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저께 경찰이 찾아왔었어. 결국 시체의 신원이 밝혀진 거야. 혜란이에 대해 꼬치꼬
치 캐묻더라구.]
[물론 서툰말은 안 했을 테지?]
[그야 당연하지. 난 이제 당신의 공범자나 다름 없다구.]
[..........................]
문남준은 아무 말도 없이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여진수는 그런 그를 덤덤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었다.
진수가 운영하는 카라얀 단란주점 안이었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라 주점안은 텅 비어있었다. 노란 등불이 한산하게 주위를 물둘이고 있었다.
진수가 이 단란주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은 아직 한 달 남짓 밖에 안 되었다.
부모와 여동생을 떠나보내고난 뒤,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다방을 경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등포 번화가에 단란주점을 차리게 된 것이다. 비록 공간은 그리 넓지 않지만, 그래도 호스티스를 넷이나 둔 비교적 견실한 업소였다.
그리고 이렇게 된 데에는 지금 맞은 편에 앉아 흙빛얼굴을 잔뜩 울그러뜨리고 있는 남준의 절대적인 도움이 있었다.
진수가 물장사에 손을 댄 것은 그야말로 호구지책이었다. 부친은 그가 어렸을 때 모친과 유일한 형제인 여동생을 남겨두고 폐암으로 사망했고, 그 뒤 모친은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두 남매를 키워왔다.
그런데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자 얼마 안 되는 재산을 물려받아 처음으로 물장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이 때는 이미 여동생 명희가 사라진 지 오래된 시기였다.
정확히 말해서 1년 8개월 전인 작년 3월의 어느날 갑자기 증발해 버린 것이다. 목동에 있는 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밤 10시쯤 그들과 헤어진 뒤로 종적이 묘연해졌다.
진수와 모친은 이틀을 기다리다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경찰은 수십명의 전문인력을 투입해서 수사에 최선을 다 했으나 이렇다 할 단서조차 잡지 못한 채 유야무야 되어 버렸다.
결국 그녀의 행적은 목동 신시가지에서부터 완전히 끊겨 버렸던 것이다. 경찰은 목동에서 집이 있는 마포 사이에서 변고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추정하에 그 일대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별무소득이었다.
교통사고라는 추정도 해보았으나 그날 이후 경찰에 접수된 교통사고 중에 명희가 관련되었을 만한 사건은 없었다.
이리하여 불량배들에 의한 납치설, 택시기사에 의한 납치유기설, 교통사고 후 유기설 등이 대두되었으나, 이 모두가 설로 끝나고 말았고, 시간만 흘러가고 있을 뿐이었다.
명희는 당시 24세로 전문대를 졸업하고 광고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진수는 하나 밖에 없는 혈육인 명희를 끔찍히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다니던 직장을 걷어치우고 명희의 행방을 찾는데 돈과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명희의 사진이 실린 전단지를 수없이 뿌렸고, 나름대로 방법을 총동원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렇게 1년이 흐른 뒤 모친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 무렵에는 진수도 동생을 찾는 일을 완전히 단념한 상태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마음 한 귀퉁이에는 언제나 명희의 명랑한 얼굴이 자리잡고 있었다.
<2>
경찰이 카라얀으로 주혜란에 대한 조사차 찾아온 것은 진수가 다방을 그만두고 단란주점을 개업한 지 한 달 가량이 지난 후였다.
전북 이리의 야산에서 주혜란이 사후 한 달 내지 40일 가량이 지난 부패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경찰의 말을 듣고 진수는 순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살된 뒤 야산에 묻혀있다가 비바람으로 흙무덤이 벗겨지는 바람에 동리사람에 의해 발견되엇다는 것이었다.
변사자는 임신 4,5개월의 몸이었고 신원을 알 만한 소지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치정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여겨졌지만, 변사체의 신원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방 남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찰은 이미 상당부분 부패가 진행된 피해자의 얼굴을 과학적인 기법을 동원하여 복원해서 몽타쥬를 만들었고, 그 몽타쥬가 실린 전단지를 전국에 배포부착했다.
그리고 며칠 뒤 서울 방학동에 사는 한 50대 여인이 그것을 보고 경찰에 출두했던 것이다. 자기의 조카딸과 몽타쥬의 얼굴이 비슷해 보여 찾아왔으며 조카딸은 평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연락을 해왔었는데, 벌써 두어 달째 소식이 끊겼다는 것이었다.
경찰은 그 여인이 말하는 조카딸의 신체적 특징과 행방불명된 시점을 조사해 본 결과 모든 상황이 변사자와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밝혀냈다. 게다가 결정적인 단서를 잡아냈던 것이다.
피살자는 여름철에 입는 상의위에 얇은 점퍼를 걸치고 있었으며, 하의는 청바지차림이었는데, 상표가 모두 뜯겨져나간 상태였다. 신발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범인이 처분해 버린 모양이었다.
