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근 선생님 정년 퇴임 축하글
‘82년생(임술년) 김지영’이 세상에 태어난 해, 대학을 막 졸업한 약관의 나이에 갑자기 등 떠밀리듯이 교직에 들어온 후, 어언 38년간의 항해를 무사히 마치고 2020년(경자년) 정년으로 퇴임을 하게 된 자네를 진심으로 축하하네.
맹자는 인생삼락(人生三樂) 중 교육지락(敎育之樂)을 하나로 꼽았듯이, 분명히 순수한 젊은 제자들과 함께했던 긴 세월을 돌이켜 볼 때, 그 즐거움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때가 많았겠지. 그러나, 포기하고 싶었지만 견뎌내야 했던 순간들도 얼마나 많았던가?
아이들과 직장에 열정을 바치며 마치 영원의 샘 속에 있던 것처럼 훌쩍 가버린 초임 시절 이후, 밖으로는 교사로서뿐만 아니라 안으로는 가정이란 보금자리도 꾸미고 아내와 아이들과 알콩달콩 살아야 할 때부터 폭풍처럼 닥친 부모님의 사업 실패에 따른 경제적 위기로 떠안아야 했던 장남으로서의 무거우면서도 기나긴 책무가 유 선생의 어깨를 무겁게 했었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주식 투자의 실패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삶의 여건이 더더욱 나락으로 떨어져갔던 때, 자존감마저 상실하고 심리적 위기로 몇 번씩이나 높은 데를 쳐다보곤 했던 시절이 있었다지. 난 그런 어려움을 곁에서 얻어듣는 것만으로도 연민을 넘어서 고통스러웠는데, 자네는 희망을 잃지 않고 해마다 빚을 갚고 저축하면서 차근차근 경제적 어려움도 극복해내고, 이젠 인격적으로 둥그러지기까지한 자네를 보면서 아래 시가 생각났다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 저 안에 초승달 몇 날”(장석주, 대추 한 알)
자네는 잘 영근 붉은 대추 한 알 같은 존재일세. 이름대로 됐으니 성공한 인생이고 인생의 승리자일세.
아마 2001년 2월쯤이 아니었을까? 가까웠지만 늘 낯선 교정에서 많은 낯선 사람 중에 내게 한 사람이 왔다네. 그때는 갑장이면서 국어를 담당하고, 하지만 이름도 처음 듣고, 처음 본 사람이었네. 운명처럼 통합이 된 후 하루하루를 함께 하는 동료가 되었지. 지금은 정현종 시인의 표현대로 방문객 한 사람이 온 게 아니라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 즉 인생이 내게 온 셈이지. 동거동락 거의 이십 년,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백 세 인생을 백 리 거리로 환산해도 우리는 인생 이십 리란 적지 않은 거리를 함께 걸은 셈이지. 먼 길에 가벼운 짐이 있을 리 없다고, 모두 무거운 짐 짊어지며 같은 길 걸으면서 모자란 거 채워주고 남는 것 나눠주며, 한 번도 다투지 않은 막역지우의 길 걸었지. 우리 제자들이 우리 두 사람을 혼동할 정도로 우리는 같이 밥도 많이 먹고, 늘 함께 다니고, 여행하고 얘기하고, 운동하고 노래했었지. 돌이켜보면 참 복된 나날들이었네.
자네 알다시피 난 본래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지. 수없이 많은 수치심의 거미줄에 엉켜서 스스로를 감추고 아는 사람에게만 징징대는 스타일이지. 내가 자네에게 얼마나 징징거렸던가?
그럴 때마다 자네는 날 지겨워하지 않고 잘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항상 정직하고, 진취적이고, 배우고 깨달은 것을 늘 남에게 가르쳐 주면서 함께 하려는 태도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였주었지. 난 그런 자네를 통해 참 많이 배웠고 그래서 아직 멀었지만 조금은 둥글둥글한 사람의 모습이 되어가는 중이네. 사람이 되는 과정은 나이를 먹어갈수록 받침에 있는 ‘ㅁ’에서 사랑의 ‘ᄋ’와 같이 점점 둥글게 되어가는 과정이라 하는데 자네를 통해 내가 둥근 사람으로 변모하려는 동력을 얻게 돼서 참 고맙네.
또한, 자네를 통해 뭘 배웠는지 생각해 보니,
우선 자기 사랑이네. 자네는 얼마나 자기 절제, 수신에 철저했던가? 나쁜 음식을 최대한 멀리 하고, 좋은 운동 방법을 꾸준히 익혀 실천하고, 운동을 통해 남들과 잘 어울리며 부부간 여행을 통해 늘 재미있게 살 궁리를 하고, 하모니카, 기타, 회화, 사진 등 예술적 감성을 닦기에 게으르지 않은 모습은 나를 늘 각성케 했다네. 지금도 자네의 다재다능함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부러움일세.
둘째 가족 사랑, 아내 사랑이네. 자네는 남들이 보면 “자랑질을 꽤 하는 친구네” 라고 생각할 정도로 자식과 아내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늘 현재 진행형으로 유지하는 사람이지. 그래서인지 사랑받은 아내는 훌륭한 내조로 집안을 불같이 일어나게 했고, 애정이 빛을 발하여 그 어려움 속에서 자제들은 타의 귀감이 될 만큼 더욱 더 훌륭하게 성장한 게 아닌가 생각하네. 늘 내가 말했듯이 자네에겐 시련이 사랑으로 가는 약이 되었네.
셋째 친구 사랑, 누구는 스쳐가는 사람도 인연으로 만들고, 누구는 인연도 스쳐가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하는데, 나는 후자에 속하는 편이라. 늘 사람과의 관계가 서름서름하고, 천고의 고독을 타고난 사람처럼, 달팽이 같은 껍데기 속에 혼자 처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지. 하지만 유 선생을 만나면서 광우, 석만, 두석, 범순과 금란지교를 맺게 해 줘서 고맙네. 청죽회 육인은 속옷까지 스치는 연인까지는 될 수 없겠지만 겉옷을 스치는 인연을 넘어, 살청되지 말고 늘 푸른 대나무로 남아 서로 사랑하는 푸른 대숲이 되길 기원하네.
“감나무에서 떨어지는 홍시를 청시(푸른 감)이 애도한다” 라고 하지만 누구든 곧 홍시가 될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라네. 때가 되면 방을 뺄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지. 영원한 자기 집은 없는 셈이지. 이젠 우리 처지가 전세나 월세 인생처럼 되었더라도 “인생은 나를 믿고 가는 길이다(만화가 이현세)”라고 했듯이 진짜 나의 인생길을 가야할 때가 됐네. 현인들은 우리가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과거에 대한 후회나 자책 때문이거나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걱정 때문이라고 얘기한다네. 즉 바로 이 순간을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우리 모두 순간 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 보세나
우린 인생삼락(부모, 형제가 다 건강할 것,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것, 천하의 인재를 모아 가르치는 것) 중 약간씩의 행복을 다 맛보지 않았나? 게다가 인생이 행복하려면 노년에 행복해야 되고, 하루가 행복하려면 저녁이 행복해야 한다는 데 오늘은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는 망우물(술)을 끼고 보약 같은 친구들 간의 수어지교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이 순간의 행복을 마음껏 누립시다. 그런 의미에서 건배를 제의합니다. 다들 경자년 새해 복많이 받으십시오.
선창: 우리는
후창: 하나다.
선창: 이대로
후창: 영원히
다시 한번 유선생님의 정년퇴임을 축하합니다.
2020년 1월 8일(수) 황승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