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국왕이 서총대에 친히 나가서 활쏘기 우승자에게 말 두 필을 하사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고려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사진가 권태균 |
성종 때 사림들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사림들이 공신집단들의 불법과 전횡을 비판해 조정의 도덕성을 높인 반면 문치(文治) 편향에 따른 국가의 문약화(文弱化)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국왕에게 국가의 문약화 방지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성종은 사례(射禮)와 강무(講武)를 직접 주관하는 것으로 ‘무인 군주’의 모습도 보이려 했다.
사례는 서울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활을 쏘는 대사례(大射禮)와 지방에서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사례(鄕射禮)로 나뉜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 공자는 “군자는 다투지 않으나 반드시 활쏘기는 그렇지 않다. 서로 읍하고 사양하며 단에 올라 활을 쏘고 내려와서 마시니 그 다툼이 군자답도다(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98F2>,其爭也君子)”라고 말했다. 대사례는 『의례(儀禮)』의 한 편명(篇名)일 정도로 국왕의 주요 의식 중 하나였다.
성종은 재위 8년(1477) 8월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공자 및 선현들을 제사하는 석전(釋奠)을 거행하고 명륜당에 나가 특별 과거를 보았다. 1400여 명의 거자(擧子:응시생) 중 권건(權建) 등 4명의 급제자를 선발했는데, 내구마(內廐馬:임금의 말)를 타고 유가(遊街:급제자의 가두행진)하는 행렬에 구경꾼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성종은 이때 사단(射壇)에 나가 대사례를 행했는데 화살 넉 대를 쏘아 1시(矢)를 맞혔고 월산대군과 영의정 정창손 이하 68명이 짝을 지어 쏘았는데 맞힌 자는 상을 주고 못 맞힌 자는 벌주를 내렸다.
선릉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
그러나 사림은 국왕이 대사례 외에도 관사(觀射) 등을 통해 무예를 권장하려 하면 그것을 비판하는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관사는 임금이 신하들의 활쏘기를 구경하는 것이지만 때로는 임금도 직접 쏘았다. 세조도 자주 관사를 즐겼으나 이때만 해도 국왕의 관사를 비판할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림이 성종의 관사를 비판하기 시작한 배경에는 무예를 천한 것으로 여겼던 사림들의 내심이 있었다. 성종 9년(1478) 4월 사헌부 대사헌 유지(柳<8F0A>) 등이 ‘지진과 흙비가 내렸는데 임금이 후원에서 종친(宗親)들과 관사하면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비판한 것이 이런 유형이었다. 임금은 수성(修省:마음을 가다듬어 반성함) 같은 문적(文的) 수양에 힘써야지 관사 같은 무적(武的) 유희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다. 무예를 천시하는 고질병이 대두하기 시작한 것이다.
성종은 “내가 종친과 더불어 관사하는 것은 친친(親親:친척을 친애함)을 돈독히 하고 무비(武備)를 닦으려는 것”이라면서 “송나라의 정치를 논할 때 ‘문치(文治)는 성했으나 무략(武略)은 강하지 못했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사림들이 이상으로 삼는 송나라가 무예를 천시하다가 망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었다.
하지만 성종은 사림들의 무예 천시에 대해 사상적·제도적으로 대응하는 본질적 대책보다는 관사를 계속하고 강무를 강행하는 현상적 대응에 만족했다. 성종 10년(1479) 3월 시강관 권건(權健) 등은 “근래 들으니 여러 도에 교서를 내려 사냥개를 구했다고 합니다”라고 비판했다. 성종은 “강무(講武)에는 반드시 사냥(田獵)을 해야 하는데 사냥하려면 개가 없을 수 없다”고 변명했다. 성종은 공신 집단들의 불법 전횡에 적당히 타협한 것처럼 사림들의 무예 천시에도 적당히 타협했다. 성종은 재위 10년(1479) 10월 2일 융복(戎服:군복)을 입고 경기도로 사냥하러 나갔는데 명분은 종묘에 바칠 제물을 잡는다는 것이었다. 이때 성종은 거차산(巨次山)·조곡산(早谷山)·묘적산(妙積山)·저적산(猪積山)·청송산(靑松山)·보장산(寶藏山)·왕방산(王方山)·주엽산(注葉山) 등지를 돌며 보름 동안 사냥하다가 17일 환궁했다.