범인은 그야말로 한 올의 증거물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용의주도했다. 하지만 범인이 지나쳐 버린 것이 한가지 있었다. 바로 반지였다.
별로 단서가 될 것 같지 않아 그대로 놓아둔 것인지, 아니면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낼 수가 없어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왼손 약지에 끼워져 있던 그 반지가 50대 여인이 말하는 그녀의 조카딸이라는 사실의 결정적인 증거물이 된 것이다. 피해자의 이모라는 여인은 조카딸이 끼고 있던 반지를 잘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변사자가 당년 26세의 주혜란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자, 수사는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런 유형의 사건은 일단 신원이 밝혀지면 주변인물을 철저히 캐나가는 과정에서 쉽게 범인이 드러나는 수가 많기 때문이었다.
수사관이 여진수를 찾아온 것도 이런 수순에서였다.
이모라는 여인이 혜란이 실종되기 전 청계천에 있는 다방에서 일하고 있었노라 말해옴에 따라 청계천 일대의 다방을 샅샅이 뒤진 끝에 그 다방이 지금은 다른 사람이 운영하고 있지만, 두 달 전까지만해도 진수가 주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네, 혜란이라는 아가씨가 제가 운영하던 채림다방에서 일했었지요.]
단란주점으로 찾아온 두 명의 형사는 진수에게 연거푸 질문을 해댔다.
혜란이 일솜씨에서부터 성격, 대인관계, 취미생활, 특히 남자관계에 대해 파고들었다.
[주혜란의 주변에 남자가 있었던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남자요?........글쎄요.......]
진수는 지난 날을 더듬듯이 천장에 매달린 노란 등불을 올려다보고 있더니, 고개를 가로흔들었다.
[제 기억으론 없었던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남자가 있긴 했지만, 사장님께서 눈치를 못챘다는 건가요?]
얼굴이 말처럼 긴 뱁새눈의 김형사가 의구심이 담긴 투로 이렇게 물었다.
옆에 앉아 있던 진한 팔자 눈썹의 정형사 역시 진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글쎄요, 종업원의 개인일엔 관심이 없어놔서요.]
뱁새눈의 김형사가 입술 언저리를 삐죽거리며 다시금 물었다.
[그렇다면 혜란이가 임신하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물론 모르셨겠군요?]
[네, 뭐라구여? 임신을요?]
진수는 천만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런 그에게 정형사가 물었다.
[사장님 말씀으론 혜란씨가 9월 초순부터 갑자기 나오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연락도 안 해봤단 말씀입니까?]
[아무런 연락도 없이 며칠씩 나오질 않아 궁금했었죠. 영업에 지장이 크니까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바닥에서 일하는 애들은 말 한 마디 없이 그만두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거든요. 그래서 처음 핸드폰으로 연락을 취해봤지만 통화가 안 되더라구요.]
[이력서 같은 것으로 집에 연락해 볼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이력서라구요? 그런 걸 곧이 믿는 업주가 있을까요? 그저 형식적으로 훑어보고 채용을 결정하는 것 뿐이니까요.]
진수의 무덤덤한 대답에 이번에는 김형사가 끼어들어 물었다.
[좋습니다. 그건 그렇고 혜란씨가 다방에 근무할 당시 다른 종업원은 없었습니까?]
그러자 진수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종업원은 혜란이 하나 뿐이었지요.]
수사진이 이제까지 알아낸 바로는 혜란은 경기도 남양주 태생으로 부친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린 뒤 모친과 단 둘이 살아왔으며, 그 모친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서울로 올라와 다방 같은 유흥업소를 전전하고 있었다. 유일한 친척이라고는 그 방학동에 사는 이모 뿐이었다.
결국 경찰은 혜란이 살해되기 전에 살고 있었던 거주지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3>
진수는 더 이상 남준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실상 단란주점을 차리는데 든 거의 모든 비용이 남준에게서 갈취한 돈이었다.
경찰이 혜란의 신원을 밝혀내고 본격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만일 남준의 범행사실이 탄로나면 자신은 단순히 공갈협박죄 뿐만 아니라 살인은폐죄까지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형사들의 끈질긴 추궁에도 진수는 절대로 그 사실을 입 밖에 내지를 않았었다. 혜란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었을 때 그의 두뇌는 자신이 생각해도 놀라울 만큼 냉철하게 돌아갔고, 허위진술로 위기를 모면했던 것이다.
혜란은 구인광고를 보고 찾아왔었고, 금방 마음에 들어 채용하게 되었었다.
그녀는 미모라고는 할 수 없으나, 요즘 젊은 여자들 같지 않게 어딘지 청순해 보이는 데가 있었다.
그런 혜란이 어느날 갑자기 소식이 끊겨 버렸던 것이다. 혜란은 그 동안 무단결근은 물론, 지각도 드물 정도로 성실했기 때문에 진수로서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혜란에게 연락을 취해 보았다. 하지만 불통이었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종업원인 서정희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서정희는 이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문남준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겠냐고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는 진수 역시 수긍이 가는 데가 있었다.
