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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남안(南岸), 나이제리아의 와리(Warri)항에서 1977년 3월 중순부터 50여 일 머문 적이 있다. 이 항구는 기니만(Gulf of Guinea)으로 흘러드는, 아프리카에서 나일강, 콩고강 다음으로 길다는 나이저강(Niger River)을 따라 강을 타고 두서너 시간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와리시가(市街)의 약간 아래쪽 강폭이 넓은 곳에 항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은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1967년 7월부터 3년간 계속된 비아프란 전쟁(Biafran War : 일명, 나이제리아 내전)으로 나이지리아와 나이지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분리독립국가인 비아프라 공화국 사이에 벌어진 내전인데 이의 중심지이기도 한데 이 지역 사람들이 흑인들 가운데서도 뛰어났다는 소문도 있었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 혹은 호주 등 대륙이나 처음 가보는 항구에 입항했을 때마다 가급적이면 인간의 때가 묻고 쌓여 약은 도시가 아닌, 멀리 내륙 쪽, 도시 문명과는 동떨어진 좀 인간적인, 어떤 점에서는 원시적인, 그런곳 사람들의 삶을 접해보고 싶었기에 가는 곳마다 기회를 엿보곤 했다. 더구나 내게는 아프리카 처음이자 미지의 세계라 호기심이 근질거리는 곳이었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물질문명의 맛이 인간의 본성을 깡그리 뭉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랬으니 갖고는 싶고 돈은 없으니 가장 손쉬운 방법, 훔치고 뺏는 것이 가장 빠른 수단이었기에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실은 여러 차례 당하기도 했다.
그래서 연구(?)한 것이 현지 대리점 직원 중 괜찮다 싶은 사람을 골라 적당히 대가를 주고 같이 다니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당시 나이제리아는 한창 석유의 힘으로 독일계 대기업을 통해 항구부터 개발 붐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치안(治安)은 극히 불안한 때였다. 이곳에서 단상(斷想)을 적어본다.
Warri 항의 위치
1. 선술집
Agent(대리점) 직원인 Mr.우쯔구 그리고 Shipper(수화주)측 주재원(駐在員)이 그의 차로 드라이브하잔다. 짧은 바지에 스립퍼, 밀짚모자에 바람 쐬러 나가던 차림 그대로 갔다. 눈치를 보니 나를 핑계 삼아 저네들 개인 용무를 보러 나선 것 같았다.
기회를 틈타 나 혼자 두어 시간 걸었다. 늦은 오후인데도 쨍쨍한 햇볕이 뜨겁다 못해 아프다. 땀이 쏟아진다. 밀집모자를 푹 눌러쓴 채 걷는데 똘망한 애들이 뒤따라 오며 중국무술 흉내를 내며 쫑알거린다. 아마도 무술 한 번 해보란 뜻 같았다. 홍콩 영화탓이리라. 중국 무술영화가 이곳에서도 한창 인기가 있었던 때라, 내가 중국인 같이 뵈고 중국인이면 누구나 무술을 잘 하는 줄 아는가 보다. 씩 웃고 만다.
몇 군데 상점을 둘러보았다. 엄청스레 비싸다. 전기제품은 가끔 일본산이 있으나 엄두를 못내는 값이다. 숲으로 둘러싸인 ‘Warri Club’의 테니스장엔 눈같이 흰 옷을 걸친 백인 아가씨와 아이들이 테니스를 친다. 푸른 잔디 위에 그나마 주위에 우거진 짙은 녹음 속에서 마치 흰나비가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열대지방에서 무엇보다 탐나는 것은 푸르름이다. 싱싱한 잎새, 윤기 나는 이름 모를 거목의 자태. 그 가운데도 생명을 마치고 말라죽은 나무들의 늠름한 나체(裸體)가 타고 오르는 덩굴식물들을 짊어진 채 버티는 모습이 더한층 이채를 띄운다. 집 주위에 낮게 담장을 이룬 푸른 대나무. 그 속에 가끔씩 피어 있는 붉은 꽃잎의 청초스럼도 인상이 깊다. 넓은 마당에 깔린 잔디를 잘 손질해 둔 것도 좋다. 그러나 수목이 우거지고 무성한 만큼 더 많은 종류의 벌레들이 서식하며 날고 기어 다닌다. 환경의 탓도 있겠지만 희든 검든 돈 많은 사람들의 사는 집을 보면 언제나 탐이 난다. 저토록 아담한 모습 뒤에는 못사는 사람들의 땀방울이 서려 있을 것이다. 그 언제부턴가 시작된 백인 우월 의식. 이 해안의 이름에도 그 역사의 한 단면이 남아있듯이 노예를 팔고 사 갔던 그 바탕 위에 구축된 그 부(富)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세계의 지도마다 남아있는 ‘노예해안’의 명칭을 볼 때 과연 이 검둥이들은 아무것도 생각키우는 것이 없을까?
