류였지만). 웨스트민스터는 또 CRC 내 보수파 (나중에는 OCRC, URC), Reformed Episcopal Church, RPCNA 같은 스코틀랜드 그룹, PCA, Reformed Baptist 교회와 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웨스트민스터 출신 교수들이 커버넌트, 고든-콘웰, 트리니티, 비블리컬, 미드아메리카, 리폼드
에피스코팔에서 가르쳤다. 풀러 신학교가 1947년 개교할 당시 커리큘럼은 웨스트민스터의 그것과 흡사했고, RTS도 1966년 미시시피 잭슨에서
문을 열 때 커리큐럼과 신학 기조와 교수 구성에 있어서 웨스트민스터에 진 은혜를 인정하고 있다.
메이첸의 웨스트민스터가 큰 신학교는
아니지만 20세기에 보수적 개혁진영 신학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할 수 있다.
메 이첸이 1937년 폐렴으로 죽기 전에 이미 새 교단의 분열 조짐에 실망했었다. 메이첸의 후예들은 신학적 투사였던 거다. PCUSA의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싸움이 끝났을 때 다른 신학 논쟁거리를 찾은 거다. 지금까지도 그러한 메이첸 운동 안에서 그 싸움은 진행형이다. 이것이 20세기 미국 개혁신학의 스토리다.
메이첸의 생애와 사상
1.메이첸의 생애
쟌 그레스햄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은1881년 6월 28일 사회적 변 혁이 활발하며, 동시에 아카데믹한 도시인 볼티모어의 한 칼빈주의의 문화를 소유한 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를 통달했을 정도로 학문적이었다. 당시 유명한 존스 홉킨스 대학에 입학하여 수학하게 된다. 그는 학문뿐아니라 여러 동아리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후에 그는 프린스턴에 가서 개혁주의 신학의 정수를 배우게 된다.
그의 역작 "예수 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 of Jesus)를 통해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이는 그로 하여금 외국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말부 르크 대학교(Marburg
University)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다. 여기서 그는 빌 헬름 헤르만(Wilhelm Herrmann) 교수에 의해 지도를 받지만, 신앙의
기저를 흔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런 자유주의의 강한 도전은 그로 하여금 그의 인 격을 강철과 같이 만드는 가혹한, 그리고
동시에 유익한 시험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나, 결코 한 인간으로서 소외된 삶을 살지는 않 았다. 그는 학생들과 더 없이 친했으며,
항상 그들과 인간적이고, 동시에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그는 인간답고 관대하였고, 모든 일에 적극적인 정열을 지녔 다. 그러나, 복음에 대하여서
곁길을 걷는 것에 대하여서는 아주 단호했다. 항 거해야 할 시기에 침묵하는 것을 오히려 그는 죄악이라고 외쳤다.
후에 그가 총회의 선교부에 대하여 대한 태도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메이첸은 그의
적수들의 공격에 대하여서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학문적 자 세는 지양하였다. 그들의 이론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수긍하였으며, 논리성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신학이 왜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지를 논리 적으로 반박하였다. 헬라어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철저한 학문 적
진지성을 그는 지녔다. 소위, '메이첸 논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미국 교회는 신학적 퇴색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23년
120명의 목사들이 서명한 '오번 선언 서'(Auburn Affirmation)이다.
성경 무오의 교리가 오히려 성경의 권위를 손상 시켰다는 지적을 포함한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물결에 대하여 미국 장로교회 는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으며, 절대 다수는 화합과 타협을 목표로 하여 침묵하였고, 일부 개혁주의 전통의
목사들은 분파주의로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자유주의자들의 모임이 선교 탐방 후 작성한 보고서인 "선교를 다시 생각한
다"(Rethinking Missions)과 재능있는 중국 선교사인 펄벅 여사의 등장은 당 시 복음주의계를 더욱 혼란스럽게 하였다. 1933년
1월 23일 메이첸은 뉴 브룬 스윅(New Bruswick) 노회를 통해 총회를 질타하는 결의문을 제출한 바 있다. 이것은 다원주의 신학에
대하여 성경적 가치관과 가르침을 고수하자는 내용이 었나, 곧 거부되었다. 자유주의자와 화합을 선호하는 무관심주의자들의 연합 전선 아래,
보수주의자들의 주장과 신학은 가두어졌고, 총회에서 제대로 표현 되지 못하였다.
'성경적 가르침에 충실하자'는 취지로 메이첸과 몇 명의 동료들은 1933년 6 월 27일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Independent Board for Presbyterian Foreign Missions)를 발족하게 된다. 그러나,
다음해 5월 총회는 이들 모임의 해산을 경고하였다. 메이첸은 그릇된 총회의 선교부의 자세를 수정하지 않는 것이 잘 못된 것이지, 자신의 선교부
조직은 정당한 것이라 주장한다. 트랜톤의 제일 장로교회에서 1935년 2월부터 3월까지 메이첸에 대한 심리가 있었다.
재판국 은 절대로 총회나 선교부의 비성경적 정책에 대하여서는 논박하는 것을 금지 하였고, 단지
메이첸의 총회의 결의에 불복하는 것에 대하여 변론하는 것을 메이첸 변호인단에게 요구하였다. 곧, 교리적인 논점은 배제하고, 정치적은 부 분만
부각시켰다. 1936년 메이첸은 정죄되었고, 그와 동료들은 교단을 조직하게 된다. 후에 교 단 명칭은 정통장로교회(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라 정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 메이첸 목사는 소천하게 된다. 2.메이첸의 사상 그의 신학은 학문적
진지성과 더불어 배타성을 공유하고 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의 논문 "예수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 of Jesus)을 보면, 그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언급한 탄생 설화에 대하여 결코 무관심하지 않았다. 예 수 탄생설화가 유대교적이든, 이교적인지 간에 그는 이런 도전에 대하여
주의 깊은 연구를 하였다. 그리고 신비로운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성경기사가 신 뢰할 수 있는 것임을 밝히고, 교회 신앙의 정당성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그는 유대와 이방 탄생 설화의 기원을 밝힘으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신학적으로 조명하였던 것이다. 메이첸은 국가나 지방 정부의 정치에
대하여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교회가 앞장 서는 것은 배제하였다. 사회적 악에 대항하여 싸워야 하는 사람은 교회가 아니라, 바로
시민으로서의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교회가 스스로 관료주의의 늪에 빠질수 있기 때문이다.
1933년 1월 뉴 브룬스윅(New Brunswick)을 통해 총회에 헌의한 결의문은 그의
사상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해외선교부에서 사람을 뽑을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을 보면, 성경의 진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대속적 죽음,
육체적 부활 등과 같은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고수할 것 등이었다. 이러한 그의 헌의 안은 그가 교리적 보수에 민감하였음을 보여준다.
반면, 이것은 그가 처한 시 대적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기보적 기독교적
전제를 다시 언급해야만 하는 시대적 상황속에서 자유주의 신학에 교회가 심각하게 침탈당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얇은 본 저서를
통해서 그의 사상의 정도를 알 수는 없지만, 자유주의 신학 사조의 물결 앞에서 복음주의(개혁주의적)자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칼빈주의 가정에서 자라나고, 그리고 구프린스턴에서의 개혁주 의 신학의 학습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
메시지의 독특성을 중요시하게 만들었 으며, 인간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릇된 신학에 대하여서는 전투적 자세를 추구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적
전제를 알 수 있다.
기독교, 더 나아가 예수 그 리스도의 우월성과 그를 믿는 공동체의 대표적 고백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으 며, 이를 위해 보다 쉬운 방법인 화해와 타협을 거부하고 '분립'이라는 힘든 길을 걸어갔던 이 모든 그의 걸음들을 통해 그의 사상의
진실성은 더욱 확연 히 드러나게 된다. 메이첸의 사상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며, 그 가르 침은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도전을 주고 있다.
http://cafe.daum.net/withhis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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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Machen 박사가 Princeton을 등지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게 된 배경
2.
Machen 박사가 한국 신학에 미친 영향, 및
3. Machen 박사가 거부한 신정통주의의 문제점
1. Machen 박사가 Princeton을 등지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게 된 배경: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는 당시 미국 북장로교 즉
UPCUSA 의 총회의 결의로
세워져서 100여년간 장로교의 어머니 같은 구실을 하면서 Charles Hodge, Archbald
Alexander, Benjamin B. Warfield 같은 대학자들의 손으로 정통적인 개혁주의 신앙을 잘 지켜내려 왔지만 독일에서
종교사학파 (Religionsgeschichtliche Schule) 의 바람이 불어오고 영국에서 Deism (자연신교) 가 들어오고
18세기의 계몽주의 (Enlightenment) 의 합리주의 (Rationalism) 과 경험주의 (Empiricism) 이 미국에 들어오고
New York 에 있는 Union 신학교에 Charles A. Briggs 교수가 독일 Berlin에서 신 신학을 공부하고 들어와서
“성경해석에는 반드시 그등비평을 도입해야 한다" 고하는 취임 설교를 하므로 이를 수용하자는 학교측과 그를 해고하라는 노회와의 충돌을 거쳐서 결국
학교가 노회를 탈퇴하는 것으로 논쟁이 일단락되었는데 이와 같은 Union 신학교의 처사는 미국의 지금까지 건전하던 신학교에 직접간접으로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Briggs 교수는 Union 신학교에서 동양어를 가르쳤습니다. 동양어란 성경원어를 말합니다.
Princeton 신학교가 세워지게 된 것은 1812년 인데 당시 UPSUSA 교단 총회에서 세 가지 안을 내 걸고 신학교 설립을 논의하였는데 1.미국을 남북으로 나누어 남에 한개 북에 한개 도합 2개를 세우자는 안, 2. 각 노회별로 한 개씩 세우자는 안, 그리고 3. 중앙에 강력한 신학교 한개를 세우고 모두가 지원하자는 안 등 셋이었는데 만장일치로 중앙에 강력한 신학교 한개를 세워 모두가 지원하자는 결의로 세워진 것입니다. 처음서부터 Princeton 은 우수한 신학자들을 확보하고 총회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개혁주의 신학을 잘 고수해 나갔자민 전에 언급한대로 독일과 영국에서 자유주의 바람이 불어와서 Union 과 Princeton에 상륙하여 비상이 걸린 미국의 근본주의 신학자들은 1910년에서 1915년까지 5년간 James Orr (Scotland 출신 개혁주의 신학자로, 유명한 국제 표준 성경 백과사전 ISBE, 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 전 5권을 편집한 분) 이 편집장이 되어 Fundamentals (근본주의 교리) 라는 12권 짜리 책을 발간하여 신 신학과 싸우며 성경대로 믿자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글을 실었는데 여기 Fundamentals 라는 책에 기고한 분들은 미국과 카나다에 있는 여러 교파출힌 학자 37명 이었는데 반드시 모두가 개혁주의자는 아닙니다. 개중에는 아르미니안 주의를 믿는 감리교도 있었습니다. 세대주의를 믿는 분도 있었으며 성공회 목사도 있었고 물론 장로교 목사도 있었고 침례교 목사가 제일 많았습니다. 초기의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침례교 출신 목사들이 제일 활발하게 일선에서 자유주의를 견제하며 싸운 것이 사실입니다.
<Fundamentalism> 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침례교 목사인 Curtis Lee Laws 라는 분으로 그는 침례교 잡지인 <Watchman Examiner> 에서 1920년에 근본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했다. 그 무렵 같은 침례교 목사인 John Roach Straton 은 새로운 신문을 발행하면서 그 이름을 <The Fundamentalists> 라고 명명했는데 이 때문에 <근본주의> 는 이제 도처에서 <성경을 성경대로 바로 믿자>는 사람들 속에서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근본주의와 자유주의의 싸움은 치열할 수 밖에 업었습니다.
<Fundamentals> 라는 책은 1910년부터 1915년 어간에 미국과 카나다
등지에서 300 만권 이상 무료로 배부되었습니다.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에게 우선 배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교리가 서로 다른 여러 교파의 목사들이
글을 기고하여 만든 까닭에 개혁주의를 지켜 내려오던 전통은 무너지고 단지 “보수” 라는 분모에 모든 것을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근본주의가 교리의 혼란으로 인하여 문제가 생기게 되는 결과를 야기한 것입니다. 근본주의자 중에는 아르미안주의자와 또 그 때 막
시작된
세대주의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세대주의자도 근본주의자들인 것입니다.
점점 자유주의가 인기를 얻게 되자 1920년에 UPCUSA 교단 총회에서는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은
반드시 의무적으로 다음 다섯 가지 교리를 믿어야 된다는 결의를 했는데 그 다섯 가지란,
1. 성경의 무오설,
2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
3.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
4 예수님의 이적의 역사성, 그리고
5. 예수님의 육적 부활 등 다섯 교리입니다.
모든 목사 후보생들을 반드시
이상 다섯가지 교리를 반드시 수용하고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는 결정입니다.
자유주의가 급속도로 펴져나가는 가운데 1922년 5월 21일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침례교 목사로서 The First Presbyteian Church of New York (뉴욕 제일 장로교회) 라는 장로교를 목회하던 Harry Emerson Fosdick 이라는 목사가 주일 아침 행한 설교 "Can the Fundamentalists Win?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수 있는가?)“ 이 도화선이 되어 PCUSA 교단 총회는 바싹 긴장하여 1920년에 결의한 근본주의 5개 교리를 1923년에 다시 재확인하여 반드시 총회의 이 결정을 준수하도록 강요 했습니다. 또한 Fosdick 목사의 그 설교는 그로부터 2 년후 자유주의자들에게 용기를 주어 Auburn Affirmtion (오번 선언)을 발표하는 계기가 되기도했습니다.
참고로 Fosdick 목사가 가르친 내용은 다음의 세 가지 비성경적 교훈입니다. 1. 성경의 무오설 은 믿을 수 없다. 2.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의 본질적 교리가 아니다, 그리고 3 예수님의 문자적 재림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며 재고해야한다
Machen 박사는 옛 프린스톤 신학교 (1920년대 이전을 <Old Princeton> 이라고 하고 그 이후를 <New Princeton> 이라고 하는데 자유주의가 감염된 이후를 말함) 에서 신약을 가르치던 신약학 교수 이며 자유주의가 UPCUSA 교단에 침투하여 개혁주의 사상이 아닌 인물들이 대거 외지 선교부에 들어와서 외국에 나가서 자유주의를 전파하므로 이에 격분하여 당시 외지 선교부장이던 그가 자유주의 목사들을 막기 위해서 총회의 허락도 없이 독자적으로 Presbyterian Independent Board of Foreign Mission (장로교 독립 선교부) 이라는 선교기관을 별도로 조직하여 선교에 힘을 썼는데 당시 북 장로교가 이를 못 마땅하게 여겨 그 단체와 손을 끊을 것을 Machen 박사에게 명령했으나 이를 단연히 거부한 John Gresham Machen 박사는 UPCUSA (미국 북 장로교)를 탈퇴하여 1933년 <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를 창립했으나 이번에는 그 교단 이름이 <UPCUSA> 와 유사하다고 하여 피소되어 소송사건에서 패소하여 그 이름을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OPC 미국 정통장로교단) 으로 바꾸었고 1936년에 정식으로 교단 창립 예배를 필라델피아에서 드리게 되었습니다.
미국 정통 장로교단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OPC) 가 창립되기 몇 년전인 1929년 Machen 박사와 그 외에 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쟁쟁한 Princeton 신학교의 elite 교수들이 모두 프린스톤 신학교를 떠나, 거기서 약 40 마일 서편에 있는 Pennsylvania 주 Philadelphia 시 중심부인 Pine Street 에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창립했고 초대 교장에 John Gresham Machen 박사를 임명했습니다. 그 때 Princeton 신학교 교단을 떠나서 Westminster 신학교의 교수가된 교수들은 조직신학에 John Murray, 변증학에 Cornelius Van Til, 신약에 Ned B. Stonehouse,구약에 Oswald T. Allis, 그리고 Edward Jseeph Young, 교회사에 Paul Wooley 등이 었습니다.이런 분들이 웨스트민스터를 이끌고 나갔지만 지금은 모두 하늘 나라에 가셨고, 근자에는 Gaffin교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젊은 사람들로 채워지게 되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새로 세워진 신학교는 그 후 귀신이 나온다고 알려져 (haunted house) 싸게 내놓았던 필라델피아 근교의 어느 부자의 큰 저택을 아주 헐값에 구입하고 이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2006년 현재, 학생수 850 명이 공부하고 있고, 교파에 가입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필자가 1990-1994년 이사회에 교단 대표로 참석하여 관찰해 본 바로는 그 학교의 운영은 주로 bequeath (자선 기관에 바치는 개인 유산) 으로 운영되어 갑니다.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는 이 답변을 쓰고 있는 필자가 근 20년 가까이 오랫동안 공부하면서 학교를 위하여 몸바처 목회자 연장교육과 당시 교장 자문으로 일한 곳이라서 누구보다 자세히 이 학교와 프린스톤 신학교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고 또한 필자의 활동무대가 주로 OPC 라서 미국 정통장로교단에 대해서도 정확히 설명할 수 있으며 지금도 필자의 신학교 동창생들은 대부분 OPC 에 소속되어 있고 OPC 는 오늘 가장 성경을 신실히 믿고 세계에서 가장 개혁주의를 신실하게 전하는 몇 안되는 개혁주의 교단입니다. 미국 정통장로교단 (OPC, Orthodox Presbyterian Church) 는 <참 교회의 세 가지 표지> 인 <바른 말씀의 선포> <바른 성례집례> 그리고 <바른 권징> 등이 조금도 차질없이 그대로 행해지고 있으면서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웨스트민스터 신조) 를 교리로 받아 드리는 진정한 개혁주의 교단이라서 필자가 늘 그 교단과 교류하고 있고, 본 선교회도 OPC 의 신앙노선을 지지합니다. 21세기 교회중 성경을 바로 가르치고 특히 <권징> 을 바로 행하는 교단은 거의 없는 것이 사실이고 보면 OPC 나 RCUS (Reformed Church in the United States) 같은 교단이 우리 주위에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2. Machen 박사가 한국 신학에 미친 영향:
한국에는 근본주의 신학이 <보수주의 신학>을 대변할 정도입니다. 지금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 Machen 박사의 Fundamentalism (근본주의) 와 Carl MacIntire
박사의 신근본주의는 성격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후자의 경우는 <근본주의 5대 교리> (위에 언급한 1920년의 UPCUSA 교단
총회의 결정사랑 다섯 가지 교리 참고, 이것을 <근본주의 5대 교리> 라고 함)에 집착하면서 주초문제를 중요시 합니다. 그리고 사회를
경원시 하는 경향입니다. 사회는 전도의 대상일 뿐 세상일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한국의 “보수” 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즉 Machen 박사의 경우는 단지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싸우면서 개혁주의를 고수하자는 입장으로 교리의 혼합이나 타협이 없이
수수하게 개혁주의를 지켜 나가자는 것입니다. 1948년에 남가주의 Fuller 신학교의 교장이던 Harold Ockenga 박사를 중심한
<신복음주의> 가 대두한 것은 바로 이런 <신근본주의)가 너무 진부하여 <근본주의 5대 교리> 에만 집착하여 연구
활동이 빈약하여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운동으로 그뒤 Edward Carnell, Carl Henry, Ronald Rash, 등으로 맥을
이어가지만 여기서는 깊이 언급하기에 적당치 않습니다. 다만 이들이 성경의 영감은 인정하지만 무오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경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생각입니다.
Machen 박사가 구체적으로 한국에 나가서 어떤 일을 했는지는 필자가 잘 모를 일이지만
한국에
펴저 있는 근본주의 사상은 Carl MacIntire 박사에 기인하는 <신근본주의> 영향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Machen 박사는 Westminster 의 교장으로 있으면서
많은 우수한 한국인 제자들을 길러냈습니다. 그중에 아마도 한국 신학계의
거성이신 박윤선 박사님을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3. Machen 박사가 거부한 신정통주의의 문제점:
문제가 한 두가지가 아닙니다. 신정통주의의 교리와 Machen 박사가 믿는 개혁주의는
하늘과 땅만큼 서로 다릅니다. 신정통주의의 발단은 구라파에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합리주의 (Rationalism) 과
경험주의(Empiricism) 이 모든 강대상을 점령하고 있을 때
스위스의 젊은 신학자 Karl Barth (1886-1968) 는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성경을 성경으로 풀이하려 했지만 워낙 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세어서 자유주의자들의 입장도 고려하고
또 당시의
합리주의를 탈피하여 성경적인 교훈을 하다 보니 결과는 완전히 성경적인 보수 신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도 아니고 정통주의는
정통주의로되 새로운 정통주의 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Barth가 1919년에 펴낸 로마서 주석도 상당히 문제가 되지만 1932년부터 쓰기 시작한 그의 Church Dogmatics (교의학, 敎義學) 에서도 그의 다른 신학 사상이 잘 나타납니다. 물론 이 책은 그가 죽을 때 까지도 완성하지 못한 8,000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이지만 그 교의학 에서 그는 자연계시를 부정하고,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 witness to the revelation“ 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Barth 와 오늘의 신비주의는 적어도 이런 면에서 일맥상통한다. 객관적 계시의 말씀을 믿지 않고 주관적인 재해석을 믿습니다.
Machen 박사는 개혁주의 신학의 기수입니다. Princeton 은 그가 떠난후 많이
자유화되었지만 그가 세운 Westminster 는 1929년 이래 오늘까지 77 년간 개혁주의 신학의 보루로 전세계에 우뚝서 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교리인데 이는 비단 그 옛날 Princeton 과 Westminster 의 개혁주의 신학의 기수엮던
Machen 박사만이 아니라 본 튤립 교육 선교회//튤립 신학 연구원에서도 수용할 수 없는 극히 비성경적인 교리들입니다.
1. Barth 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이 아니며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증거에 불과하다> 는 이론을 펴 나갑니다. 성경의 권위를 정면으로 공격하며 성경의 완전 영감설을 부인하는데 빨트 신학의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의 권위 문제입니다.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면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에 대한 도전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선지자직분> 에 도전하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것은 John Gresham Machen. 박사가 쓰신 Christianity and Liberalism, 기독교와 자유주의, (Eermans 출판사, 1924)에서 하시는 말씅이면 이 질문 응답자도 동감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주신 특별 계시의 말씀 자체이며 빨트가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증거> 가 아닙니다. 여기에 개혁주의와 신정통주의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Machen 박사도 이 점은 수용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신정통주의는 성경을 액면 그대로 성경으로 받아 드리지 못하며 성경은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아니라 불완전하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 고 가르칩니다. Barth 는 그의 책에서 “The Bible is God's Word so far as God lets it his word. 성경은 하나님이 그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Church Dogmatics, Vol. I, p.123) 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것은 Machen 박사의 개혁주의와 wjdauss으로 상치됩니다. 여기서 Barth의 말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인용한다면, “Die Bibel enthaltet das Wort des Gotts." 그러므로 Barth 에게 있어서는 성경의 완전 영감설 (Plenary Inspiration) 은 무의미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은 내가 그 말씀을 받아 드릴 때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받아 드리건 말건 객관적으로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자기를 나타내 주신 완전한 말씀이며 그 자체가 완전하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성경의 완전성을 믿지 않는 Barth 는 문제가 많은 인물입니다. Barth는 1919년에 발간한 그의 로마서 주석 책에서 “성경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배제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있다“ 라고 말했는데 이 말도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Barth 에게는 성경에 <불순물> 이 들어 있는데 그 불순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이론인데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 아닌 것> 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Barth 가 당시의 Albrecht RITSCHL 이나 그의 제자 Adolf von Harnack 같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에 대항하여 정통을 주장한다고 하지만 첫 째 성경의 권위 면에서 정통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가운데 일본에서 유학온 여학생이 귀뜸해 주었는데 일본에서는 신정통주의가 가장 인기가 있다는 것이며 그가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도 다른 목사들을 모아놓고 Barth를 강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빨트는 그의 교의학 (교의학 Church Dogmatics)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많이 언급합니다.. 아마도 빨트의 신학의 특징은 그가 강하게 주장하는 기독론 (基督論, Christology)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기독론은 정통적인가요? 빨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를 그리스도안에 나타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그리스도>는 어떤 분인가요?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논합니다. 이사야 4;1을 치금 펴서 읽어 보세요. 거기 나오는 일곱 여자는 일곱 이단 교회이고 그들이 모두 예수님의 이름만 빌리자고 합니다. 이단도 모두 예수 이름으로 나옵니다. 빨트는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반사 (reflection) 이다. 예수는 인간으로 오셔서 온 세상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므로 모범을 보인 분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알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에 계신 분이다> 라고 합니다.