문남준은 올 2월 경부터 진수가 운영하는 채림다방에 일주일이 멀다 하고 찾아온 단골손님의 한 사람이었다.커피보다는 혜란을 만나기 위해서 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혜란을 보기위해 찾아오는 손님은 그 외에도 여러 명이 있었다.
그런데도 진수가 문남준을 혜란의 실종과 연결시켜 생각한 것은 그가 보통 이상의 관심을 혜란에게 쏟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진수는 혜란이 무단결근을 한 나흘째 되던 날 혜란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형사들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그녀의 주소가 채용할 때 받아놓은 이력서에 상세히 적혀 있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혜란은 중계동 소재 단독주택에 세를 들어 살고 있었다. 그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사정을 설명했고, 여주인도 며칠째 아무런 연락도 없이 집을 비우고 있는 세입자에 대해 무척 걱정을 하고 있었다.
진수는 여주인을 설득해서 열쇠기술자를 불러 혜란의 방으로 들어가 보았다. 혹시 혜란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리고 방 안에서 한 물건을 입수할 수가 있었다. 그는 여주인이 밖에서 한 눈을 파는 사이에 그것을 몰래 숨겨가지고 나왔다. 그것은 혜란이 쓴 일기장이었다.
진수는 다방으로 가서 일기장을 한 줄 한 줄 눈을 빛내며 읽어내려갔다.
일기는 2년 전부터 기록되고 있었다. 그러나 진수의 흥미를 끈 것은 바로 요 몇 달 사이의 것이었다.
그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종의 기대감과 호기심을 품고 하나 하나 읽어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문제의 기록들을 찾아냈다.
4월 경부터 문남준과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더니 그와의 애정문제가 날이 갈 수록 일기의 기둥줄거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늘 남준씨에게 임신한 사실을 알렸다. 하지만 남준씨는 어찌된 셈이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근래 남준씨는 웬지 기분이 언짢은 듯 만나도 전처럼 잘 웃지도 않고 말도 잘 안 한다. 왜그러냐고 물어도 그냥 넘어가려고만 할 뿐,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 웬지 자꾸만 불안해진다..................
............점점 배가 불러오는 느낌이다. 오늘 남준씨를 만나 하루 속히 약혼날짜를 잡자고 했다.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 우리의 사이를 공개하고 정식으로 교제를 해나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시큰둥한 태도로 아직 시기상조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대체 무엇이 시기상조란 말인가? 우리가 무슨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떳떳한 미혼남녀가 아닌가?....................
..............내일 모레 남준씨의 생가가 잇는 전북 이리로 함께 가기로 했다. 그 분도 근래 전에 없이 다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줘서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남준씨는 바람도 쏘이고 고향의 부모님에게 인사도 드릴 겸 그 곳에서 2,3일을 보내자고 했다.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가게는 사장님께 말씀드려 이틀 동안 휴가를 받을 작정이다. 아르바이트생인 정희가 있으니까 사장님도 아마 그 정도는 양해해 주시리라 믿는다..............
진수의 눈을 잡아끈 대목은 바로 일기의 맨끝부분이었다. 혜란은 남준과 함께 그의 고향으로 내려갈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 길로 행방불명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물론 혜란이 아직까지 남준의 고향에 머물러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녀의 꼼꼼한 성격으로 보아 분명히 이모나 그에게 연락을 해왔을 것이다.
이제 혜란의 실종에 남준이 개입된 것은 거의 확정적이었다. 아니, 개입했을 뿐만 아니라 혜란은 남준에 의해 살해된 뒤 유기된 것이다. 진수가 이런 극단적인 결론을 도출해낸 데에는 일기장의 내용에 상응하는 최근의 남준의 태도변화를 들 수 있었다.
몇 달 전만 해도 남준은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채림다방을 드나들었다. 그러던 것이 차츰 뜸해지더니 마침내 발길을 뚝 끊고 말았던 것이다.
일기의 마지막 부분이라 할 수 있는 9월 초순 경 혜란은 진수에게 이틀간의 휴가를 요청했고, 진수는 그 동안의 그녀의 근무성적을 감안하여 기분좋게 허락했던 것이다.
그 때는 혜란과 남준이 꽤 깊은 관계에 빠져있었다고 직감하고 있었거니와, 남준의 고향이 행선지였다는 것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었다.
진수는 남준이 범인이라는 추정하에 바쁜 시간을 쪼개 그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남준이 신도림동 어딘가에 철강회사를 갓 차렸다는 이야기를 혜란에게서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마침내 남준의 회사를 찾아냈다. 그런데 회사는 뜻밖으로 규모가 제법 크고 당당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퇴근하는 경리여사원을 매수해서 혜란이 결근한 날짜인 9월 12일과 13일에 과연 남준이 회사에 출근했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남준은 몸이 안 좋아 좀 쉬어야겠다면서 이틀 동안 회사에 나오지를 않았고, 그것은 혜란의 휴가날짜와 딱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결국 진수는 남준의 범죄의 꼬리를 잡았으며, 그 때부터 남준은 진수의 손아귀에서 놀아났다.
