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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글은 카페지기 서봉석(소선)의 블로그
"소선의 음악이야기" blog.naver.com/bongarr 에서 옮긴 것입니다.
국내 유명 연주자(1930~80년대) 트롬본 - 송민영, 홍덕표
트롬본 (Trombone)(Posaunen 독일어)
목차
트롬본의 여러 모습
트롬본은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나?
국내 트롬본 주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의 재즈 트롬보니스트는? (나이 순)
우리나라 1950년 전후의 트롬본 유명 연주자는?
송민영
홍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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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롬본의 여러 모습
트롬본의 모습은 1500년대 중반에 현재처럼 만들어졌으며 1800년대에 와서는 현재의 표준적인 슬라이드 트롬본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예전에는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 콘트라베이스 등으로 나뉘어져 활용했지만 현재는 테너와 베이스만이 주로 쓰이
고 있다. 트럼펫처럼 밸브를 부착한 밸브트롬본도 있는데 1900년을 전후로 군악대에서도 사용한 적이 있었고 미국에서 재즈맨들
이 간혹 슬라이드 트롬본과 다른 맛을 느끼려고 연주하는 경우가 있을 뿐 정규적인 편성의 악기로는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1950년대에는 캐나다의 세계적인 재즈 트럼펫의 메이너드 퍼거슨(Maynard Fugerson 1928~2006)이 창안하여 만들어진 슬라이
드와 밸브가 함께 부착된 수퍼본(Superbone)도 활용되어지고 있다. 이 악기는 밸브를 이용해서 연주할 때에는 왼손가락으로 밸
브를 누르고 또 슬라이드를 이용할때에는 밸브를 정지하고 슬라이드로 연주하는 방식이었다.
트럼펫 처럼 연주하려면 왼손가락 운지법을 별도로 숙지해야 하기에 연주가 쉬운 악기는 절대로 아니다.
기존의 싱글 테너트롬본으로는 최저음을 낼 경우 슬라이드를 6~7th position 까지 길게 빼야 되는데 1970년대 와서는 밸브 부착
장치(Valve Attachment)가 있는 트롬본이 유행되면서 왼손엄지로 로터리식 밸브를 눌러서 조바꿈하면 팔을 짧게 움직이면서도
정확한 저음을 싱글트롬본의 최저음인 E(7th 포지션) 음보다 더 아래 음까지 낼 수 있게 만들었다. 베이스트롬본 역할까지 겸한
이 악기를 테너베이스트롬본이라고도 부르며 근래 테너트롬본 연주자들은 이 악기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 악기보다 저음을 확실하게 내고 음폭도 넓고 음량도 크고 푸근하면서도 중후감있는 사운드를 내는 베이스트롬본이 별
도로 쓰여지기때문에 이 테너베이스트롬본은 테너 역할만 하게 된다. 교향악단이건 재즈빅밴드이건 간에 트롬본섹션에 4인이 편
성될 때는 반드시 베이스트롬본이 포함된다. 재즈빅밴드에서는 베이스트롬본을 별도의 기능을 가진 포지션으로 간주한다. 그만
큼 베이스트롬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가 1950년대에 트롬본을 처음 배울때만 해도 트롬본 하면 당연히 싱글이었다. 중고등학교때 밴드부 처음 들어가서 악기를
결정할때에 상급생들이 키가 큰 학생을 우선 트롬본에 배치했던 생각이 난다. 시가행진 할 때면 맨 앞열에 키가 큰 학생들로 뽑은
트롬본파트가 여러 악기중에 제일 멋있다는 말을 듣고 으쓱대던 추억도 있다. 1950~60년대에는 군악대와 학교밴드들이 국경일
을 비롯하여 국가나 지역행사 등에 동원되어 1년에도 수차례씩 시가행진이 이루어졌었다.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외국으로 유학갔던 트롬본 주자들이 테너베이스 트롬본을 가지고 귀국, 유행시켰고 그 이후 각 오케스
트라와 대학교에서는 거의가 이 악기로 대체되었다고 보아진다. 빅밴드에서는 계속 싱글테너트롬본을 주로 사용했지만 1980~90
년대를 거치면서 테너베이스트롬본으로 악기교체가 많이 된 것 같다.