신정통주의는 가르치기를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God is unknowable" 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빌리면, “God is wholly other” 라는 말을 잘 씁니다. 그 말은 그들의 신학으로 보아서는 일관성이 있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나타내되 <그가 인정하는 한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 , 결국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있다, enthaltet > 라고 하니 이 말씀의 nuance 는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있다는 말이고 그들의 말로 성경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치므로 빨트의 하나님은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gnontes ton theon 로마인서 1:21) 하나님> 이 아니고 인간의 알 수 없는 하나님으로 변해 버리고 맙니다.
셋째, 신정통주의는 <하나님은 자연계시에 자신을 나타내 주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Barth 는 개혁주의에서 가르치는 게시의 두 가지 종류, 즉 자연계시 (혹은 일반계시, Natural Revelation/General Revelation) 와 특별계시 (Special Revelation) 의 구별을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경에 자신을 나타내되 그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가르칠 뿐, 일반 계시는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에서는 일반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게할 수 없다고 로마서 1:20에 가르치는 것이 사실입니다. 로마인서 1장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십시오.
넷째, 신정통주의의 약점은 인간의 이성에 대한 비관주의 입니다. 신정통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 (inability to resort to human reason). 이것은 자가 당착 (自家撞着) 에 빠지는 말입니다. 빨트 신학은 주관적으로 이성을 통해서 성경을 해석하는데 인간의 이성(human reason 人間理性)을 스스로 믿지 못 한다고하면 어떻게 바른 진리에 도달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깁니다. 인간의 이성에 호소하면서 시작했던 신정통주의의 허구(虛構, fallacy) 가 여기에 들어납니다. 인간이 이성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알수 있는가?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주교의 가르침이지요. 이유는 인간의 이성은 죄로 인하여 지.정.의 (知情意) 모두가 타락해서 이성만의 힘으로는 진리에 도달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진리 이므로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빨트는 이런 점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물론 Barth 가 18세기 독일의 계몽주의 (啓蒙主義, Enlightenment) 의 영향을 받아서 그의 신정통주의 신학을 정립한 것은 말 할 나위도 없지만 오늘 Barth를 지지하는 신정통주의 학자들은 성경으로 성경을 풀 생각을 하지 않고 <이성> 에 호소합니다. 이는 필연코 진리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진리는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리스도 뿐이기 때문이지요.
다섯째, 신정통주의는 예수님의 두 가지 상태 즉 낮아지심 (humiliation) 와 높아지심 (exaltation)을 부인합니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예수님과 성부는 같은 분이니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따로 있을 리 없고 예수님의 높아지심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는 논리이지만 예수님의 인격에는 신성과 인성이 있고 예수님의 사역에는 비하 (卑下, 낮아지심, humiliation) 이 있고 승귀 (昇貴, 높아지심,exaltation) 이 있다는 것을 Barth 는 부인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비하를 통해서 인간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고난을 받으셨으며, 그의 승귀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하늘의 보좌에서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시며, 장차 영광 속에 다시 육적으로 재림하십니다. 이것은 그의 승귀(昇貴, exalatation) 입니다. 그러나 빨트의 신학은 이를 부인하므로 성경적 진리를 이탈하고 있습니다.
여섯째, 신정통주의는 주관적 경험에 중점을 둡니다. 인간의 주관적 경험과 이성으로 진리를 판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계시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지 않고, <계시란 내가 하나님과의 만남> 이라고 믿습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계시의 말씀이 아니고 >나에게 계시의 말씀이 되어야> 하나님의 계시라고 저들은 믿는데 이는 성경의 계시관을 송두리째 흔들어놓는 인간의 철학사상으로 아주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이 객관적으로 주신 그의 진리의 계시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 입니다. 내가 말씀을 만날 때 그 말씀이 말씀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건 말건 계시는 객관성을 가지고 존재하는 하나님의 불변의 말씀으로 믿어야 합니다 (딤후 3:16).
일곱째, 신정통주의는 정통신학의 신학용어 (theological terms)을 모두 사용하지만 그 말의 의미를 주관적인 이성과 경험으로 <재해석, reinterpret> 합니다. 원죄. 아담과 타락, 그리스도의 구속, 부활, 재림 등 정통주의에서 사용하는 말을 사용하지만 그 말들은 신정통주의자들에게는 개혁주의자가 해석하는 그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Barth는 창세기 1-5장을 saga <전설 傳說) 이라고 하고 한편 같은 신정통주의자인 Emil Brunner 는 <신화 神話) 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가장 비성경적인 신학 태도이다.
이런 일들은 한번 일어났던 혹은 일어나지 않을수 도 있는 전설로 후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Barth 는 이것을 Historie 가 아닌 Geschichte 라고 부릅니다. 즉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아니고 구원의
역사에서 신앙을 위해서만 의미를 지닌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빨트주의 (혻은 신정통주의)는 정통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신앙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드는데 기여했을 뿐, 정통에서 아주 떠나 개혁 학도로서는 도저히 받아 드릴 수 없는 교리상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신 정통주의 의 교리를 정리하여 비판한다면 크게 세 가지로 말해 볼 수 있습니다.
1. 신관 (神觀) 에 있어서 하나님은 자신을 예수에게 나타내어 인류를 구원하지만 그는 인간이 도모지 알 수 없는 분이라는 Barth 의 말은 성경에 위배됩니다. 성경은 로마인서 1장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창조되었는데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이는 지.정.의가 <진리>와 <거룩>과 <의>로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지음을 받았다는 말이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타락한 인생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며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지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억제하고 조물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상하며 경배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도 Barth 와 그를 따르는 신정통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알 수 없는 분, God is wholly other> 라고 성경을 왜곡합니다.
2. 기독론 (基督論) 에 있어서 예수의 성육신을 말하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말하면서도
예수님의 비하(humiliation, 卑下) 와 승귀(exaltation, 昇貴)를 부인하는데 이유는 하나님과 예수는 같은 분인데 하나님의
승귀와 비하가 있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세주로서의 예수님의 대속의 사역에 대한 곡해에 기인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지
남에게 <희생의 모범>을 보이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의 죽으심은 그의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함입니다 (마 1:21, 갈
3:13.) 자유주의자들의 공통되는 견해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희생의 본보기> 로 생각하며 <인류의 사표 (師表)> 로
보는 경향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희생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한 한 스승으로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대속 물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려 오신 분이시비다 (마 20:28). 풍요하신 그가 우리를 위해서 가난해 지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고후 8:9-10) 이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
3. 계시관(啓示觀) 에 있어서, Barth 는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증거 (witness to the Word of God) 라고 믿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는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나타내신 종결된
계시의 말씀이 아니며 우리가 이성과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을 때, 하나님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 지식과 신학이 약한 일반 성도들은 분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나태내신 특별계시의 말씀으로 필요성,
충족성, 무오성, 명료성이 분명한 계시의 말씀이며 성경말씀이 죄악에 물든 인간의 판단에 따라 성경말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Barth 가 1919년 펴낸 로마인서 주석 책에서 “성경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배제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고 한 말은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도 있다는 말인데 이는 계시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부인하는 말이며 성경의 권위를 부인한다는 것은 바로 말씀 그 자체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이며 그리스도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다는 말이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분은 구원이 없는 <유기자(遺棄者 ,reprobate)> 라고 말한 John Gresham Machen 박사가 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 (1924)“ 란 책에서 한 말은 참으로 옳은 말씀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유념할 말씀입니다.
신정통주의가 1960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정통신학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신정통주의에서 한 걸음 나아가서 Postmodernism (후기 근대주의 後期近代主義) 라는 사상이 프랑스로부터 미국으로 건너와서 온갖 교리상의 오류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주님의 재림까지 계속해서 이어질 것이며 성도가 할 일은 항상 깨어 악한 자의 화전(火箭, fiery arrow) 을 막는 길 뿐입니다.
튤립 교육 선교회// 튤립 신학 연구원
김명도 교수
www.tulipministri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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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과 박형룡,박윤선
메이첸(John Gresham Machen)은
1881년 7월 28일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태어났다. 그는 존스홉킨스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를 거쳐 독일의 마르부르크와 괴팅겐대학에서
공부했다. 유럽에서 돌아온 메이첸은 1906년 가을부터 23년간 프린스턴에서 신약을 가르쳤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온 젊은 신학도 박형룡이
프린스턴에서 공부할 때(1923-1926) 메이첸은 조교수로서 ‘신약문헌과 주해’를 담당하고 있었다. 메이첸은 박형룡을 주목하고 기대를 걸었다.
그 후 프린스턴에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이 밀려오자 메이첸은 몇몇 교수들과 함께 그 학교를 떠나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거기서 한국의 유학생 박윤선을 지도(1934-1936)했다. 박윤선은 평생 메이첸을 삶의 모델로
삼았다. 메이첸도 박윤선을 뛰어난 학생으로 생각하였다. 1936년 미북장로교에서 축출되어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창설한 메이첸은 병약한 몸을 이끌고 한 교회에서 설교 도중 쓰러져 결국 1937년 1월 1일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세계
최고의 신약학자이며 개혁주의 신학의 전사(champion)가 소천하였다.”
http://cafe.daum.net/homoo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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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Gresham Machen 교수의 생애와 사상
1. 가정 배경과 학창 시절
메이첸 교수는 1881년 7월 28일 미국 메릴랜드 주 발티모어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아서
웹스터와 어미니 메리 그레샴 메이첸의 세 아들 중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메이첸 교수의 조상은 영국계로서 미국에 이민 온 이후, 주로
버지니아주와 조지아주에서 살았다. 그는 존스 홉킨스 대학교에 입학하여 줄곧 우등생으로 공부하여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특히 라틴어와 헬라어 실력이
매우 뛰어났다. 메이첸은 철저하게 보수주의적인 배경 속에서 신앙을 배웠다. 그는 “내가 12세 되던 무렵에 습득하고 있었던 신구약 성경 지식은
오늘날 신학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 지식보다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가정교육을 통해서 철저하나 성경교육을 받았다.
그는 1902년 9월 프린스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는 워필드가 교수하고 있던 시절이라 그는 워필드 교수 아래서 철저한 보수신앙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1905년에 신학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1904년에는 문학 석사 학위를 병행하여 취득하기도 했다. 그의 생애가 특이한 부분은 1905년 독일에 1년간 유학하면서 소위 구자유주의 신학자들의 학문을 접하게 된다. 그 중에서 그는 Herrmann교수의 강의 한 때 깊은 감명을 받고 많은 갈등을 갖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그의 어머니는 소요리문답을 읽고 공부하므로 신앙적 정체성을 찾을 것에 대해서 권하기도 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프린스톤 신학교에 헬라어와 신약성경 전임 강사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독일 유학으로 생긴 신앙의 갈등이 해결되지 않아 8년 동안 목사 안수를 거부하기도 했다.
2. 프린스톤에서 웨스트민스터로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그는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즉, 1914년 패튼 학장이
퇴임하고 그 후임에 J. Ross Stevenson박사가 학장으로 취임하였던 것이다. 이 사람은 포용주의와 타협주의를 표방하는 입장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학교는 점점 자유주의적인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가정 깊이 비판했던 인물이 바로 메이첸이었다. 이런
갈등이 좀더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은 어드만 박사가 19개의 복음적 교파와 연합하자는 합동안을 지지하는 의사를 공적으로 표시하였고,
스틴븐슨 교장도 이 입장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메이첸을 철저하게 반대를 했다. 메이첸은 이것을 두 가지 내용을 들어 반박하였다. 첫째로 합동안을
발의하는 제안문의 서론이 신학적으로 애매모호하다는 것을 지적하였고, 둘째는 합동안에는 목사들이 신조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는 조항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메이첸이 신학교 사역 중 또다른 중요한 사건은 1923년 발표된 “기독교 자유주의”의 출간으로 드러난 메이첸 교수의 분명한 보수주의적 색깔이었다. 이런 메이첸의 입장으로 인해서 자유주의와 대립하게 되는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프린스톤 신학교 안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립적 양상은 학생들에게서도 노출되었다는 것이다. 신학생들이 복음주의 학생 연맹을 조직하고 지도교수를 초빙하는 과정에서 메이첸과 어드만 사이의 심각한 신학적 대립이 일어났던 것이다. 결국에는 워필드 이후 변증학 교수로서 메이첸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앞서 있었던 신학적 갈등이 이 문제에까지 파급되어 변증학 교수 임용이 취소되었다. 결국 학교는 신학적 대립으로 운영 이사회와 재단 이사회로 양분되었고, 이런 과정 속에서는 메이첸은 점점 더 정치적으로 공격을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3. 메이첸과 독립 선교회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보수주의적 신학적 입장이 더 이상 가르쳐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Robert Dick Wilson교수와 Oswald T, Allis, Van Til 교수 등과 학생 20명이 합세하여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미국 북장로교회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메이첸의 생애와 관련해서 중요한 또다른 사건은 예일 대학교의 교회사가 S. E. Mead 교수가 “선교의 재고”라는 글에서 제기했던 내용이다. 여기서 미드 교수는 현대사회가 바뀌었기 때문에 선교정책도 바뀌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일반 선교사들이 치러야 하는 교리 시험같은 것은 꼭 치러야 할 필요가 있는가를 문제제기 했던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적 사상에 대해서 메이첸은 1930년 5월 “Christianity Today(1930년 5월호)”에 기고하기를 “역사적, 정통적 기독교와 현대주의는 한 울타리 안에서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Robert E. Speer박사와 정면으로 대결하기도 했다. 스피어 박사는 평화주의자, 포용주의잗, 관망주의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는데 메이첸은 이처럼 보수주의도, 현대주의도 아닌 제3의 입장을 표명하는 신학자들도 매우 위험하다고 비판했던 것이다. 스피어 박사는 “외지 선교 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으면서 자신의 입장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그리고 이 보고서에 대해서 Pearl S. Buck여사가 지지를 표명하고 메이첸과 대립을 갖게 된다. 펄벅 여사는 중국 선교에 있어서 복음보다 물질 원조가 앞서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입장은 보수주의자들에게 큰 문제를 야기 시켰다. 그래서 메이첸과 펄벅 여사는 선교문제에 대한 갈등을 드러내게 되었다. 그녀는 New Republic지의 논객이 되어 메이첸을 더욱 비판했다.
4. 메이첸의 마지막 투쟁
펄벅 여사는 1933년 1월호 “Harper”지를 통해서 보수주의자들의 선교 정책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대해서 메이첸은 보수주의자들을 대표해서 반박했다. 그는 뉴브런스윅 노회를 통해서 총회에 상정하도록 1933년 1월에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그 내용의 골자는 펄벅 여사를 선교사의 직책에서 해임시키라는 것과 기독교 5대 교리를 믿지 않는 선교사들을 선교지로부터 소환하여
심문하고 각서를 쓰게 하든가, 아니면 해임시키라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 중에서 펄벅 여사는 자의로 선교국에 사표를 제출했지만 결과는 메이첸에게
더욱 악화되었다. 필라델피아 노회와 아버딘 노회는 메이첸의 제안을 부결시키고 오히려 메이첸 교수 와 그 일파를 각 노회에서 축출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벌였던 것이다.
이런 과정 중에 H. McAllister Griffith목사는 새로운 독립 선교국을 설치하겠다고 천명하였다. 이것은 독립 선교 단체를 의미했다. 결국 1933년 6월 27일에 새 선교 기구는 탄생하였고 메이첸 교수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 일로 총회는 1934년과 35년 총회 이전에 메이첸과 그 일파를 책벌하였다. 그리하여 메이첸과 그 일파도 1936년 6월11일 필라델피아시에서 아메리카 장로교회를 창건하였다. 역시 여기에서도 메이첸이 총회장에 피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1937년 1월1일 미국 서북부 North Dakoda에서 독감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5. 사상적 배경
메이첸이 이처럼 강경한 보수주의적 사상을 표명한데 대해서 많은 비판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그의
“교회관”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부분이 많이 있다. 이 교회관 부분에 대해서 저자는 7항목에서 좀더 세밀하게 다루어 주고 있고, 본 항목에서는
주로 보수주의적 사상을 받게 된 배경을 제시해 주고 있다.
메이첸이 철저하게 보수주의적 신학사상을 형성하게 된 것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소요리문답을 교육 받으면서 철저한 보수신앙을 배워고, 커서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워필도와 패튼 교수를 통해서 칼빈주의에 대해서 확고하게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해 주고 있다.
6. 성경관과 성경 연구
메이첸은 조직신학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는 역사적, 고증적 방법과 변증적 방법을 제시했고,
이런 방법은 철저하게 정통적 성경관 위에 서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와서 미국 신학교들은 앞다투어 독일에서 도입한 고등비평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메이첸은 1905년 “Princeton Theological Review지에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 논문에서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탄생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런 연구를 통해서 메이첸은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작업은 자유주의만의 방법이 아니라 보수주의
성경학자도 성경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되 성경에 기록된 사실과 내용이 참되다는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바울 종교의 기원”이라는 책을 통해서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사도 바울의 기독교 제2의 창시자로서 예수의 교훈을 근본적으로 변질시켰다라는 주장을 철저하게 배격하였다. 이런 활동을 통해서 그는 자유주의자들이 문제 삼고 있던 테마를 연구함으로써 성경 말씀의 초자연성과 신적 권위를 변증하는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7. 교회관
메이첸 사상 중에 가장 많이 비판 받는 부분이 바로 교회관이다. 그의 분리주의적 태도에 대해서
바로 이 교회관의 변지를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첸 교수의 신학 사상과 그 역사를 살펴보면 극단적 분리자라는 평가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취한 입장은 개인의 신학적 입장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개혁교회가 취해왔던 교회적 고백 안에서 취한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교회는 1차부흥 운동 이후로 교리를 무시하는 모습이 팽창되었고 이것을 비판하는 세력이 구파로 이것을 인정하는 입장이 신파로 나뉘어 졌다. 미국장로교회는 결국 1729년 9월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채택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것을 채택하는 과정에서 예비안과 완결안으로 나누어져서 채택하게 된다. 2차 부흥운동이 18세기 말에 일어나면서 장로교회는 처음과 같이 교리 채택에 대한 갈등을 다시 나타내게 된다. 역기서도 구학파와 신학파로 나뉘어 갈등을 드러낸다.
교회는 남북전쟁 후 하나로 연합하는 운동이 일어났고, 이 과정에서 북장로교회는 큰 변화를 갖게 된다. 즉 다윈의 진화론과 성경연구에 있어서 고등비평의 방법 채택과 관련해서 갈등이 터졌다. 결국에는 1903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개정문제가 제기되었고, 이에 당황한 보수주의자들은 1910년 기독교 근본 교리 5개 조의 확인과 책택을 총회적 차원에서 천명하였다. 이 때 1924년 오번 선언이 발표되어 5개 조항을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핫지나 워필드 등은 철저하게 보수주의적 입장을 고집했고, 그것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지키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입장을 메이첸도 동일하게 지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첸의 행동은 개인적 판단의 행위라기 보다는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8. 메이첸의 현대 사상 비판
메이첸이 비판한 현대주의는 문예 부흥 이후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쳐서 19세기 찰스 다윈의
진화론의 가미로 원죄에 대한 부인, 그리고 윤리성만 강조하는 성향 등이 도입되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이와 같은 방법론을 도입하여
기독교의 특수성을 종교의 보편적 원리의 단순한 시대적 상징으로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의 본질을 단지 종교의 보편적 원리 속에 편입시켰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자연주의 사상이라고 지적한다. 메이첸은 기독교가 초자연적 종교이기 때문에 과학과 타협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조화시킬 수도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던 것이다.
출처: 성남 한마음교회/http://cafe.daum.net/Cr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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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 신학의 출현
이 세미나 페이퍼는 조직신학의 세미나
복음주의 신학을 이수하기 위한 것임
담당교수:
도한호
도학윤
침례신학대학교 M.Div., 1999.
1999. 12.
9.
목 차
서 론
--------------------------------------------------------- 1
.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 1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 1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 2
3. 세대주의 영향
----------------------------------------------- 3
.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
5
1.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 5
2.
프린스톤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 6
3. 근본주의와 미국 침례교
--------------------------------------- 8
. 성경관에 대한 고찰 ------------------------------------------
10
1. 알취발드 알렉산드 ------------------------------------------ 10
2.
찰스 핫지 ------------------------------------------------- 11
3. 워필드
---------------------------------------------------- 12
4. 그레샴 메이첸
---------------------------------------------- 12
결론 ---------------------------------------------------------- 14
참고문헌목록 --------------------------------------------------- 15
서 론
종교개혁이후 신학의 역사를 개관하면 17세기는 종교개혁의 유산을 그대로 지키고자 노력한
정통주의의 시대이다. 그리고 18세기는 인간의 이성이 가지는 능력이 강조되며 계몽주의시대가 도래하고, 19세기에 이르러서는 개신교 자유주의
시대가 된다. 이때에 발전한 신학을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명명한다. 교수 목창균은 자유주의의 시작을 현대에서 종교가 어떻게 가능하며 기독교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하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자유주의 신학은 어느 특정 신앙고백이나 신조에 종속되지 않고 그 시대에
적절하고 타당하게 만들려고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신학의 중심을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경험이나 정황에 둠으로써 인간 중심적
신학이 되었다.
자유주의는 동정녀 탄생과 예수님의 기적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등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하나님의 창조적인 능력을 부인한다. 자유주의는 성경의 영감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독특한 신성, 죄의 회개 그리고 개인의 부활과
같은 것들을 현대 문화에 내던졌던 것이다. 이런 자유주의 신학에 대항하여 19세기말 미국에서 일어난 근본주의 운동은 본래의 탄생 배경과 맞지
않게 여러 측면에서 오해와 괄시를 받아 온 것이 사실이다. 근본주의는 1900년에서 1930년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휩쓸었던 자유주의 물결에
대한 반대운동으로서 특별히 비일(D. Beale)은 근본주의의 형성과정을 두 시기로 구분했다. 첫째로 1857-1930년까지의 근본주의 운동을
비순응주의자(nonconformist)"라 하며, 둘째로 1930년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근본주의 운동을 분리주의자(seperatist)"로
정의한다. 결국 비일(D. Beale)의 주장에 따르면 근본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먼저
미국 내에서 근본주의 운동이 태동하기까지의 외적인 상황을 먼저 고찰하고자 한다.
. 근본주의 신학의 개념
1. 근본주의 운동의 배경
19세기말부터 미국 개신교는 엄청난 도전에 직면했다. 1861년 발발한 남북 전쟁 후 미국은
산업혁명으로 인한 산업화와 함께 독일로부터 오는 고등비평과 영국으로부터 온 다윈의 진화론이 미국인들의 삶 전체뿐만 아니라 교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은 농업국가의 대열에서 이탈하여 세계 주요 산업 강국의 대열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의
특징으로는 재벌의 증가와 이들을 통한 파급 효과이다. 반세기도 안되는 짧은 시간 안에 광대한 대륙에 철도가 종횡으로 개통되고 이를 따라서
사람들의 정착과 개발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이런 일들을 수행한 재벌들은 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이와 같이 재벌들의 축적된 부를 통하여 이미
설립된 교육기관에 관대한 기증이 시작됨으로 교육계의 지도력이 전환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당시 미국사회의 변형은 주로 도시로의 인구이동, 이로 인한 도시의 급격한 팽창과
확대, 유럽으로부터의 이민 증가와 새로운 교단의 성립으로 설명된다. 특별히 도시의 성장은 남부보다는 북부에 두드러졌고, 이런 현상은 자연히 농촌
인구의 고갈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인구분포의 변화는 비단 농촌 인구의 유동뿐만이 아니라 이민 인구의 계속적인 증가도 한 몫 하였다. 더구나
해외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은 대부분 카톨릭 교도였으며 비영어권이었다. 그래서 1914년이 되어서는 카톨릭이 미국에서 단연 최고의 교파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은 미국인의 생활에 특히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무렵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계사의 중심 무대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전쟁전의 미국은 수많은 다양한 민족들을 동화시키는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큼
낙관적이었다. 미국의 이상주의와 기술에 의하여 정복될 수 없었을 만큼 심각한 도전은 없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모든 신뢰와 도덕적 열정을
전쟁의 노력에 쏟아 부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성공은 대부분 전쟁에 국한되어 있었다. 일부 상반되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성화의
체험은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전쟁으로 인하여 급속한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재즈(Jazz) 시대가 도래하였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은 승리로 종결되었으나 미국의 성전적() 열정은 교회
이상주의를 더욱 강화하였고 금주운동이 마침내 승리하여 1919년부터 발효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은 불안하였다. 러시아가 공산주의
혁명에 의해 적화되고 쿠 쿠룩스 클랜(Ku Klux Klan)이라는 반흑인 조직이 결성되고 후에는 카톨릭교도, 유대인, 비북유럽계까지
적대시하였다. 그리고 1920년대가 되어서는 세속화 현상이 밖으로 공개화 되기 시작하였다. 성()에 대한 이야기가 공공연해지고 선정적인
머릿기사의 타블로이드(Tabloid)판 신문이 1919년 시작되었다. 여성들이 공개석상에서 흡연하고 신교도에게 금기시 되었던 춤이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고 심지어 교회의 청년 모임에까지 도입되게 되었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미국 문화의 변질은 교회와 신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을
주었다.
