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시리즈.
"마지막 때와 심판에 대한 경고",
26) "농담으로 여겼더라" - 롯의 사위들처럼 심판의 경고를 무시하는 태도
성경본문 : 창 19:12~16, 29
19:12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 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 내라
19:13 그들에 대한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 여호와께서 이 곳을 멸하시려고 우리를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
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19:15 동틀 때에 천사가 롯을 재촉하여 이르되 일어나 여기 있는 네 아내와 두 딸을 이끌어 내라 이 성의 죄악 중에 함께 멸망할까 하노라
19:16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자비를 더하심이었더라
19:29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
여러분, 살면서 누군가 심각한 얼굴로 경고를 해왔는데, 그걸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은 적 있으십니까.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꼈으면서도 "다들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간 적,
자녀에게 "그 길은 아니다" 말했다가 오히려 잔소리 취급 당한 적,
혹은 반대로 부모님이나 목사님이 하시는 말씀을 "또 그 소리"라며 한 귀로 흘린 적 — 저도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에야 압니다.
그때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다는 것을요.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순간을 다룹니다.
소돔이 무너지기 몇 시간 전, 롯이 사위들에게 가서 외칩니다.
"일어나라, 이곳에서 떠나라. 여호와께서 이 성읍을 멸하시리라."
그런데 그 다음 구절이 우리 마음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사위들에게는 농담으로 여겨졌더라."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세상 무너질 소식을 전하러 온 장인의 얼굴을. 그런데 사위들은 웃습니다.
이 장면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도 종종 그 사위들 자리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농담으로 여겨졌더라"의 실제 의미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이 구절은 "וַיְהִי כִמְצַחֵק בְּעֵינֵי חֲתָנָיו", 직역하면 "그가 그의 사위들의 눈에 농담하는 자처럼 되었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장의 주어가 롯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롯이 농담을 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
그의 사위들의 눈에" — 즉 듣는 자의 눈에 그렇게 비쳤다는 것입니다.
여기 쓰인 동사 "מְצַחֵק(메짜헥)"은 히브리어 "짜하크(צָחַק, 웃다)"의 피엘(Piel)형입니다.
같은 어근에서 "이삭"이라는 이름이 나왔을 정도로 원래는 그냥 "웃음"을 뜻하는 말인데,
이 강조형으로 쓰일 때는 대개 부정적인 색이 입혀집니다.
나중에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희롱했다"고 할 때(창 21:9),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모함하며 "우리를 희롱했다"고 할 때(창 39:17) 쓰인 것과 같은 형태입니다.
반면 사라가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웃었던 그 웃음(창 18:12)은 다른 형태(칼형)입니다.
즉 사위들이 롯의 말을 들은 방식은, 그저 이해가 안 됐다는 정도가 아니라 조롱에 가까운 반응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롯의 말투가 아니었습니다.
문법이 확실히 말해주는 것은, 문제는 전달자의 진지함이 아니라 청자의 마비된 귀였다는 사실입니다.
진짜 심판의 경고가,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도착했는데도,
그것이 그들 귀에는 그냥 하나의 소음, 하나의 웃긴 이야기로 들렸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사위들"이 정확히 이미 결혼한 사이였는지 약혼한 사이였는지는 히브리어 표현만으로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립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본문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 이들은 롯과 가장 가까운 가족, 매일 얼굴을 보고 살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왜 그들은 못 들었을까요.
소돔에 살면서 무언가 특별히 나쁜 일을 겪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소돔에서의 삶이 그들에게는 그냥 "평범한 하루하루"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나고 자라 그 공기를 매일 마시다 보면,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판단하는 감각 자체가 서서히 뒤집어집니다.
어제도 똑같았고 오늘도 똑같은데, 왜 갑자기 세상이 끝난다는 겁니까.
그들 눈에는 롯이 이상한 사람이었지, 소돔이 이상한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이건 롯의 사위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롬 1:18).
우리가 진리를 못 알아듣는 건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익숙해진 죄가 우리의 판단력 자체를 흐려놓았기 때문입니다.
오래 신앙생활 해 온 우리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있다 보면, 경고의 말씀조차 "늘 듣던 그 설교"처럼 들리는 순간이 옵니다.