♬ 트롬본은 우리나라에 언제 도입되었나?
우리나라에 트롬본이라는 악기가 처음 도입된 것은 1900년 고종황제의 칙령에 의하여 대한제국군악대를 창설하게 되면서다. 당
시 내부대신 민영환의 지시로 동생 민영찬(후에 주프랑스 대사)이 독일로 가서 주한 독일대사와 미리 약속이 되어있던 독일 군악
대장 프란츠 에케르트 (Franz von Eckert 185912~16) 와 만나서 협의 - 50개의 악기와 악보 외 필요 부품들을 구입해 들여오게 되
는데 이때의 악기편성에 테너 트롬본 3개와 베이스 트롬본 1개가 포함되어 있었다.
프란츠 에케르트는 다음 해인 1901년2월에 입국하여 군악대를 편성하고 지도하기 시작했으니 트롬본의 첫 주자는 대한제국군악
대 대원이 해당되겠다.
그후에 트롬본 연주자의 자취로는 1927년03.02. YMCA에서 공연한 재즈 연주부분에서 홍난파(1897~1941 작곡,피아노,바이올
린)가 리드하는 "코리안 재즈밴드"의 트롬본 주자 박권원의 모습이 보인다.
♬ 국내 트롬본 주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미국의 재즈 트롬보니스트는? (나이 순)
잭 티가든 (Jack Teagarden 1905~1964)
토미 도시 (Tommy Dorsey 1905~1956)
카이 윈딩 (Kai Winding 1922~1983)
에디 버트 (Eddie Bert 1922~2012)
제이제이 존슨 (J.J. Johnson 1924~2001)
어비 그린 (Urbie Green 1926~2018)
♬ 우리나라 1950년 전후의 트롬본 유명 연주자는?
1930~40년대초의 대중음악 트롬본 연주자에 관련된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몇 분의 이름을 찾았는데 그분들의 경력을 알수 없었
다. 그리고 이 시절까지만 해도 클래식과 대중음악을 구분하지않고 연주자들이 양쪽을 넘나들며 연주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크로스오버(?) 라고 해야 할까....
박권원( )
1929년을 전후하여 홍난파와 코리안재즈밴드에서 트롬본을 연주.
윤기항(尹基恒 )
1935 오케레코드 작곡가 겸 트롬본 연주자, 더블 베이스 연주로 최초의 대중음악 방송 출연 기록이 있음.
이유성(李有聖 1915~1991 / 1950 월북)
클래식을 전문으로 연주했지만 대중음악 연주에도 합류했다.
평양 숭실중학교에서 트롬본 배움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음악부
1939년 오케레코드사에서 운영하는 CMC악단(신곡 홍보 위주의 무대공연단체)의 멤버로 중국과 일본의
전국 순회공연에 장기간 참가
1940년 라디오에서 트롬본 독주,
1941년 조선음악협회의 조선교향악단 단원
1942년 만주 신경(방송)교향악단 →경성후생실내악단(서울음대 관현악단 모체)의 단원
또한 이 즈음 트롬본 소곡 "황성의 달" 을 독주로 공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5년 서울의 고려교향악단 창단멤버
1946~49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 1950 월북 이후 북한 인민군협주단에서 지도자급으로 활동.
이교숙(李敎淑 1924~2017)
클래식을 전문으로 이유성과 함께 활동.
1944년 20세때 만주국 신경(방송)교향악단에서 트롬본 주자 겸 방송음악 선곡 담당으로 활동.
1945년 서울의 고려교향악단 창단 멤버 / 고려교향악단이 운영난으로 해체되고 1948년 서울교향악단이 창단
(1950년 6.25전쟁으로 해체) 되는 시기에
1948년 해군군악학교 교관(병조장)으로 입대 / 1956년에 장교로서 미해군군악학교 유학을 가게되어 트롬본이 아닌 국내에 없는
분야를 수학하고 옴. 하프 와 재즈편곡이론을 수학하고 귀국.