2. 근본주의 용어의 형성
근본교리들(Fundamentals)이란 책자는 근면하고 관대한 평신도 기독인 실업가 라이만
스튜어트(Lyman Stewart 1840-1923)가 자기 소유의 출판사업을 태동시켰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근본교리들이다. 스튜어트는
1894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 참석하여 대표단 가운데 나타난 배교현상과 기독교에 대한 현대주의의 도전을 보고 이를 막고자 결심하게 되면서
딕슨(A. C. Dixon) 목사와 협력하여 근본교리들 12권을 한 질로 출판했다.
근본주의란 명칭은 자유주의가 근본원리(the fundamentals)로서 배척한 핵심적인
구속교리들을 습관적으로 언급하는 데서 발달된 것이다.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적어도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그 해에 근본원리란 제목하에
복음주의 기독교를 해석하고 옹호하는데 기여하게 된 12권의 소책자 중 그 첫 권이 나왔다. 켈리포니아의 어떤 부유한 두 분 인사의 호의로 그
첫판은 영어 사용국의 목사, 전도사, 선교사, 신학생, 주일학교 교장, Y.M.C.A 및 Y.W.C.A 책임자들에게 주소가 입수되는 대로 무료로
다 보내어졌다. 결국 그것은 3백만부 이상 배부되었다. 이 책에 기고한 저자들 가운데는 오르(Adams orr), 워필드(B. B.
Warfield), 앤드슨(Robert Anderson), 모올(H. C. G. Moule), 그리피드 토마스(W. H. Griffith
Thomas), 토리(R. A. Torrey), 몰간(G. Campbell Morgan)등 같은 해박한 학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논문들 중
상당수가 학구적으로 철저히 다루어진 작품들이었다고 허버트는 그 평론에서 말하고 있다. 그 시리즈에는 논쟁의 내용이 된 근본 원리들에 대한 명확한
성경 해석들이 실려 있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변증학자들은 그 근본원리에 반대하는 입장들과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한 어떤 인상적이며 사사로운
증언들을 반대했다.
이와 같이 근본 원리들이 보수주의의 슬로건으로 사용된 것은 1910년 미 북장로교 총회에서
발간된 구원(Deliverance)이란 책자에서부터 였다. 이 때 근본원리는 출판 과정에 있었다. 이 책에는 신앙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의 근본원리
들이 다섯 가지 조항으로 상세하게 열거되어 있었다.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예수님의 신성, 그의 동정녀 탄생과 이적, 우리 죄를 대신한 육체적
죽음, 그리고 육체적 부활과 승천, 이상 다섯 가지이다. 그 이후로 줄곧 미국복음주의자들은 근본원리라 하면 단지 이 조항들을 언급하는 것으로
습관이 된 것 같다. 총회록이 약간의 수정과 첨가를 거쳐 최근의 근본주의 기관의 교리적 신조로 채택되었다. 이 기관들 중 첫째가 1919년에
결성되어 지금도 존속하고 있는 세계기독교 근본원리협회(World Christian Fundamentals Association)였다. 1920년
북침례교 협의회의 복음주의자 대표 일단은 신약성서 신앙의 근본원리들을 재 진술, 재확인, 재강조 하기 위하여 그들 서로 예비회담을 가졌다. 그
후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발행한 침례교 잡지 파수꾼(Watchman-Examiner)에 실린 한 논문에서 근본원리들을
수호하기 위해 충성을 다해 싸우고자 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로 근본주의자들이란 명칭이 만들어졌다.
3. 세대주의 영향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적 사조에 대한 반발로, 그들이 사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강하게 주장하는 근본적인 몇 가지의 교리 때문에 그러한 명칭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이 근본주의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어떤 이들은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신학 목록을 중심으로하는 하나의 신학적인 운동으로 보며 샌딘(Sandeen)과 같은 이는 신학 중에서도 영국의 전천년설을 그들의 핵심으로
보며 세대주의 전천년설의 대표자인 다비(Darby)를 근본주의의 전형적인 인물로 본다. 하지만 허드슨(Hudson)은 근본주의 운동은 미국에
있어서 도시와 교외의 갈등이라는 상황을 배경으로 사회적으로 접근하기도 하며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려는 이들도 있으며 반지성주의, 문화적 갈등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현대 신학, 자유주의, 현대주의, 특히 성서 해석에 있어서 고등 비평에 대해 극보수적인 반응을 보인데서 근본주의가
생겨났다고 보고 있다.
세대주의의 기원은 서로 이견이 있지만, 대개 19세기 초 영국의 형제주의
운동(Brethren Movement)을 주도했던 다비(J. N. Darby)에 의해 골격이 갖추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다비(Darby)는
세상의 역사를 일곱세대로 구분했다. 세대주의의 두드러진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성경은 일곱 세대의 패턴을 통하여 모든 역사적 변화를 설명했다는
가정이다. 각 세대마다 하나님은 다른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인간을 시험하셨다. 인간들은 모든 시험에 실패했으며, 각각의 세대는 파멸적인 하나님의
심판으로 종결되었다. 첫 세대는 인간이 타락하여 죄에 떨어지고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남으로써 끝이 났고, 두 번째 세대는 홍수와 더불어 끝났으며,
세 번째 세대는 바벨탑과 더불어 끝났다. 우리는 여섯 번째 시대인 교회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이 세대도 파멸과 하나님의 간섭의 날을 향하여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7년에 걸친 전쟁과 재난의 날이 있은 후, 예수께서는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천년동안 다스린다는 것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성경 특히, 예언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에 근거한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성경의 무오류성을 진정한 신앙의 시금석으로 삼을 것을 가장 강조하는 계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영국에서 들어온 이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전천년설은 예언을 하기 위한 의도를 가지고 성경을 연구한 예언 수련회를 통하여 미국안에 확산되었다. 기차가 교통수단의 주종을 이루고 있던 시대에
새로운 휴가형태로 유행했던 여름수련회가 특히 효과적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드와이트 L, 무디가 세대주의의 체계에 대하여 동정적이었다는
사실이다.
세대주의 그 자체는 놀라운만큼 반현대주의적이었다. 여러 가지 관점에서 세대주의는 현대주의의
반사체였다. 현대주의는 현대문화에 대하여 낙관적이었으나 세대주의는 비관적이었다. 중요한 것은 두 운동이 모두 성경과 역사와의 관계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현대주의는 인간역사라는 렌즈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했으나, 세대주의자들은 오직 성경이라는 렌즈를 통해서만 역사를
해석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근본주의 운동은 사경회 운동으로 번져갔고 특히 나이아가라 휴양지에서
모인 연례적인 성경 연구회는 가장 대표적이었는데 이 사경회 운동은 과학주의, 합리주의에 짓밟힌 성경의 권위를 되찾고 무시된 기독교의 근본 교리를
확립하자는 운동이었다.
. 근본주의와 미국 장로교 및 미국 침례교
1. 근본주의와 미국장로교
근본주의 논쟁이 시작된 1920년 초반에서 1929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설립하기까지의 과정을 서술하고자 한다. 1920년대에 갑자기 탄생한 것이 아니고 많은 상황들이 전개되어 있었으나 본격적인 논쟁은 1920년에
시작되었고 극심한 대립의 양상은 1929년을 계기로 쇠퇴하였기 때문이다.
1910년 장로교 총회는 근본주의 5개 교리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1915년에는150명의
목사들이 근본적인 것으로 돌아가자(Back to the Fundamentals)라는 글을 당시 총회장과 3명의 증경 총회장의 서명과 함께 총회에
제출하였다. 현대주의에 대한 미국내 근본주의의 대응은 분명해 보였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나 1921년 5월 침례교 목사인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은 뉴욕제일장로교회(Newyork First Presbyterian Church)에서 근본주의는 승리할 것인가?
라는 설교는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본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포스틱(Fordick)의 의도는 교리나 신조보다는 교회론적인 면으로, 포괄적인
교회와 배타적인 교회를 구분하여 근본주의의 배타적이고 비타협적 교리를 비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와는 달리 필라델피아의 아치 스트리트 장로교회(Arch Stewwt
Presbyteiran Church) 목사 클라렌스 에드워드(Clarence Edward Macartney)가 불신앙이 이길 것인가?라는 제목을
붙인 설교로 응수하였다. 포스딕에 반대하는 메카트니는 보수주의 운동의 선봉에 서서 필라델피아 노회를 주도하여 뉴욕 강단에 대해 즉각 소송을
제기하도록 1922년 총회에 제의 하였다(포스딕은 장로교인이 아니었으므로 직접 그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결국 미국 보수주의자들이 견지해 오던 5대 교리가 교회를 속박하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현대주의 신학에 신학적 논쟁을 벌인 보수주의의 대표자는 메이첸(J. G. Machen)이었다. 먼저 어번 선언(Auburn
Affirmation)에 대하여 메이첸은 즉각적인 반응을 나타내었다. 그는 어번 선언은 단순히 장로교 교리에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의 특성에 관련된 모든 것을 반대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리고 메이첸은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통하여 비록 자유주의가 관용을 부르짖는다 할지라도 기독교 내에는 자유주의를 위한 여지가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메이첸은 당시의 상황을 싸움의 시대로 정의하고 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님을 천명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자유주의 신학자가 기독교 교리를 하나씩 하나씩 적에게 내주고 나서 보유하게 된 것은 전혀 기독교가 아닌 별개의 범주에 속하는 전혀
다른 종교인 것이다. 실제로 어번 선언이 발표된 후, 기독교 세기 Christian Century 잡지가 근본주의와 현대주의는 두 가지 별개의
종교들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양자간에는 더 이상 화합을 이룰 한계를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두 세계가 충돌하였다. 근본주의자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이요 현대주의자의 하나님과 다른 한 하나님이다. 두 세계의 생득적인 불일치는 상호관용의 단계를 이미 넘어섰다.라고
선언하였다.
메이첸의 저항이 있었지만 교계의 상황은 점점 더 현대주의에 유리하게 되었다. 1924년
미국 장로교총회는 총회장으로 포스딕의 설교에 대응했던 매카트니(C. E. Macartney)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비록 보수주의자가 총회장에
당선되었으나 어번 선언에 대한 문제를 무기 연기하게 되었고, 재판부에서는 교회가 구체적으로 교리적인 요강을 규정한 적이 없었기에 총회가
직분자들에게 교리시험을 실시할 권한이 없다고 판결하였다. 이것은 1910년, 1916년 1923년 5개 신조 선언을 공식적으로 반박한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보수주의자들 중에서도 중도파 보수주의에 의하여 자유주의의 승리가 촉진되었던 것이다.
1925년은 근본주의자들의 쇠락이 더욱 두드러진 해이다. 테네시주 데이턴(Dayton)에서
열린 세기의 재판, 즉 스콥스(Scopes) 재판이 열렸다. 이 재판은 실제로 근본주의 논쟁의 정점에 해당하는 사건이었다. 1925년 봄
테네시 주에서는 가장 강력한 반진화론법이 제정되었고, 이 법은 공립학교에서 다윈설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제정되었다. 이때 스콥스는 주법을 어기고
진화론을 가르쳤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이때 기독교 측에서는 브라이언(William Jenning Bryan)이 반진화론적 입장을 취하였다.
재판의 결과는 브라이언의 참패였다. 대로우(C. Darrow)의 공세에 밀려서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전혀 대답하지
못하였다. 브라이언은 대로의 쉴새 없는 심리로 종교영역에서 그의 피상적인 사고와 부족한 준비를 드러내며 실수를 연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전국으로 퍼지자, 근본주의자들의 무지와 고집스러움이 집중적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브라이언은 죽었지만 근본주의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25년 총회는 오하이오 주에서 모여 어드만(C. R. Erdmans)을 총회장으로
선출하였다. 근본교리들의 기고가인 어드만의 피선은 근본주의의 승리처럼 보였으나, 어드만은 본래 교리적 논쟁보다는 평화와 관용을 선호한
사람이었다. 어드만은 15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교단내 영적 상태와 불안 조성 원인을 규명하며, 이를 차기 총회에 보고하여 교회의 일치와 진보를
도모하려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1926년 총회에 이르러서는 어번 선언에 관하여 토의조차 하지 않고 논쟁의 유예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1927년
총회에서는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대한 목사의 서명 수락 문제를 처리하며, 15인 위원회는 교회가 본질적 교리들을 정의한 적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결국 1927년을 기점으로 미국 장로교회는 자유주의에 항거하거나 교회 자신의 신앙을 정의 내릴 수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2. 프린스톤 장로교 신학교의 변화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설립
프린스톤 신학교는 현대주의의 유입으로 미국 교계가 어려움을 겪을 때, 신학적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그러기에 미국 장로교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이 패배하고 자유주의가 승리함에 있어서 프린스톤의 역할과 위치, 신학적 태도는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교회가 현대주의에 서서히 젖어가자 프린스톤 역시 한 세기 이상 지켜 오던 신학흐름이 변질되었던 것이다.
1914년 관용주의적 보수주의자 스티븐슨(J. R. Stevenson)이 학장이 되기 전,
프린스톤은 장로교 전통신앙의 난공불락의 요새라 일컬어진 패튼(F. L. Patten)에 의해 보수신학을 고수하였다. 스티븐슨이 보기에 그동안
프린스톤은 구학파만을 고수하였으나 그의 교육방침을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통합된 구학파와 신학파의 기관이다. 그러므로 신학교 학장으로서 나의
야심은 이 신학교를 어떤 특정한 당파의 학교가 아니라 전체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학교로 만들려는 것이다. 프린스톤 교수들은 이에 대하여
반대하였으나 몇몇 교수들이 학장의 의도에 도도함으로 분열이 시작되었다. 학장과 동조한 교수들은 현대주의자들은 아니었으나 당시의 신학사조에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투적 보수주의자로 메이첸이 이들과 대립한다. 그는 강의실에서, 교회에서, 책이나 논설 속에서 어디에 있든지
자유주의에 대항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지상과제는 프린스톤에 신학교 초기의 신학전통을 그대로 고수하는 것이었다.
프린스톤은 당시에 2개의 이사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나는 교육프로그램을 관리하고 총회의
승인을 얻어야 하는 운영이사회와 1822년 설립되어 재정을 관리하는 재정이사회이다. 장로교 논쟁이 치열할 때,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 학장을
지지하며 메이첸의 교수직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운영이사회는 메이첸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이에 총회는 1926년 프린스톤 사태를 연구할
위원회를 발족시켜서, 프린스톤의 분열은 교수진의 분열이라 평가하였다. 이 위원회의 보고가 채택되어서 1929년 33인의 새로운 재단이사회를
구성되어 1/3은 구 재단이사회에서, 1/3은 구 운영위원회, 1/3은 교회 전체에서 선출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스티븐슨 학장의 권위를
극대화하였고, 보수주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프린스톤 이사회에 어번선언에 서명한 두 사람이 포함되게 되었다.
이렇게 프린스톤의 상황이 변화되자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전통을 계승할 새로운 신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1929년 7월 18일 약 7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프린스톤 신학교가 오랫동안 영예스럽게 견지해 왔던 하나님의 말씀과 웨스트민스터 신조에 대한 충성 정책을 흔들림 없이 계속할 새로운 신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메이첸은 3사람의 보수주의 교수들, 곧 윌슨(R. D. Willson), 반틸(C. Vantil) 그리고 앨리스((O. T. Allis)와 함께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했던 것이다. 메이첸이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한 취지는 그의 개강예배 설교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프린스톤 신학교는 죽었지만, 프린스톤의 고귀한 유산은 살아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 전통을 손상시키지 않고 지속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결국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 전통을 수호하기 위하여 새로운 신학교 설립과 교단의 분열까지도 감내하였던 것이다.
3. 근본주의와 미국침례교
기독교와 자유주의간에 투쟁이 교파 내에서 격화됨에 따라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무
신조나 고백이나 조직신학에도 입장 표명을 하지 않는 자율적인 침례교인들조차, 자신들의 지교회들을 넘어서 자기들의 종말론 견해를 방어하는 데
그들의 장로교 형제들이 근본주의 초창기에 느꼈던 것보다 덜 강박감을 느꼈다. 비록 침례교인들은 이 운동의 처음 기간 곧 1857-1920년 동안
고참 보수파 근본주의의 지도력에서 장로교인들보다는 뒤졌지만 그들은 주요 공헌을 하였고 특출한 지도력도 제공하였다.
침례교인들은 근본주의자들이 천명한 신학적 견해를 받아 들였지만 정통주의의 교리적 입장이
만장일치의 옹호를 받는 신앙성명서가 되어야 한다는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에는 찬동하지 않았다.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의 거의 모든 무리들은 원래의
근본주의자들의 특징인 보수주의 신학을 학문적으로 제시하는데 높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종종 일어나고 있는 바와 같이, 원래
지도자들의 높은 이상들은 그들의 활동과 견해를 지지해 주는 동지들을 성공적으로 보유하지 못하였으며, 근본주의는 급격히 완고한 율법주의로 전락되고
말았다. 그리고 많은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지할 수 없었는데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이에 대한 과격한 논쟁들 가운데 종종 나타나
있다. 물론 몇몇 침례교 학자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지속시켜 나가는데 참여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이 그들 다음 세대의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완고한
자들임을 종종 입증한다. 근본주의 약점들은 1920년대를 넘어서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극단의 세대주의, 과도한 정서주의, 사회에서의 도피,
은둔, 복음에 대한 문화적인 도전 앞에 가지는 공포, 윤리적 문제에 대한 소홀함, 호전적인 신학 논쟁, 경건주의적 개인주의 등의 상당한 부정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후기 근본주의자는 신근본주의(Neo-Fundamentalism)라고 불린다. 신근본주의는
남침례교와 북침례교에 각각 분파를 형성하는 요인이 되었다.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의 논쟁이 일어났던 시기에 서든침례신학교(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학장으로 에드가 영 멀린스(Edgar Young Mullins)가 선출되었다. 그는 이
시대에 남침례교인들을 안정시키는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에스텝(William R. Estep)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멀린스와 로버슨(A.
T. Robertson)은 모두 주도적인 근본주의자들의 집단에서 커다란 존경을 받았다. 어떤 탁월한 미남침례교인도 조직화된 근본주의에서 지도적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멀린스와 로버슨은 미남침례교인들의 삶과 신학에 다른 학구적인 지도자들과 똑같이 영향을 미쳤음은 의심할 바 없다.
멀린스는 비록 신학적 방법에 효과적으로 변화를 가져왔지만 침례교의 신학적 사고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서의 완전한 진리 성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멀린스에게 있어서 성서는 오류가 혼합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된 진리였다. 성서의 목적은 종교적인 것이며 따라서 성서는 그러한 견지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성서는 어느 부분에 있어서나 사실적이며 진리를 갖고 있다. 이른바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 간의 논쟁이 있던 시기에 멀린스는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적 믿음을 옹호하는 글을 썼다. 1924년 미남침례교 교회학교부(Sunday School Board the Southern
Baptist Convention)는 그의 십자로의 그리스도교(Christanity at the Cross Roads)를 출간하였다. 그 책의
두드러진 구별 속에서 멀린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신약이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에 대한 논쟁은 이제 거의 찿
아볼 수 없다. 과학적 지식은 우리의 복음주의적 신앙을 옹호하는 쪽에서 이 문제들을
결정하여 왔다. 공격은 이제 기록들 자체의
기초들에 대하여 가해지고 있다. 중재
자들과 중립자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눈을 감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리
스도교의 기초들을 그 역사적 기록들을 의심함으로써 파괴시키려는 시도가 행하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멀린스가 말하였거나, 믿었던 것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그가 그의 저술들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의심도 주어지지 않고 있다. 그는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적 침례교회 전승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제기한 가장 기본적인 문제들이 칼빈주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은 아니며, 심지어 침례교 교리의 독특성에서 나온 것들도 아니다.
남침례교인들은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 (Baptist Faith and Message)로
알려져 있는 신앙 고백문을 작성하여 통과시킴으로써 1925년 진화론적 및 현대주의적 이론들에 응답하였다. 이 신앙 고백은 남침례교 총회의 교리적
통일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북침례교인들은 신학적인 자유주의를 지향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운동에 대하여 심각한 논쟁을 지속적으로 벌여왔다.
이러한 논쟁은 20세기 전반에 그들의 총회의 특징이 되었다. 반면에 남침례교인들은 그들의 신학적 확신들에 대하여 훨씬 더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한 조화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증될 수 있다.
예컨대 텍사스 출신의 근본주의 지도자였던 노리스(J. Frank Norris)는 남침례교회의
지도층을 한번도 성공적으로 공격하지 못하였다. 그는 한 때 대단히 극단적인 견해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죠오지 워싱톤 트우엣(George
W. Truett: 달라스의 제일침례교회 목사)을 성서적 진리를 훼손시키는 인물로 비난하기까지 하였었다. 신학적으로 남침례교인들은 거의 모두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의 대다수는 노리스가 믿었던 것과 똑같은 교리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노리스 같은 근본주의자들의 신랄한 논쟁적 체계에
대하여서는 동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남침례교인들은 1925년 중요한 신앙고백을 투표로 인정하였다. 이 신앙고백은 비록 몇몇 사항들에 있어서 애매
모호하다는 비평을 받아 왔기는 하지만 보수주의적 신학 체계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침례교인들은 북침례교인들과는 달리 그들이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로 나뉘는 명백한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다.
북침례교 총회는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교회들 내에서도 자유주의에 직면하였다.
자유주의와 관련된 문제들은 너무나도 심각하여졌기 때문에 침례교 근본주의자들의 총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 회의는 1920년 북침례교
전국 총회가 있기 바로 직전 뉴욕 주 버팔로(Buffalo)의 델라웨어 에버뉴 침례교회(Delaware Avenue Baptist
Church)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발표된 모든 메시지들은 침례교 근본주의(Baptist Fundamentals)라는 한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회의의 참석자들은 총회가 전통적 침례교 교리들에 대한 교수들과 학교 이사들의 태도들을 조사할 것을 요구하는 안건을 투표로
통과시켰다. 보수주의자들은 그 조사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생긴 논쟁은 비통함과 긴장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다음 해
까지 계속 되었다. 학교들을 조사하는 임무를 받았던 위원회가 다음 해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학교 조사 위원회는 몇몇 문제들이 있음을
인정하였으나, 본질적으로 보고서가 침례교 교육기관을 옹호하였다. 총회가 신앙 고백문을 채택하도록 만들고자 한 보수주의자들의 시도들은 거듭 거듭
실패하였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러한 20년대의 논쟁은 30년대, 4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북침례교 총회에서 보수주의자들은 같은 교단 안에
있는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기 위한 근본주의자협회를 구성하였다.
. 성경관에 대한 고찰
근본주의 논쟁의 핵심은 성경관이다. 많은 신학자들이 근본주의를 정의할 때 성경관을 논하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그러므로 근본주의 논쟁은 전통적으로 고수되어 오던 성경관을 지키려는 무리들과 새롭게 변화된 세계관으로 과거의 성경관에
반기를 든 무리들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현대주의는 새로운 성경관을 제창하였다. 인간의 이성에 의하여 수용되지 않는 성경의 내용은 사실로써
수용하기를 거부하고 초대교회가 신화로 첨가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론에 관한 것,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동정녀
탄생, 육체적 부활, 성육신 등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이러한 도전에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초자연적이고 동시에 역사적 사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두 본성, 동정녀 탄생, 성경의 영감, 성경의 권위를 세우고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성경관은 미국 장로교회에서 프린스톤 신학자가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기에 이들의 성경관은 곧 근본주의 성경관이라 하겠다. 이에 프린스톤 신학자들, 알렉산더, 찰스 핫지, 워필드, 메이첸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성경관을 개괄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1. 알취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프린스톤 신학의 출발점은 초대학장인 알렉산더(A, Alexander)이다. 성경관도 예외는
아니었다. 1812년 그는 학장 취임연설에서 성경을 신학교 존립을 위한 기초로 설정하기 위하여 요한복음 5장 39절 성경을 찾으라는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그의 저서인 변증학의 6장에서 12장까지는 성경이 확증적이고 영감을 받아 기록된 것이며, 정전()이라는 외증들을 요약하고 성경의
권위는 성경 자체의 내증에 의하여 더욱 분명하게 설명된다고 말한다.
