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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18일 아산 UBF 주일메시지
내가 곧 길이요
말씀 / 요한복음 14 : 1-31
요절 / 요한복음 14 : 6
제가 생각해볼 때, 가장 길었던 시간은 신병훈련소에 있었던 때였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갈지, 어떤 주특기를 가지고 어떤 보직을 맡을지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기도합니다. 근심 없고 두려움 없이 힘껏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Part 1 내가 길이요
1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근심에 빠졌습니다. 이들의 근심은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보장이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말씀의 ‘믿으라’에는 ‘맡기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예수님께 맡기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참고한다면 ‘근심’은 예수님께 맡김으로써 해결할 수 있습니다. 계속 근심한다면, 예수님께 맡기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크게 두 가지 이슈를 가지고 근심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노후, 청년들에게는 ‘장래’입니다. 둘째는 ‘사후’입니다.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 죽은 후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두 가지 문제를 예수님께서 책임져주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가 책임지려고 합니다. 자기가 책임지려하는 것이 이미 1차 심판아래 들어간 것입니다. 자기가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고 하니 얼마나 괴롭습니까? 근심이 찾아옵니다. 불안합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이런 근심, 불안, 평안없음은 그 사람의 정신뿐 아니라 건강까지 갉아 먹는다고 수많은 의학자들이 논문으로 발표하고 입증하고 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그의 영혼이 불신 속에서 이미 지옥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근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근심’문제를 해결하여야 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근심을 멈추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즘 ‘이대남’ ‘이대녀’라는 말이 자주 쓰입니다. 이십대 남자, 이십대 여자라는 말이지요. ‘이대남’은 지금 정부를 싫어하고 ‘이대녀’는 지금 정부를 지지한다고 합니다. 이대남이 지금 정부를 싫어하는 이유는 취업도 어렵지만, 취업하여 돈을 모은다고 해도 앞으로 그들 생전에 서울에서 자기 소유의 거처를 마련하기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이대남들에게 위로가 되겠습니다.
이 말씀은 이대남 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장래의 보장, 죽은 후의 보장은 예수님께 다 해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견고한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거처’는 하나님과 견고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하나님의 복주심이 풍성한 곳입니다. 제자들의 문제는 현재의 안전과 미래의 보장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견고한 관계가 있는 거처, 예수님께서 예비하신 가장 안전하고 신실한 거처를 보장해주십니다. “거처”는 단순한 거주지가 아닙니다. 당시 용어로 광대한 궁전을 의미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을 참고하면 “거처”는 큰 성입니다. 매우 화려하고 매우 견고하고 매우 풍요로운 곳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이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그 길의 목적지가 어딘지 알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럴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하신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가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고 합니다. 도마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에 오셨으면 로마인들을 쫓아내고 왕이 되실 일일지 왜 가시는지, 자기들을 두고 다른 어디로 가시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의 길, 메시야의 고난의 길을 몰랐습니다. 고난 후에 부활이 있는지 몰랐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NIV성경에는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대학에서 독일어 강의를 신청해서 들었는데 교수님이 이 말씀을 독일어 배울 때 한 문장 안에 정관사가 남성, 여성, 중성 단어 앞에 각각 다 다르게 붙어 있다고 하며 알려 주었습니다. “Ich bin der Weg und die Wahrheit und das Leben” 정관사가 붙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은 유일성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일한 그 진리 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이 말씀은 예수님 외에 하나님께로 가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선언합니다. 예수님 외에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주신 다른 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우리에게 진정한 생명,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없습니다. 왜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과 우리 죄인들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은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써 우리는 담대하게 하나님께 예수님 이름을 의지하여 나아가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친 자녀로 받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유일한 진리 인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주의 주, 왕의 왕으로 영광을 얻으심으로써 우리에게 승리와 영광을 얻는 진리를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작동하는 진리를 탐구합니다. 거미는 어떻게 거미줄에 자기보다 더 큰 동물이 걸리면 나오지 않고 있다가 자기가 먹을 수 있는 곤충이 걸리면 얼른 달려 나오는 것일까? 박쥐는 어떻게 빛도 없는 어두운 밤하늘을 훤한 낮에 날아다니듯 날아다니며 먹이를 정확하게 잡아먹을까? 왜 사과는 나무에 달려 있다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이 세상에는 작동하는 원리가 있고 어디서나 변함없이 작용하는 법칙이 있습니다. 이 모든 실물들과 그것들에게 작용하는 불변의 원리와 법칙들을 탐구하는 것을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진리탐구라 칭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우리의 세상과 우리의 피조물에게서 작용하고 작동하고 있는 진리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특히, 생명을 낳는 진리, 생명의 열매를 맺는 진리, 진정한 승리를 얻는 진리 자체입니다. 십자가를 통한 부활, 고난을 통한 영광, 낮아지심을 통하여 지극히 높아지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삶은 누구든지 예수님처럼 살면 누구든지 얻을 수 있는 영광의 진리, 영생의 진리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하시고 생명을 공급하시고 우리에게 주신 생명을 영원하게 하시므로 그 유일하신 생명 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살아서 풍성한 생명을 누리고 우리의 인생을 마친 후 죽음의 문을 지나서도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아 누립니다.
