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녀 박향랑은 조선 숙종 때 사람이다. 향랑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성질이 못된 계모는 향랑을 학대했지만 조금도 성내지 않고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순종했다. 그녀는 17세에 칠봉에게 시집을 갔지만 성질이 악한 칠봉은 향랑을 학대하였다. 결국 향랑은 친정으로 도망쳐 왔지만 계모 또한 그녀를 박대하였다. 오갈곳 없는 향랑은 투신자결을 하기로 마음 먹고 「산유화」를 부른 뒤 강물에 뛰어 들었다고 한다.
열녀 박향랑은 조선 숙종 때 사람이다. 당시 일선부 상형곡에서 박자신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행실이 바르고 정숙하여 이웃 사내들과도 놀지 않았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밑에서 자랐는데, 성질이 못된 계모는 향랑을 학대했지만 조금도 성내지 않고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순종하였다. 17세 때 같은 마을에 사는 임천순의 아들 임칠봉에게 시집갔는데, 향랑보다 세 살이나 어린 칠봉은 성질이 악하고 망측하여 향랑을 원수처럼 여겼다. 향랑은, 칠봉이 나이가 어려 지각이 없어 그러려니 하고 참으며 견디었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칠봉의 학대는 마찬가지였다.
막대기로 전신을 두들겨 패고 머리카락을 쥐고 내동이치는 일이 날마다 계속되었다. 시부모가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참다못한 향랑이 친정으로 돌아갔으나 계모 또한 박대하였다. “출가한 제집이 어찌 다시 돌아오느냐, 내 너를 먹여 살릴 수 없다.”며 계모는 하루에도 수십 번 이런 말을 하며 꾸짖고 욕을 해댔다. 보다 못한 아버지가 숙부의 집으로 향랑을 보냈다. 향랑은 평생 처음으로 숙부의 집에서 평안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그 평안도 몇 개월 가지 못했다. 하루는 숙부가 “내 어찌 백 년 동안 너를 키우겠느냐. 네 남편이 너를 버렸으니 다시 찾을 리 없고. 너 또한 혼자서 살 수 있겠느냐? 다른 곳으로 시집가도록 하여라.”고 하였다. 향랑은 “숙부님은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 비록 무식하고 부덕을 닦지 않았어도 부덕은 압니다. 제 몸은 이미 한 사람에게 허락되었거늘 남편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재가할 수 있습니까?”고 대답하였다. 향랑의 말을 들은 숙부는 더 이상 재가를 권유하지 못하고 박대하면서 향랑의 뜻을 꺾으려 들었다.
숙부집에서도 견딜 수 없게 된 향랑은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시집으로 돌아갔다. 칠봉의 구박은 더욱 거칠어졌다. 보리타작하듯 전신을 두들기고 머리채를 쥐어뜯었다. 못된 아들의 행실을 도저히 고칠 수 없음을 안 시아버지가 하루는 향랑에게 “며늘아가, 날마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사는 너를 내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구나. 몇 년 못 가 골병들어 죽느니 다른 곳으로 시집감이 어떠냐?”고 개가를 권했다. 향랑은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을 누르고 숙부에게 말한 것과 같이 개가의 부당함을 말하였다. 그리고 “아버님, 울타리 바깥에 흙집이라도 만들어서 저를 받아주시면 저는 마땅히 죽는 날까지 그 속에서 있겠습니다.”고 간청하였다.
시아버지는 “괜히 집안을 어지럽게 만들지 말아라.”며 한 마디로 거절했다. 그해 가을 향랑은 아무도 자기를 받아 주지 않고, 그렇다고 이부종사는 할 수 없어 죽기로 결심했다. 죽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투신자결하기로 마음먹고 가는 길에 오태란 곳에서 나무하는 12세 소녀를 만났다. 사는 곳을 물어보니 이웃 동네였다.
“내 오늘 너를 만나 다행이구나! 네가 만약 남자였다면 내 원통한 사연을 말할 수 없고, 너 또한 큰 처녀 라면 반드시 나의 죽음을 막을 것이나 너는 어리니 내 죽음을 막지 못하고 총명하니 내 말을 내 아버지에게 전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내 죽음이 명백치 못하면 친정부모님과 시부모님은 내가 잠적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갔으리라 의심하겠거늘 너를 만나 나의 죽음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천만다행이다.” 하며 향랑은 그 소녀에게 어릴 때 계모에게 학대받은 얘기와 시집살이 3년 동안 겪은 설움을 낱낱이 들려주었다.
야은 선생의 비석(砥柱中流碑)이 있는 못에 이르러 머리를 풀고 치마와 신을 벗어 함께 싸서 소녀에게 주면서, “이것을 우리 부모에게 갖다드리고 내 죽음이 명백함을 증명토록 해다오.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이 죄가 되지만 죽어서라도 다시 부모를 뵈옵고 응어리진 애원을 풀어 보아야겠다.”고 했다. 향랑이 곧 물에 뛰어들려고 하자 소녀는 무서워서 달아났다. 향랑은 소녀를 쫓아가 만류하며 다시 강 위에 이르러. “두려워 말아라. 내가 너에게 노래 한 곡을 가르쳐줄 테니 너는 모름지기 암기하고 낭송하다가 언젠가 땔나무를 구하러 이곳에 오게 되어 이 「산유화(山有花)」한 곡 조를 노래하면 나의 혼백은 틀림없이 네가 온 것을 알 것이다. 푸른 물결을 굽어보아서 만일 소용돌이치는 곳이 있으면 나의 혼백이 그 가운데에서 놀고 있다고 알아라.”고 했다.
향랑은 거듭하여 강물에 몸을 던지려다 돌아와 멈추며, “죽기로 결심하고도 물을 보니 두려운 마음이 생기니 가련하구나. 내 차라리 물을 아니 보리라.” 하더니 마침내 적삼을 벗어 얼굴에 덮어 쓰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소녀가 돌아가 그 아버지에게 알리니 그 아비가 곧바로 시신을 찾으러 갔으나 허사였다. 14일이 지나도록 시체가 떠오르지 않다가 아비가 시신을 찾지 못하고 어찌할 수 없어 관(棺)을 가지고 집에 돌아왔는데, 보름째 되는 날 적삼으로 얼굴을 가린 향랑의 시체가 물 위로 떠올랐다.
향랑이 부른「산유화」는 다음과 같다.
天下高遠 하늘은 어찌하여 높고 먼 것인가
地下廣邈 땅은 어찌하여 넓고도 광막한가
天地雖大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一身靡託 이 한 몸을 의탁할 수 없으니
寧投江水 차라리 이 연못에 몸을 던져
葬於魚腹 물고기 배 속에 장사지내리라
숙종 29년(1703) 5월, 이 이야기를 들은 당시 선산부사 조구상(趙龜祥)이「향랑전」을 짓고 그림을 그려서 향랑의 정렬을 기렸다. 훗날 향랑이 빠져 죽은 언덕 위에 향랑비를 세우고 그 영혼을 위로하였고, 향랑이 빠져 죽은 곳을 향랑연(香娘淵)이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