성경의 영감에 대해서도 알렉산더는 설명한다. 곧 영감은 성경 기자들이 성경을 기록할 때
감독의 역할을 한다. 곧 성령의 감독하에 성경이 기록되었기에 오류로부터 보호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한 역사가가 성령에 의해 감동되어
성경을 기록할 때, 섭리된 목적에 부합되는 사건과 상황들을 선택하도록 역사한다. 그리고 사건이 내용 속에 모든 실수와 잘못들로부터 보호되도록
사건을 해설하게 돕고 힘을 준다. 그래서 영감받은 이들은 영감 받지 않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스스로의 문체나 표현 방법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알렉산더는 영감을 정의하며 완전영감(Plenary Inspiration)을 주장한다. 결국 알렉산더는 성경의 어느 부분이라도 오류가
존재한다는 것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에게 있어서 이와 같이 성경의 권위를 높이는 것은 곧 하나님을 높이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2. 찰스 핫지(Charles Hodge)
찰스 핫지는 알렉산더를 계승하여 확고한 프린스톤 신학을 정립하고, 더욱 강력한 성경의
권위를 확립하였다. 핫지(Hodge)의 출발점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는 사실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은 첫째, 하나님이 성경의
저자이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성경이 진리라고 증언하는 것은 모두가 진리이다. 넷째,
성경이 옳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옳으며 틀리다고 하는 것은 모두 틀리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핫지(Hodge)는 계시와 영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영감은 신자의 마음속에 단순한
영적 조명이나 성화 하는 능력이 아니고 초자연적인 영향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계시의 목적은 사람을 더욱 지혜롭게 하여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요, 영감의 목적은 오류를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책들과 모든 부분은 꼭같이 영감된 것이다. 제한이 있을
수 없고, 저자와 저작 모두 영감 되었다는 것이다. 핫지(Hodge)는 영감론이 저자의 언어까지 영감 되었다고 주장한다. 성경 저자들이 정확한
언어를 선택하도록 영감 하셨기에 성경의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도덕이나 종교적 진리에만 무오한 것이 아니고 과학, 역사,
지리에 관하여 모두 무오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핫지(Hodge)의 성경관에서 독특한 것은 원본(Autographa)의 무오설이다.
성경 속에서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동일한 사건에 대하여 상이한 진술을 설명하기 위하여 제창되어진 것이다. 핫지(Hodge)의 시대에도 원본
무오설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존재하지도 않는 원본의 무오성은 사본만이 남아있는 현재에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본무오설은
워필드(Warfield)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전된다.
3. 워필드(B. B. Warfield)
워필드(Warfield)가 활동하던 시기는 선배들보다 기독교 진리에 관한 변증에 더욱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 독일신학의 유입, 진화론, 슐라이에르마허의 영향으로 신앙의 주관주의와 같은 도전이 거세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워필드(Warfield)는 성경 영감설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요 계승자로써 영감의 방법이 축자 영감인 것을 주장하였다. 워필드(Warfield)가
성경 영감 교리에 공헌한 것은 참으로 지대하다. 철저하게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이 이론에 관한한 전무후무한 공헌을 하였다.
성경이 그 자체의 영감을 교훈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망라하고 성경 속의 세부 원리와 일반 원리를 통원하여
영감교리를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의 문헌집 대부분이 성경의 영감과 무오교리를 옹호하는 것이었다. 1881년 핫지(A. A. Hodge)와 함께
출판한 영감(Inspiration)이라는 글에서, 성경의 축자영감 사상에 관한 교회의 역사적 확신을 기술하고, 당시대 양측 곧 보수주의와
현대주의의 전제들을 기술한 이후에, 성경의 자증에 기초한 전통적인 성경관을 주장한다.
워필드(Warfield)가 보기에 영감에 관한 성경의 주 본문은 세 가지 있다. 요한복음
10장 35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베드로후서 1장 20절에서 21절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디모데후서 3장 16절이다.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의 성서 해석은 교리 중심의 해석이 되기 쉽고 따라서 본문 전체를 개관적으로 보지 못할 위험이 뒤따르기도 한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성서의 영감성과 무오성의 교리를 입증하는 구절로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워필드(Warfield)의 성경 영감교리는 많은 비판을 받는다. 신정통주의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부룬너(E. Brunner)는 워필드(Warfield)가 프린스톤의 역사적 교리를 언어적 무오(Verbal Inerrancy)의
극단으로 끌고 갔다고 공격한다. 그러나 워필드(Warfield)의 성경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주로 원본 무오설에 집중된다. 즉 영감은 성경
저자들이 최초로 기록한 원본에만 적용된다는 이론이다. 이에 대한 워필드(Warfield)의 견해는 단호하다. 그는 말하기를 원본, 어떤 부분의
참 의미가 오늘날 결정적으로 알려진 역사나 과학의 진리 또는 명백히 확인되고 해석된 성경의 다른 부분과 직접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증명하라고 선언한다.
4. 그레샴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프린스톤 신학의 마지막 주자로 일컬어지는 메이첸(Machen)은 그의 선배들이 축척하고
주장해온 신학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는 구프린스톤에 철저하게 서 있는 찰스 핫지(C. Hodge)와 워필드(B.Warfield)의 제자였다.
메이첸(Machen)은 1881년 A. A. 핫지(A. A. Hodge)와 워필드(Warfield)가 저술한 영감(Inspiration)이란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성경은 물론 원본에 있어서도 완전하고, 무오하고, 유기적 영감의 책으로 전혀 오류가 없다고 한다. 메이첸은 이와 같이
선진들의 신앙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당대에 일어났던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선배들의 이론을 보완하였다.
우선 현대주의에서 가장 심하게 부인한 두 가지 기적을 역사적 사실로써 옹호하였다. 곧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이 그것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of Christ)을 통하여
성경의 초자연적 무오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완전영감에 대하여 부가적인 설명을 더해주고 있다. 곧 완전영감은 성경의 모든 부분이 똑같이
아름답다거나 똑같이 가치 있다는 것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는 성경의 각 부분이 똑같이 참되다는 것과 각 부분은 자신의 역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선배들은 영감의 방법, 범위, 결과 등에 대하여 논의하였고, 메이첸(Machen)도 이를 동의하는 동시에 영감 받은 성경의 각
부분이 연합과 통일성이 공존함을 보완하였다. 또한 메이첸(Machen)은 성경이 종교와 영감의 책일 뿐만 아니라 과학과 외적
역사(external history)에도 무오하다고 말한다.
곧 성경의 과학적인 면을 더욱 강조하는 그의 태도이다. 성경은 사실이며, 과학이다. 이에
메이첸(Machen)은 말하기를 기독교는 과학과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는 다른 지식 분야와 상호 관계가 없는 악의 없고 무익한 부수 현상이
아니다. 라고 하여 성경과 과학, 타학문과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또한 메이첸에게 있어서 성경은 교리에서 시작을 한다. 그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평하며 말하기를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만을 청중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어떤 계획과 권고는 없다. 단지 사실들,
교리들이었다. 성경 어디에서나 그렇다. 처음은 교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생활이다. 결국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복음에서
추론한 것이 아니다. 메이첸(Machen)에게 있어서 교리는 처음부터 복음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결 론
근본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물인 듯한 인상을 주었고, 또 일종의 열광주의를 연상케 하고 있지만 그 본질에는 인간 생활의 기반이 되는 신앙이 깃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신앙이다. 그러나 그 곳에는 충분한 위안과 영감으로 가득차 있다. 그리고 이 신앙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성서로 돌아가서 비평가들의 초인간적 지도를 따르지 않고도 자유로이 성서를 읽을 수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런 신앙 가운데서 가치와 존귀의 의미를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지위에 있는 사람이든지 속죄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이웃에게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손을 뻗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본주의가 초자연주의를 강조하고, 성경의 객관적 계시와 정확무오한 권위에 정면
도전하고, 그리스도의 처녀탄생, 그리스도의 신성, 대속교리, 부활, 재림등 기독교의 근본교리들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나, 거기서
몇 가지 약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첫째로, 근본주의의 약점은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을 깊이 보지 못하는 점이다. 구약시대의
신자들 가운데는 율법으로 구원을 얻고, 신약시대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은 다같이 은혜언약에
속하는 구원방법의 계시이다.
구약이 은혜의 약속에 대해 계약이라고 한다면, 신약은 그 성취에 대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연속성과 통일성을 갖는 것이다. 둘째로, 근본주의 약점은 일반은총(자연은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세속 학문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여 마침내 반()지식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셋째로, 근본주의는 개인의 종교경험을 강조하는 경건주의적 경향을 보이면서 기독교의 사회적,
문화적 명령을 무시한다. 종교는 개인의 기도생활과 성경공부, 그리고 교회출석에 국한되고, 경제학이나 사회학, 그리고 자연과학이 제기하는 문제들에
대하여는 무관한 생활을 한다. 그러므로 문화, 과학은 성경신학에 의하여 지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한정되고 제약을 받는다.
지금까지 근본주의의 운동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자유주의의
도전에 대항하여 다시 한번 성경의 권위를 확인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이해하려고 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본주의 내에서 발생한 분열과 또한
세대주의 운동 등의 측면으로 가급적 이해하고자 하였다.
우리 한국적인 교회의 상황도 보수주의, 개혁주의를 앞세우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근본주의, 즉 1920년 이전의 초기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기본적인 것들을 수호하고자
하는 신앙의 결단과 응징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퇴색하고 변질된 근본주의의 갈림길인 신근본주의와
신복음주의의 현상은 우리가 경계해야만 하는 신학적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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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학자 메이천 박사의 신학과 사상 조명
메이천 박사(1881-1937)의 전기가 총신대학교 명예교수인 홍치모 교수에 의해 「메이천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으로 번역, 출간된 것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신학대학원과 일반대학원에서 메이천 박사의 신학과 사상을 강의해 오면서
우리말로 된 책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터에 금번에 출판된「메이천의 생애와 사상」은 한국에서 메이천 연구에 크게 공헌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본서는 "역자서문"에서 밝힌 대로 한국교회가 메이천을 근본주의자로 매도하는 풍조에 대하여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에 대한 재조명의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역자인 홍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메이첸 교수에 대해서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인상은 일반적으로 나쁜 편이다. 한국교회는 그를 가리켜 분열, 혹은 분리주의자, 독선주의자, 근본주의자로 취급하면서 매도해 왔다. 너무나
피상적이고 몰상식한 언동이 지난 60년 가까이 한국교회 안에 난무하였다. 지금도 메이첸 교수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것이 없다, 그는 여전히
완고한 근본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메이첸 교수 자신이 언급한 바 있지만 그는 칼빈주의자였다." "
이 책의 원 이름은「잔 그레섬 메이천: 전기적 비망록」으로, 저자는 메이천의 뒤를 이어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신약신학자였던 스톤하우스 교수이며, 영국의 에프. 에프. 브루스 교수와 쌍벽을 이루며, 한 시대의 신약학계를 선도한
인물이다.
이 책은 전체 671쪽이며 차례로 25장으로 되어 있고, 메이천의 출생부터 소천까지의 사건들을
일목요연하게 각각의 제목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제1장과 2장에서는 미국의 남부에서 자란 메이천의 어린 시절을 조명하고 있으며, 그의
잔스 합킨스 대학교 시절은 제3장에서, 프린스톤 신학교 시절은 제4장에서 다루고 있다.
제5장, 6장, 7장에서는 괴팅겐 대학교와
말부르크 대학교에서의 독일 유학 시절을 다루고 있으며, 제8장에서 11장까지는 프린스톤 신학교 교수로서의 활동을, 그리고 제12장에서
15장까지는 세계 제1차대전과 메이천의 군 입대를 다루고 있다.
메이천의 주요 저서들인 「바울종교의 기원」(1921년), 「초보자를 위한 신약헬라어」,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년)에 대한 기록은 제16장과 17장에서, 파즈딕 목사로 인해 신학교와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 안에서의
갈등(일명 장로교 논쟁)은 제18장부터 22장까지 다루고 있다. 이후 프린스톤 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운 일(1929년)은
제23장에서, 장로교 해외독립선교부의 설립과 메이천 재판 사건은 제24장에서, 그리고 제25장은 그의 소천과 관련된 에필로그를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메이천은 미합중국장로교회의 목사요 신학교 교수로서 임종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았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메이천의 독일 유학 당시 이미 미국의 교계, 특히 자신이 속한 미합중국장로교회의 상당 부분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당시 유럽을 석권한 "자유주의"(또는 구자유주의, 현대주의로 명명)의 영향은 빠른 속도로 미국의 교회들과 여러 신학교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메이천은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하던 대로 수구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신에, 기독교 신앙과 신학은 학문적인 변증이
가능하며 또한 마땅히 최선을 다하여 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메이천은 목사요 신학교 교수로서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두 가지 분야에서 이 일을
계속했다. 첫째는 논문과 저술을 비롯한 학문적인 추구를 통하여 기독교가 유일하고 참된 종교인 것을 드러내는 것과, 둘째는 강연과 활동을 통하여
기독교와 성경의 진정성을 역설하는 방법이다. 이 결과로 당시 신약신학자로서의 메이천의 명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바울종교의 기원」과
「초보자를 위한 신약 헬라어」는 80년이 지난 지금도 바울신학연구와 성경헬라어 연구의 필독서가 되고 있으며, 1930년에 출간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불후의 명작으로, 아직도 이 방면에 더 나은 저작이 출판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은 말이다.
올해는 죽산 박형룡 박사 (1897-1978)의 출생 106주년과 더불어 미국 프린스톤 신학교
유학 시 그의 스승이요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마지막 주자인 메이천 박사의 서거 66주년이 되는 해이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은 구 프린스톤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은 그가 신학사, 신학석사를 마친
1923년에서 1926년 사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구체적으로 비롯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프린스톤 신학교가 설립된 1812년부터, 프린스톤 신학교의 이사회의 재편성으로 말미암아 동
신학교가 신학교 설립 이래로 표방해온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 신학을 포기하고, 그 시대의 사상적 흐름이었던 종교다원주의를 신학교의
나아갈 방향으로 정한 1929년까지 동 신학교에서 주장되고 교수된 신학을, 1929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교수 되어온 신학과 대조하여 구 프린스톤
신학(Old Princeton Theology)이라고 부른다. 구 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대표자들로는, 프린스톤 신학교 설립과 더불어 첫 교수였던
아치볼드 알렉산더로부터 찰스 하지, 아치볼드 알렉산더 하지, 워필드, 게하르더스 보스, 메이천 등이 있다.
박형룡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에 유학한 1923년은, 미합중국 장로교회가 소위 근본주의대
근대주의 논쟁에 휘말려있던 시기로, 1910년에 채택된 「근본교리 5개조」가 1916년과 1923년 두 차례에 거쳐 확인 절차를 거치고,
미합중국 장로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거나, 목회를 희망하는 타교단의 목사에게 최소한의 신앙고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또한, 이 해는 위필드 박사가 교단 내 점증하는 자유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한 세대의 임무를
마치고 소천(1886∼1921년 사이 35년 동안 교수)한지 2년 후로,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마지막 주자 메이천 박사가 「바울종교의
기원」(1921)에 이어, 「초보자를 위한 신약 헬라어」(1923),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를 출간하고, 당시 자유주의 또는
현대주의(Modernism)와의 논쟁에서 보수연합세력의 지도자로 부상한 해이기도 하다.
1812년 신학교의 설립 이래로 1929년까지, 동 신학교에서는 스코틀랜드의 상식철학의 도움을
받아, 성경의 영감과 무오, 그리고 그 권위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동시에 장로교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도게요와 대소 요리문답에 구현된 성경의
근본교리들에 대한 입장을 일관되게 변호했다.
구 프린스톤 신학자들의 이러한 태도야말로,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소위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에서, 메이천으로 하여금 그 논쟁의 중심에 있도록 만들었다. 사실, 메이천은 자신이 근본주의자로 불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개혁신학자로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천은 당시 용어대로 정의하여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당시 근본주의 운동은, 자유주의 또는 근대주의 신학에 반대하는 범교단적인 보수연합세력의
결집이었으며, 오늘날의 왜곡된 용어의 사용과는 분명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근본주의 운동은 오늘날 용어상 구별이 필요하다.
19세기 후반부터 1930년대, 정확히 말하면 메이천 박사가 미합중국 장로교회에서 목사직이
박탈된 1936년까지와 그 이후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를 우리는 근본주의 운동으로 부르고, 후자(1936년 이후)를 "신근본주의"로
부른다.
1936년 이후의 신근본주의 운동에서는, 1936년 이전과는 달리, "분리의
교리"(Doctrine of Separation)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1차 분리를 넘어 2차 분리를 주장하고 있다. 이런 역사적, 신학적
맥락에서 구프린스톤 신학 전통의 마지막 주자 메이천은 1920년대와 1930년대 근본주의 대 현대주의 논쟁에서,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보수연합세력의 결집인, 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논쟁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기독교의 한 형태가 아니라,
기독교와는 뿌리가 서로 별개인 다른 종교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근본주의 운동은 메이천이 속한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서는 1925년을 분수령으로 보수세력의 영향이 급속도로 떨어지게 되었다. 1925년 총회장에 당선된 프린스톤 신학교의 찰스 어드만의 영향과,
같은 해 테네시주 데이튼 시에서 열린 원숭이 재판의 창조론 시비에서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1860∼1925)의 답변은 교단 내 보수세력의
영향이 현저하게 감소하게끔 만들었다.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이 격돌하던 바로 이 시기에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를 마쳤다. 후에,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는 동안 그의 제자의 한 사람인 박윤선이
1934년 미국 유학을 결심했을 때, 자신이 졸업한 프린스톤 신학교을 추천하지 아니하고,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적 좌경화를 지적하고 메이천
박사를 중심하여 새로 출발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1929년 설립)로 가도록 권한 것은 메이천의 제자로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단서가 될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으로, 1812년 프린스톤 신학교의 설립부터 1929년 이사회가 재편성되어 신학적
좌경화를 이루기 이전까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주장되고 교수되어온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줄기에 선 신학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과 사상을
연구할 때는 반드시 구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맥락에 비추어서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끝으로, 메이천의 신학과 사상 연구에 있어서 1915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초기 메이천으로,
그 이후를 후기 메이천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사실 메이천은 미국의 남장로교회 소속이었으나, 1914년 목사 안수를 받으면서
북장로교회(당시 미합중국장로교회)로 교적을 옮겼으며, 이듬해 조교수로 취임하게 되었다. 초기 메이천의 저작으로는 프린스톤 평론에 실린 서평들과
논문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후기 메이천의 저작으로는 그의 저술들이 전부 이에 속한다. 「초월하신 하나님」, 「기독교 인간관」,
「기독교와 현대신앙」등은 그의 만년에 행한 라디오 강연을 모운 것으로 유작에 속하며, 유일하게 자신의 자전적 삶의 여정을 글로 남긴 것으로
"투쟁하는 기독교"(1932년)라는 글이 있다.
금번에 출판된 본서는 또 하나의 전기인 헨리 코리 저, 「잔 그래스햄 메이천」(총신대 출판부,
1997)과, 메이천의 초기 작품을 모운 「메이천박사저작선집」(총신대 출판부, 2002)과 더불어 메이천 연구에 획기적인 기여를 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출처 http://cafe.daum.net/homoou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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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신학자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
근본주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반동으로 20세기 초에 일어난 신학으로 메이첸이 그 대표적인
신학자이다.
근본주의는 성경의 무오성과 축자영감설을 상당히 강조하며 가장 보수적인 신학체계를 가지고 있다.
박형룡 신학은 구
프린스톤 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신학은 일제 식민통치하에서 한 민족의 교육과 개화에 힘썼던 평양 숭실 전문학교에서 시작되었고, 무엇보다, 그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은 그가 신학사, 신학석사를 마친 1923년-1926년 사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구체적으로 비롯되었다.
박형룡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유학한 1923년은 미합중국장로회가 소위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에 휘말렸던 시기였으며, 구 프린스톤 신학전통의 마지막 주자인 메이첸 박사가 <헬라어 첫걸음>(1921),<바울종교의 기원>(1921)에 이어 <기독교와 자유주의>(1923)를 출간하고 당시 자유주의 또는 근대주의와의 논쟁에서 보수 연합세력의 지도자로 부상한 해이기도 하다.
미합중국 장로교회 안에서 근본주의 대 근대주의 논쟁이 격돌하던 바로 이 시기에 박형룡 박사는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석사를 마쳤다.
후에 그가 한국에 돌아와서 평양신학교에서 교수하는 동안, 그의 제자 박윤선을 프린스턴 신학교에
추천하지 아니하고,
당시 프린스톤 신학교의 신학적 좌경화를 지적하고 메이첸박사를 중심으로 새로 출발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도록 권한 것은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사상의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조직신학자로서 박형룡 박사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흔히 그의 글의 인용으로 출발한다.
그의 면모는 1977년에 발간된 <박형룡박사 저작전집>에 가장 잘 담겨있다. 전체 20권으로
되어 있으며, 이중 제1권부터 제7권까지가 교의신학 7권에 해당한다.
그의 <교의신학> 7권은 그의 창작물이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그는 일찍이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1941년판)을 번역하여 신학교의 교재로 사용했다.
이 때문에 그의 <교의신학> 7권은 벌콥의 <조직신학>에 전적으로 의존한 번역 또는 번안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벌콥의 <조직신학>과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을
외형적으로 비교만 해 보아도 잘못된 편견임이 금방 드러난다.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은 세계 교회에 "한국신학"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위대한 업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그의 저작전집 제7권에 해당하는 <교의신학 내세론>은 그 명칭에서부터 서구의 타신학자들의 것과는 구별된다.
벌콥의 <조직신학>에 서는 종말론이라 이름한데 비해, 박형룡박사는 이를 <내세론>이라고 명명했고,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구속적 관점 에 비추어 서술하고 있다.
또한 그의 교의 신학 내세론을 전체적으로 시종일관 역사적 천년기전설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는 시대론적 천년기전 재림론을 배격하고 나머지 견해를 개혁주의 교회가 모두 수용할 수 있음을 밝히고, 특히, 대한 예수교 장로회의
신학적 전통은 "역사적 천년기전 재림론"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내세론>은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 칼빈주의의
틀 안에서 매우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은 구 프린스턴 신학으로 대표되는 영미 계통의 장로교 신학과 화란 계통의 개혁신학의
조화를 일구어낸 신학으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교의신학은 루이스 벌콥의 조직신학을 기초로 하고 다른 권위자들로부터 재료를 수집하여
종합함으로써 되어진 저술이다.
그의 교의 신학은 기초적으로 바빙크 - 벌콥 게통을 따르고 있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수학한
프린스턴 신학교의 충실한 계승자들, 특히 "찰스 핫지, A.A.핫지, 워필드, 메이첸 등의 교수들의 글에서도 널리 인용하고 있다.
그가 이미 영미 계통의 신학뿐만 아니라, 이에 화란계통의 신학을 접목함으로써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 칼빈주의, 청교도적 장로교주의 신학 전통을 한국교회에 정착시킨 점에 있어서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신학적 업적은 바르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는 일평생 한국교회와 총신을 위해, 역사적 개혁주의, 전통 칼빈주의, 청교도적 장로교주의, 신학적 전통을 한국 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을 노력을 다 하였다.
