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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한국작가회의 경기 광주지부 너른고을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한기수
어떤 울음, 대숲의 유전자를 가진 (외 4편)
조영민
망각의 배후에서 일평생 울음 음계만 섭취하던 종족을 나는 본 적 있다
이를테면,
내가 밤새 왼쪽 옆구리로 몰린 상념들을 일으켜 오른쪽으로 다시 돌아누웠다거나
창가에 누군가 서성이며 밤새 눅눅한 공명의 휘파람을 불다 떠난 날이면
여지없이 아침 대숲에는,
밤새 누군가가 적시다 남긴 슬픔의 부스러기가 수북이 쌓여 있곤 했다
대숲의 유전자를 가진 울음은 언제나 야행성이다
그러나 세상 어느 누가,
푸른 울음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도회지 골목 끝 야심한 발톱들을 수소문할 것이며
세상 어느 누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소문들을 조우하기 위해 여의도 광장으로 나갈 것인가
한때 나는, 야심한 시각 제 몸의 늑골 속에다 울음의 음계를 저장하는 대숲에 든 적 있다
소리가 나는 것들은 죄다 동물성이라고 믿었던 그 때
밤새, 퍼 올려도 퍼 올려도 뿌리가 잘 마르지 않던 그녀의 젖은 밤을 본 후
나는, 울음을 관절 속에 저장하는 푸른 家系들의 경전을 찾아 얼마나 먼 길을 허비했던가
길을 걸으면, 지난날 내 청춘의 상념 안쪽에서 누군가 울음을 엎지르는 소리 들린다
그런 날, 나의 잠은 늘 성장을 더디 했고
어머니는 대숲처럼 방 안에서 몇날 며칠이고 두문불출하곤 했다
오늘 또 다시 내 불혹의 입구 저쪽 어딘가에서 오래전 듣던 대숲이 운다
이상한 나라
퇴근 후, 몸은 벽걸이에 걸렸던 옷처럼 떨어졌어요 나는 어떤 계절일까요
아프리카의 코 같은 말라위나 세상의 허파 같은 미국도 아니에요 유럽이 신다 버린 구두 한 짝 같은 이탈리아도 아니에요 일찍이 들판에 물이 오를 때부터 이 땅은 왜, 반란이라는 바람이 자주 부나요 많은 꽃들은 염소울음 같은 연기들을 뿜어대고 자객들은 밤마다 곤충처럼 날아다니네요 비와 안개는 길을 지우고 슬픔은 잡초처럼 쑥쑥 자라고 저 많은 들판 냇물 언덕은 누가 함부로 그어놨을까요 싱싱한 까마귀 떼들은 누가 함부로 삭제했을까요 들꽃 영토 게시판에는 의문의 몽타주가 늘어나고요 해안 초소의 경계병인 해당화 꽃은 달의 속치마나 들추고 있지요
온종일 들꽃 공화국의 바람들은 어떤 주머니를 찾아다니는지 옷에서 비린 세탁소 냄새가 나네요 잦은 변화로 옮겨 심어도 소용없는 이 들판의 해충들. 꽃들의 신앙인 카멜레온은 더디고요. 제가 낳은 씨앗들은 이미 알 수 없는 벌레들의 자치구 태양은 왜 꽃들의 위험을 눈부시게 비추고만 있나요
들꽃장부보관소의 민들레 통치 자료를 난로 속에 쉴 새 없이 태우는 겨울, 본래 이 들판은 통치가 필요 없었을지도 몰라요 흙이면서도 흙이 아닌, 우주가 아니면서도 우주인 허공처럼 태어날 때부터 이미 다른 계절들의 식민지는 아니었을까요 개화의 전성기도 없는 해충들의 배후, 다스릴수록 병명만 늘어가는
사람들은 가끔 저를 엘리스 왕국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한 이름은 아닐 거예요 들판의 처음과 나중이 엉켜버린 계절에 이름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저는 누군가의 아이디 속 까맣게 잊힌 비밀번호인지도 몰라요
길갓집
고속도로 한켠
‘배 팝니다’ 를 온종일 머리에 이고 서 있는 집 한 채
달리는 졸음들이 던진 타액은, 유리창에 탁한 구름이 되고
인적이 끊긴 그곳은, 언제부턴가 햇빛이 단일품목이다
무료한 오후가 되면, 먼지 앉은 햇빛을 꾸벅꾸벅 손질하던 강아지와
더러는 갓 출하된 소음이 간판보다 환히 눈에 띄기도 하고
흐린 날에는 처마 밑이 그렁그렁, 속눈썹을 잠재우기도 하는 집
밤이면 희미한 적막 하나 방석처럼 가로등을 깔고 앉아
마실 나온 달빛을 물고 쫄랑대는 강아지와 함께 사는,
속도를 놓친 바람이 그 집을 여인숙으로 착각했는지
허기에 지친 발길로 해진 유리창 안쪽을 기웃거리다 사라진다
더는 팔 것이 없는 야심한 밤이면
폭주의 굉음들이 남기고 간 헤드라이트 불빛을 떨이하거나
끝도 시작도 없는 길의 입구를 양손에 들고 한참을 서성인다
그러나 봄이면, 배꽃과 함께 인기척도 돌아와
진도 바닷길이나 산청 약초축제를 곰곰 서두를 것도 같은
앞으로도 한동안
길갓집은 빨리 낡아갈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늙음만큼 새 것이 있는가
생의 기울어짐은 이곳에 새로운 계절들을 불러올 것이고
당신도 어느 날 이곳에 다다르면 한때 이곳이 까마귀와 배의 우화가
하얗게 피고 지던 곳임을 알고 그리움 안쪽으로 화.들.짝.
