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고
전생에 무슨 죄목이 깊어 고개를 못 들고 있을까.
꼿꼿한 키 끝에 보랏빛의 수줍음 가득하다. 세든 반 지하에 조아린 ‘ㄱ’자 꽃등, 샛노란 속살 들킬까 노심초사다.
따라비오름을 비껴가며 *쫄븐 갑마장길로 향한다. 걷는 언저리로 사라져간 갑마들의 묵직한 말발굽 소리 들리는 듯하다.
점심 약속을 마치며 계획에 없던 외출이다. 문득 가을이란 한 마디 발단에 나선 행선지, 조각 마음으로나 머물러 뒤척이던 이구동성의 합세다. 딱 이맘쯤 물봉선의 마음을 닮은 일행들이다.
구두를 신은 걸음들이 제법 조심스럽다. 산행의 기본은 복장부터인데 위반사항은 단체퇴출감이다. 길섶의 이질풀꽃, 오이풀꽃, 참취꽃, 잔대꽃들이 일행의 복장을 비웃듯 저음의 종소리를 울린다. 가을을 접신하러 온 일행의 대화에도 무시로 끼어든다.
어렵사리 가시천에 이른다. 투영된 하늘과 구름 한 조각 노니는 수면 위로 작은 나뭇잎 한 장 툭 내려앉는다. 한때의 견고한 세상, 아름다운 이별을 목도한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는 경계의 울림일 터, 흔적도 없이 잊힐 한 편의 글처럼 자연스러움일까. 가물던 마음에 물꼬를 만난 듯 일행 모두 솜처럼 젖어든다. 너른 품새의 그늘에 둘러앉아 세상사 화제꺼리 틈새로 굽어보던 큰 구실잣밤나무의 헛기침 소리 꽤나 크다. 막바지의 무더위를 씻고 적당히 목마름을 해갈한다.
목적지를 뒤로하고 돌아가는 길목이다. 오면서 못 보던 것들이 다행인지 눈에 더 띈다. 그냥 지나칠까 무릎을 꿇게 하는 녀석들이다. 낯익어서 더 낯섦은 익히 알던 이름조차 더 이상 불러줄 수 없음이다. 눈길 멎는 그들에게 계면쩍은 눈인사를 보낸다. 입술 밖으로 곧 새어나올 듯한 이름인데 마냥 하얘진다. 비어가는 기억력의 그늘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할 길이 없다. 그 끝 모름에 마뜩찮아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고 혼자 씨익 웃는다.
높아진 쪽빛 하늘에 환절기의 무기력을 말끔히 헹궈내고 싶다. 계절이 깊어가는 대자연에 호흡을 맡겨두니 널브러진 기억창고에 청소기가 돌아가는 듯하다. 어느 틈새로 여백이 생겨날 것 같다. 그곳에 말간 자리 오래 비워둘 터다.
길을 따라 마냥 걷다보니 기다려도 기척이 없는 한 사람, 뒤떨어진 이를 위한 신호를 함께 보낸다.
“야-호~”
“야-고~”
멀찍이서 뒤따르는 답이 고스란히 당도한다. 때마침 양옆으로 도열한 억새 무리를 지나며 시낭송을 경청한 터다.
여름날 내 노동은 종하나 만드는 일
보랏빛 울음을 문 종하나 만드는 일
가을날 소리를 참고 향기로나 우는 종
(오승철 시조 ‘야고’ 전문)
야고 시 한 편 나누며 관련된 이야기 나누던 중 거리감 없이 다다름이다. 못지않은 반향에 서로의 마음 들킨 듯 눈빛 보다 잰 웃음소리가 걸림이 없다. 낮잠에 든 따라비오름의 심기를 건들임일까.
뒤늦게 당도한 이는 야고 무리에 넋 놓다 시간 가는 줄 모른 거라 고백한다. 흘려둔 것이라도 주울 요량에 기웃거리다 온 죄밖에 없다는데 몰래 훔쳐보고 온 것처럼 미안해하는 눈치다. 야고라는 단어에 모두 반색이다. ‘야고, 야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어디쯤이더냐고 옥타브를 높인다.
아쉬움이 커가던 차에 몇 발자국이나 떼었을까. 오름의 땅할아버지, 일행의 말을 엿듣다 참견하듯 보랏빛 웃음을 흘림이다. 대 일가를 이루고 있는 야고의 무리다. 온통 보랏빛 꽃물에 압도된다. 식구도 많은데 세 들어 사는 처지라 한껏 낮춘, 야고의 눈높이로 고정된 시선들이다. 그 빛깔의 어진 성정에 흠씬 젖는다. 연달아 터지는 셔터 소리가 말간 들녘에 금을 내듯 가시로 얹힌다. 돌아가는 발길 아쉽던 차에 한껏 보상받는 심사들이다. 이 대목을 놓칠세라 끄트머리에 당도한 그녀는 ‘야고선생’으로 불려진다. 꽃방망이의 돌림노래, 파도를 꽤나 오래 탄다.
걷다 보니 진분홍빛 그리움을 키우던 실한 물봉선 지대다. 한창인 때를 털렸는지 수척하다 못해 넋 놓고 있다. 떼로 선 자리는 포토존 세례의 발자국 상흔들로 난자하다. 풀릴 대로 풀린 동공은 지진 한방 크게 날아든 듯하다. 그 폭발음 또한 풍광 되어 떠나질 못하고 맴돈다. 한낮의 열기 또한 실낱같은 생을 거꾸로만 재촉할 뿐이다. 의지 없이 다녀가는 생, 한 생의 갈무리까지 떠올리게 한다. 적이 몸살을 치룬 것들에게 이구동성의 위무가 이어진다. 멋쩍은 용서를 고이 받아들일까. 동행이란 이름의 뒷모습에 바스러지는 후미의 한 자락 풍경이다.
가까스로 가을빛 물결에 끼어들어 누군가의 상처를 부추긴 것은 아닐까. 가을의 공명 탓에 숨죽이며 ‘향기로나 우는 종’ 야고, 그 일가의 뒷걸음질 치던 함성 뒤늦게 듣는다.
*쫄븐 갑마장길 : 짧은 갑마장길
첫댓글 예쁜 모습 만큼이나 예쁜 글이 있는 책 잘 읽었습니다.~~^^
문장이 아주 산뜻하네요. 제주말로 적절히 비빈 것도 맛깔스럽고.
첫 출간 축하드려요.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주에 사는 작가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주에 살더라도 아무나 쓸 수 없는 내면의 글입니다.
고해자 선생님, 출간 축하하며 아름다운 글 많이 써서 보여주셔요.
답글까지 남겨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마음이 따뜻한 분들은 역시...
어디를 가나 품새가 다름을 새삼 느끼게 된답니다.
제주는 겨울비가 내립니다...
동계 세미나 때. 30여년만의 폭설로 제주를 꽁꽁 잠궈놓더니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요...
저 빗소리 속에 봄을 재촉하는 따뜻함이 한껏 담겨있네요...
봄이 머지않음이겠지요^^
고해자 선생님,< 날아간 지팡이>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선생님의 작품집을 통해
제주를 재조명해 봅니다.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 드립니다.
이번 세미나때 뵐수 있으리라 여겼는데 피치못할 사정으로 참석을 못했다하여
조금 섭섭하기도 하였습니다
앞으로의 문운을 기대해 봅니다.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