박형룡 박사가 남긴 신학적 업적에 대한 바른 이해와 평가는, 총신의 과거, 현재, 미래와
직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21세기를 향해 매진하는 대한예수교 장로교 총회 전체 교회의 신학적 정체성을 지도하는 척도가 된다고 하는
의미에서 후학들의 어깨는 한 츰 무겁다.
http://cafe.daum.net/jesusins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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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신학 보수 투쟁역사에서 21세기 교회의 사명 찾자
-심창섭교수
21세기 교회의 방향 찾기 심창섭 교수의 교회사
①신학과 신앙의 정통성 회복:역사적 관점에서
②미래 신학의 방향과 복음
③신학의 현실성과 문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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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신학과 신앙의 정통성 회복 :
역사적 관점에서 미래학자들은 새 천년기에는 교단이나 교파보다는 개교회 중심의 기독교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러나 교단성과 교파성을 초월한 복음운동이 약진한다고 해도 기독교의 건강한 신앙과 신학의 바탕 위에서 교회는 세워지고 발전할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미래 교회의 건전한 성장과 발전을 위한 신학적인 입장을 정리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다룰 것이며, 둘째는 미래 신학의 방향과 복음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학의 현실성과 문화성을 다루겠다. 기독교 역사의 전반적인 신학과 신앙의 역사성을 다 취급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20세기 정통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갈라섬의 분수령을 이루었던 미국 북장로교의 분열을 중심으로 다루겠다.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가름했으며, 프린스톤신학교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새로 설립된 이 사건을 다룸으로 기독교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바르게 인식하고자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도전과 근본주의 운동 19세기부터 전격적으로 나타난 과학주의와 진화론 사상은
기독교인과 교회의 전통적인 신학과 신앙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합리주의 사고방식에 기초한 과학주의가 신학계에서도 팽배하기 시작했다. 합리적인
이론이나 과학적인 경험의 범주에 속하지 아니하는 신학과 신앙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의 고등비평주의를 탄생시켜 성경에 대한
권위와 신실성에 도전하는 신학사상을 낳았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이러한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도전하면서 신학과 신앙의 전통적인 근간을
보호하려고 형성된 운동이 바로 근본주의 운동이었다.
따라서 근본주의의 발생은 일부 비판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속좁은 보수주의자들의 사상이 아니라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성경의 진리를 보존하려 한 움직임이었다. 바로 이 현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치열한 신학사상 논쟁은 미국교회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미국의 북장로교회의 분열이 그 대표적 예이며, 구체적으로는 현대주의에 대항하여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의지 때문에
프린스톤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였던 메이첸이 중심이 되어 필라델피아시에 웨스터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메이첸은 현대주의자들의 신학사상이 잠입해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면서 특히 성경관에 있어서 비타협의
정신으로 보수주의 신학을 주장했다. 그는 성경의 고등비판을 악마로, 자유주의와 현대주의자들을 반기독교 세력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는 성경의
축자영감설과 무오성을 변호했으며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철저하게 변호했다.
문제 발단은 뉴욕의 리버사이드 제일 장로교회 목사였던 포스딕의 설교였다. 포스딕은 1923년경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라는 설교에서 “교회는 자유주의자들을 제거하지 말라”고 주장을 했다. 보수주의자들에게, 포스딕의 이 설교는 자유주의
사상을 선전하고 유포시키는 도전적인 설교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1910년과 1916년에 총회에 제기되었던 신앙의 본질적인 5개항의 기본교리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성경의 무오성,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수의 대속적 속죄, 예수의 육체적 부활, 그리고 예수의
이적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재확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사람들은 물론 보수주의자들이었으며 이 전통을 보수하려고 노력했던 대표적 신학자가 바로
그레샴 메이첸이었다. 메이첸은 특히 웨스트민스터의 신앙고백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신조라고 확신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메이첸의 반격은 대단했다. 그는 북장로교회의 자유주의자들이 교회를 떠나지
아니하면 교회 안에 평화가 찾아오지 아니할 것이며 복음적 기독교는 암울한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진보파의 공격이 시작됐다.
1924년 1월 150명의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목사들이 오번신학교에 집결, 1923년에 총회에서 통과한 5개의 근본주의 교리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를 ‘어번 성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1300여명의 목사들이 이 성명서에 서명을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보수와 진보간의 갈등이
심화되자 북장로교회의 총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문제해결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총회는 공적으로 온건한 자유주의의 노선을 취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총회 안의 보수 세력은 약화되고 종국에는 장로교의 기본교리 논쟁과 신학 논쟁은 자유주의 수용이라는 오점을 남긴 채 퇴조하기 시작했다.
프스딕 목사와 어번 성명서의 영향은 교단 신학교였던 프린스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학교
안의 진보와 보수의 세력은 교수와 학생들뿐만 아니라 학교의 양 이사인 운영이사회와 재단이사회에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특히 당시의 학장이었던
스티븐슨과 어드만 교수는 관용정책을 폈고 보수 진영의 선두주자였던 메이첸은 관용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력하게 천명했다. 논쟁은 어드만과 메이첸
사이의 불편한 관계에서 출발하였다. 어드만 교수는 실제로는 신학적으로 보수주의자였지만 스티븐슨 학장의 관용정책을 지지했다.
어드만과 메이첸의 관계가 악화된 것은 프린스톤 제일장로교회의 목회현장이었다. 메이첸은
1923에서 1924년 사이에 이 교회의 임시목사로 봉사했다. 당시 이 교회에 출석하던 프린스톤대학의 영문학 교수인 헨리 반 다이크 박사는
메이첸의 설교가 분리주의적인 비성경적인 설교라고 비난하면서 교회출석을 거부하였다.
메이첸은 교회의 평화를 위해 목사직을 사임하게 되었고 후임에 어드만 교수가 부임했다. 문제는
어드만 교수가 설교를 하기 시작하자 반 다이크 교수가 다시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사건을 취급했던 당시의 보수파 주간지였던 ‘더
프레스비테리언’(The Presbyterian)에서 반 베이크의 교회 출석을 보도하면서 반베이크가 자유주의 만큼 어드만도 자유주의라고 몰아세웠던
것이다. 이 보도는 어드만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고 메이첸과 어드만이 적으로 갈라서게 했으며 그 결과 프린스톤 신학논쟁이 가속화됐다.
메이첸 교수는 이 보도와 자신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변명하였지만 이 일로 인해 두 교수는 본의
아니게 논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리고 어드만 교수는 많은 지지자들을 얻게 되었다. 동시에 일부에서는 메이첸 교수를 광신적 근본주의자라고
혹평했다. 이들로 말미암아 깊어진 신학적 논쟁은 정치적으로 비화됐고 프린스톤신학교의 양 이사인 재단이사회와 운영이사회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운영이사회는 주로 메이첸의 신학노선을 지지하는 보수주의자들이었고 재단이사회는 스티븐슨과 어드만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학생들도
양분되었으며 특히 복음주의 학생연맹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결성되어 프린스톤의 향방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메이첸이 사주한다는 탄압적인 비난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는 메이첸의 교수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워필드 교수가 죽은 뒤에 변증학
주임교수 자리가 비게 되었고 운영이사회는 메이첸 교수를 그 자리에 추대했다. 그러자 운영이사회의 이 결정에 불복한 학장 스티븐슨과 어드만 교수는
총회에 청원하여 이사회의 결정을 보류시켰다. 이로 인해 총회에서는 특별조사위원회(The Thompson Committee)가 조직되었고 이
위원회는 메이첸의 임명을 보류시키고 양 이사회의 통합안을 총회에 건의했다. 톰프슨위원회의 건의안은 1929 총회에서 승인되었고 33명의 단일
이사회가 새로 구성됐다. 이 단일 이사회는 프린스톤신학교는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을 견지한다는 내용의 확인 성명서를 발표했으나 메이첸은 불확실한
이들의 행동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1929년 가을 메이첸은 필라델피아에 새로운 웨스터민스터신학교를 개설하고 강의를 시작했다.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 보수를 위한 투쟁 메이첸 교수의 투쟁은 성경적인 정통신학의 보수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역사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의 회복이었다. 메이첸은 독일 유학을 통해서 신학의 좌경의 심화 과정을 경험한 신학자였다. 그는 진화론과 과학주의 그리고 성경의 고등비판은
이미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키고 신학의 세속화를 가속시키고 있음을 깊이 인식했던 것이다. 메이첸은 프린스톤 신학의 전통은 하지와 워필드 등의 정통
신학자들이 고수한 성경의 영감과 무오성 위에 서 있으며 이 신학을 유지해야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체성을 보존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메이첸은 워필드 교수가 서거했을 때 그의 어머니에게 워필드 교수를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는
찬사의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메이첸이 신학과 정통성을 얼마나 고귀 한 것으로 여겼는지는 자신의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문제는 단지,
우리가 우리들의 신앙에 근거하고 있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심 가운데서도 여전히 신앙을 선택할 수 있는 신앙에 근거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다.” 메이첸의 확신은 분명했다. 역사적인 기독교의 정통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길만이 인간의 구원을 담보하는 유일한 진리였던
것이다.
역사적인 기독교의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에서 빗나가기 시작한 프린스톤신학교와 미북장로교회의 역사는
메이첸이 예견한 데로 현대주의 노선을 지속적으로 유지했다. 프린스톤 신학은 신정통주의의 미국내 메카로 등장했으며 북장로교회는 점점 자유주의와
세속적인 신학과 신앙의 노선을 밟아가게 되었다. 그 결과 1967년에는 드디어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을 수정하는 작업을 하였고 이 수정을 통해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부분을 외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북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WCC) 등의 운동을 주도하면서 성경의 본질적인 구속의
은총의 원리를 외면하고 사회복음주의적 관심으로 기울게 되었다.
특히 세계교회협의회가 종교다원주의 색깔을 가지고 있음에도 전혀 거부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는
관용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종국에는 여성안수가 허용되었고 교단에 동성연애 목회자가 생기는 등 시간이 감에 따라 복음과 성경의 가르침을 빗겨가는
교단의 정책이 심화되었다. 21세기에도 이러한 변화의 물결이 여전히 가속화될 가능성이 짙은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21세기의 교회는
역사적인 신학과 신앙의 정통성을 회복하여 복음적인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시대적인 요청과 도전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신학과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는 길만이 교회가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는 대안일
것이다.
②미래 신학의 방향과 복음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로 유명한 한스 큉은 새 천년의 종교에 대한
강연에서 새 천년에는 기존의 정통종교들이 그것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힘들며 서구인들은 동양종교를, 동양인들은 서구종교를 찾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새 천년에 종교의 패러다임이 심하게 바뀌어 질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즉 새 천년에는 인간은 자신이 전통적으로 믿어 오던
종교적인 가치나 본질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넘어서서 새로운 영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더군다나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늘 아래서 그리고
엄청나게 변화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 인간의 종교적인 가치 개념도 변화하리라는 추측이다.
이러한 변화를 대면하면서 미래 신학자들의 화두에 오른 이슈는 종교다원주의이다. 종교다원주의의
성향이 날로 짙어 가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개혁주의 정통신학과 복음의 정체성에 대한 자리매김을 할 필요가 요청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근본적
유일신론’ 포스트모더니즘의 경향 아래 종교다원주의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종교다원주의가 갖고 있는 최대의 위험성은 바로 근본적
유일신론의 개념이다.
이 개념은 지금까지 제종교들이 공통관심사(환경문제, 가난문제, 평화와 정의문제 등)를 위해 서로
대화한다는 차원의 개방성을 넘어 종교간의 존재론적인 본질성의 융합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독론 중심으로 형성된 기독교의
배타성을 극복하고 신존재 중심의 차원에서 타종교를 이해하고 수용하자는 신학적 발상이다. 이는 하나님을 하나의 궁극적인 실재로 인식하는 철학적인
신존재 이해에서 출발한 것이다. 하나님을 한 장소나 특정한 종교에 국한 시킨다면 도리어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게 하는 부족 신앙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잘못된 배타주의의 산실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도식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유일신론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고 예배하는 배타주의의 논리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반면에 근본적인 유일신론은 만유의 주인인 한 분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서 나오는데 이는 모든 종교가 각자 경험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 중심의 해석을 통해 타종교와의
만남과 포용성을 기독론 안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신학자는 박종천 교수였다. 그는 특히 상생신학의 이론을 근거로 최대치의
기독론(Maximum-Christology)을 주장하면서 타종교와의 본질적인 수용성을 제시하였다.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전통적인 삼위 일체의 개념에서 하나님 중심의 개념으로 전환하려 했던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삼위 중의 한 위격으로 국한된 해석에서 이해하지 말고 하나님이란 보편적인 신 개념에서 이해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론
자체가 신중심을 포함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니이버가 주장한 근본적인 유일신 개념과 유무상통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지향하는 운동 가운데서 바로 이러한 최대치의 기독론이나 근본적인 유일신론이 신학의 패러다임을 존재론적으로 바꾸려는 극단적인 움직임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은 많은 종교적 전통들을 통하여 실현된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던 것이다. 이런
주장의 결과로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학계의 모임에서 어느 교수는 대표기도를 드린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마호메트의 이름으로, 석가의 이름으로,
그리고 공자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종교다원주의 부작용 종교다원주의가 모색하는 새로운 종교의 패러다임은 범종교적인
가치관의 형성은 물론이고 종교간의 혼합을 포함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는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외면한 채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기독교 진리와
타종교를 융합해 보려는 과정이며 이것은 다원화가 아니라 일원화 혹은 통폐합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는 종교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혼합절충주의에 빠지는 위험을 갖고 있는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초대교회의 영지주의자와 같은 이단들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특별히 토착화라는 이름 하에 신학적
상대주의나 포괄주의 혹은 융합에의 길을 모색하는 것은 분명히 종교와 문화의 고유적인 독특성과 차이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단순논리의 모순에
불과하다. 만약 민족의 제 종교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적인 경험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운동이나 기독교적인 종교경험과 동일시한다면 이것은
결국 기독교의 토속종교화를 의미하며 또한 토속종교의 재건에 불과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종교적인 경험의 나눔을 통한 정체성의 확인보다는 오히려 종교의 붕괴성 즉
기독교의 붕괴성을 초래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편적 경험을 토대로 한 종교 다원화운동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탄생시킬 것이며 도덕과 종교의
혼돈을 유발시킬 것이다. 혹자는 종교다원화 현상은 서로 각자의 종교를 인정하자는 다원화이지 융합이나 합일이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휘의
난무에 불과하다. 결국, 동학의 하느님, 정감록의 하느님, 단군신화의 하느님, 불교의 하느님, 유교의 하느님을 기독교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차원에서 다원화 이론을 전개하는 것은 극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전제에서 다원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통기독교의 그리스도
유일구원관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주장인 것이다. 그리고 종교다원화는 다원주의의자들의 주장처럼 종교의 보편성을 만족시키겠지만 종교간의 특성을 희석화
내지 무시하여 도리어 종교의 아노미 현상을 초래할 것이다. 만약에 종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모든 종교의 공통된 경험을 찾아 변증법적으로 종교의
공감대만 주장한다면 시대마다 새롭고 이상한 신흥종교나 신의 존재가 발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적인 정통신학과 신앙은 초대교부인 키프리안의 말처럼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데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배타적인 유일 구원관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다. 이것을 무시한 종교간의 대화나 타협은 도리어
종교붕괴현상을 유발시킬 것이다. 종교다원주의야 말로 예수의 유일구원을 보편화 해 버리기 때문이다. 비록 포스터모더니즘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대안으로 기독교계에서나 종교계에서 종교다원화 현상을 거론하고 있지만 계시종교인 기독교의 진리를 상대화시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인본주의의
오만인 것이다.
상생신학의 이해에 있어서도 종교간의 오해와 갈등을 넘어서 평화적인 공존의 의미에서이지 기독교와의
본질적인 상생의 원리를 나누자는 주장은 받아 드릴 수 없는 것이다. 새 천년의 기독교의 과제는 종교적인 다원화 현상 속에서 바로 정통신학과
신앙의 구원관을 지키고 선포하는 데 있다. 특히 한국의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기독론의 보편성과 공명성을 삼위일체에 호소하는 종교다원주의의
범재신론적인 기독론은 예수의 속죄의 사건을 사회적, 문화적, 생태학적 상관성으로 유도하면서 인간의 내적 죄악의 치유를 외면하는 논리를 잉태시키고
있다. 기독교가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생명줄은 바로 그리스도의 유일구원관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의 유일 구원사상을 배제하고 기독교는 타종교와의
대화나 공존을 위한 만남의 경험을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공동선 추구의 가능성 하버드대학교 신학부 학장이었던 크리스터 스텡달 교수는 하버드
세계종교연구센터에서 개최된 세미나에서 오늘날의 종교적인 상황을 설명하였다. “종교간의 문제는 그토록 심하게 우리들을 괴롭혀 온 서로 간에 있는
미움과 적대감이라는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잔해가 더 이상 낙진하지 못하게 하고 신앙과 헌신이라는 인간의 위대한 힘을 실재화 하는 방안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사상을 전면 수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위의 언급 속에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에서 경청할 부분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의 본질을 변질시키거나 혼합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종교간의 갈등을 통해서 빗어진
비극을 해소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지난 2000년간 지구촌의 종교는 매우 빈번하게 종교라는 이름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핍박하거나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많은 고통을 주어왔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들이 종교간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서로간의 개인적인 살인행위와 파괴 행위
이상이었다. 이것은 더 이상 인류가 지불해서도 안되며 지불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경험하면서 종교들이 새 천년에도 지속적으로 서로 배타적이며 반목과 질시를
되풀이하기보다는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사회와 국가의 공동선을 위해서는 서로 대화하고 방안을 강구해 가는 일들을
모색하는 차원에서는 종교다원주의의 고민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공동선을 위한 대화나 만남은 각자의 존재론적인 신앙의 본질을 양보하거나
부인하면서 융합의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기독교는 그것의 존재론적인 신앙의 본질성과 그리스도 유일구원성의 진리를 손상시키지
아니하는 범위 내에서, 그리고 교회(교단)의 합의가 모아진다면, 재난구호나 에이즈 퇴치사업 같은 사회적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에 있어서 타종교와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http://cafe.daum.net/chongtheol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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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자들의 문화 이해)
성경에 문화적 개념은 창세기의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6-28.는 말씀에서부터이다.
여기서 다스린다는 것은 바로 아담의 문화적 노동(cultural labors)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아담은 우주의 한 존재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문화 창조의 명령(cultural mandate)을 받은 것이다. 이는 문화의 본질이 바로
만물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명령은 아담에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주신 동일하게 주신
명령이다. 즉 성경의 문화적 개념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분류하고, 확장하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씀에서 문화적 명령의 완성을 엿볼 수 있는데, 이 말은 모든
피조 세계를 창조하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형성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주권을 위임받은 것이므로 인간은 위임받은 주권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를 다스리며, 주관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코 인간 스스로 판단하여 다스리라는 말씀을 악용해서는 안되며, 문화에 대한 책임의
근거를 하나님에 뜻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후로 세상에 죄가 들어오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 문화적
사명을 악용하게 되고,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게 된다. 창 6:5, 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하나님은 문화적 사명을 악용한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노아를 통하여 다시금 새로운 세계를 허락하신다. 그리고 다시 한번 문화적 사명을 확인시키신다.
또한 스킬더(Klass Schilder)는 예수 그리스도는 문화의 열쇠라고 말하고, 메이첸(G.
Machen)과 반틸(H. Vantil)은 문화를 지식과 신앙의 관계 속에서 결코 격리시킬 수 없다고 말하였다. 최근에는 로끄마커(H. R.
Rookmaaker)와 쉐퍼(F. A. Schaeffer)와 같은 학자들도 문화를 성경적으로 이해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이들의 견해는 주로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롬 11:36, (cf., 고전 8:6, 11:12, 골 1:16, 시 36:9).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가 세상의 모든 영역에 걸쳐 있음을 인정하며, 문화의 출발은 그리스도시오, 그리스도가 주권자로서 다스리시며, 일하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문화 속에서 스스로가 문화 주체자임을 자각하여 하나님의 주신 문화적 명령에 책임 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문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이 삶의 전 영역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창조하는 전인격적 행위라 할 수 있다. 즉 문화란 사람이 땅과 역사와 관계된 모든 업적이다. 이에 대하여 반틸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인간이 관리하고 개발하는 일체의 일”이라고 정의하였다.
우리는 문화를 성경에 그 뿌리를 두고 이해해야 한다. 만약 성경에서 벗어난다면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이며, 저주받을 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또 노아에게 주신 문화적 사명을 져버리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그 책임을 수행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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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과 그의 신약 주해:『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중심으로
John Gresham Machen and His Exegesis on the New
Testament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Virgin Birth of Christ (1930)
목차
1. 들어가는 말
2. 메이첸의 생애와 작품: '단순한' 연대기 형식으로
3. 저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통한 메이첸 이해
3.1. 외형적 분석: 책의 배경
3.2. 내용적 분석: 책의 구조 및 논지
4.
메이첸의 신약 주해의 특징
4.1. 역사-과학적(Historical-Scientific) 접근
4.2.
증거-변증적(Evidential Apologetic) 접근
4.3. 전제-변증적(Presuppositional Apologetic)
접근
4.4. 교회-실천적(Ecclesiastico-Practical) 접근
5. 신약학자 메이첸에 대한 평가
6. 나가는
말
영문초록
참고문헌
1. 들어가는 말
현재 미국 커버넌트 신학교(Covenant Theological Seminary)의 역사신학
교수로 있으면서, 구(舊) 프린스톤의 신학과 사상에 대해 귀중한 연구를 소개한 바 있는 David Calhoun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을 지키기
위한 한 유능한 변증가로서 가장 잘 알려진 메이첸'(Machen is best known as a capable apologist for
historic Christian orthodoxy)을 주지시키면서도, 상대적으로 '신약학자로서의 메이첸'(Machen as a New
Testament Scholar)이 온전히 부각되지 못했던 아쉬움을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그러나 메이첸 박사는 신약학자로서 우리에게 합당하게 소개되지 못했다. 그가 저술한 두 개의 위대한 신약 연구서인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바울 종교의 기원』은 대체로 잊혀져 온 것이다. 그리고 메이첸이 신약학자로서 보여주었던 능력과 확신들은 그가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비평가로서 그리고 정통 기독교의 변증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한 까닭에 가려졌던 것이다. 그가 이 '위대한 전투'에 전적으로 헌신한 것과 55세에 맞은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해 메이첸은 신약학 분야에 더 엄청난 획을 긋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이 분야에 획을 그었던 자였다,..."(Trrry A. Chrisope, Toward a Sure Faith: J. Gresham Machen and the Dilemma of Biblical Criticism, 1881-1915, p. 7 - 서문 추천서에서).
이런 면에서 본 논문은 비록 제한적이지만 신약학자로서 메이첸을 조명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메이첸의 주저인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주목한 후에, 그의 주된 신학적 전제/틀 속에서 메이첸의 다른 글들에서도 발견되는 신약 주해 접근의 특징들을 4 가지로 제시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신약학자로서의 메이첸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시도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을 다루기에 앞서, 본 논문(과 메이첸 자신)을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중요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메이첸의 생애와 작품'들에 대한 주요 정보들을 연대기적으로 먼저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이것은 메이첸 활동 시기의 역사-문화-신학적 맥락을 간접적으로나마 고려해 보고자 함이며, 아래에 제공되는 '역사적 자료'를 통해서도 메이첸이 무엇보다 신약학자라는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6. 나가는 말
미합중국 장로교의 신학적 무관심 내지 좌경화 속에서, 그리고 교회-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
때나 지금이나 '역사적 메이첸'(Historical Machen)에 대한 오해는 적지 않은 것 같다. 우리는 과연 어느 정도 메이첸을 메이첸
되게(let Machen be Machen) 하고 있는가?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러나, 어떤 관점이나 접근을 통해서 그 누가 연구하든지 간에,
여전히 우리에게 남아있는 '역사적 메이첸'의 한 초상이 여기 있다. 그것은, 그가 칼빈주의 개혁신앙이 성경의 최대 표현이라는 고백 속에서도
엄밀한 신약학자였으며, 사도적 교회의 전통을 파수하는 역사적 기독교의 대표적 변증가이면서도, 학문과 신앙과 삶의 정직한 일치를 위해 최선을 다한
한 장로교 목사요 성도였다는 사실이다.
신약학자로서 메이첸이 남긴 자취는 오늘 우리 한국 신학계와 교회에 어떤 함의를 던지고 있는가? 위에서 제시한 메이첸에 대한 3 가지 평가는 오늘 우리가 처한 각자의 (보수-진보) 신학적, 신학교/교단/교회적, 그리고 한국의 문화적 상황에 따라 고려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이제 필자는, 메이첸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마지막 결론 장에서 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한 단어를 주목하면서 본 글을 맺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기독교적'(基督敎的; 크리스티아노스)이란 용어이다. 신(약)학자이든, 목회자이든, 교회이든, 성도이든, 오늘 우리 시대는 메이첸 자신이 그 시대에 의식했던 것 이상으로, 신(약)학자, 목회자, 교회, 성도 따위의 용어들이 쓰이고 있는 일상 생활과 전문 영역에서, '기독교적'이란 용어의 잃어 버렸거나 망각하기 쉬운 이 본질적 수식어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즉, 역사적 '예수가 그리스도'(예수스 에스티 크리스토스; 참조, 마 16:16; 막 8:29; 눅 9:20; 행 2:36; 5:42; 9:22)임을 믿는 무리들(참조, 행 11:26; 26:28; 벧전 4:16)에게 붙여졌던 이 용어 크리스티아노스가 메이첸의 의식 만큼이나 오늘 우리에게 좀 더 온전히 인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성도이든, 목사이든, 신학자이든, "예수가 누구인가"에 대한 나의 답변이 여전히 사도적 신앙에 기초하고 그 신앙을 고백하고 따르는 '기독교적'(基督敎的)도, '기독교적'(基督敎的) 목사, '기독교적'(基督敎的)신학자로서의 일관성있는 답변인지를 정직히 물어보아야 할 일이다.