저네들 볼일 다 본 듯 어스름해지자 길가의 선술집으로 간다. 옳거니! 오히려 이런 데가 좋다. 밤의 거리는 낮과 또 다른 매력이 있다. 이래서 밤이 좋다고들 하는가. 밤이 갖는 이질성. 분명한 낮의 모든 것을 깡그리 빨아드려 불명하게 만들어 버리는 밤이 있어 그만큼 사람들의 행동이, 마음이 넓어지고 자유로워지는지도 모른다. 낮에 본 각색의 얼굴 모양이나 빛깔이 밤엔 오직 한가지 색으로만 뵌다. 연립주택같이 길게 늘어선 집 앞에는 백열전등이 켜져 있고 호얏불도 있다. 길가에서 그냥 자는 사람, 아랫도리만 가리고 앉아 노는 사람들, 간혹 어떤 곳엔 라디오에서 음악 소리가 나고 그 주위에는 아이나 어른들이 팔과 허리를 흔들며 장단을 맞춘다. 길 한복판엔 웅덩이 같이 물이 고였고 그 건너편엔 백인이 경영하는가 깨끗한 약방의 간판이 보이며 희고 긴 형광등이 밝게 비친다.
술집 안. 우중충한 백열등! 그나마 두 가지 붉고 푸른 전구가 밝히는 홀 안에는 너댓개의 테이불이 있고 구석 카운터에는 3-4개의 긴 의자가 놓였다. 시끄러운 소음이나 다름없는 음악. 그러나 그것이 곧 이 집 전체의 분위기를 살리고 죽이는 듯하다. 술 마시는 모습이 우리완 다르다. 서로가 한패, 같이 왔으면서도, 술잔도 안주도 없이 각자의 앞에 놓인 병을 들고 마실 뿐 말이 없다. 누가 권하지도 조르지도 않는다. 자의(自意)다.
술자리에 들었다 하면 지껄이고 떠들며 주거니 권커니 하는 우리와는 별세계인듯하다. 음악이 흐르면 그냥 흔든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고 봐주건 안 봐주건 그게 문제가 아닌 듯 하다. 그저 자신의 흥만 돋구면 되는 가보다. 일정한 룰도 없다. 팔 허리 그리고 다리를 박자에 맞추기만 하면 된다. 저쪽 창살넘어 골목에서도 검은 ‘밤의 꽃’들이 역시 어울려 춤을 춘다. 하나의 물결이다. Mr.우쯔구가 내 옆구리를 건드리더니 “저쪽 아가씨 하나 어떻소?” 하며 사인만 하면 된단다. 자슥! 속셈이 뻔하다. 서류를 적당히 꾸미고 선장 Sign만 받으면 사무실에서 공용(公用)으로 처리, 용돈이라도 좀 챙기려는 수작이다.