그에게 있어 트롬본 연주활동은 고려교향악단에서가 마지막이 된다.
과거에 전설적인 얘기 하나는 이교숙은 트롬본 배울때에 천정에 줄을 매어 악기를 고정시키고 뒷짐을 지고 입술에 마우
스피스를 가볍게 대고 부는 훈련을 했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클래식 트롬본은 이교숙이 최고라는 말이 돌았다.
필자가 이교숙선생님께 재즈편곡이론을 수강할 때 위의 얘기를 여쭤보니 빙그레 웃으시면서 고려교향악단 시절 교향곡
악보에 트롬본이 3 옥테이브 E 소리 나는 부분이 있었는데 그 음을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낸 후에 "트롬본은 이교숙이
최고다" 라는 말을 듣기는 했다고 겸손하게 말씀하신다.
1954년 군악장교로 임관 후에는 군악대와 윈드오케스트라가 연주할 수 있는 많은 곡들을 작곡, 편곡하게 되고
1967년 해군에서 예편된 후에는 이화여대,중앙대학등에서 작곡과 교수로서 또 관악지도자협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관악협회 업
무와 더불어 관악곡을 다수 작곡했으며 하프 전수와 하프 연주곡 작곡 등에 열정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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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민영(宋旻榮 1927~2002-경기 수원) 트롬본, 작곡가, 지휘자, 가수.
[음악 경력]
KPK악단 (김해송악단 1945~1949)
해군본부군악대 근무(입대시 병조장 부여=상사)
KBS전속경음악단 지휘자 (1955~1957) (당시 KBS경음악단은 손석우,노명석,송민영 3인 공동지휘 체제였음)
미8군공연단체 Tommy Ario Show 밴드리더 (1958~1965)
KBS-TV 프로그램 전속악단(1965~1966)
송민영과 그악단
미국으로 이민(1975 이민 후 잠시 음악활동하다가 신학교육 이수 후 개신교 목회자로서 목회 활동을 했었다.)
[작품]
청춘목장, 산골처녀 외 다수
[스토리]
송민영은 수원에서 감리교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미국 선교사에게서 트롬본을 배웠다고 한다. 1950년 6.25전쟁 이전에 해
군군악대에 입대하였다. 이 시절에는 군악대의 질을 높이기 위해 사회에서 활동하던 유능한 연주자들에게는 계급을 그의 경륜과
능력에 따라 부여해 준 적이 있었는데 그는 당시 국내 최고악단인 김해송의 KPK악단 경력이 있었기에 처음부터 병조장(상사) 계
급으로 복무했다. (이 때에 순수음악-교향악단 계열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중 군악학교의 교수로 입대한 분들도 있는데 각자의
경륜과 능력에 따라 장교에서 중상사 계급을 부여했음)
1945년 해방 직후의 KPK악단 시절 악단장이던 김해송의 재즈에 대한 뛰어난 감각과 이해력, 미군클럽 공연때에 미국음악을 직
접 경험해 본 것등에 영향을 받아 일찌기 재즈의 매력에 빠졌었다. 군 제대 후에는 자신의 악단을 창설하여 활동하다가 1957년
미8군쇼를 시작하게 된다.
그는 국내에서 보기 드문 트롬본 솔리스트였다. 깨끗한 톤과 뛰어난 테크닉으로 솔로곡을 위시하여 딕시랜드 재즈를 즐겨 연주했
고 그가 리드하는 미8군쇼 "Tommy Ario Show"는 미군 장교들이 가장 좋아하는 쇼단의 하나였고 수준높은 음악, 앞서가는 음악을
추구했으며 목소리 또한 매력있는 바리톤이어서 뮤지컬 "남태평양"중에서 Bali Hai를 노래 할 때는 관객들 모두가 기립박수를 치
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미군 고급장교들 펜이 많았었다.
미8군쇼 전성기였던 1960년대 중반에는 미8군 공연단체의 출연자(악단,무용,가수,사회자 등)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회사를
상대로 투쟁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때 앞장서서 일했다는 이유로 회사로 부터 불이익을 당해 힘든 기간도 있었다.