비록 그의 시대 상황이 '순수한 신약학자 메이첸' 보다는 '변증적인 신약학자 메이첸'을 요구했다 할지라도, 신약학자로서의 메이첸(Machen as a New Testament scholar)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 더욱 깊이 있게 다룰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http://my-cgi.dreamwiz.com/wminb/artical/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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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은 분리주의자인가? 최덕성 교수(고신 신대원)
최덕성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역사신학)
http://blog.naver.com/dschoiword/110005000317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에 항거하다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한 그레이스앰 메이첸을 분리주의자로
규정하는 교회사가들이 있다.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신학대학원의 교회사 교수 가운데도 그렇게 평가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메이첸을
분리주의자로 평가는 시각은 교회사를 진리성이 아니라 힘의 논리, 기득권의 관점, 강자의 시각으로 평가한 결과이다. 신앙인물과 교회사 평가의
기준은 성경이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이첸은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이 주제는 "배교로 치닫는 교회,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 머물
것인가"에 직결되어 있다. 정당화 될 수 있는 교회분열의 경우를 말해 준다.
이 글은 최덕성 저,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2005) 제14장 “매카트니와 메이첸의
선택: 배교로 치닫는 교회, 머물 것인가 떠날 것인가?”를 옮겨 온 것이다.
1. 교리 없는 기독교
미국북장로교 총회(1934, 클리브랜드)는 그레스앰 메이첸이 장로교 독립외국선교회(The
Independent Board of Foreign Missions, 이하 독립선교회)를 설립한 것이 교단의 헌법에 위배된다고 단정했다. 장로교
신자 개인이나 교회가 독립적인 선교기관에 헌금을 바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었다. 총회 산하 선교부와 상충되는 선교기관에 헌금을 내는 것을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독립외국선교회는 교단 안에서 선교자금을 모금하는 일을 즉각 중지할 것이며, 이 단체와 관련된 교역자들과 신자들은 당장
관계를 끊으라고 지시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엄명했다.
그 무렵, 교단의 외국선교부는 포용주의 에큐메니스트 로버트 스피어(Robert Speer)가 이끌고 있었다. 총회는 자유주의 신학을 추종하는 선교사들 문제로 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고백하는 신자들이 바친 헌금이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선교사들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태국인들이 불교를 더 잘 믿도록 하고, 중국인들이 도교나 유교를 더 정성껏 믿도록 하고, 일본인들이 신도교를 더 열성적으로 믿도록 하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메이첸은 독립선교회를 조직(1933)하여 정통신학과 교리에 근거한 선교 활동을 확대하고자 했다.
보수파 지도자 클라렌스 매카트니는 총회가 메이첸과 독립선교회 활동에 제재를 가하는 결정을 하는 것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총회의 조치가 그 정신과 분위기를 볼 때 가혹하고, 엄격하고, 비성경적이고, 비장로교적이라고 말했다. 그 결정은 프로테스탄트교회의 결정이 아니라 마치 로마 교황의 교서와 같다. 조잡하고, 언어도단이며, 헌법에 위배된다. “경건한 사람들이 장로교인답게 단결하여 선한 일을 하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괴롭힘과 징계와 비난과 핍박을 받아야 하는가? 가당치 않다! 그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1고 항의했다.
자유주의 신학자 헨리 코핀도 총회의 그러한 조치가 정당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메이첸의 뜻에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총회가 정당하지 않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총회의 지시를 받은 뉴부른스윅노회는 메이첸에게 총회의 결정에 대한 응답을 요구했다. 메이첸은 총회에 불순종하는 것이 교단의 헌법과 성경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총회의 명령에 따르지는 않지만, 미국북장로교회에 남아 있을 완전한 권리가 있다. 나는 장로교회의 헌법에 따르고 있다”2고 말했다.
메이첸이 총회의 명령을 거부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총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려면 그리스도의 복음에 반(反)하는 것을 선전해야 한다. 기독교인이 바친 헌금을 비기독교 메시지를 전하는 선교사들이 사용하게 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낸 헌금을 기독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활동을 하는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 (2) 총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 명령에 복종하려고 하면 헌금을 자유의지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벌금이나 세금처럼 강제적으로 내야 한다. 그러나 선교헌금은 벌금이나 세금이 아니다. 신자가 자유롭게 바치는 예물이다. 총회가 교인들의 헌금을 금하는 것은 신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다. (3) 성경은 이러한 세 가지 행위를 모두 금한다. (4) 총회의 명령은 교회의 헌법에 위배된다. 교회헌법은 총회의 결정보다 상위(上位)에 있다. 따라서 총회의 결정은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헌법에 부합해야 한다.3
뉴부른스윅노회는 메이첸의 소명(疏明)을 접하고 7인 위원회를 구성하여 재판을 했다. 혐의는 다음과 같았다. (1) 목사임직 서약을 어겼다. (2) 장로교회의 행정과 규율에 불복한다. (3) 교회의 규정과 헌법의 권위를 부인한다. (4) 교회의 법적인 권위를 무시한다. (5) 독립외국선교회와 관계를 끊으라는 총회 지시를 거부한다. (6) 교회의 화평을 유지하려는 열의가 없다. (7) 성실하지 않다. (8) 선배들이 합법적으로 권하거나 명령하거나 바로잡아 줄 때 순종하지 않는다. (9) 주 안에 있는 형제들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한다.4 메이첸에 대한 혐의는 이처럼 여러 가지였지만 위원회가 내린 결론의 요점은 한 가지였다. (10) 총회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는 것이었다.
노회는 1935년 3월 29일에 메이첸에게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유죄 판결을 내리고 목사직을 정직(suspension)시켰다. 메이첸은 자신이 불복종하는 것은 총회가 아니라 총회의 불법적인 명령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교회법정, 곧 대회(Synod)와 총회(1936, 시라큐스)에 상소하여 변호하고자 했으나 기각을 당했다.
개혁파(자유주의)와 중도파가 장악한 미국북장로교의 법정은 정의와 장로교 질서의 기본 원칙을 비웃고 있었다. 하나님만이 홀로 양심의 주이시며, 성경이 총회와 모든 신학논쟁을 판단하는 유일한 표준이라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대원칙을 충격적일 만큼 무시하고 있었다. 『크리스챠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는 “총회의 권위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보다 우월한지 그 여부를 묻는 게 교리 문제가 아니란 말인가?” 하면서 메이첸에 대한 교회 재판의 부당성을 지적, 비판했다. 카이퍼(R. R. Kuiper) 교수는 “메이첸의 재판은 자유주의와 그 선동자들의 불관용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 비장로교적인 지도자들은 장로교 목회를 하는 훌륭한 장로교인에게 관용하려고 하고 있지 않다”5고 분석, 비판했다.
총회가 교단 산하의 선교부가 아닌 독립선교회의 활동을 제재한 것은 월권이다. 미국북장로교회 노회와 총회의 결정은 신자의 양심과 자유를 구속하는 매우 부당한 것이었다. 미국북장로교회 총회의 결정은 정치폭력이었다. 자유주의 신학자 헨리 코핀조차 그 부당성을 지적할 만큼 정당하지 않았다.
매카트니는 메이첸에게 온화한 태도를 가지라고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현실론을 펼치면서, 기독교인의 양심과 자유도 중요하지만 총회의 결정에 순응하지 않으면 당장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들이 목사로 장립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며, 독립선교회 관련자들이 장로교단 안에서 활동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고 말해주었다.6 독립선교회를 해체하고 덜 논쟁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라고 권했다. 매카트니는 교단 안에서 화평스런 방법으로 정통신학의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파급하고 싶었다.
그러나 메이첸은 매카트니의 권고를 거절했다. 미국북장로교회가 파송하는 비기독교적인 선교사들보다는 자신이 주도하는 선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훨씬 더 충실하게 전하고 있으며, 총회가 이러한 선교단체의 활동을 방해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했다.
메이첸의 전기 작가 스톤하우스는 그가 원칙에 철저하고 헌신정신이 강하고 용감하며 사람을 사귀는 능력이 탁월하고 타인의 허물에 대해 관대한 사람이었다고 기술한다.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도 관용적이며, 정치적 편법과 술책을 싫어했다고 한다.7 그러나 교회개혁을 위한 메이첸의 분투노력은 소용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교회의 분열 조짐이 여러 해 동안 나타났다. 메이첸은 교회 분열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분열을 혐오하여 ‘매우 가증스런 죄악’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교회 조직체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버렸다는 것이 입증될 경우에만, 곧 그 조직체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경우에만 떠나는 것이 정당할 수 있다고 보았다. 메이첸은 “순전한 장로교인이었다. 더욱이 장로교회의 목회자답게 교회 헌법을 옹호하려는 그의 열심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실제로 당대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장로교회 헌법이 유지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 만약 메이첸이 자신에게 개인적인 행복과 편안함을 안겨 줄 행로를 좇았다면, 그는 훨씬 이전에 장로교회를 떠났을 것이다. 그가 개혁을 위해 수고하는 가운데 겪은 것은 냉담함이나 적의 뿐 아니라 모욕과 비방이었다. 그것은 쓰라리고 우울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원칙에 대한 심사숙고가 그로 하여금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게 했다.”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엄숙하게 열린 장로교 총회(1934)와 노회의 재판법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反)하는 결정을 내렸고, 교회의 헌법을 무시했다. 총회와 노회는 조직체의 결정에 절대복종하라고 하는 교권적 압력을 가했다. 교회 안에는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 기독교와 신앙무차별론이 강세였다. 메이첸은 그러한 적들에 맞서 싸웠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로교호헌언약연합(Presbyterian Constitutional Covenant Union. 1935)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미국북장로교회의 헌법을 옹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1) 교회헌법이 바탕을 둔 하나님의 말씀, (2) 믿음과 교리문답에 관한 개혁주의 신앙고백이 담고 있는 완전하고 영광스런 신앙체계와 계시된 진리, (3) 인간 법정에 대한 맹종이 아닌 기독교인의 자유에 대한 보장과 성경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장로교 정치의 참된 성경적인 원칙 옹호 등을 목적으로 천명했다.9 이 단체는 미국북장로교회가 진정으로 장로교 정신과 원리(Presbyterianism)에 충실할 것을 희망했다.
메이첸은 장로교호헌연합 조직에 가담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겸손한 마음으로 미국장로교회의 헌법을 지키면서, 기존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하고자 했다. 자유주의 기독교와 신앙무차별주의가 통탄스러울 정도로 성행하는 상황에서 분명하고 영광스러운 기독교의 메시지를 회복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자 했다. “만약 그런 노력이 실패하고 특히 현재의 다수파의 전제주의적인 정책이 승리한다면, 희생에 개의치 않고, 미국의 참된 장로교회를 영속시키기 위해 준비할 것이다”10고 말했다.
장로교호헌연합은 진정한 장로교회를 지속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메이첸이 조직한 선교회와 마찬가지로, 기대했던 것만큼 관심을 크게 끌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이사회도 장로교호헌연합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웨스트민스터의 한 명의 교수와 열세 명의 이사들이 독립선교회와 장로교호헌연합을 지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메이첸의 올곧은 행보는 그들에게 완강한 것으로 비쳐졌다. 매카트니도 동참을 주저했다. 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기존 교단 안에] 머물러 있겠다”11는 태도를 보였다.
사태가 신앙과 치리회의 한계를 넘은 것을 본 메이첸은 매카트니에게 자신이 참다운 장로교회가 실현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고 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의 해방이 성취되도록 하기 위해 복음을 반대하는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다고 믿는다”12고 했다. 그는 당분간 교단을 떠나지 말라고 권면하는 매카트니에게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는 자들을 수용하는 ‘배교하는 교회’에서 이탈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나는 분열이 곧 이루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고 희망하면서 분열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장로교단이 그 핵심부에서 배교한 교회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그와 같이 배교한 조직 속에서 계속하여 머무는 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13
미국북장로교회 총회(1936)는 독립선교회와 관계를 가지는 교역자들의 목사직을 정직시켰다. 메이첸도 거기에 포함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장로교호헌연합은 아메리카장로교회(Presbyterian Chuch of America)로 출범했다. 가담자들은 새 교단의 출발과 관련하여 복음적 신앙이 타협적인 교회기구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활발하게 전진할 것이라고 기뻐했다. 그때 미국북장로교회는 이 새로운 교회가 자신의 것과 비슷한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그래서 아메리카장로교회는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신생 교단은 얼마 후 전천년설과 알코올음료 사용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갈등을 겪었다. 칼 매킨타이어가 이끄는 성경장로회(BPC)가 분열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페이스신학교, 비블리칼신학교, 커버난트신학교가 설립되었다.
미국북장로교회는 1967년에 바르트주의를 반영한 새로운 신앙고백서를 만들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큰 차이가 있는 고백문이었다. 그러나 이 교회 안에서 신앙고백이나 신조는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 이 교단은 1983년에 미국남장로교회(PCUS)와 통합하여 현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로 개편되었다. 이 교단 안에는 성경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속죄사역·육체부활·기적수행 능력을 부인하는 자,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길로 고백하지 않는 자도 목사로 장립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의 원죄를 부정하는 자도 목회활동, 교수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는 그러한 사람을 상당수 만난 바 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분열은 한국장로교계의 교단 스펙트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장과 통합은 미국북장로교회의 후신인 미합중국장로교회(PCUSA)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 고신과 합동은 미정통장로교회(OPC)와 역사적으로 미국남장로교회와 관련이 있는 미국장로교회(PCA)와 자매관계, 우호관계에 있다. 박형룡·박윤선·한부선·이근삼·오병세 교수 등은 구프린스톤신학 전통을 전수(專修)한 사람들이다. 프린스톤신학교 또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메이첸의 가르침을 받거나 영향을 받았다. 고신대학교(고려신학대학원), 총신대학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등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이와 신학노선을 공유하는 리폼드신학교와 커버난트신학교 등과 학문 교류를 하고 있다.
2. 매카트니와 메이첸의 선택
매카트니는 메이첸과 달리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포용하는 교회 안에 남아 있는 편을 택했다.
정통신학을 고백하면서도 좌경화 된 ‘배교하는 교단’을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교회는 거대한 조직과 재산과 인력과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가 매카트니를 이사로 초대하자 장로교 총회는 그를 프린스톤신학교 이사로 임명했다. 프린스톤은 거대한 재원을 가진 학교였다. 매카트니는 이러한 학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프린스톤신학교의 이사가 되어 정통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롱필드는 매카트니가 프린스톤신학교의 이사가 되기로 한 것은 정통신앙을 위한 책임 있는 행동을 하기 위한 동기는 아니었다.14
매카트니가 프린스톤신학교를 선택했으나 그가 메이첸의 지도를 따른다는 이유로 프린스톤신학교 이사로 봉사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1947년에 재차 총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열성적인 목회활동·설교·교육으로 보수신앙을 보급했고, 팜플렛을 제작하여 영향을 광범위하게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미국북장로교회의 좌경화, 세속화, 자유주의화의 물결을 막을 수 없었다.
좌경화 된 교회기구 안에 남아서 정통신앙을 파급하겠다고 한 매카트니의 선택이 아주 부당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진리 중심의 공동체가 되도록 하고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 신앙을 파급하는 데 이바지하는 하나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매카트니는 미국북장로교회의 정체성 유지와 추락 방지에 그다지 기여하지 못했다. 해롤드 오켕가를 포함한 열두 명의 젊은 목사들을 지도하여 미국 기독교계에 이바지했다. 그러나 배교의 물결을 막는 데 기여했다고 볼 수는 없다. 급진 좌경화 하는 교회와 신학교의 신앙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부당하게 목사직을 정직당한 메이첸은 교회가 일단 자유주의 신학을 수용하면 정통신앙의 원상태로 되돌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고서 ‘배교에 들어선 교회’에서 분리하는 길을 택했다. 기독교의 중추 진리와 교회론을 둘러 싼 지성 싸움에서 정통교리의 중요성과 신앙의 자유의 보고(寶庫)를 회복시킬 새로운 종교개혁, 곧 역사적 기독교의 복흥(復興)을 꿈꾸었다.
메이첸이 교단을 떠난 것은 ‘분리주의’ 행동인가? 이 용어가 이 경우에 적절한가 하는 것은 교리사와 교회사의 관점으로 따져보아야 한다. 로마가톨릭교회처럼 외형적 교회 기구를 절대시하는 시각에서 보면 그가 교회를 떠난 것은 분리주의 행동이다. 그러나 장로교회가 지향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영적인 몸으로, 신앙고백공동체로 본다. 교회의 존재가 무엇을 믿고 고백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으로 본다. 웅대한 기구와 거대한 재산과 체계적인 행정 조직을 가졌다고 무조건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칼빈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는 집단은 아무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을지라도 ‘교회’라고 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는 말씀선포―교리를 교회의 존재여부를 식별하는 표지(標識)로 여겼다.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는 ‘교회’라면 그것에서 성별(聖別)하는 것이 옳다고 가르쳤다. 칼빈의 관점, 곧 진리성 원칙에서 보면 메이첸의 선택은 분리주의 행동이 아니다.
교회·교단이 공적으로 이단교리를 천명하지는 않으면서도 중추 교리를 신앙하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 종교다원주의자, 거짓교사를 제재하지 않고 그들이 교회와 신학교에서 가르치도록 허용하는 경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신약성경의 가르침과 칼빈의 원리를 적용하면 그러한 집단에서 ‘자유’(liberation)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일이다. 이단보다 더 유해한 자유주의 기독교가 자리 잡도록 포용하는 그러한 ‘교회’에서 성별하는 것이 옳다. 성별은 보편성과 사도성을 가진 교회의 단일성을 보존하는 방법이다.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 배교하는 교회나 우상숭배하는 교회를 떠난 사람은 ‘분리주의자’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장로교회의 신학에 충실한 정통신학자 메이첸은 교단을 떠나고, 교회의 신학을 부정하는 자유주의자 코핀은 그 안에 남아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교회 안에는 정통신앙을 가진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이 메이첸을 따르지 않는 것은 신학논쟁이 교회 지도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문제였다는 것을 말한다. 유서 깊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신자들은 교회 자도자들과 신학자들이 그 같은 배교적이고 회색주의적인 사상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메이첸이 대항하여 싸운 것은 당시 장로교회 구성원 전체가 아니라 개혁주의 전통의 교리적 충실성을 부인하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신학자들이었다.
교회의 신학노선 설정을 위한 논쟁은 언제나 ‘별들의 전쟁’이다. 고대교회의 기독론 논쟁이나 종교개혁기의 교회론 논쟁이나 19세기와 20세기의 자유주의 기독교 문제로 인한 장로교회의 갈등에 관련된 사람은 소수의 신학자들이었다. 한국장로교회의 분열(1952, 1953, 1959)에 개입된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소수였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가 생명력과 신학적 정체성을 잃게 되는 것은 그 신앙공동체를 주도하는 극소수의 신학자 때문이다. 그 교단 안의 목회자와 장로 몇 퍼센트가 복음적 신앙을 고백하는가 하는 것보다 그 공동체를 주도하는 소수 신학자의 신학 사상이 무엇이며, 그 교단의 신학노선이 무엇이며, 교회가 어떤 류의 신학 전통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만약 메이첸이 덜 전투적인 자세로 논쟁에 임했다면 과연 다수의 정통신앙인들의 그를 지지했을까? 반드시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신자들은 ‘진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삶의 세계’(Lebenswelt)에 따라 행동한다. 개인과 마찬가지로 집단은 다양한 면들로 구형된 정신·관행·습관·언어·몸짓·상징·기호·사고방식·느낌 등에 따라 행동한다. 신학과 교리는 이른 바 클리셰(cliche), 곧 심리, 사회, 문화 요소들과 얽혀 있다. 메이첸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았다. 다수의 신자들은 정통신앙을 가졌다. 그러나 신학논쟁은 소수의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의 승리로 귀결되었다.15 교회의 좌경화와 생명력 상실은 언제나 소수 신학자들의 그릇된 사상에서 시작된다.
만약 메이첸이 교단 안에 남아 온건한 인사들을 설득했다면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가 선택한 양자택일 구도는 다양한 기질을 가진 인물들과 상이한 배경과 역사를 가진 당시 교회를 충분히 고려한 것은 아니다. 문화와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제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메이첸이 교단 안에 남아 있었어도 자유주의 신학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교회의 신학의 흐름을 바꾸어놓을 수 있을 만큼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기 어렵다. 매카트니가 교단 안에 남아 있었지만 그가 미친 영향이 두드러지지 않은 점이 이 사실은 말해준다.
메이첸이 줄기차게 펼친 논의의 핵심은 당시 교회의 지도자들이 지향하는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방지하는 데 그 초점이 있다. 어드만과 스피어 등 중도파 인사들이 취한 태도는 교회가 고유한 신학적 정체성을 포기하도록 하는 물꼬를 텄다. 보수파의 어정쩡한 자세와 중도파 인사들의 회색주의 태도 그리고 그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결탁은 교회의 좌경화와 신학교의 변질을 몰고 왔다.
롱필드는 미국북장로교회가 메이첸을 잃은 것이 교단의 큰 손실이었다고 지적한다. 당대 최고의 정통신학자를 붙들지 않은 탓으로 교인 수가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사양길에 들어섰다고 한다.
3. 사랑, 관용, 진리
자유주의 기독교는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교회의 지평(horizon)을 넓혀 이웃·가난한
자·억압받는 자에 대한 관심과 구조악·질병퇴치·교회의 사회적 책임·기독교인의 실존적 삶에 대한 통찰을 갖게 했다. 인종차별 철폐·빈민구제·사회악
타파·사회정의 실현·교회와 국가의 관계 등에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보수계 교회들의 사회에 대한 이해·교회의 사회적 역할·사회구조 변혁에 대한
인식과 대처능력이 진보계 교회들보다 덜 활동적인 것은 사실이다. 빌리 그레함과 존 스토트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복음주의세계선교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n World Evangelism)의 ‘로잔언약’(1974)은 보수계 기독교가
사회에 대한 관심을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교회와 사회 사이에 높은 담장을 가로질러 두었던 보수계 선배들의 태도와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사회참여·사회정의 실현·질병퇴치·인권회복 등은 인도주의 차원에서도 할 수 있고, 비기독교 단체도 수행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불교승려와 이슬람 사제와 연합하여 수행할 수도 있다. 성경 가르침에 따르자면 교회가 이것도 취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죄·십자가·구원·영생·영적인 삶과 이웃사랑의 실천과 사회와 국가와 문화에 대한 책임 중 그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참여와 사회윤리 실천과 선행이 교회의 생명을 잃게 만드는 흐름과 무관하다면 교회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사회참여에 열성을 보인 자유주의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교회에 남긴 것은 생명력 상실과 교인 수 감소와 불명확한 정체성이다. 자유주의 기독교는 성경이 제시하는 중추 교리와 십자가와 영생의 도리를 거부하거나 이러한 주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사회참여, 사회구원을 기독교의 신앙의 본질인 것처럼 가르쳐 왔다. 사회에 대한 관심과 기여는 그 자체로 훌륭하다. 그런데 그것과 함께 찾아온 것은 신앙공동체의 생명력과 정체성의 상실이다. 기독교 신앙을 가져야 할 까닭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못하는 불명확한 정체성이다.
이 점을 고려하면 자유주의 기독교의 사회복음주의 신학이 달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가정교회는 사회참여·사회윤리·교회와 국가의 관계 활동에는 미미하지만 왕성한 생명력과 순수한 신앙과 오순절적 열정을 가지고 있다. 중생한 그리스도인이 신적 성품에 참여할 수 있고, 그러한 사람이 수행하는 사회참여와 윤리가 의미를 지닌다.