범행동기는 역시 진수가 예상한 대로 결혼할 뜻은 추호도 없었는데 어쩌다가 혜란이 임신을 하고 말았고, 그것을 계기로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오자 생각다 못해 지리를 잘 아는 고향인 이리 근처의 야산으로 데리고 가서 교살한 뒤 시체를 암매장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진수는 남준에게 돈을 갈취해서 단란주점을 차렸고, 장사는 차츰 궤도에 올라서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혜란의 사체가 발견되었고 경찰이 수사에 나서게 된 것이다.
게다가 남준의 말이 모든 증거가 되는 물건을 감쪽같이 인멸했다는데 경찰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신원을 밝혀냈으며 수사망을 차츰 좁혀오고 있었다.
<4>
애초에 혜란을 건드린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하기는 그 당시까지만 해도 남준 역시 혜란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어느 상류층 가정의 일개 운전사일 뿐이었다. 그야말로 직업치고는 미천한 것이었다.
그는 남달리 출세에 대한 욕구가 강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출세한다는 것,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결코 녹녹치가 않았다. 별로 배우지도 못한 빈농출신의 그에게 출세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자가용 운전사로 일하는 것만도 감지덕지하고 있었고, 틈틈이 혜란을 만나는 것을 유일의 낙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팔자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느날 갑자기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행운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던 것이다.
그 행운을 잡은 것은 정확히 지금부터 5개월 전인 금년 6월의 일이었다.
남준은 신사동에 있는 어느 부유한 집안에 근무하고 있었다. 집주인은 젊었을 때 남편과 사별한 40대 후반의 여자였고, 아직 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그리고 고용인으로 50대의 가정부와 운전사인 남준이 있을 뿐이었다.
작고한 남편이 워낙 재력가여서 여의도에 있는 8층짜리 빌딩에서 나오는 임대료만으로도 먹고 살고 남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미망인 유영애가 몇 년 전부터 어느 대기업의 간부와 정을 통하고 있었다.그녀는 그 기업 부사장 성병일과의 관계를 남준에게 드러내 놓고 있었다. 그만큼 남준을 신임하고 있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도, 반대로 운전기사 따위를 멸시하여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남준은 한 때 그것을 미끼로 협박을 해볼까도 생각했지만, 스스로 어리석은 짓이라고 일축해 버렸었다. 그럴 것이 그들 두 남녀는 설사 불륜관계가 드러난다 해도 크게 불이익을 당할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상 대기업의 부사장으로서 첩 하나 정도 거느리는 것은 결코 사회적인 물의의 대상이 못되었고, 게다가 유여인은 남편과 사별한 지 이미 10여년이 되는 터였다.
그들 남녀는 이런 사실을 기정사실화하여 운전사인 남준에게 별다른 경계심도 없이 둘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놓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 덕에 남준은 월급 외에 그에 상응하는 보너스를 두둑히 챙길 수가 있었다. 공연히 입을 잘못 놀렸다가 해고를 당하느니 차라리 돈이나 챙기자고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데 행운의 여신은 난데없는 곳에서 손을 내밀었던 것이다.
집주인 유영애가 지병인 고혈압으로 사망한 것은 금년 6월 중순의 일이었다. 그 영애가 죽기 며칠 전 병실로 남준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편지봉투 하나를 건네주면서 만일 자기가 죽게 되면, 그것을 성병일에게 전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걸 꼭좀 성사장님한테 전해줘요.]
[넷, 알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남준은 물론 충견처럼 머리를 조아리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도 못되어 그녀는 숨지고 말았다.
남준은 그 때까지만 해도 그 편지를 소중히 간직하고 잇었고, 여주인의 마지막 부탁을 충실히 이행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이었다. 보나마나 삶의 최후를 맞이한 중년여인의 치졸한 넋두리가 적혀있으려니 생각하면서도 마치 판도라의 상자의 유혹처럼 보고 싶어 좀이 쑤시는 것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삼수갑산엘 갈망정 뜯어보자)
그는 마침내 봉투를 뜯어보았다.그리고 뜻하지 않은 공갈의 재료를 잡은 것이다.
편지는 모두 10장 분량이었으며 남준이 짐작한 대로 마지막 가는 여인이 애인에게 띄우는 눈물겨운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공갈의 재료는 단 몇 줄에 있었다.
.............병일씨, 그 악몽 같은 일은 이제 그만 잊어버리셔요. 경찰은 낌새조차 못채고 있어요. 게다가 벌써 1년 반이나 전의 일이잖아요? 물론 그 때 당신은 과속운전을 하고 있었지만, 따지고보면 갑자기 도로변으로 뛰어든 그 여자쪽에 더 큰 잘못이 있었어요. 어쨌거나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무서워져요. 새벽녘 가평, 그 어둠 속에서 땀을 비오듯 쏟으면서 그 여자의 시체를 야산에 파묻던 일, 정말 끔찍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정말 안심해도 돼요. 그러니 그 일일랑 저의 죽음과 함께 병일씨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지워버리셔요................
