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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전시사칼럼
우리는 구경꾼이 아니다.
105세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강연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그가 14살에 중학생이 되었을 때 선친께서 하신 말씀이다. ‘자신의 일과 가정의 일에만 열중하면 그만큼만 성장할 것이고 직장이나 공동체의 일에만 열중하면 그만큼 성장할 것이지만 나라와 민족의 일에 뜻을 가지면 그 크기만큼 성장할 것이다.’ 절대로 나라와 민족의 구경꾼으로 살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김형석 교수는 우리 시대의 스승이다. 그의 강연을 듣고 생각했다. 한 시대의 스승이 아무 부모 밑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었구나.
며칠 전 30년이 넘게 모인다는 친목 단체에 속해있는 사람에게서 들은 얘기다.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모임이 유지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더니 대답이 간단했다. ‘절대로 만나면 정치 얘기, 종교 얘기를 안 한다.’라고....듣고 보니 그럴 것 같긴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리 건강한 모임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 놀라운 30년 생명력이 내게는 흡사 똥 싼 바지춤을 움켜잡고 노래 부르는 아이의 모습으로 오버랩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대졸자인 한국은 이미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다. 이런 나라에서는 투표권 가진 사람은 다 정치전문가, 자녀를 키우는 사람은 다 교육전문가라는 말이 하나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정치와 종교는 왜 침묵의 영역인가? 말하는 입만 있고 들을 귀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해 시퍼렇게 세운 칼날은 있어도 그 칼날을 숨기고 마주 앉을 생각의 칼집은 없었기 때문이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나 나라는 결코 이런 풍경을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다. ‘정치적 소신은 쉽게 변하지도 않는다. 당연히 쉽게 설득당하지도 않는다.’라고.....그래서 그 어떤 모임에서도 심지어 가족 모임에서도 정치 얘기는 금기(禁忌)의 영역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여기까지다. 날마다 자신이 갇힌 성벽을 넘어 들판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어울리지만 정치는 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삐죽이 나온다. 그래서 이런 세태는 분명히 아이러니다. 아니 이런 현실에 기죽어 지내는 우리네 삶 자체가 모순덩어리다. 왜일까. 서로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서로서로 못 본 체하는 동안 그 불이 바지를 타고 올라와야 비로소 다 함께 ‘불이야!’ 라고 외치는 꼴이니까. 지금까지 번번이 우린 그렇게 살지 않았나.
돌아보면 정치에서 자유로운 세상살이는 그 어디에도 없다. 삶의 곳곳에 이미 정치가 파고들었고 물들어있기 때문이다. 본시 정치란 게 그렇다. 아무리 씻어내고 닦아내도 그대로 있고 눈 돌려도 보이고 귀 막아도 들린다. 비즈니스에도 시장에도 학교에도 거리에도 정치가 흘러 다닌다. 용산 대통령실과 여의도에만 정치가 있는 게 아니다. 정치의 시즌이 선거철만 반짝 열렸다 닫히는 번개시장도 물론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라의 구경꾼이 되기 싫어 이 글을 쓴다. 그냥 내 생각을 펼쳐내 본다. 독자들이 추호도 내 생각에 동의할 것을 원치 않는다. 다만 우리 모두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기만을 바랄 뿐이다. 세상만사 구경꾼의 자리는 군중의 자리다. 군중은 끌려다니는 존재다. 끌려다니면 그게 바로 노예다. 그렇다. 어디든 구경꾼의 자리를 벗어나야 비로소 주인의 자리가 보인다.
며칠 전 영국의 권위 있는 경제 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즈(FT)가 ‘Is South Korea’s Economic Miracle Over?, 즉 ‘한국의 경제 기적은 끝나는가?’라는 기사를 실었다. FT는 그 이유를 이렇게 예시했다. 1)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한 성장정책, 2) 중국기업의 무서운 추월, 3) 심각한 저출산, 고령화 문제, 4) 대기업 3세 경영전략의 안이함, 5) 입법권을 독점한 좌파 입법권력과 국민에게 인기 없는 우파정부로의 정치적 리더십의 분열이다. 한국은 세계로부터 성공한 나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행복한 나라는 아니다. 자살률 OECD 평균 2배, 초저출산으로 인구재앙이 예고된 나라, 좌,우파로 갈라진 심각한 심리적 내전 상태가 이를 증거 한다. 게다가 한국은 이상한 나라다. 이런데도 사람들은 천하태평이고 이러고도 나라가 굴러가는 게 신기하다는 뜻이다.
