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토디오 이야기
원래 우리집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다.물론 막내 고모님의 영향으로 연로하신 할머니 (방일림 세실리아)가 이따끔 성당을 나가시고 식사때 성호경을 그으실 때 까지 모두들 구경만 하였다. 헌데 막내 누나 종숙이가 서울 창덕여고로 진출해서 명동 성당을 다니면서부터 상황이 달라 졌다. 부모님의 비호감적 천주쟁이 시각도 바뀌면서 중학생이된 나도 이따끔 누나를 따라 성당에 나가 보기도 했다.그리고 그것이 나의 성당 인연이 전부였다.
1974년 겨울 난 진해 해군 사관학교에서 미해군에서는 animal course로 악명 높다는 가입교 훈련 과정을 받고 있었다. 정말 춥고 배도 고팠다. 하루 24시간중 유일하게 쉴 수 있는 시간은 일요일 종교활동 시간 뿐 이었다. 해서 모두는 무조건 성당,교회, 법당 중 한군데로 숨어 들어가 따뜻한데서 한시간 졸고 나면 나누어주는 빵과 떡을 얻어먹고 돌아왔다. 그래도 가본데라고 성당이라 난 성당에 줄을 섰다. 미사시간에 한해 선배가 피아노로 성가 반주를 하는데 화음 없이 멜로디로만 겨우 따라 하는 것을 보았다. 빵을 하나 얻어 먹은 후 피아노나 키타를 칠줄 아는 후보생 나오라 해서 잘난 채 한다고 앞에 나가서 가요“하숙생”을 화음 뿡짝뿡짝 넣고 친 것이 메토디오의 출발이 될줄은 그때 까진 몰랐었다.그 시간 이후 난 성당 반주 생도로 지목이 되어 그로부터 4학년 되어 3학년에게 강제로 물려 줄때까지 꼼짝없이 일요일 외출도 미사후 늦게 나가야하는 부지불식 신앙심 높은 사관생도가 되어야 했다.하다 보니 1학년 되어 세례를 받게 되었는데 이때 신앙심 깊었던 3학년 한 선배가 대부를 서게 되었다. 서유석 선배는 서울 출신으로 사관생도 중 가장 모범이 되어서 받는 다는 군기장을 3개씩이나 달고 있는 정말 모범적인 생도였으며 후일 사관학교를 졸업 후 신학대학을 졸업하여 최초 사관학교 출신 신부님으로 군종감까지 역임후 대령으로 전역을 하신 특이한 경력을 가지게 되는 선배님이었다.
사관학교 생활은 정말 힘이 들었다.
만일 지금 다시 하라고 한다면 천금을 준다고 해도 사양할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자 말자 뛰기 시작해서
점호가 끝나고 소등을 해도 언제 또 비상 소집으로 불려 나가 무슨 트집으로 빳다를 맞을지 불안 불안해 가면서 잠을 잤다.
그런 소동 가운데서도 졸업 서열이 결정되는 공부를 해야하고 또 학점을 따야했다. 정말 많이 울었다. 해서 성당에 가서 엎어져 울고 또 물어 보았다.
주님!
전 왜 여기서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해야 하는지요?
이렇게 사는게 맞는 길인지요?
스스로 자청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
저에게 오늘 이고난이 미래 무지게 다리가 되게 하소서!
아니 그냥 그저 무사히 건너만 갈 수 있게 해 주소서!
이렇게 울음을 추스린 김호 생도는
캐돌릭 성가집 1번부터 끝까지 한번 다 피아노를 치고 나서 겨우 진정된 마음에서 내무반으로 돌아오곤 했다. 솔직히 신앙심 보다 주님께 원망과 넉두리만 하는 바다가 보이는 사관학교 작은 성당이었다.
이후 졸업 후 조종사가 되어
진해 비행장에 근무하게 되는데
함정도 아니면서 진해 통제사령부
와 먼거리에 위치한 부대 형편상
종교활동이 없는 상태에서 부대
정훈관을 겸무한 난 각 종파별(천주교,개신교,불교) 자체 조직을 결성해
종교 활동을 활성화 하였다.
물론 천주교 담당자는 내가 맞았고 하여튼 사목 활동을 열심히 하는 평신자로, 신부님을 대부빽 으로 둔 대자 신자로 진해해군성당 교우의 관점에선 나름 신앙심 깊있는 젊은 장교로 성장하여 갔다.