(이때는 국내의 모든 직장에서 노조 성격의 투쟁은 감히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재즈빅밴드 리더로 유명한 트롬보니스트 토미 도시(Tommy Dorsey) 를 좋아해서 악단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서
Tommy Ario로 지었다. 딕시랜드재즈도 즐겨 연주했지만 그의 연주는 토미 도시의 그것처럼 멜로디를 예쁘고 우아하고 부드럽게
연주하는 품위있고 매력적인 트롬보니스트였다. 그는 미8군쇼 단체에 있을때에 빅밴드와 캄보밴드 두가지의 악단편성으로 활동
했었다.
1950~60년대에는 유명 악단장 중에 3대 紳士가 있었는데 트롬본의 송민영, 클라리넷의 엄토미, 트럼펫에 최상룡 이었다. 이들
모두가 180cm 정도의 큰 키에 미남들이었고 연주실력 또한 뛰어난 멋쟁이 밴드마스터들이었다.
당시 이들의 인기는 영화배우 못지 않았었다. 송민영은 당시 서구풍의 가요로 인기절정이었던 최고의 인기 여가수 송민도의 남동
생으로서 연예인 남매의 인기 또한 대단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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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덕표(洪德杓 1929~2007 경기 포천) 트롬본. 한국 제1세대 재즈
[음악 경력]
육군군악학교 - 육군본부군악대 , 육군교향악단
미8군쇼 Holywood Show
베트남 주둔 미군 쇼밴드 리더
미8군쇼 Benny's Show 밴드리더
홍덕표와 그악단 단장
TBC-TV 경음악단 (단장 이봉조)
KBS -TV관현악단 (단장 김강섭)
제 1세대 재즈밴드
홍덕표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성장했다. 중학교시절 밴드부에서 트롬본을 접하게 되고 졸업 후에는 소방대의 악대
에서 활동을 하다 1950년 육군군악학교에 입교하여 육군군악대와 육군교향악단을 오가며 근무하게 된다.
그때부터 그는 남들이 소리내기 힘들다는 트롬본에서, 높은 음과 낮은 음들이 자신에게서는 자유자재로 나는 것을 발견하게 된
다. 군악대에서 스윙밴드를 조직하여 미군클럽에서 공연하는 팀에 합류하면서 미국의 재즈음악을 듣게 되고 음반대로 재즈음악
을 흉내 내다보니 어느 사이에 "트롬본 = 홍덕표" 가 되어 있었다. 그는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오랫동안 딕시랜드 재즈를 연주하
던 트롬본의 전설인 잭 티가든(Jack Teagarden)을 좋아해서 그가 연주하던 곡들을 주로 연주하기도 했었다.
미8군쇼 초기인 1960년을 전후하여 테너색스의 이봉조와 만나 그의 쇼밴드에서 솔리스트로 함께 하게 된다. 그는 그때 이태리
가곡 "돌아오라 소렌토로(Come back to Sorrento)"를 솔로곡으로 하여 트롬본 쇼를 하면 그 장소는 열광의 도가니로 변하곤
했다. 트롬본을 분해하여 마우스피스, 슬라이드 부분과 벨 부분을 나누고 하나하나를 가지고 재미있는 소리를 내고 다시 결합한
후에는 손을 뒤로 한채로 슬라이드를 마루바닥으로 끌고 다니면서 연주를 하고 또 의자에 앉아서 양말을 벗고 발가락으로 슬라이
드를 잡고 슬라이드를 조정하면서 연주할 때에는 감탄 또 감탄의 연속이었다.