흥미롭게도 자유주의자 코핀은 1952년에 이르러 자유주의 기독교에 대한 확신을 잃었다.15 자유주의 신학은 코핀조차 그 흥기(興起)를 걱정할 정도로 위험하고 세속적이고 유해한 것이었다.
미국북장로교회의 신학 논쟁기에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것들은 오늘날 대부분 참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가 주장하던 것들을 포기했다. 자신들의 주장이 옳지 않는 것임을 자인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덧없는 신학에 연연하면서 교회에 남긴 것은 엄청난 불행과 비극이다. 생명력 없는 기독교, 교회의 정체성 상실, 교회분열을 안겨주었다.
자유주의 기독교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도의 역사성을 부정하고 성경무오성을 불신하며 기독교 신앙을 상대화 하는 것이다. 복음서 기록의 계시성을 부정한다. 신앙을 역사적 사실에 토대를 두지 않고 실존적인 결단을 통해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진리를 양보하여 하나 됨을 얻고자 한다. 외적인 통일성을 위해 내적인 하나 됨을 보장하는 교리를 희생시킨다. 교리와 생명을 상반 관계로 본다. 기독교의 본질이 윤리에 있다고 본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추구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구주, 구원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지만 유서 깊은 유서 깊은 기독교의 신조와 신앙고백을 의중 유보한다. 문구 하나 하나에 사적(私的) 의미와 이의(異意)와 다른 개념을 덧붙여 해석한다. 민중신학자나 해방신학자가 말하는 구원과 개혁주의 신학자가 말하는 구원은 개념이 다르다. 전자는 사회악·구조악·질병·가난에서의 해방을 의미하고, 후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이 제공하는 죄 사함과 영원한 형벌에서의 해방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사랑과 관용정신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거짓교사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다. 그는 이단을 단호히 배격한다. 에베소서 1-3장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최소의 터’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 ‘터’ 위에 세워졌다. 이 ‘터’를 배제하는 하나 됨은 거짓된 연합이며, 그리스도와 불일치하는 일치이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이미 존재하는 하나 됨을 깨뜨리는 연합이다.
신약성경과 바울의 관점에서 보면 미국북장로교회의 갈등과 분열은 메이첸과 정통신앙 수호자들의 전투적인 자세와 불관용 태도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성경이 말하는 최소한의 ‘터’를 허물고 주의 포도원에 여우가 들어와 분탕질하는 것을 허용한 결과이다. 교회의 좌경화와 생명력 상실은 중도파 지도자들이 교회의 신앙고백적 정박지를 허물려고 하는 자유주의자들에게 관용하는 태도를 취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전도자를 세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성도를 온전케”(엡4:12)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했다. 구원의 유일무이한 ‘터’ 위에 선 성도들이 신앙의 초보에 머물지 않고 단단한 것을 먹고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분별하도록 가르치기 위해 그들을 세웠다.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세상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도록(엡4:14) 하려는 목적이다.
바울은 ‘진리 안에서 일치’만이 정당하다는 것을 말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1)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불신하거나, (2)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의미를 의중유보하거나 (3) 같은 용어를 사용하지만 완전히 다른 개념을 부여하거나 근본 개념을 바꾸어 해석하고 (4) 자유주의 신학자, 거짓교사를 규제하지 않는 교회와 일치를 도모하는 것은 배교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이미 이루신 연합’을 유지하자면 자유주의 신학자, 종교다원주의자가 설교강단과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는 교단과 연합, 일치를 삼가 해야 한다.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 태도를 가진 교단과 하나 됨은 옳지 않다.
믿음의 터가 다른데 누구를 향하여 함께 기도할 것인가? 전해야 할 것이 일치하지 않는데 무엇을 함께 전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고백하지 않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하늘로 좇아 나타났다고 하는 진리를 믿지 않으며 하나님의 진노 따위는 허황된 교설(敎說)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무엇을 함께 고백할 것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지 않고 단지 신앙의 차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과 무슨 선교를 함께 할 것인가?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의 대속 제물로 내어주었다고 믿는 사람과 악을 허용한 하나님을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사람 사이에 진정한 교제와 일치는 불가능하다. 성경은 “한 성령, 한 주, 한 믿음, 한 세례, 만유 위에 계신 한 하나님”에 대해 일치된 신념을 요구한다.
이상의 논의는 다음 세 가지 경우에 독자적인 교회설립이 정당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박윤선 교수가 어느 글에서 지적한 것과 같은 결론이다.
첫째, 교회가 우상숭배를 할 때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로마가톨릭교회에서 분열한 경우이다.
둘째, 교회가 기독교의 중추 교리를 부정하거나 부정하는 자를 제재하지 않을 때이다. 메이첸이 자신에게 정치폭력을 가한 교회, 포용주의, 다원주의, 신앙무차별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를 떠난 경우이다. (따라서 메이첸을 분리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 힘의 논리, 기득권의 관점에서 평가한 것이지 진리성에 기초한 평가가 아니다. 교회사 평가의 기준은 성경이다).
셋째, 교회가 진리에 충실한 사람을 추방할 때이다. 출옥성도들 중심의 경남노회(현 고신)가 건실한 단일 장로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지만 다수의 우상숭배 전력자들이 주도하는 총회가 정치폭력으로 그들을 제거한 경우이다. 그들이 새로운 교단을 형성한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신약성경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 가지 경우에 ‘분리주의,’ ‘교회분리운동’이라고 보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판단이다.
[최덕성 저, “에큐메니칼운동과 다원주의”(서울: 현장과본문사이, 2005)에서 옮겨 온
것이다. 각주는 책을 보라. 북장로교회의 좌경화 역사에 대한 관련 글들을 책에서 참고하라.]
http://cafe.daum.net/xingyuanxiaoq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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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첸의 바울 신학 이해
李 鍾 潤(서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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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G. Machen의 바울 연구는 그 시대 상황을 잘 표출하고 있다. 합리주의와 역사 비평주의
특히 종교사학파들이 득세하던 18세기, 19세기의 소위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강한 도전을 하고 있다.
특히 Machen은 19C말 신약학계의 가장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던 예수와 바울의 문제에 대한
W. Wrede의 입장에 크게 도전을 하면서 성경적 바울 신학을 세우고 방어하는 일에 챔피언이 되었다.
본 논문은 Machen의 바울 신학 이해를 위해 Machen을 촉발시킨 20세기 초 바울 연구의
중심 인물인 Wrede를 살펴본 후 변증적 신학자로 알려진 Machen의 입장을 정리하고 Machen 신학이 오늘에 미치는 신학적 평가를 하고자
한다.
Ⅰ. 20세기초 예수-바울 문제에 대한 폭발
19세기말 신약학계는 기독교의 창시자가 예수냐 바울이냐를 찾는데 논쟁을 모았다. 1905년 W.
Wrede의 Paulus가 출판되면서 예수-바울 문제의 토론은 결정적 전환점을 맞게 된다. Wrede는 바울을 신학자로 해석했다. 물론 논리적
체계를 갖춘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바울의 사상에는 모순과 불연속성이 있음을 찾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에게서 기독교는 사상적 체계를
이루었다고 본다. Wrede의 주장이 19C 연구들과 구별된 것은 바울의 신학이 그의 신앙과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신앙과 신학의 구별을 부인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가 여기서 말한 것은 교리와 경건을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Wrede는 기독론을 바울 신학의 중심으로 보았다. 바울은 그의 회심 경험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분명한 확신을 얻었다.
그의 신학은 여기서부터 출발된다. 바울의 그리스도는 선재하신 하나님으로 신성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시어 죽음과 부활로 하늘의 영광에로 가신 분이시다. 그는 사탄의 노예로 잡혀있던 인간을 구원하셨다. 그러나 Wrede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은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예수의 생애와 품성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바울에게는 순전히 형식적이다. 바울에게는 성품이나 개성의 개념은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인성은 쉽게 알 수 없는 유령과 같은 것이다.
Wrede에 의하면 기독론에서 나온 구원론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에서 승리하심으로 모든 인간이 그와 함께 모든 원수를 이기고 새로운 존재로 들어가게 한 것이다. 따라서 모든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죽었고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시작된 종말의 마지막에 이 구원이 실현된다. 그러나 초자연적 힘이신 성령이 인간에게 임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바울의 구원론은 브레데에 의하면 인간 내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개인 밖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변화는 이차적이다. 이 같은 구원론은 개인적이기보다 종족 또는 인류전체의 구원을 말한다.
브레데에 의하면 바울의 신학은 그의 회심 경험에서부터 설명된다. 바울이 예수에 대한 지식이 어떠하든 바울은 그것을 12사도로부터 받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것은 별의미가 없다. 바울이 관심을 가진 역사적 사건은 십자가다. 사실 바울에게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라기 보다 초역사적 사건이었다. 감각의 세상 너머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브레데에게서 바울의 기독론은 예수의 실존은 거부되고 예수의 이상화 또는 신격화를 말한다. 윤리적 성품들 즉 순종, 사랑, 겸손은 예수의 윤리적 성품에서 온 것이 아니고 사도 바울의 구원 교리에서 온 것이라 한다. 브레데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하늘 존재 양식으로부터 논리적 결론으로 그리스도의 선재를 도출해 내지 못하였다. 인간 메시야로서 예수의 위엄을 강화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신성을 주장하지도 못했다.
브레데의 설명에 의하면 바울은 예수를 믿기 전 이미 신적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경험을 할 때 나타난 그분을 자신이 갖고 있던 그리스도와 동일시 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기가 갖고 있던 유대 묵시 문학적 그리스도를 그가 만난 그리스도 예수라는 이와 동일시 했고 그 예수는 지상에서 살던 나사렛 예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 신적 그리스도를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유대교 안에 있던 메시야 신앙일 것이다.
브레데는 그의 책 마지막 장에서 기독교 기원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의 위치를 묻고 있다. 즉 예수-바울 문제를 논한 것이다. 브레데에 의하면 예수와 바울은 유대교의 서로 다른 계층에 속했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단순성과 바울의 사변적 복잡성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브레데는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이해한 사람이라는 Welhausen이나 Harnack이 주장한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바울과 예수는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바울이 예수의 영향을 받은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같은 시대에 유대교에 속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는 그에 대한 설명은 충분하다고 보았다.
예수와 바울을 비교한 후 브레데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께 대한 책임 있는 개인적 품성 즉 윤리적 신앙이 바울에게서 구원사의 객관적 사건에 중심을 둔 구원의 종교로 바뀌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브레데에 의하면 바울은 기독교의 창시자요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으심, 부활과 같은 종교의 근본이 되는 구원 행위를 만든 기독교 신학의 창설자라는 것이다. 신화적 구원론의 개념을 Graeco-Roman세계의 토양에 이식 시켰고 이 신학으로 유대교의 한계를 넘어서 역사를 구원하는 새 종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기독교의 제2창설자로 남아 있다.
결국 브레데에게 예수-바울 문제는 예수냐 바울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로 등장한다. 이 같은 브레데의 바울전은 복음주의적 입장의 신학자들뿐 아니라 자유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는 신학자들에게도 커다란 도전이 되었다. 브레데의 주장이 옳았다면 바울의 그리스도는 예수와 단절을 해야 하고 역사적 근거를 상실한 기독교를 세워야 할 것이다.
Ⅱ. 변증적 신학자 J. G. Machen의 출현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보수 신학자들의 반응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이나 미국에 있는 보수 신학자들은 논쟁에 뛰어들어 점차 신학적 토론이 깊어갔다.
J. G. Machen은 문제 속에서 신학적 전제(theological presuppositions)의 중요성을 보았다. 그리고 Wrede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 발전의 논리적 결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Machen은 예수-바울 문제를 자연주의(naturalism)와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 사이의 선택 문제로 풀었다.
Machen은 바울에 대하여 Wrede와 두 가지 면에서 공감을 표시했다. 즉 바울을 신학자로서 해석한 점과 바울의 신학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다는 점에서 Wrede와 일치한다. 그러나 Wrede와 달리 Machen은 바울의 신학이 예수의 교훈과 같은 초대교회 가르침과 조화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초대교회와 일치한다는 Machen의 견해는 교리적 비교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12 사도들이 바울의 신학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바울과 예수사이에 일치는 바울의 회심이 초자연적 성격으로 마침내 보증되었다는 것이다.
"만일 바울이 자기 가르침과 나사렛 예수의 교훈사이에 근본적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면 그는 예수의 제자로 남아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회심은 초자연적이었음이 틀림없다. 반면에 바울이 예수와 불협화음을 내었다면 그의 회심은 초자연적이 아닐 것이다. 그의 회심은 예수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초자연적 사건이었다면 회심은 바울을 지상의 예수와 불일치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현현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었다면 바울은 자기가 동의하지 않은 이의 제자로 자신을 간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바울은 예수의 참 제자였다 라는 가정은 Machen에 의하면 복음서 전체 속에 비쳐진 예수의 모습으로 실증되었다고 한다. 이 점에서 그는 소위 역사적 예수를 재건하려는 역사 비평주의의 시도를 거부한다. 그리고 초대 교회(바울)의 초자연적 그리스도관을 주장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가 수년 전에 사셨던 예수와 완전히 일치하는 분으로 동일시 한다. 갈릴리에 사시던 예수가 부활하신 주로 믿은 바울은 예수와 그리스도가 다른 분이 아닌 동일한 분임을 그의 서신에서 강조한다.
따라서 Machen은 바울을 예수의 제자로 변증한다. 그는 역사적 예수의 교훈과 모범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Machen은 바울 신학의 핵심은 지상의 예수를 모방한 것뿐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교제(communion)하는데 있다고 한다. 이 교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인격적 신앙적 관계로 이해되는 것이다. 여기서 Machen은 예수의 십자가 교리를 뛰어넘는 바울을 본다. 그러나 Machen에 의하면 예수는 그가 가르치고 행한 것으로 기독교를 세우지 않았다고 본다: "교회가 그에게 경배를 드리는 것은 그의 죽음을 우주적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가 인간 구원을 위하여 지상에 오신 하나님이실 때만 그 같은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인격의 인식은 바울 이해의 열쇠가 된다. 그리고 예수-바울의 문제의 해결도 여기서 찾아진다.
Machen에 의하면 예수와 바울 사상의 일치는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인격과 바울의 초자연적 회심을 근거로 한 전제(presupposition)에 있다. 그러므로 예수와 바울의 차이점의 개연성은 배제된다. 결론적으로 예수와 바울 사이에 역사적 차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Machen의 입장이다.
사실 이 문제에 대한 Machen의 입장은 역사적인 연구보다는 신학적이고 따라서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와 자연주의(naturalism)의 대결문제로 분석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계시와 역사의 관계 문제로 대두되게 된다. Machen은 계시 속에 있는 역사적 요소를 배제하고 초자연주의적 경향만을 강조한 것은 J. Weiss가 역사성만을 강조한 것처럼 균형을 깨뜨린 점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지만 Machen은 복음서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함으로 그의 신학에 큰 오점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본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기독교 공동체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고 본 것은 바울을 기독교의 제2의 창설자로 보려는 Wrede의 입장에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리에서 출발한다는 바울의 입장을 강조했다. 결국 바울 종교의 기원은 Wrede의 주장처럼 구약 묵시문학적 기독론이 아닌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라는 것이다. 33년간 지상에서 사시던 그 예수와 부활·승천하신 예수는 같은 예수로 바울이 그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바울의 사도권은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Machen은 바울의 종교(신앙)와 신학은 분리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수가 "나를 사랑하시고 …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단순한 신학적 사변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였고 산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에게 종교는 신학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신학도 종교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바울에게 기독교는 생활인 동시에 교리다. 논리적으로는 교리가 앞선다. 생활은 교리의 표현이지만 교리는 생활의 표현은 아니다. 바울 안에 나타나 있는 신학은 기독교 체험의 산물은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 체험이 그것으로 산출되는 바 모든 사실의 제시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부성의 단순한 계시자에 불과하다면 바울은 예수의 참제자는 아니었다. 예수가 인간의 죄를 지고 죽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속죄주인 이상 바울은 예수의 참 추종자가 된다.
Machen의 가장 큰 공헌은 종교사학파에 대한 비판이다. 기독교가 헬라주의, 유대주의, 이교주의의 영향을 받았고 거기서 파생되어 왔다는 종교 사학파의 주장에 쐐기를 박은 것이다. 우선 바울이 유대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창설했다고 주장한 W. Wrede의 이론에 정면 도전을 한 것이다. Wrede의 가설은 바울의 구원론 보다 그리스도론을 설명한 것이다. 기독교 이전의 유대 묵시문학적 메시야 사상을 바울이 다메섹에서 만난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려는 주장이다. 그러나 바울의 기독론은 시종일관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이 Machen의 주장이다. 그러나 그 예수는 구약에 예언된 인자로 본다. 갈릴리 나사렛 예수가 영광을 받으실 구원주라는 것이 바울 사상임을 Machen은 갈파한다.
바울 종교가 이처럼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의 메시야 교리에서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사람들은 바울 종교의 기원을 헬레니즘 시대의 혼합적 이교 종교에서 찾으려 했다. 특히 메시야의 죽음과 부활을 이교 신화와 결합시켜 해석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Machen은 이 같은 주장을 하는 Bruckner를 비판한다. Gnosticism을 비롯한 헬라적 동방종교에 관한 제반 이론들은 Machen에 의하면 바울 이후 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바울 종교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배격한다. 또한 헬라적 용어를 바울이 사용했다해서 반드시 바울이 헬라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로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Machen은 예수의 주 되심을 바울이 강조한 것을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그의 바울 종교의 기원 마지막 장(8장)을 '예수의 구주성'으로 잡고 채우고 있다. 여기서는 W. Bousset의 주 그리스도 사상에 도전을 한다.
Bousset에 의하면 ?????? 칭호는 일찍이 헬레니스틱 영향과 환경하에서 사용되고 있었던 개념을 신약의 저자들이 취해온 것이라 한다. Bousset는 ①예수의 생애 동안 예수는 ??????칭호를 사용치 않았고 예루살렘 모 교회에서는 그 같은 칭호는 사용된바 없다는 것이다. ② 바울은 ??????를 ??????개념과 동일하게 사용하면서 일반적인 주인·소유주하는 뜻으로도 사용했다 한다.
Machen은 G. Vos의 입장에 서서 ① ??????칭호가 수리아 나 애굽 이방종교나 밀의 종교 또는 노스틱주의에서 예배 대상과 동일시되었다는 이론은 증거가 없다는 것과 ② ??????와 ??????를 동일시한 점을 비판하고 ③ 로마 황제에게 붙여진 ??????가 신약의 개념과 일치한다는 주장을 배격했다.
이처럼 Machen은 바울 신학에는 헬레니즘이나 유대교 또는 동방 밀의 종교의 영향은 없으며 브레데가 생각한 것처럼 유대 묵시 문학적 메시야 개념에서 찾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묵시 문학적 메시야는 예배의 대상이 아니고 사랑을 받아 마땅한 인격은 아니기 때문이라 한다.
바울의 예수에 대한 관계는 사랑의 관계이고 사랑은 인격 대 인격사이에 존재한다. "그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해서 자기를 주셨다"는 여기에 바울 종교의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Ⅲ. Machen 신학에 대한 평가
"기독교의 창시자는 누구인가? 바울인가 예수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Machen은 바울을 통해
접근할 수는 있으나 예수가 기독교의 창시자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바울의 종교와 동방의 제 종교와의 차이는 아주 명백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유대교와의 고리도 완전히 끊어 놓았다. 그리하여 종교사학파의 도전에 정면 선전 포고를 한 것이다.
바울 종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도 분명하게 한다. 한 마디로 구원의 종교라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진리였던 사실 뒤에 서지 않고 최근 일어난 사건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관계와의 다른 관념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하나의 행위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성이라는 영원한 진리 위가 아니고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제공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의 아버지가 되는 사실 위에다 세우셨다고 본다. Machen은 바울 종교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실 위에 기초를 두었다고 한다. 예수는 바울에게 있어서 실제적으로는 계시자가 아니라 구주였다.
이 같은 Machen의 기독론은 당시 신학자나 역사 비평주의자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였다. 얼마 전까지 살아 있어 굴욕의 죽음을 당한 하나의 인간 예수를 바울이 신격화한 것으로 밖에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바울에게 단순한 사제관계가 아니라 언제나 종교적 신앙의 대상이었다.
동양의 군주나 황제의 신격화는 예수에 대한 바울의 태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군주가 주가 되는 것은 다른 신들도 주가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있지만 예수가 주가되는 것은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는 유일의 주만 있었다.
바울의 예수 이해는 초자연주의적이었다. 예수는 진실로 환상적 존재라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를 신격화 한 것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지한 것이라 한다. 따라서 Machen은 바울 이해에 대한 자연주의적 해석 방법을 배제한다.
또한 Machen은 바울 연구의 자료로 논쟁이 있는 문제를 인식하면서도 비평주의 입장을 배격한다. 튜빙겐 학파에서 제기한 사도행전의 진정성과 비평학자들의 목회서신에 관한 이론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처리한다. 성경을 문학작품 또는 전승된 얘기책 정도로 보고 연구하려는 당대 신학풍토에 복음주의적 방어벽으로 Machen은 우뚝 섯던 것이다.
그를 편협한 근본주의자라고 몰아 부치는 이들도 있으나 Machen은 그의 동료 교수였던 코넬리우스 반틸의 주저인 Defence of Faith와 같이, 기독교 신앙을 방어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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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프린스톤과 그레샴 메이첸, 그리고 그 제자들
보수주의의 신학이 구 프린스톤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 프린스톤(Old Princeton)의 일백년 역사는
아취발트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
찰스 핫지(Charles Hodge),
그리고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의 보수신학과
신앙의 계승으로 수놓아졌다.
프린스톤 신학사상을 연구한 호펙커(W. Andrew Hoffecker)는
알렉산더가 구
프린스톤의 목사였다면
핫지는 그 학파의 신학자이며
워필드는 프린스톤의 변증학자임을 지적하였다.
이 세 신학자중에서
조직신학을 저술해 낸 사람은
오직 핫지뿐이다.
핫지는 그의 조직신학에서
구약과 신약의 말씀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며
정확무오함을 분명하게 전제하였다.
또한 그는 성경이 오류를 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성의 산물이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혹은
평범한 방편으로 사람들에게 이해되도록
충분히 투명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보수신학의 바탕은
이와같이 성경의 신적권위에 도전하고 손상을 가져오는
자유주의와
한결같이 철저히 대결하여
그 입장을 견지하고 계승하여 왔다.
예를 들면, 찰스 브릭스(Charles A. Briggs,1841-1913)의 고등비평이
프린스톤의 정통성을 위협하며
또 그가 성경의 권위, 정확무오,
그리고 영감을 부인하고 나섰을 때
미국장로교단은
그의 교수직을(Union Theological Seminary)엄 금하고
1892년 총회에서 성경의 정확무오 교리를 재천명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브릭스는
아취발트 알렉산더의 미국장로교단과 단절하고
자유주의를
가속화시킨다.
핫지의 신학은 워필드에게,
워필드의 변증학은 그레샴 메이첸에 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메이첸은 프린스톤에서 워필드에게 학적인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것은 그의 저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성경의 신뢰성에 대한 정통신앙의 힘찬 변증을 통해 잘 나타나 있다.
1929년에 이르러
윌슨(Robert Dick Wilson, 1856-1930),
메이첸(John Gresham Machen,1881-1937)
그리고 앨리스(Oswald Thompson
Allis,1880-1973)등의 보수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파수꾼 양성은 반드시 계속되어져야함을 선언하고
프린스톤에서
사퇴하여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카이퍼(R. B.
Kuiper, 1886-1966),
울리(Paul Wooley, 1902-1984),
머레이(John Murray,
1898∼1975)
그리고 맥크래(Allen A. MacRae,1902∼현재)와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메이첸 박사가 죽은 1937년에 이르러
설립비전은 뜻밖의 변화로 흔들리고 말았다.
그때는 이미 윌슨은 죽고
앨리스는 사임한 뒤였다
세 가지 변화는
신자의 자유, 천년설, 그리고 변증학 분야에 관련된 것이었다.
주초(酒草)에 대한 신자의 양심의 자유,
무천년설 그리고 전제주의 방법론을 지지하는 학자들과
주초를 악으로 간주하여 금하고
전천년설과 증거주의 방법론을 지지하는 학자들이
첨예한 대립양상을 보이게 되었고
후자그룹은 웨스트민스터 출범 8년째인 1937년
구 프린스톤신학 계승을 위한
훼이스신학교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물론 메이첸과 윌슨의 입장은
구 프린스톤신학의 특징인
증거주의 방법론이었다.