남준은 그 편지를 모두 복사해서 그 사본을 성병일에게 보여주었다. 그러자 병일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낭패의 빛을 만면에 띄우며 힘없이 고개를 떨구는 것이었다.
[제발 살려만 주십시오. 무슨 짓을 해서라도 꼭 보답하겠습니다.]
병일은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 때부터 그는 남준의 꼭두각시가 되었던 것이다. 끝이 없는 협박의 사슬에 묶이게 된 것이다. 그가 그 고리를 잘라내면, 동시에 그의 모든 부와명예도 함께 잘려져나가는 것이다.
남준이 두 차례에 걸쳐 뜯어낸 돈만 해도 호화별장 하나를 짓고도 남는 액수였다. 남준은 곧 회사를 차렸다. 그는 전에 철강관계의 직업에 종사한 적이 있어, 철강사업에 대한 안목이 제법 있었다. 게다가 사업이 여의치 않게 되면, 언제건 병일에게서 자금을 뜯어낼 수가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나 할 까, 별볼일 없는 운전사 시절에 사귀게 된 다방레지 주혜란이 그의 탄탄대로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조용히 해결을 보았어야 하는 건데, 살해해 버린 것은 역시 경솔한 짓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으로 청산하려해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던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자위수단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그까짓 다방레지 때문에 앞길을 망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저러나 그 다방주인이었던 여진수가 혜란의 일기장을 미끼로 협박을 해왔을 때 남준은 이것이야말로 인과응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그는 병일에게서 또다시 사업자금을 두둑히 뜯어낸 뒤라, 다시는 그에게 손을 벌리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난데없이 진수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어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또다시 병일에게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들의 추악한 먹이사슬은 이렇게 끝도 없이 물고 물리고 있었다.
<5>
그 무렵 주혜란살해사건의 수사본부는 뜻밖의 단서를 잡고 사건해결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혜란의 시체가 발견된 지 한 달이 훨씬 지난 12월 초순의 어느날 대구시의 한 파출소에 젊은 여자가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뜻밖의 제보해 왔다. 그녀는 혜란의 사진이 들어있는 게시판의 유인물을 보고 지체없이 출두한 것이었다.
대구 중부경찰서로부터 죽은 혜란이 실종되기 전까지 서울 청계천의 채림다방에서 함께 일했다는 여자를 찾아냈다는 보고를 받은 수사본부는 아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서정희를 즉시 이리로 데리고 온 수사진은 본격적인 증언청취에 들어갔다.
[저하고 같이 일하던 혜란이 언니가 9월 중순 경 휴가를 간 후 그 뒤로 다방에 나오지를 않았어요. 저는 이상하게만 생각하고 있었죠. 그 후 한 달 가량 지나 주인아저씨가 다방을 정리하는 바람에 더 이상 서울에 머물고 싶지 않아 고향인 대구로 내려왔던 거에요.저는 그 때 혜란언니가 임신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감지하고 있었어요.]
[혹시 혜란을 임신시킨 남자가 누군지 모르나?]
[글쎄요. 확실한 건 모르지만.......그 때 혜란이 언니와 사귀던 남자가 있었어요. 사귄다고 한 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느낌일 뿐인데, 어쨌든 문남준이라고 33,4 세 가량 되는 사람이 다방에 뻔질나게 드나들어서 혜란이 언니와 얘기를 하고 돌아가곤 했어요.]
나아가서 그녀는 남준이 다방에 드나든지 몇 달 후 신도림동인지 어딘지에 무슨 철강회사를 차렸다고 말하던 것을 기억 속에서 되살려내 주었다.
서정희의 출현으로 그 동안 사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한 꺼풀 걷히고 앞길이 환하게 트이기 시작했다.
수사진은 며칠 뒤 신도림동에 있는 문남준의 대림철강으로 기세좋게 쳐들어갔다. 작업실에 있던 남준은 좀 얼떨떨한 눈치였으나 형사들을 집무실로 안내했다.
[주혜란을 아실테죠?]
자리에 앉자마자 뱁새눈의 김형사가 물었다.
[주혜란이요?]
남준은 고개를 갸웃하고 반문했다. 그런 그를 노려보며 김형사는 다그쳤다.
[주혜란을 정말 모른단 말씀입니까?]
팔자눈썹의 정형사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는데요.]
[문남준씨, 증거는 이미 확보돼 있어요. 당신 채림다방의 주혜란한테 임신까지 시켜놓고 고향인 이리 근처 야산으로 데리고 가 목졸라 죽인 뒤 암매장하지 않았소? 그 다방에서 같이 일하던 서정희란 여자애가 모두 털어놨단 말요.]