그리고 1980년 12월 21일 진해 해군성당 최초로 김상목, 박호영 신부님 주례로 혼배 미사를 올림으로 이또한 해군 신자의 모범이 되었다. 결혼후 1981년 백아도 비행사고를 겪고 회복하면서 병상에서의 기도는 나의 진통제 였으며 희망이었다. 정말 몰핀 아니면 해결 될 수 없는 통증 가운데 기도와 중얼거리는 성가 가운데 고통의 시간은 흘러 갔고 6개월 후 난 부대로 돌아와 다시 비행기를 탔다.
그렇게 큰 사고를 겪고 다시 비행기를 타기 까지 정말 많이 망설였다. 이가운데 수도 통합병원에서 두 분의 수녀님이 큰 용기를 주셨는데 한분인 통합병원 소속 할머니 수녀님이 말씀 하시길 “한 공군 중위도 비행사고후 통합병원을 거쳐 자대 복귀하였는데 당신이 기도하신 후 지금도 잘 비행하고 있다”면서 꼭 퇴원 후 다시 비행 할 수 있도록 기도 해 주시겠다고 했고 또 한 수녀님은 막내 누님의 연락을 받고 병문안 오신 누님 친구인 효주 글라라 사복입는 수녀님으로 나에게 묵주를 쥐어 주시고는
“호야!
주님께서 그 힘든 사지에서 널 살려주셨구나.꼭 다시 비행을 해서 주님께 보답 드릴 수 있도록 기도할게”하신 격려 말씀들이 다시 비행기를 타야겠다는 오기에 기름을 부어 주었다.
전쟁통에도 아이는 태어나듯이(나도 1953년 전쟁통에 태어났다) 이 와중에도 연지가 태어났다. 갖 100일이 지난 연지는 진해 군종 사제관에서 이번엔 김성진 신부님, 서유석 부제님(대부님이 신학대학 졸업후 진해 해군성당 부제로 계셨다)의 집전으로 유아 영세를 받았다. 대모는 연지 엄마 친구 순덕씨가 서 주었고 세례명은 우리집안 1호 신자 막내고모와같은 “스꼴라 스띠까”로 했다.
이후1985년 서울로 보직을 옮기면서부터 거의 매 2년 마다 보직따라 성당을 바꾸는 뜨네기 신자가 되었고 군대 계급이 올라감에따라 성당에서도 총무, 주일학교교장, 평신도회장 등으로 직책이 바뀌면 평신도로 업무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2007년 연지 결혼식에선 서유석 아부지 신부님과 동해 해군 성당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가던 이홍근 신부님이 더블 주례 사제로 혼배 미사를 집전해 주셔 기쁨이 두배 되었다.
사람 사는게 어디 진득할게 있을까만 2007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2010년 군복을 벗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뒤에 찾아온, 죽을 것만 같았던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벗어 나기위해 선택한 가출 중에서도 손에서 놓지 않은 묵주 덕분에 무사히 귀가하고 쌍둥이 손주 다나 다민이를 만나는 기쁨을 갖게 되었다. 2014년 봄 사제 서품 30주년 기념식에서 만난 아부지 서신부님은 이때 사건을 “2014년 메토디오 부활”이라고 칭 하셨다. 2007년 연지 결혼식 때 큰아버지 부조에 써온 손녀 이름이 다나(端雅)였다. 그리고 이를 본 공군의 칠성대 성당 나광남신부님은 다나(多羅)의 세례명을 매우 이쁨으로 대변되는 “그라시아”라고 미리 정해 주셨고 후일 쌍둥이 동생 다민(多慜)이는 매우 총명함으로 대변되는 글레고리오 성인의 이름을 지어 주셨다.
이리하여 막내 누님으로부터 시작된 성당으로 향하는 대열에
조카(막내누님 큰아들) 이유진 신부님(LA주교좌 성당 주임신부) 서품 강복에 이어 다나(그라시아) 다민(글레고리오)이 까지 아장 아장걸음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다나 그라시아,다민 글레고리오>
<2019년 12월 해군성당 홈컴밍 미사에서 아부지 서신부님과>
2020년 1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또한해를 시작하면서 은총의 역사를 돌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