사냥은 국왕의 놀이이기도 했지만 강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평화시의 군사 훈련이기도 했다. 국왕의 사냥은 임금이 전쟁에 나갔을 때를 가정해 진행되었다. 어가(御駕) 앞 교룡기(交龍旗) 밑에 초요기(招搖旗)를 세웠는데도 달려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수들이 곤장을 맞은 것이 이를 말해준다. 성종은 강무에서 신하들을 죄준 후 이렇게 말했다.
“내가 평일에는 대신을 예로 대우하여 죄를 주지 않으려 했지만 군문(軍門)의 일은 크므로 죄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의원에게 치료해 주도록 하라.(『성종실록』 10년 10월 6일)” 성종은 이처럼 강무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도 사용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성종이 두 차례 북벌을 단행한 이유 중에는 왕권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있었다. 성종 10년(1479) 윤10월 명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건주여진(建州女眞:남만주 일대의 여진족)이 명나라 국경을 침범했다면서 출병을 요구했다.
성종은 “지금 겨울철을 만났으니 군사를 보내기가 가장 어려운 시기”라며 난색을 표하기도 했으나 결국 파병에 동의했다. 성종은 세조 때 여진 정벌에 참전했던 우찬성 어유소를 서정대장으로 삼아 1만 명의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건너라고 명했다. 서정군은 만포진(滿浦鎭)에서 이산진(理山鎭)까지 도강 지역을 물색했으나 그해 따라 얼음이 얼지 않아 도강에 실패하고 철수했다. 이대로 그칠 수 없다고 생각한 성종은 좌의정 윤필상과 평안도 절도사 김교(金嶠) 등에게 4000군사를 주어 다시 압록강을 건너게 했다. 그러나 여진족이 주로 흩어져 퇴각하는 전술로 맞서는 바람에 조선군이 올린 전과는 여진족의 머리 16급(級)과 남녀(男女) 합계 15명을 사로잡은 것에 불과했다.
성종 22년(1491) 정월 여진족 올적합(兀狄哈) 1000여 명이 영안도(永安道:함경도) 조산보(造山堡)를 공격해 군사 3명 사살, 26명 부상의 인명 피해를 주고 물자를 노략해간 사건이 발생했다. 경흥(慶興)부사 나사종(羅嗣宗)이 두만강을 건너 추격하다가 되레 전사하자 파병론이 등장했다. 찬반 양론이 대립했으나 성종은 파병을 결정하고 허종(許琮)을 북정도원수(北征都元帥)로 삼아 두만강을 건너게 했다. 여진족은 이때도 흩어져 도주하는 작전으로 맞서 조선군은 9명의 여진족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하는 작은 전과를 거두는 데 그쳤다. 만주 강역을 영구히 점령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응징 차원의 파병은 효과가 클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었다. 군사 문제에 있어서도 성종은 근본적 해결책을 모색하기보다 현상 타개책에 만족했다. 그 결과 25년이란 짧지 않은 재위 동안 성종이 남긴 구체적 업적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군(聖君)의 칭호를 받았던 것은 그 앞의 세조·예종이나 그 뒤의 연산군과 비교된 데 따른 반사이익에 불과한 것이었다.
재위 25년(1494) 11월 성종은 천증(喘證:기침)과 설사(痢證)에 목이 마르는 복합병세가 발생했다. 12월에는 얼굴빛이 위황(<75FF>黃:마르고 노래짐)해지고 허리 밑에 붉은 적취(積聚:배 속 덩어리)까지 나타났다. 배꼽 밑 종기를 오래 앓았다는 이세좌(李世佐)를 불러 치료 방법을 물어보자 “이 병을 앓은 지 15년인데 별다른 치료 방법은 없고 단지 수철(水鐵)과 천년와(千年瓦)를 불에 구워 아픈 부위에 문질렀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세좌는 그 후에도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다는 혐의로 연산군 10년(1504) 사형당할 때까지 10년을 더 살지만 성종은 달랐다. 12월 24일에 종기(腫氣) 치료 경험이 많은 의원(醫員) 전명춘(全明春)을 불러 치료하게 했으나 그날 오시(午時:오전 11시~ 오후 1시) 대조전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였다. 국왕이 될 수 없었던 성종은 대비 윤씨와 공신집단의 합의로 왕위에 올라 현실과 적당히 싸우고 적당히 타협했다.
성종이 타협을 거부했던 거의 유일한 사건이 왕비 윤씨의 폐출과 사사(賜死)였다. 그렇게 죽인 여인의 아들 연산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 또한 그로 인해 불거질 문제에 눈 감은 일종의 타협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