이보다 더 심각한 증거가 지금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다. 우리 국민들의 비틀거리는 집단지성(集團智性)이다. 4년 전 21대 총선부터 먹구름이 밀려왔다. 그 데자뷰인 22대 총선은 그냥 쓰나미 같은 것이었다. 무슨 얘기인가? 선거에서 압승, 참패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그 나라 국민들의 정치적 수준은 바닥으로 내려앉는다. 그리고 집단지성은 심각하게 망가졌다고 보면 된다. 두 날개로 날지 못하는 새의 운명은 죽음뿐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 수준의 문명국가라는 대한민국의 정치수준이 아프리카 최악의 독재국가보다 못한 선거 결과를 보였다. 한국인의 정치수준이 반세기 이전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래서 종북, 범죄, 막말, 일인 독재 정당에게 면죄부, 아니 날개를 달아줬다. 윤리, 도덕, 상식이 철저하게 망가지고 거꾸로 뒤집힌 선거였다.
빈대 잡겠다고 단 하나뿐인 초가삼간에 불을 지른 사람이 한사람 건너 한사람인 나라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 아노미(Anomie)의 쓰나미는 이제 시간문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산업혁명 이후 인류는 팽창사회를 유지했다. 글로벌 경제성장은 그 파이를 꾸준히 키워왔고 이로써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의 시대 등등 세계사적 고비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다. 팽창사회가 생산하는 저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인류사회는 바야흐로 수축사회로 들어섰다. 간단하게 말해 각자에게 돌아갈 몫을 결정하는 파이 자체가 점점 줄어드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되면 물질의 문제가 이념과 사상의 문제를 흔들기 시작한다. 본시 인간은 빵과 자유가 무너지면 자유와 민주주의 같은 이데올로기를 간단하게 포기해 버린다. 다시 말해 생존의 압력이 높아지면 윤리와 도덕, 양심과 상식을 간단하게 포기해 버린다.
이번 4.10 총선에도 뒷말이 많다. 사전투표와 본투표의 득표율 괴리가 12%를 넘는다. 누가 봐도 정상은 아니다.(2016년 20대 총선에서는 이 비율이 0~3%차이였고 일률적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사전투표가 31,28%로 역대 선거사상 최고치다. 특히 서울, 부산, 경기, 대전, 인천, 울산, 세종, 제주의 1,576개 동에서는 단 한 곳도 예외없이 일률적으로 민주당 후보의 사전득표율이 당일 득표율보다 높게 나왔다. 이는 동전 1,567개를 동시에 던져서 모두 앞면이 나올 확률이다. 우리보다 더 수준 높은 IT 강국 대만은 100% 수(手)개표다. 온갖 선거관리의 부실과 특히 선관위의 인사부정과 비리는 이미 세상에 공개되었다. 이런 마당에 모든 의혹을 한낱 총선결과 불복으로 치부하는 주장 역시 상식적일 수는 없어 보인다.
이번 총선을 복기(復棋)해 보면 분명한 선례 하나가 떠 오른다. 30여년 전 흔치 않은 치적을 남긴 미국의 아버지 부시 정부를 단 한 번으로 주저앉힌 빌 클린턴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란 선거 구호다. 이번 총선이 그 복사판이라고 보는 편이 마음 편하다. 왜일까. 들리는바, 이재명이 선거판에서 흔들어 댄 대파 퍼포먼스 약발이 상당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한국사회의 불평등 구조는 생각보다 심각하고 국민 각자의 체감지수는 그보다 더 훨씬 심각하기 때문이다. 계량적 수치가 좋은 증거다. 지금 한국은 최상위층 10%가 전체소득의 45%를 차지하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의 최상위층 몫 20%가 30년 만에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지금 한국은 90%가 그 나머지 55%를 나누어 가지는 치열한 경쟁구조다. 심각한 상대적 불평등 구조라고 해야 한다. 대파 퍼포먼스가 먹혀들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이미 진행형이었다.