따라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님이 내 구원의 길이며 하나님의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시라는 사실을 기뻐하여야 합니다. 십자가와 부활로써 우리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어 주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7-11절 말씀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예수님과 3년간 공동생활을 하며 예수님을 보았고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이 완벽하게 계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일하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인격적으로 구별되시지만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십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연합하여 나타난 것이 그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일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다와 광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마다 귀신들이 쫓겨나갔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맹인이 앞을 보고 저는 자들이 고침 받고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구약의 성경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12-14절을 보십시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 예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능력과 은사를 받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이론이나 마음에 평안을 누리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므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별하고도 놀라운 능력을 덧입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시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시는 것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길, 생명과 영광의 메시야의 길을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찬양 합니다.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Part 2 다른 보혜사 (16-31)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는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 계명을 주셨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절대적 순종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심으로써 남겨질 제자들에게 새롭고 구체적인 약속을 주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구하여 하나님께서 다른 보혜사를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시면 다른 보혜사가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게 하십니다. 보혜사란 도와주시는 분이란 말입니다. 대언자, 변호인이란 의미도 있습니다. 다른 보혜사는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영이신 하나님이십니다. 17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요한복음에서 “진리”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진리의 영’이란 영이신 하나님, 영이신 예수님임을 말해줍니다.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시라면 영으로써 우리에게 오시는 하나님이 새로운 보혜사 성령이십니다.
둘째,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7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아브라함의 시대에, 모세의 시대에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시대에 사람들은 사람의 몸으로 계신 예수님이 계시는 곳에서만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에 오시는 보혜사는 우리 속에 들어와 계십니다. 이와 같이 새로운 보혜사는 영이신 하나님으로써 우리 속에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영으로 내안에 계심으로 인하여 우리에게는 어떤 은혜로운 역사가 일어납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오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떠나 십자가에 죽으시고 또 부활하신 후에는 승천하시므로 자기들이 홀로 세상에 버려진 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홀로 버려져서 고립무원에 처한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나는 혼자가 아닙니다. 새로운 보혜사께서 나를 지켜주시고 나를 늘 도와주십니다.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곁을 떠나가시지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보혜사로 제자들에게 다시 오셔서 함께 하십니다.
새로운 보혜사는 우리를 살리십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께서 다시 사셨습니다. 새로운 보혜사를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십니다. 새로운 보혜사는 우리 안에 계시면서 나를 살리는 일을 하십니다. 우리는 상하기 쉽고 쇠하기 쉽습니다. 상처받기 잘하고 죽을까 두려워합니다. 세상의 권세 잡은 사단과 악한 영들은 우리를 사망으로 몰고 가려 합니다. 이제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보혜사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시며 우리를 살아나게 하십니다. 우리를 항상 안전하게 하나님 안에 거하게 하십니다.
새로운 보혜사는 계명을 지키게 하십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새로운 보혜사로 다시 오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예수님의 계명을 잘 간직하게 하십니다. 마음에 계명을 잘 간직하고 이 계명을 지켜 행하게 하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계명을 지키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 사람에게 예수님을 나타내 주십니다.
제자들의 곁을 떠나가신 예수님께서 새로운 보혜사로 우리에게 오시는데, 새로운 보혜사는 다른 이름으로 “성령”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 각자의 속에 거하십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는 나와 늘 함께 해주시며 나를 살아나게 하시고 주의 계명을 지키게 하셔서 하나님께 사랑받게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기쁘고 확신 있게 해주시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와 계시는 성령을 기뻐하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룟유다 아닌 다른 유다가 말했습니다.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 사람은 본래 열심당원, 운동권 이었습니다. 그는 현실의 변화에 대한 갈망이 컸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예수님께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나타내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상 메시야에 대하여 여전히 미련이 많습니다.
23,2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에게 많은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역사의 비밀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메시야이심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미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그 말씀을 지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메시야이심을 나타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말씀을 충분히 듣고도 그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실 때 제자들에게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이루시는 역사는 예수님께 들은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는 역사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내면에 예수님의 말씀을 심어 주십니다. 들은 말씀을 다시 생각나게 하십니다. 그때 우리의 내면은 평안합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조건적입니다.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보혜사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은 조건적이지 않고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평안을 맛보며 제자들은 마음에 근심과 두려움을 내쫓을 수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길을 가신 후 성령으로 우리 에게 다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시간과 공간에 제한 없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나중에 이러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질 때에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0,3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에 죽으시는 때가 임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실 때 세상은 마치 세상 임금인 마귀가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한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마귀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만민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스스로 죽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그 뜻에 순종하시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심으로써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활짝 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다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주요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고백한 사람은 모두 그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허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성령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성령의 은혜를 거부하는 사람이거나 성령의 은혜를 허비하는 사람입니다. 옛날 에어콘은 정속형이었는데 요즘은 인버터형이라고 합니다. 실외기가 일정 온도에 도달하면 더 이상 돌지 않고 순환만 시켜서 전기요금을 낮춘다고 합니다. 요즘 에어콘은 계속 켜두는 것이 켰다 껐다 하는 것보다 전기요금을 더 아끼는 사용법이라고 합니다. 인버터형 에어콘을 계속 켜두는 것이 더 낫다고 소개하는 것은 매일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것이 지혜롭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매일 성령과 함께 하며 매순간 성령께 도움 받고 매일 매순간 성령의 은혜입어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갈 수 있게 해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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