두 형사는 남준의 표정이 순간 경직된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남준은 이내 태연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요. 주혜란은 누구고 서정희는 또 뭐란 말요?]
김형사는 상대방의 당당한 기세에 눌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정형사가 마지막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정 그렇다면 서정희와 대질시키는 수 밖에 없겠군.]
남준은 또다시 주춤하는 기색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그러고 보니 생각이 나는군요. 맞아요. 채림다방에 있던 그 레지아가씨가 주혜란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그 아가씨를 어쨌다구요? 목졸라 살해를 해요?]
그는 노기등등하여 혀를 쩍쩍 찼다. 두 형사는 다시금 말문이 막혓다.
[당신 그 아가씨를 임신까지 시키지 않았소?]
정형사가 언성을 높이며 다그치자 남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그 다방에 가끔 간 적은 있지만, 주혜란이와 사귀다뇨? 누가 그런 헛소리를 합디까? 난 그저 심심풀이로 그 아가씨와 어울렸을 뿐이라구요. 그런 쓰잘데기 없는 말을 하려거든 그만 돌아가십시오.]
남준은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렇게 되고보니 두 형사는 할 말이 없었다. 그가 혜란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증명할 결정적인 증거란 없었던 것이다.
김형사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지난 9월 12일과 13일 회사를 쉬셨더군요. 왜죠?]
[9월 12일이라구요?.......글쎄요. 기억이 안 나는대요. 그건 또 왜 묻습니까? 이번엔 알리바이를 캐시겠다? 어쨌든 그 날 회사를 쉬었건 안 쉬었건 난 그런 사건하곤 관계가 없으니 맘대로 해석하시구려.]
<6>
[허어, 그것 참 아주 독한 악당을 만났구먼.]
주혜란살해사건 수사본부가 설치 돼어 있는 이리 경찰서 안이었다. 두형사의 보고를 받은 형사반장이 탄식하듯 말했다.
[그 자가 주혜란을 살해한 건 분명한데,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
반장이 약간 벗겨진 머리에 손을 대고 이렇게 말했다.
[일단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로 하죠. 그 서정희가 혜란과 남준이 깊은 관계에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고, 혜란이 휴가를 받은 날 남준도 회사를 쉬고 있었으니.... 게다가 시체를 유기한 곳이 바로 남준의 생가 근처가 아닙니까?]
[글쎄, 하지만 모든 게 다만 정황증거일 뿐이잖아? 그런 방증만으로는 구속영장을 발부받기가 힘들지. 보다 확고한 물증이 있어야 해.]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입니다마는....]
김형사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놈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여진수한테서 모색해 보는게 어떨까 하는 겁니다.]
[여진수를? 그럼 여진수가 이번 사건의 공범자라도 된다는 건가?]
[아뇨, 그건 아니더라도 당시 채림다방의 아르바이트종업원이었던 서정희가 주혜란과 문남준 사이를 눈치챘을 정도였는데 , 정작 주인이었던 여진수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좀 수상쩍단 말씀입니다.
게다가 그는 우리가 혜란이 말고 다른 종업원은 없었느냐고 물어봤을 때도 없었다고 위증을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렇다고해서 그가 문남준과 공범관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그런데도 진수가 위증을 해서 문남준을 도와준 까닭은 뭐냐? 그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남준이 혜란을 살해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제 생각으로는 여진수가 문남준의 결정적인 약점을 잡고 그를 협박해서 돈을 챙겼다고 봅니다. 그래서 자기보신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고 말씀입니다.]
반장은 김형사의 추리의 타당성을 인정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난 김형사는 또다시 말했다.
[그 근거로 주혜란이 실종된 지 불과 한 달만에 다방을 그만 두고 영등포에 제법 그럴듯한 단란주점을 차린 점을 들 수 있죠. 우연이라고 하기엔 전후사정이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집니다. 저는 그 돈이 문남준에게서 나왔다고 봅니다.]
반장은 그럴듯하다고 다시금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말야, 김형사. 진수가 그 많은 돈을 어떻게 갈취했을까? 바꿔말해서 남준이 그만한 재산을 갖고 있었을까? 지금은 철강회사 대표라지만 얼마 전까지도 그는 일개 자가용 운전사였단 말야.]
[하긴 그건 그렇군요.]
김형사는 자신의 추리에 폐단을 발견한 듯 약간 위축되어 말했다.
이 때 옆에 있던 정형사가 여전히 덤벙대는 투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진수와 문남준 사이에는 묘한 공통분모가 있네요.]
그러자 순간 반장과 김형사는 그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고 두 눈초리를 빛냈다.
[문남준도 갑자기 생활여건이 상승했다, 여진수도 마찬가지다. 이거 아무래도 구린데요.]
[그렇다면 문남준도 위법으로 돈을 챙기도 있었다는 건가? 어떻게?]
반장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동안 말들이 없었다. 그 공백을 깨고 김형사가 말했다.