아무리 그럴지라도, 아니 아무리 분풀이 투표로 나라의 날개 죽지 하나를 꺾어 버렸을지라도, 아니 용산의 빈대가 미워 초가삼간에 불을 놓았을지라도 말이다. 진실로 우리가 반드시 벗어나야 하고 버려야 하고 끊어내야 하는 게 하나 있다. 그게 바로 정치 ‘팬덤(Fandom)’이다. 저쪽이 밉다고 우리 쪽을 무조건 지지하는 이토록 망가진 선악(善惡)의 판단 기준은 다만 자멸의 지름길이다. 이런 병리현상은 날이 갈수록 골수를 파고드는 고질병이 되고 나라의 생명줄은 물론 인간의 본성까지 갉아 먹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집단광기(集團狂氣)의 노예가 된다.
얼마 전 영화 ‘쉰들러 리스트’를 넷플릭스에서 봤다.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천재성이 곳곳에 베여 있는 명화라서만은 아니다. 그 영화의 한 장면, 나치 친위대 소속 유대인 수용소 소장 독일군 장교가 아침 에 일어나 실탄을 장전한 긴 총을 들고 나온다. 숙소 창밖 넓은 마당에는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유대인 수용자들이 분주히 오간다. 마침내 인간사냥이 시작된다. 총성과 함께 차례대로 유대인 십여 명이 피를 뿜고 쓰러진다. 수용소장 나치 장교, 그 역시 전쟁 전에는 누군가의 평범한 아들, 남편, 아버지였을지 모른다. 나치의 집단광기가 평범한 어느 독일 남자를 희대의 괴물이자 야차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칸트 철학과 베토벤 음악을 보유한 독일은 세계 문명사에 빛나는 국민적 집단지성을 가진 나라였다. 하지만 히틀러라는 역사의 반역아, 괴벨스의 선전선동, 그 광기의 시대를 피하지 못했다. 아니 독일국민들이 그들을 선택했다. 그리고 독일인의 집단지성이 어디까지 얼마나 순식간에 망가질 수 있는지를 역사로 보여 주었다. 그럼 찬란한 문명국가, 위대한 역사적 유산을 지닌 우리 대한민국은 이같은 집단광기에서 정녕 예외일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인간의 본질적 심성을 역류하는 세력에게 몰표 날개를 달아준 총선 결과 앞에서 선뜻 아니라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요컨대 여야 어느 쪽의 승패를 떠나 우리 모두는 지금 한국인의 심각한 정치 팬덤을 주목해야 한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한국인의 집단지성이 집단광기로 망가지는 비극적 사태만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길은 하나뿐이다. 우리는 이 시대 정치의 구경꾼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가 아무리 침묵하려 해도 정치가 우리의 삶을 절대로 그냥 두지 않기 때문이다.
* 240503/ 글 최익제장로(敎博)
첫댓글 정치는 국민을 편하게 해주는것 ... 왜 국민이 주권 행사 했으면 되었지
자칭 위정자라는 애들 한테 도움을 청해애 하나 ?
선거철만 되면 국민의 충실한 개가되겠다는 놈들은 다 ... 자기네 가족 들부터 챙기고
여,야 를 떠나 정치 하는 인간 들은 그들 만의 세상이 따로 있음을 ...
자전거에 스피커 달고 다니면서 선거유세 하던 친 형님(60년대 ) 생각 하면 ...
그래서 1969년 고3 중퇴후 을종간후 ... 그래도 좋아 !!!
지금이... 이젠 이념 아니라 우리 현실 국민 우리 나라를 위해 살아야 하고
제발 둘 만 이 라 도 잘 낳아 잘 기르자 !!! 라고 운동해야 할 우리 나라 !
시골에 가 보니 ... 60은 청춘이요 70은 한창 일할 나이...
실사구시의 정책이 필요 할때... 시골도 외국 근로자 없으면 지탱 모함.
우리 후손들을 위 해 뭘 해야 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