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무게 / 길상호
카터 끄는 상자, 상자 타고 이동하는 상자, 상자 위에서 잠자는 상자… 상자 없이는 살 수 없는 상자들. 뒤집어쓰고 나갈 상자를 단속하는 일도 중요해. 새 상자 들이는 날 밤이면 창문 닫고 커튼 치고 밀폐된 상자 속에서 작업을 해. 모서리에 박힌 스테이플러 침들을 빼내고 상자 안과 밖을 바꿔 다시 똑같은 자리에 침들을 박아주면 끝(주의사항-침들의 이빨자국을 남기지 말 것, 이 작은 단서 하나가 의심을 불러들일 수 있음). 이름을, 원산지를, 성분목록을, 제조연월일을 안에 숨긴 상자, 닫으면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상자. 그렇다고 오래 사용할 생각은 절대 위험, 아무리 단단하게 봉한 모서리도 언제가 입 벌리고 말거든. 그런데 요즘 이 방법도 통 믿음이 가질 않아. 맨몸으로 비밀을 수집하고 다니는 노인과 대면한 이후의 일이야. 리어카에 수북이 해체된 상자를 싣고 오르막길을 가고 있기에 도와주는 척 따라붙어 말을 걸었지. 대체 상자들 안에는 뭔 비밀들이 담겨 있던가요? 난 그딴 거 관심 읎어, 무게만 나가면 그만이지, 암만. 요즘은 사람들 버리는 게 일이니께 재미가 쏠쏠혀. 허(虛)허(虛)허(虛). 순간 뒤집어쓴 상자가 무거워 주저앉았는데 노인은 가뿐히 오르막 정상에 올라가 있는 거야. 텅 빈 웃음소리가 나의 상자를 두드리는 새벽이었어.
목욕
옷을 다 벗었는데
박박 문지르니
먼지의 옷이 벗겨진다
살비듬 옷이 벗겨진다
상처로 꿰매놓은
헐렁한 옷만 남는다
이 옷을 벗기는 데
또 얼마나 걸릴까
수련처럼 평생 물을 맞대고 살면
스르르 풀릴 실밥인데
고개를 돌려보니
물기 젖은 창 너머로
또 낙엽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