또 다른 곡으로 재즈곡인 "야간 열차 (Night Train)" 로 쇼를 했는데 이 곡에서는 보통 트롬본 연주자들 보다 2 옥테이브를 더 폭
넓게 연주하는 특이한 매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1958년 미국에서 재즈트롬본의 전설이라고 일컬어지는 뉴올리언스 재즈의 잭 티가든이 재즈의 국제적 홍보와 주한미군 위문공
연차 내한했다가 명동의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당시로서는 최고의 공연장)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이런 쇼를 한 적
이 있었다. 그는 이 날 그의 히트 솔로곡인 "Dark Eyes" 로 쇼를 했다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필자는 수년 후 신문기사로 보았기에)
그는 평소 술을 좋아했기에 술좌석을 같이 하는 친구와 후배들도 많았고 특히 후배들에게 편안하게 잘 대해 주었기에 많은 후배
들로 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다. 그가 78세를 일기로 우리의 곁을 떠났을 때에는 장례식장인 의정부시의 백병원에 수많은 후배들이
줄을 이어 조문을 다녀갔다. 또한 고인을 모시고 오랫동안 제1세대 재즈팀을 이끌어 온, 재즈계에서 선배들을 잘 모시기로 소문난
재즈피아노의 신관웅은 자신이 경영하던 재즈클럽 "Moon Glow" 에서 유가족을 모신 가운데 고인을 기리는 "故홍덕표 추모음악
회"를 통해 스타급 재즈맨들이 총출연하여 고인의 넋을 위로하기도 했다.
그가 평소 즐겨 연주하던 손때 묻은 악기인 "Old 회사" 제의 슬라이드 트롬본은 "Moon Glow" 클럽 무대 벽에 걸려 있었다.
이제는 그 클럽도 문을 닫았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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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는 글
♬ 대중음악 연주계의 어제와 오늘
우리나라 대중음악계의 과거 유명 연주자들은 사실상 재즈를 바탕으로 1930년대 부터 미국의 이름난 재즈맨들의 음반을 듣고
흉내 내면서 자생 성장했다고 하겠다. 클래식음악과 국내의 가요와는 전혀 다른 ,그 새롭고 매력 있는 재즈와 한국의 옛 가요음악
을 어떻게 융합해야 할까 고민하며 우리 가요계에 정착, 접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그 시절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고 보여진다.
1950년대 들어서서는 미군의 장기 주둔으로 인해 미국의 대중음악을 수시로 접하면서 재즈에 대한 이론서적이나 편히 들을 수
있는 음향장비도 구하기 힘들었던 그 시절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미국의 재즈를 위시한 여러 나라의 세련된 음악을 듣고 그와
비슷하게 연주하는 훌륭한 연주자들이 계속 이어서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예술적 감각과 재능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한
DNA를 갖고 태어나지 않았나 유추해 보게 된다.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에 다행스러운 것은, 1980년대 말 서울예전(현 서울예술대학)에 대중음악 전공의 실용음악과 설립을
필두로 그 이후 1990년대에는 국내 대학교에 대중음악 전공학과의 신설이 확산되고 거기에 맞춰 재즈 교육의 최고봉인 미국 보
스턴의 버클리음악대학을 비롯한 선진국의 음악대학에서 재즈를 수학한 엘리트들이 국내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면서부터 엄청난
발전을 하게된 것도 우리나라 대중음악 연주계의 크나큰 수확이라 하겠다.
가끔 TV에서 연주자 경연대회에 출전하는 멤버들을 보면 악기연주의 기본인 음정, 박자. 테크닉 등은 이미 초월했고 감정표현 내
지 창의력, 팀웍, 관중흡인력 등을 중점적으로 가리게되는 그런 수준에 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래고 또 놀랜다. 하지만 이 뛰어난 고
급 인력이 활동할 공간이 별로 많지가 않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 우리나라에서 관악기 연주계가 발전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시기를 살펴보면
1930~40년대 가요의 탄생과 악극단 성행 및 8.15직후 미군 3년간 주둔 시기에 재즈를 처음 들어보며 접해보던 악단 연주활동
1950~60년대 미군의 대병력 국내 주둔 시기에 미8군연예대행기관(1958~)에서의 본격적인 재즈와 팝음악 연주활동
1970~80년대 국내 라디오(1948~) 및 TV(1961~)방송사의 개국과 방송전속악단의 활동
1980~90년대 국내 재즈밴드의 활성화 와 재즈 유학생 증가 및 각 대학교의 대중음악과목 신설 등 교육저변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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