길을 잃을 것이다. 망각도 오래되면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지
취기에 흔들리던 트럭 하나 적막한 집 앞에 차를 세우고
아득히 먼 유년의 저장고를 열고서
지퍼 안쪽 시간들을 들풀 저쪽으로 배설하고 떠나간다
소리꽃
나팔꽃이 햇살 한 모금 길게 연주를 하는 공원 벤치
언제부터 소리가 주식이었을까, 저 비둘기들
소리에 저렇게 배가 고팠다니, 잘 데워진 공원 한켠에서
길거나 짧은 음표로 늦은 공복을 수선하고 있다
한낮의 태양이 나른하고 미지근한 바람과 앙상블로
나팔꽃을 연주하는 그 곁에서
생의 무대를 막 은퇴한 곱슬머리 지팡이 하나가
뒤틀린 몸으로 까마득히 졸고 있는 한낮, 그러나 소리들은
우리의 방심을 틈타 오후보다 빨리 시들곤 했고
가끔은 잘 열리지 않는 기억의 틈바구니에서
시든 악보 한 송이 불협화음의 세월을 견디기도 한다
한 소리가 지고 나면 다른 소리가 그 자리로 되돌아오는지
해마다 오월이면 우리의 망각 속으로, 소리들이 피어난다
저, 앙상하고 질긴
엽록의 덩굴들이 퍼 올리는 소리는 어떤 음계일까, 나 오늘
저녁 바람이 모두 소화불량에 걸린 것도 잊은 채
푸르거나 붉은 음계들 몇, 오래 듣고 있다
가을史
카드를 슬쩍 바꿔치기한 날씨였다
골목을 나서면 옷을 차려입은 바람이 달려왔다
바람의 근육에서 향수가 느껴질 때
내가 바람의 지인 같았다
하늘은 노름판이어서 꼭 패를 맞춰보고 싶었다
구름은 오후에 맞춰 보아야할 패였지만
아침부터 돌렸다 나는 밤보다 아침에 잃은 게 많았다
길이나 태양을 까면 빈껍데기뿐이었다
날마다 시간은 패를 돌리지만
내가 애인처럼 데리고 들어가는 고독도
짜고 쳤다
돌 틈에 꽃이 만발하고 냇물에 간밤 별들의 겨드랑이 냄새가 날 때
판을 뒤엎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미리 본 것들이다 뒤돌아보면
마을이라는 것은
산들이 카드 패를 즐기다 오줌을 누러 일어선 자리
집을 하나하나 엿보면 빈 카드나 들고 있다
오래 전부터 남은 패를 들고 있던 아버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식구들은
밥상에 패를 놓지만 아버지는 끝내 내놓지 않았다
보여주지 않는 것은 다 보여준 걸 알기 때문이라는 걸 모르고
아버지는 남은 패를 모종에 맞추곤 했다
아침이면 패가 돌아가고 내놓을 패가 없어지자
자리에서 우리를 털곤 했던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의 새 카드 패였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조영민
전남 장흥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및 삼육대 대학원 졸업. 2012년 영남일보 문학상 시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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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회로 (외 4편)
김인숙
나는 TV를 켜고 채널을 돌린다
하루를 여는 CCTV.