[그럼 한 번 이런 방법을 써보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연막작전을 쓰는 거죠. 문남준을 호출해서 여진수가 모든 사실을 자백했다고 유도심문을 하는 겁니다.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놈이라도 진수와 대질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으면 쉽게 무너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이 안을 채택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보기 좋게 적중했던 것이다.
그렇듯 철저하게 범행을 부인하던 남준이 여진수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말하고
[이게 바로 진수가 자백한 내용을 녹음한 테이프라구. 한 번 틀어볼까?]
이러면서 가짜테이프를 들이대고 욱박지르자 고개를 힘없이 떨구고는 순순히 자백을 한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남준 역시 뺑소니교통사고를 내고 시체를 암매장한 어느 대기업의 간부를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성병일이 즉시 호출되었고 남준이 그를 협박하는데 사용한 죽은 유영애의 편지사본을 들이대고 추궁하자 그 또한 순순히 범행을 자백한 것이었다.
마포 도로변에서 젊은 여자를 치여죽이고 시체를 차량 트렁크에 싣고는 가평 야산에 파묻었다는 것이었다.
수사진은 즉시 성병일을 대동하고 그 야산 일대를 뒤져 마침내 이미 부패되어 뼈만 남은 사체 한 구를 찾아냈다. 변사체의 옷 안에 신분증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신원을 확인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여진수였다. 그는 남준을 대질시키고 협박사실을 추궁했는데도 한사코 갈취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실상 그의 갈취행위를 입증할 만한 증거자료는 없었던 것이다. 남준의 말에 의하면, 진수는 돈을 꼭 현금화시켜 직접 받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남준이 주혜란을 살해했다는 결정적이 증거물인 혜란의 일기장을 진수가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남준을 주혜란 살해 및 사체유기 혐의로 입건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뚜렷한 물증이 없고보니 수사진으로서는 개운치가 않았던 것이다.
<7>
그로부터 며칠 뒤 김형사와 정형사가 단란주점으로 진수를 찾아왔다.
[또 무슨 일이죠? 그 사건얘기라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니 돌아가시지요.]
[여진수씨]
실내의 붉으레한 조명 아래 테이블을 사이에 마주앉아 있는 진수를 바라보며 김형사가 엄숙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남준씨한테 돈을 갈취한 일이 없소?]
[또 그 얘긴가요? 이젠 정말 말하기도 싫습니다.]
그러면서 진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그런 그를 김형사가 제지했다.
[여진수씨, 오늘은 그 일 때문에 찾아온 게 아닙니다. 잠깐 앉아 보십시오.]
그 말에 진수는 의아한 눈빛으로 천천히 소파에 엉덩이를 밀착시켰다.
[매스컴을 통해서 이번 사건의 전모를 알고 계실테죠?]
[그런데요?]
[문남준이 대기업 부사장인 성병일을 협박해서 거액을 갈취해온 사실도 물론 알았겠죠?]
[.........알고 있습니다.]
[그 성병일이 내연의 여자와 여행을 갔다오다가 젉은 여자를 치여죽이고는 가평의 야산에 시체를 파묻었어요. 그리고 어쩌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문남준은 그에게 달라붙어 돈을 뜯어왔죠. 그런데 말입니다, 여진수씨..........]
김형사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진수는 일말의 호기심을 느끼며 형사의 입을 바라보았다.
이 때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정형사가 끼어들어 김형사의 말을 가로챘다.
[여진수씨, 당신은 그 교통사고의 희생자가 누구였는지 물론 모를 테죠?]
정형사가 김형사의 느긋한 말투에 짜증이 난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그 희생자는 바로 이 여자입니다.]
그는 점퍼 안주머니에서 사진을 한 장 꺼내 진수의 눈 앞에 들이댔다.
그것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던 진수의 시선이 순간 얼어붙어 버렸다.
그 사진에는 햇빛이 내려쪼이는 화창한 나무들을 배경으로 20대 초반의 젊은 여자 하나가 해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진수를 바라보던 김형사가 딱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 사진은 작년에 행방불명된 여동생을 찾기 위해 당신이 경찰서에 제출한 바로 그 사진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성병일의 차에 치여 유명을 달리 한 그 아가씨가 바로 당신의 여동생이었단 말입니다.
그런 성병일에게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남준은 피를 빨아먹고 있었고, 또 당신은 그 남준에게서 피를 고스란히 빨아먹고 있었던 거죠. 결국 여동생 여명희의 억울한 죽음을 성병일, 문남준, 그리고 바로 당신이 은폐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말은 바로 당신이 여동생을 살해한 공범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김형사는 여기까지 말하고는 인간의 비정함에 지쳤다는 듯이 한숨을 길게 토해냈다.