드나드는 사람마다 희지도 검지도 않은 이상한 물건(?)이 앉아 있는 듯 쳐다보며 간다. 그러나 대부분은 손을 흔들거나 턱으로 혹은 눈으로 인사를 나누고 간다. 네거리 하나를 지나는데 20분이 걸린다. 교통순경도 없다. 저네들끼리 끼이고 얽혀서 요지부동의 상태가 되자 다시 운전자들이 내려서 스스로 정리를 해나간다. 아마도 욕일 것만 같은 고함을 질러가면서 -. 처음부터 끼어들지를 말지.
2. 노천 극장
저녁 후 이곳 날씨처럼 텁텁한 기분을 달래자고 나이 지긋한 일본인 통신장과 함께 걸어서 ‘Warri Club’ 까지 갔다. 실내는 시원한 Air-con 바람에 소름이 쫙 끼친다. 뒷뜰에 마련된 맑은 물의 풀장, 앞뜰 입구에 즐비한 고급 자가용 차들, 독일산 벤즈가 많다. Membership(회원)제라 그런지 검은색 사람은 적다. 들어올 수는 있으나 이용자는 없는 듯. 비싼 편도 아니다. 간이극장, 음식점, Bar, 테니스장. 어린이 놀이터, 풀장을 갖추고 회원이 아닌 자는 입장료만 1 naila를 받는다. 입장시엔 주소와 이름을 기재해야만 한다. 오늘 저녁은 제비뽑기 같은 도박이 있단다. 시원한 음료수 한잔으로 끝내고 어둠이 깔리기를 기다려 이웃의 서민들의 극장엘 가본다. 바깥의 둔탁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무더위와 함께 눌러 덮친다.
극장? 창고 같기도 하다, 객석에서 화면을 보면 화면 뒤쪽은 그냥 훤히 틔여 있다. 같은 극장인데도 화면 바로 밑은 50코보, 중간은 1나이라(1나이라=100코보). 맨뒷쪽 그러니까 이층의 선풍기 아랫쪽은 1나이라 20코보. 2층은 1나이라 50코보이다. 분위기도 사뭇 다르다. 북적거리는 곳은 50코보짜리고, 1나이라쪽은 거의 비어있고 1.2 나이라 이상의 자리는 제법 점잖고 근엄한 편이며 그나마 3분의 2는 찼다. 시작 전의 선전영화는 한국에서와 같다. 비누, 가루비누, 옷감 등의 선전이 한참 있고난 다음 본 영화는 그냥 이어진다. 뉴스도 애국가 한다고 서라 앉으라 말도 없어 좋다. 화면은 마치 시골천막 시절의 소낙비가 오는 것이었다. 1950년대 우리나라도 그랬다.
주로 홍콩무술영화이다. 중간에 간혹 내용과는 관련이 없으면서도 크로즈업시키는 여체 한 부분들! 그럴 때마다 오랫동안 계속되는 함성과 휘파람. 마칠 때까지 3번 정도 영화가 끊어지는 것을 보면 영사기(映寫機)는 1대뿐임이 분명하다. 그때마다 화면에 비춰지는 손전등의 불빛, 불투명한 토키, 그나마 잡담과 환성 속에 묻혀버린다. 일일 1회 상영뿐이다. 낮에는 자연조명(?)에 의해 상영불가. 극장자체가 그렇게 지어졌으니 도리가 없단다. 가끔은 한국과 홍콩합작영화가 오기도 하는데 토요일은 대만원이라 한다. 여기서 마치면 11시. 다음부턴 각 Bar들이 붐비기 시작한단다. 새벽 4시까지 open 하는 Night Club ‘LIDO BAR’가 가장 고급이라고 했다. 개점이 밤 10시란다.
3. 노점 식당
길가의 천막 비슷한 것을 치고 우리의 평상(平床) 같은 것 주위에 의자 몇 개, 그 옆이 바로 노천 부엌인, 이곳 사람들이 오가며 늘 이용하는 식당이 있어 들어가 보자고 했다.
Mr.우쯔구, “Captain, 정말 저기서 식사할거요?” “그럼 배고픈데 먹어야지”. “와~!”
실은 나같이 이색적인 동양사람이 이곳에 들리는 것만 해도 저네들에게는 구경거리인 듯 구경꾼들 마져 있다.