멈춰진 많은 시간을 창밖에 두고 잘 수 없다
한 번도 허기진 적 없다
항상 허공에 의지한 육중한 체중, 그리고 고통,
도망치는 발소리 쫓아 눈을 회전시킨다
그림자가 줄어든 겨울
내 관절에 시간을 쏟아내는 밤
구겨진 계단을 재단하던 가로등이
내 옆구리에 눈을 밀어 넣고 있다
숨을 몰아쉬면서 인기척을 듣는다
왕성한 이빨만 드러낸 호기심 섞인 차가운 속내
그들은 내 시야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친다
어떤 이는 안테나로 달빛을 끌어당기고
누군가는 고양이 꼬리를 넘나들며 주정을 부린다
개 짖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소리 없는 폭설은 아우성쳤다
그들은 내 삶 밖에서
그들의 삶 속에서
비밀이 살해된 세상
나로 돌아가고 있다
여름 판타지
햇살을 양푼에다 비벼 먹어야지
일요일은 일렁이는 포도나무 아래로
기어다녀야지 쏟아지는 비를
기다려야지 하늘이 뚫린 작은 방에
내 우울을 가둬야지
벌겋게 타올라야지 쑥쑥 자란
말들을 비워내야지 슬픔은
목젖 아래 밀어붙여야지 말라터진
입술로 긴 촉수를 뻗어야지
내 우울을 뿌리째 뽑아들고
덜덜 떨어야지 난 맨발로
뛰어들어 일요일을 부숴버려야지,
신경줄처럼 매달린 내 분노의 포도알들을 으깨버려야지,
내 속의 비명을 들어야지,
그물처럼 출렁이면서
순간 스케치
그녀는 용수철 튀어오르듯 소리쳤다 눈싸움을 하세요 골목의 눈을 밀고 내려오자 그녀는 다시 외쳤다 안돼요, 거기는 썰매가 지나갈 곳이에요 어설피 잡은 눈덩이가 손에서 미끄러진다
눈발의 아우성, 이쪽저쪽에서 사람들의 눈 터는 소리, 눈발마저 잠재우는 포장마차의 김발, 뚫고 나갈 틈이 없다 파리바게트 유명약국 애플피시방 간판까지 바꾸는 눈발, 바람 한 자락 내려와 불 켜진 십자가에 블록을 쌓는다 낡은 집 처마 걱정,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긴다 눈싸움을 하세요
골목 끝 집의 소녀, 붉은 망토를 걸친 푸들과 썰매를 탄다 내일을 바겐세일하는 전당포, 사람들은 눈을 헤치고 비틀비틀 꿈을 빌리러 간다 고래라도 잡을 듯이 속력을 내는 망사스타킹들의 발길, 쌓인 눈이 스르르 돌아앉는다
폭설, 내가 던진 눈덩이가 사람들 가슴에 떨어지는 소리, 투명하다
작별 판타지아
그림자가 일렁이는 어둠 속에서는 죽어 있는 자신을 본다고 그는 15년째 말하고 있다 어째서 죽어 있는 자신이냐는 질문은 이제 와 부질없다 그는 그것이 고양이를 업고 전생, 후생을 넘나들었던 핏줄의 대물림 탓이라고 믿었다
그는 자신을 찾기 위해 위험한 빙판길을 나서지는 않는다 대추나무 빗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 그는 죽어 있는 자신을 볼 것이라고 했다 내 주검 앞에서 사람들이 사탕 알을 굴리는지 쓸개를 씹는지 볼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야말로 씁쓸한 영화일 것이라고 그는 재미있어 했다
“그렇긴 해도 벗어놓은 모자만큼의 허전함이겠지요?”
그의 최후는 모든 꿈이 빈 껍질로 허우적거릴 뿐이라는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 고양이 울음이라도 남기기를 바랐다
TV에서 저 세상 악귀들이 신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밧줄을 잡아 오르려고 아우성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 고양이의 투시안? 신의 흔적마저 꿰뚫는 귓바퀴?
그는 그것이 고양이를 업고 전생, 후생을 넘나들었던
그의 가계(家系) 물림이라고 믿었다
사각형의 한쪽 모서리
12월, 그날, 나는 기차를 탄다 am7, 아침이 휘파람을 분다 균열을 보인 역엔 소주병들이 구른다 나무의자, 유리창에 눌린 얼굴, 뼈마디에 새겨진다 기차가 숨을 토해낸다 누군가 뿜어 올린 담배 연기, 천안, 익산, 지도를 그린다 폰은 9시쯤 폭우를 만날 것이라고 예보했다 말라비틀어진 내 이름, 패배감의 무게, 바깥 풍경, 하얗게 저울질한다 그 시소놀이, 목구멍 가득 들어찬다
허물어지듯 급정거하는 기차, 난 셔터 누르듯 기차에서 내린다 네거티브 필름이 깊이 새겨진 내 이름, pm6, 기차는 역을 출발한다, 나는 악수를 한다 하늘 한쪽으로 기운 내가 허물어진다
김인숙
강원 강릉 출생. 성신여자대학교 동대학원 일문학 석사. 관동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겸임교수 정년퇴임.
—《현대시학》2012년 4월호
첫댓글 독수리님 오랜만에 글을 실으셨네요.반가워요.터미널에 오시면 들려서 차라도 한잔 하고 가세요.사업 번창을 기원 합니다.
제가 요즘 독서에 빠져 지내느라 좀 소원했습니다. 책과 접신을 하면 릴레이 경기처럼 이어지는지라 ^^ 지금도 도서관으로 달려가고 싶은 걸 참아내고 있습니다. 이젠 제 글을 좀 써보려고 말이지요. 오후에 아이 교복 찾으러 나갈 계획인데 그것이 이루어지면 찾아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