훼이스신학교의 34년간의 순항에도 불구하고
학사행정 및 학교운영의
극단적인 독재와
극분리주의의 양태로 인하여
강제은퇴 조치된 맥크래와 물러난 교수들은
그들을 따르는 학생들과
필라델피아 북서쪽에 새로운 터전을 잡고
비블리칼신학교를
시작하였다.
구 프린스톤신학의 마지막 주자
알랜 맥크래 박사와
비블리칼의 맥크래 박사는
셈어학(The Semitics)계통에서
당대의 가장 저명한 석학인
윌슨 박사의 뛰어난 제자였다.
스승의 발자취를 좇아
셈어학을 독일에서 연구하고
그의 위촉을 받아
구
프린스톤신학의 계승을 위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에 동참하였다.
그는 딕 윌슨 박사의 셈어학과
보수신학을 전수하고 계승하여 왔다.
기독교 세계에서 자유주의 성경관의 약점을
수많은 후진들에게 이해시키는 데 공헌해온
것이다.
스위스에서 라브리 공동체(L'Abri Fellowship)를 시작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프랜시스쉐이퍼(Francis A. Schaeffer,1912-1984)는
맥크래 박사의 제자였다.
훼이스신학교 졸업반 때 조교로 채용되기도 했던 쉐이퍼는
맥크래 박사를
구 프린스톤 신학교의 위대한 학자들의
성경적 충실성으로부터
21세기의 다리를 놓아주는 인물로 불렀다.
쉐이퍼는
생존시 맥크래 박사가 역사 및 과학
그리고 종교사에 관한 모든 분야에서
정확무오한 성경관을 고수해온
위대한 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인본주의로 혼란한 세계인의 사상에
「기독교 선언(A Christian
Manifesto)」으로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세계의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쉐이퍼의 신학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수양과 통찰력은 성경관에서 비롯되었고
구 프린스톤의 신학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수 있다.
「로마서 주석(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he Epistle to the Romans)」과
「구속의 완성과 적용(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으로 유명한
존 머레이와
알랜 맥크래는
세계적 석학인 딕 윌슨 박사, 오스왈드 앨리스 박사,
그리고 그레샴 메이첸 박사 아래서
함께 공부한 프린스톤신학교의 동기생이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의 교수요원으로 7년간 함께 봉직하였다.
머레이 박사는 그와의 교제에
대해서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 말씀중심의 온전한 결단과
개혁신앙에 대한 헌신으로 끌렸다고 회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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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샴 메이첸의 <기독교 인간관>의 목차
1.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
2. 하나님의 작정
3. 하나님의 작정과 인간의 자유
4. 예정이란 무엇인가?
5. 성경은 예정론을 가르치고 있는가?
6. 예정에 대한 반대
7.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섭리 사역
8. 하나님의 섭리 사역
9. 기적
10.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는가?
11, 하나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창조하셨는가?
12.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바 된 인간
13. 생명의 언약
14. 인간의 타락
15. 죄란
무엇인가?
16. 하나님의 율법의 엄위성
17. 인간은 죄 가운데 잃어버린 바 되었는가?
18. 인간 타락의 결과
19. 원죄란 무엇인가?
20.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죄인
성경의 교리에 목숨을 거는 진짜 이유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눅 10:27).
“이 교리면 누구에게나 충분하지 않은가?”라고 그 연사는 말했다.
물론, 그것은 전혀 교리가 아니라 명령이다. 그러나 이 구절이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원대하다는 연사의 주장은 옳았다. 그런데 만일 이 구절이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원대하다는 그의 주장이 옳다면,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것 이외에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관한 교리를 포함하여 광대한 교리들을 주장하는가? 왜 우리는 단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만족하지 않는가? 이 말씀은 참으로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원대하지 않은가?
이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으로부터의 대답은 무엇인가? 기독교적 관점으로 부터의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그렇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중대한 이중(二重) 명령은 확실히 누구에게나 충분할 정도로 그 사상이 아주 원대하다. 그렇지만 당신은 그 구절의 사상이 진정코 너무도 원대하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 모든 문제가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인 이유이다. 예수님의 이 엄청난 명령은 그 사상이
너무 원대하다. 그것은 너무 원대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못하였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께서 그 명령을 말씀하신 높은 의미로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을 사랑했다면 모든 사람들은 우리와 함께 잘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아무 부족함도 없었을 것이고, 우리에게 어떠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교리도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실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품격-두 개의 구별된 본성을 갖고 계시사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시지만 여우언히 한 분이신 분-에 관한
교리도 필요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의로웠을 것이며, 따라서 구주(救主)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죄인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교사와 모범가, 율법 수여자 그이상인
분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것이 바로 믿지 않는 자들이 단순히 교리라 하여 경멸하지만 우리는 즐겨 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또한 이것이 바로 우리가 목숨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품격과 사역에 관한 중대한 성경 교리를 고수하는 이유이다.
내가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모범과 율법 수여자로만 들었다고 한다면, 그분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산상보훈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었다고 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무어라고 말씀을 해야 하겠는가? “예수님
감사합니다.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전부입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사랑하고 마음이 청결하다면 만사가 잘 될 것이며 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글쎄, 나는 당신이 어떻게 말할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예수님의 그러한 명령을 들은 후에 단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 나는 망하게 되었다. 나는 하나님과 나의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나는 마음이 청결하지 못하다. 나는 죄인이다. 예수님, 당신의 높은 명령들 이외에 나에게 하실 다른 말씀은 없습니까?”
그리하여 내가 죄인으로서 예수님께로 가서, 내가 그분의 명령들을 불순종하였으며, 나는 그분에게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얷도 없는 전적으로 무가치하고 무익한 존재임을 고백할 때, 그분은 나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단지 “너는 나의 높은
명령들을 들었다. 그것은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이고,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복음 전부이며, 네가 소유할 수 있는 교리 전부이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시는가?
그렇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가 지키지 않았으며, 또한 지킬 수도 없는 계명의 냉정한
위로가 그분이 나에게 주실 수 있는 전부가 아니다. 그분은 나에게 그분 자신을 주신다. 그분은 성경에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지금도 살아계셔서 내가 신뢰할 수 있는 나의 구주로서 자기 자신을 나에게 주신다. 그분은 그분의 품격과 사역에 관한 중대한 교리들 안에서 자신을
나에게 주신다. 만일 그분이 다른 어떤 분이시라면, 그분은 나를 구원하실 수 없으며, 나는 그분을 신뢰함으로써 구원을 얻을 수 엇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나를 구원하실 수 있었으며 또한 구원하셨고,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하여 그분과 연합되었다.
이제 알겠는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관한 교리를 고수하는
이유이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교리를 냉담한 이론적인 문제로서 취급하지 않고,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깊은 바다 가운데서
자신을 구하기 위하여 판자를 붙잡는 것처럼 그 교리를 취급한다.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이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교리들은 우리에게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며, 또한 학교나 교실에서만
취급되어질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치명적으로 중대한 문제이다. 그것은 생사(生死)가 걸려 있는 문제이다. 여기에 우리의 영원한 문제가 달려
있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 안에만
우리의 소망이 있다. 기회가 있을 때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p.22-25
하나님의 품성적 불능(不能)
하나님은 자신의 성품(性品)에 의해 제약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지혜가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지혜롭지 않은 일을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의(義)가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불의한 일을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선(善)이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하지 않은 일을 행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진리가 무한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거짓말하실 수 없다. p.29
사람의 선택과 자유 그리고 성품
사람의 선택들은 외적인 강제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자유롭다. 그렇지만 만일 그 자유가 그 사람 자신의 성품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선택은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p.30
예정 교리의 여러 오해들
나는 예정 교리가 의미하지 않는 바들에 관하여 여러분들에게 몇 마디 말하고자 한다. 예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전횡적으로 또는 선하신 이유도 없이-비록 그 이유가 우리에게 신비로울지라도-어떤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신다는 것을 의밓지
않는다.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교리는 구원을 얻고자 하는 어떤 자들에게 구원의 문이
닫혀 있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한 이 교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에 미치지 아니할 것임을 알고 자포자기하는
상태에 떨어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이 다소의 공포심을 갖고 이 중대한 성경의 교리를 보는 것은 이 교리를 완전히 오해한
때문이다. p.76
첫째로, 이 예정의 교리는 어떤 사람들은 버림을 받는 한편,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도록 선택하신 것이 단지 우연이나 또는 자의적(恣意的)인 그 무엇에 기인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로, 예정 교리는 하나님께서 죄인의 죽음을 기뻐하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은 뚜렷이
그 반대로 말씀하고 있다. 에스겔서 33장에 나오는 저 유명한 구절들을 들어 보라. “주(主)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겔 33:11).
디모데전서에서도 똑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그 곳에 말씀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고 하였다. 이 나중 구절은 결코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지의 행위에 의해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도록 결정하셨다는 의미일 수는 없다. 실제에 있어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셋째로, 예정 교리는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구원을 얻는 다거나, 또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정죄를 당하여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가 취급해 오고 있는 이 중대한 교리에 대한 참으로 근본적인 반감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일어나는 까닭은 바로 이러한 오해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예정 교리가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을 것인지 믿지 않을 것인지를 결정하기 전에,
그들이 구원을 얻도록 예정되었는지 아니면 멸망하도록 예정되었는지를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예정 교리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복음을 들었는데, 복음은 나의 마음을 꽤 감동시켰어. 어쩌면 나는 복음을 받아들일는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가? 내가 구원을
얻을는지 아니면 버린 바 될지는 어쨌든 미리 다 정해저 있는데, 내가 믿기로 결정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더욱 심한 것은 역시 예정의 교리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그들이
상상하는 것이다. “나는 복음을 들었는데, 나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해.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구원을 얻도록 예정된 자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만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어. 그렇기 때문에 내가 멸망에 이르도록 예정되어 있는 한, 내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하더라도 나에겐 소망이 없어.”
또 하나의 예(例)를 든다면, 예정 교리가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그들은 누군가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고 상상한다. “나는 하나님에 의해 선택함을 받은 자며, 나는 선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을 경멸할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선택함을 받은 자로서
궁극적으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될 것임과 내가 죽을 때 영원한 복에 들어갈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어.”
이 세 가지의 독단적인 예(例)들과 그밖에 이와 비슷한 많은 예들은 예정 교리가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들이다. p.80-85 (요약)
인간에 대한 2분설과 3분설
성경은 참으로 인간의 영이 그의 혼과 구별된다고 가르치는가, 아니면 성경은 인간의 혼과 인간의
영은 두 개의 다른 이름으로 불리워질 뿐 정확히 동일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중요한 성경 구절 하나를 아주 명백히 이해함으로써 주어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고린도전서 2장에 나오는데, 3장과 연결되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거듭하여 혼과 영을 구별하고 있으며, 또한 ‘혼’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람이
‘영’으로 특징 지워지는 사람과 구별됨을 말하고 있다. “‘혼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을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다. 나는 방금 고린도전서 2장 14-15절을 인용하였다. 아마도 여러분 가운데는 이 인용이 아주 정확하지는 않다고 말할 분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영어 성경에는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라나니”로 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것이 원문의 의미에 가장 가까운
참으로 멋진 번역임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실제로 ‘자연인’ 대신에 ‘혼적인 사람’(soulish man)으로 되어
있다. 단지 ‘혼적인’(soulish) 이라는 말이 영어에는 없을 뿐이며, 따라서 이 점에 있어서 우리가 흠정역(KJV)과 같이 번역할 때,
우리는 그 의미에 최대한 근접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성경이 ‘혼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을 이 구절에서 대조시키고 있다면, 이것은
인간의 본질이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혼과 영으로 구분된다고 하는 3분설에 대한 아주 명백한 예(例)가 아닌가? 이
구절은 분명히 인간의 영과 인간의 혼을 구별하지 않는가?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다. 정반대로 이 구절은 명백히 인간의 본질을 육체와 혼과 영으로
구분하는 3분설을 반대하고 육체와 영혼으로 구분하는 2분설을 지지한다. 명백한 사실은 “영에 속한 자”라는 어구에 사용된 형용사 “영에
속한”(신령한)에서 “영”이라는 말은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가리킨다고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 구절에서보다
더 명백히 나타낸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그런 다음 그 구절은 계속해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영이 그 속에 계심으로써 하나님의 일들을 깨닫는 자에
대하여 말씀한다.
그러면 “혼적인 사람”(육에 속한 사람)과 대조적인 “영적인 사람”(신령한 자)이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대낮같이 명백하다. “혼적인 사람”이란 인간의 영혼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영적인 사람”이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소유한 사람이다.
따라서 “영적인” 사람이란 ‘혼’과 대조하여 ‘영’이라고 불리우는 인간 본질의 더 높은 측면
또는 부분을 발달시킨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인가! “영적인” 사람이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3위이시며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에 의해
변화되어진 사람이며, “혼적인 사람”이란 단지 자신의 영혼만을 가지고 있을 뿐, 이러한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이다. “영적인”(신령한)이라는
형용사에 있어서 ‘영’이라는 말이 사람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므로, 이 말의 첫 철자가 대문자로 씌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울 서신의 다른 구절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 구절을 바르게 이해하는 열쇠이다.
성경적 의미에 있어서 ‘영적인 사람’(신령한 사람)이란 거듭난 사람이며, 자기 본성의 일부가
아니라 본성의 전부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변화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본성을 육체와 혼, 그리고 영의 세 가지로 구분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 있는 그 중요한 구절의 진정한 의미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3분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또 다른 구절들이
있지 아니한가? 3분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유일한 구절을 우리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구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독자들의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흠없이 부전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이 구절은 그 밖의 바울
서신과 그 밖의 성경이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뒤엎는 데에 적절히 사용될 수 없다. 단지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독자들의
전존재(全存在)가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흠없이 설 수 있도록 보존되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원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표현 방법을 사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단지 이같은 생각을 나타내기 위하여 갖가지 말들을 열거하고 있을 뿐이다. 만일 ‘혼’과 ‘영’이라는 두 말 이외에도 그러한
생각을 나타낼 수 있는 또 다른 말들이 있었다면, 그는 그 다른 말들도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본성이 성경에 의해 육체와 혼과 영으로 구분된다고 하는 견해를 아주
단호하게 거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점점 더 많이 생각하면 할수록, 인간 본성에 대한 3분설의 견해는 중대한 실수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 견해는 사실상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주장되어 온 실수이며, 또한 그것은 학구적으로 그리고 경건한 태도로써
옹호되어져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중대한 실수이다.
이 견해는 구속(救贖)함을 받은 자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빈 공간”의 견해-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에는 하나의 빈 공간, 즉 하나님의 전(殿)이 되어야 할 공간이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꽤 괜찮다고하는
생각-를 조장시킨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일어나는 일은 단지 인간 본성의 한 부분, 즉 “영적인” 부분이자
이전에는 방치되었던 부분이 발달되고 인간의 생명에 있어서 마땅히 차지해야 할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고하는 생각을 조장시킨다.
이와 같은 생각은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나타내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인간
본성의 진정한 상태는 인간 본성의 한 부분이 소멸되거나 또는 이지러진 성장만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전부가 부패해 버린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전에 빈 공간과 같았던 인간 본성의 일부에 하나님이 들어오셔서 왕자에 앉으시는 것이
아니라, 전에 죄 때문에 부패하였던 전 인간(全人間)이 하나님의 영의 중생케 하시는 능력에 의하여 변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영과 인간의 혼을 구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명백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심할 여지 없이 이 두 말은 동일한 것을 두 가지 다른 방식으로 부르고 있는 것인데, 이 말들 사이의 차이를 조사해 보면 흥미로울
것이다. 하지만 지금 주목해야 할 중요한 점은 그것들이 동일한 것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단지 우리말로 ‘인간의 혼’ 또는 ‘인간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을 가리키는 두 개의 다른 말들일 뿐이다. 그리고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이제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p.162-167
인간에게 죄는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이 인간의 보편적인 죄성(罪性)은 단순히 그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에게 속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인간 본성 그 자체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최소한 두 가지 방식으로 이 사실을 입증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께서 자신의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그들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고
명하신다(마 5:48).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면, 예수께서는 그렇게 되라고 그들에게 명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인간 본성의 필수적인 부분이 아니다.
둘째로, 예수님 자신이 죄 없는 사람-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나 전혀 죄가 없는
사람-의 실례(實例)를 나타내 보여주신다. 이것 역시 죄가인간의 본성 그 자체에 필연적으로 속해 있지 않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
예수께서 보여 주시는 죄 없는 사람의 실례란 그 자신의 예(例)이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죄의식의 흔적이 전혀 없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기도할 것을
가르치셨지만 그분 자신은 그러한 기도를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에게 “‘너희가’악한 자라도”(마 7:11)라고 말씀하셨지,
“‘우리’악한 자라도”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있다고 하신 그 죄성(罪性) 속에 자기 자신은 포함시키지 않으셨다.
우리는 여기서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모든 말씀 가운데 흐르고 있는 매우 이상한 사실의 한 예(例)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특히 죄에 있어서 예수께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청중들과의 사이에 언제나 유지하고 계시는 이상한 간격이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을 하나로 묶으시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께 말씀하지 않으시며, 그 어떠한 죄의 고백에 있어서도 자기 자신과
자신의 제자들을 하나로 묶지 않으신다. 우리는 때때로 이 엄청난 사실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어느 다른 선생이 자신의 청중들에게
"너희 악한 자라도“라고 말한다고 상상해 보라! 예수님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이 그와 같이 말한다면 얼마나 혐오스럽겠는가! 그 외의 다른 종교적
선생이라면 ”우리가 다-여러분과 나-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 악한
자라도“라고 말씀하신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죄악 된 인간성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시키신다.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잃어버린 바 되었지만 그분 자신은 죄가 없음을 가르치고 계신다. 확실히 이것은 이상한 사실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이 아니셨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설명은 전혀 적합지 않다.
복음서 전체에 걸쳐서 예수께서는 참된 인간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예수께서도 자신을 그렇게 묘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가 없었던
인간을 보게 된다. 이것은 죄가 인간 본성(本性)의 필수적인 부분이 결코 아님을 아주 분명히 보여 준다. 죄는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 p.243-245
인간의 죄성은 아담의 죄에서 기인한 것
인간은 선하게 창조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이 현재 악한가?
선(善)으로부터 악(惡)으로의 이 엄청난 변화는 어떻게 하여 일어났는가? 앞서의 강연에서 이야기한 내용 가운데 우리는 최소한 올바른 대답에 대한
암시를 받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우리는 죄가 어떻게 세상에 들어 왔는가를 살펴보았다. 죄는 아담의 죄를 통하여 들어왔다. 만일 통상적인
출생에 의해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면, 확실히 아담의 후손의 이 보편적인 죄성(罪性)은
아담의 죄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다. 아담의 후손들은 아담의 경우와는 달리 삶을 죄 없이 시작하지 않고 이 모양 혹은 저 모양으로
아담이 범한 죄에 오염된 상태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당연하다. 한결같은 결과는 단일한 원인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간이 아담의 죄에 연루된 정확한 방식에 대해서 교회 안에 서로 다른 견해가 있어 왔다.
인간은 상당히 큰 통일체를 형성하고 있으므로 아담이 행한 것을 모든 사람이 실제로 행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은 모두 아담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그의 행동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이었다고 사람들은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가 상식과 성경 모두에 모순됨은 아주 명백하다. 상식과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다수의
사람들이지 결코 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행한 것이 실제로 그의 후손 모두에 의해 행해졌다고 할 수 없다. 나는 일생에 잘못된 일들을
많이 행했지만, 에덴 동산에서 금지된 실과를 먹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에 의해 행해진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 즉 아담에 의해 행해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아담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이 아담의 최초의 죄에 연루되었는가?
나는 이 점에 대하여 소요리문답(제16문항)에서 말하고 있는 바를 인용한 다음, 그것이 성경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여러분에게 묻고자 한다.
질문은 “모든 인간은 아담의 최초의 범죄 가운데 타락하였는가?”라고 되어 있다. 대답은 이렇다.
“그 언약은 아담 자신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후손을 위하여 아담과 맺은 언약이므로 통상적인 출생(보통 생육법)에 의해 그의 혈통을 이어받는
모든 사람은 그의 최초의 범죄 가운데 그 안에서 범죄하였으며, 그와 함께 타락하였다.”
여러분은 여기서 언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행위 언약 혹은 생명 언약인데,
우리는 그 조건이 매우 단순함을 살펴보았다. 그 언약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만일 아담이 하나님의 계명을 완전히 지킨다면 생명을 얻을 것이고,
불순종한다면 죽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언약은 아담 자신을 위하여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후손을 위하여 아담과 맺은 것이라고
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는 데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심지어 아담의 타락이 기술되어 있는 창세기도 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이 아주 훌륭한
성경적 증거가 있음을 명백히 보여 준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담은 범죄할 때 죽게 되어 있었다. 죽음이 불순종에 대한 형벌이 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범죄하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직 아담만이 죽었는가? 그의 후손들은 그가 시작했던 곳에서 시작하는가? 아담 앞에 놓여 있었던
죽음과 생명에 대한 양자택일이 그의 후손들 앞에 완전히 다시 놓여졌는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그 반대였음을 창세기는 아주 명백히 보여 주고
있다. 아담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개인적으로 전혀 아무 선택도 하기 전에 이미 그들에게 임한 그 죽음의 형벌을 받았다. 창세기는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그 생명의 언약을 아담과 맺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혈통의 대표자로서 그와 맺은 것임을 의미한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한다면, 그의 후손들의 전(全) 혈통이 생명을 얻을 것이다.
만일 그가 불순종한다면, 전(全) 혈통이 죽게 될 것이다. 그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이해할 때, 그것이 이 이외의 다른 무엇을 의미한다고 볼 수
없다.
창세기에 전제되어 있는 그 문제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신약의 어떤 중요한 구절들에 있어서 더욱
명백해진다. 특히 로마서 5장 후반부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롬
5:18)라고 그는 거기서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롬 5:19)라고 그는 그 다음 절에서
말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들 가운데서, 그리고 로마서 5장 후반부 전체를 통하여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는 혈통의 대표로서 범죄했다고 하는 중대한
교리를 우리는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인간은 그의 최초의 범죄 가운데 ‘그 안에서’ 범죄했으며 ‘그와 함께’타락하였다고 하는 것은 아주
타당하다. p.246-248
“정녕 죽으리라”에서의 ‘죽음의 의미’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만일 그가 불순종하면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 안에는 육체적인 죽음이 포함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안에는 또한 육체적인 죽음 훨씬 그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그 안에는 영적인 죽음이 포함된다. 그 안에는 선한 것들에 대한 영혼의 죽음이 포함된다. 그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영혼의 죽음이 포함된다. 그 아담의 죄에 대한 무서운 형벌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이 허물과 죄 가운데 죽게 된 것”이었다.
내가 이와 같이 말할 때, 그것은 하나님이 앞선 죄 때문에 나오는 죄나 그 외의 어떤 다른
종류의 죄의 조성자이심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담의 죄에 대한 마땅한 형벌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을 거두셨음과 또한 모든 인간의 영혼이
영적으로 죽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영적인 죽음에 대하여는 소요리문답 가운데 우리가 애써 설명해 온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 대한
죄책”이라는 말 다음에 기술되어 있다. “사람이 타락한 지위에서 죄되는 것은 아담의 최초의 범죄에 대한 죄책과 원시의(原始義)가 없는 것과 온
성품이 부패한 것인데, 이것은 보통 원죄라 하는 것이요, 아울러 이 죄로 말미암아 나오는 모든 죄이다”라고 소요리문답에서 말하고 있다. 타락으로
인하여 인간은 원시의(原始義)가 없고 온 성품이 부패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영적인 죽음이다.
원시의(原始義)의 결여, 온 성품의 부패, 영적인 죽음은 그 자체가 죄이다. 그것은 단순히 죄의
기초나 죄의 토대나 죄의 근원만은 아니다. 물론 이것도 모두 사실이다. 실제적인 범죄들은 모두 그것으로부터 나온다. 하지만 그것은 죄의 기초나
토대 이상이다. 그것은 자체가 죄이다. 영적으로 죽은 영혼, 그 무서운 부패로써 부패한 영혼은 더 이상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이 전가됨으로써만
죄악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의 죄악됨으로써 죄악되다. 그것은 단지 아담의 죄책 때문에만 유죄한 것이 아니라 또한 그 자체의 죄 때문에
유죄하다. 그것은 이제 그 자체가 죄악되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p.253-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