머리에 터반 같은 머릿수건을 두른 주인 아주머니가 푸짐한 웃음으로 맞는다. 쟁반에 옥수수로 만든 진득한 떡(?) 한 덩이와 그 옆에 생선조림 두 마리, 그리곤 물 한 컵이 전부다. 그 물은 마시기도, 손을 씻기도, 음식을 집기 전에 살짝 손가락을 살짝 적시기도 하는 다용도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물은 마시지 않고 파는 식수(食水)나 음료수를 이용해온 터라 따로 코카콜라 한 병을 시켰다.
물론 수저는 없다. 그냥 손가락 3개(엄지·검지·중지)를 컵의 물에 살짝 적시고는 옥수수 떡 한 점 집고 바로 생선 조금 떼어서 같이 입에 넣는다.
한 점 입에 넣어 보니 입안이 얼얼하며 정신이 번쩍 든다. 우리의 매운 김치는 저리 가라다. 엄청 맵다.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맵게 먹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매울 줄은 몰랐다. 더위에 더해 땀이 쏟아진다. 억지로 다 먹었다.
그런데 말이다. 저들은 손가락에 옥수수 떡이 전혀 묻지 않고 깔끔하게 접시까지 닦아 먹는데, 나는 어찌 된 셈인지 손가락은 물론 손바닥 전체가 떡이 칠갑되어 있다. 내가 봐도 남사스러웠다. 손가락과 손바닥을 핥아 먹는 모습을 구경하던 주위 사람들이 웃으며 박수를 치기도 한다. Mr.우쯔구란 녀석도 박장대소를 하며 주인 아주머니께 뭐라고 얘기 했다.
넙대대한 얼굴과 두툼한 입술에 우리의 인심 좋은 시골 아주머니 같은 여주인이 웃으며 옥수수 떡을 한 주걱 더 얹어 주며 먹으라는 시늉을 한다. ‘아무렴, 죽어도 먹어야지~~’
미국의 유명한 맥도널드 햄버거의 창업자는 “손으로 먹는 것이 가장 맛있다.”는 말을 했다던데 그 말이 어느 정도 맞는 것도 같았다.
이 생선은 내가 영국에서 싣고 온 북구(北歐)산 정어리였다. 무작위로 네모통에 넣어 냉동시킨 것으로 통상 이런 류(類)의 생선은 사료나 비료의 원료로 쓰이는 것을 인도(印度)상인들이 영국항에서 적재, 이곳에 큰 냉장창고를 짓고는 보관해 두고 시중에 출하하는 것이다.
영국·인도·나이제리아 모두 옛 영국의 식민지였던터라 연관성이 엿보인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같은 흑인들이면서도 인도인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으로 취급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인종차별제도가 심했던 당시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인도인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는 경우를 여러 번 본적이 있다.
선박에서 양하 할 때 인부들이 이 생선 몇 마리 훔치다 잡혀가기도, 서로 치고받는 싸움도 불사하던, 그야말로 사족을 못 쓰던, 이 고기 한 상자면 웬만한 곳은 모두 통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웃 Lome항에서는 하루의 작업을 마치고 고기 몇 마리씩 주지 않는다고 데모까지 했었다.
이것을 적당히 말려서 매운 고춧가루를 발라 숯불에 반쯤 구워 큰 소쿠리에 수북하게 담아두고는 사 가는 사람이 있거나 식탁에 가져올 때는 한 번 더 바짝 구워주는 것을 시내 길거리에서도 자주 보던 것이다. (계속)
첫댓글 궁금증을 유발하는 미지의 아프리카에도 갔다 왔군요. 부럽당^^ 아니 무섭네요.ㅋ
밤중에 쏘다녔다니 간 큰 친구.
소통은 영어로?
무지한 본토인과 문화권의 유럽인 사이에
크나큰 갱이 형성 되어 다가가기 무서울 것 같군요.
호기심 속에서 지켜보겠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경험하는 선배님의 용기에 감탄합니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