죽음에 대한 말씀도, 심판에 대한 말씀도, 회개에 대한 말씀도 — 처음엔 서늘했는데 지금은 익숙합니다.
익숙함이 우리를 무디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나 더 짚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롯 자신에 대해서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롯을 "의로운 롯"이라 부릅니다(벧후 2:7).
그는 진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살아온 삶의 자리는 소돔 성문이었습니다(창 19:1).
그는 그 도시의 죄악과 오랫동안 타협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떠나라, 심판이 온다"고 외칠 때, 사위들에게 그 말이 얼마나 무게 있게 들렸을까요.
저도 여기서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경고할 자격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우리 삶이 그 말과 정말 같은 방향을 향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요.
저 자신도 설교단에서 하는 말과 삶의 결이 어긋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 경고도 누군가에게는 "농담"처럼 들릴 수 있다는 걸, 저는 두려운 마음으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 본문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
여기까지만 말하고 끝내면, 오늘 메시지는 "그러니 너희는 정신 차려라, 깨어 있어라"는 결론으로 흘러가기 쉽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 본문이 진짜 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본문을 조금만 더 따라가 보십시오.
16절입니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람들이 롯의 손과 그의 아내의 손과 두 딸의 손을 잡아 인도하여 성 밖에 두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정신을 차린 건 롯도 아니었습니다.
롯조차 마지막 순간까지 머뭇거렸습니다.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낸 건 그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의 손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인자를 더하심이었더라" — 이게 핵심입니다.
롯이 구원받은 이유는 그가 사위들보다 더 영적으로 예민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손을 붙잡아 끌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롯을 구원하셨는지, 창세기는 나중에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그 지역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이 거주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보내셨더라"(창 19:29).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소돔을 위해 중보했던 그 사람(창 18장) 때문에, 롯이 살았습니다.
롯 스스로는 자기 사위 하나 구원할 능력이 없는 무력한 중보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위에, 진짜 중보자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우리에게도 아브라함보다 더 크신 중보자가 계십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서서 간구하시는 분, 그리고 심판의 날에 우리의 손을 붙잡아 끌어내시는 분 —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롯이 도망친 소알이라는 작은 성읍이 임시 피난처였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참된 피난처는 십자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분이라 부릅니다(살전 1:10).
심판을 피할 방법은 우리가 더 열심히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심판을 대신 지신 분 안에 있는 것입니다.
적용: 오늘, 할 수 있는 것
첫째, 오늘 조용한 시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요즘 내가 익숙해져서 더 이상 서늘하게 듣지 못하는 말씀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나만 떠올려 짧게 기도로 아뢰십시오.
큰 결단이 아니어도 됩니다.
인정하는 것만으로 시작입니다.
둘째, 마음에 걸리는 한 사람 — 자녀든, 손주든, 오래된 친구든 — 그 이름을 적어 이번 한 주 매일 이름을 불러 기도하십시오.
다시 말을 얹으려 하기 전에 먼저, 내 삶이 그 사람에게 어떤 소리로 들려왔을지부터 하나님 앞에서 돌아보십시오.
셋째, 이번 주 하루를 정해서, 하루를 마칠 때 딱 한 가지만 돌아보십시오.
"오늘 나는 무엇을 '늘 그렇듯이' 넘겼는가."
그리고 그 자리에서 짧게 주님께 다시 붙잡아 달라고 구하십시오.
결론
롯의 사위들의 비극은, 세상이 무너지는 그 밤에도 자기들이 있던 자리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늘 그렇게 옵니다.
요란한 예고 없이,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하루 한복판으로.
그래서 주님도, 베드로도 롯의 때를 마지막 때의 그림으로 삼으셨습니다(눅 17:28-30, 벧후 3:3-4).
그러나 오늘 우리가 정말 붙들어야 할 것은 두려움이 아닙니다.
롯의 손을 붙잡아 성 밖으로 끌어내신 그 손,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조카까지 건지신 그 신실하심입니다.
우리가 매번 무디어지고, 매번 늦게 깨닫고, 매번 머뭇거려도 — 우리를 끝내 끌어내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 손을 오늘도 신뢰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심판의 경고를 농담으로 흘려듣던 우리의 손을, 오늘도 놓지 않고 붙잡아 끌어내시는 분이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