얼빠진 진수의 두 눈에 사진 속의 명희의 해맑은 미소가 어느새 연민의 눈물을 머금은 쓴웃음으로 바뀌고 있었다.(끝)
아이디어는 좋은데 세부적인 설정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자신과 내연남인 성병일의 치명적일수 있는 비밀을 편지에 써서 운전수에게 맡긴 아줌마의 설정같은 경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40대의 고혈압이 지병으로 있는 아줌마라고 해도 그런 편지를 운전사에게 남기고 갑자기 죽는다는건 -마치 자기가 죽을걸 알기라도 하는것처럼 자기가 죽게되면 그 편지를 성병일에게 전해달라는 말까지 남기고- 소설의 설정을 위한 설정일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굳이 그 비밀을 알아야한다면 문남준이 운전사이기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알아낼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소하지만 사실감을 떨어뜨리는 묘사들이 좀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수의 모친이 노환으로 죽었다고 했는데, 실종된 여동생이 24살 -실종된지 1년 8개월이 지났다면 26살- 동생과의 터울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어머니가 노환으로 죽기에는 이른 나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땅속에 묻은 주혜란의 시체가 한달에서 40일정도 사후경과시간이 지난 걸로 밝혀지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사망추정시간은 일주일 정도가 넘어선 시점부터는 부패정도로 알기는 개인차가 심하기때문에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부패된 해골로 슈포임포즈기법을 이용, 몽타쥬를 만들고 신원확인후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느때쯤부터 행적이 묘연해져 그때를 살해시기로 잡는게 논리적이죠. 그리고 임신한 경우라고 하면 남준과의 관계를 남준의 진술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은 주혜란의 유전자와 아기의 유전자, 남준의 유전자를 확인하면 남준이 아무리 혜란과의 관계를 부정해도 그가 주혜란을 임신시킨 사실은 드러나니까요. 실제 야산에서 사체가 발견되고 수사진들이 어떻게 수사를 해나가는지에 대해 조금 더 세심히 조사해서 작품에 반영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추리소설은 그런 부분에서 약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있는데
CSI과학수사대같은 프로그램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이런 부분의 허술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은 그냥 읽는게 아니라 논리적인 수사과정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구나 이 소설에서는 수사관들의 수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게 나오기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작가가 염두에 두어야하겠지요. 이런 기초적인 것들이 탄탄하게 이루어졌을때 비로소 아이디어가 소설속에서 제대로 빛을 발할수 있을꺼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댓글 현철벌떼님 작품 중에서 제일 인상깊게 읽었던 작품입니다.진상이 밝혀진 후 인물들을 보면 참 비극적이거든요.
고맙습니다^^
아이디어는 좋은데 세부적인 설정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네요. 자신과 내연남인 성병일의 치명적일수 있는 비밀을 편지에 써서 운전수에게 맡긴 아줌마의 설정같은 경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40대의 고혈압이 지병으로 있는 아줌마라고 해도 그런 편지를 운전사에게 남기고 갑자기 죽는다는건 -마치 자기가 죽을걸 알기라도 하는것처럼 자기가 죽게되면 그 편지를 성병일에게 전해달라는 말까지 남기고- 소설의 설정을 위한 설정일뿐이라는 생각입니다. 굳이 그 비밀을 알아야한다면 문남준이 운전사이기때문에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알아낼수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사소하지만 사실감을 떨어뜨리는 묘사들이 좀 있습니다. 이를테면 진수의 모친이 노환으로 죽었다고 했는데, 실종된 여동생이 24살 -실종된지 1년 8개월이 지났다면 26살- 동생과의 터울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어머니가 노환으로 죽기에는 이른 나이지 않을까요? 그리고 땅속에 묻은 주혜란의 시체가 한달에서 40일정도 사후경과시간이 지난 걸로 밝혀지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사망추정시간은 일주일 정도가 넘어선 시점부터는 부패정도로 알기는 개인차가 심하기때문에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부패된 해골로 슈포임포즈기법을 이용, 몽타쥬를 만들고 신원확인후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어느때쯤부터 행적이 묘연해져 그때를 살해시기로 잡는게 논리적이죠. 그리고 임신한 경우라고 하면 남준과의 관계를 남준의 진술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은 주혜란의 유전자와 아기의 유전자, 남준의 유전자를 확인하면 남준이 아무리 혜란과의 관계를 부정해도 그가 주혜란을 임신시킨 사실은 드러나니까요. 실제 야산에서 사체가 발견되고 수사진들이 어떻게 수사를 해나가는지에 대해 조금 더 세심히 조사해서 작품에 반영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추리소설은 그런 부분에서 약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있는데
CSI과학수사대같은 프로그램에 익숙해진 독자들이 이런 부분의 허술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을것 같습니다. 추리소설은 그냥 읽는게 아니라 논리적인 수사과정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더구나 이 소설에서는 수사관들의 수사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게 나오기때문에- 이런 부분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작가가 염두에 두어야하겠지요. 이런 기초적인 것들이 탄탄하게 이루어졌을때 비로소 아이디어가 소설속에서 제대로 빛을 발할수 있을꺼라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