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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는 길
양문규
나는 한때 몸을 가릴 옷 몇 벌과 바리때만을 지닌 채 산천을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다 길 위에서 죽어도 좋겠단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아름다운 삶일 수 있는가?
향리를 떠나 대처에서의 고교생활은 무척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이러한 생활의 요인이 외부적인 낯선 환경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 내속에 나를 얽어매고 있는 무엇이 하도 커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적확하게 한마디로 전언할 순 없지만 아마도 비워도 비워지지 않는 ‘타는 외로움’ 때문이었지 싶다.
그 무렵 나는 학교 공부는 뒷전이고 독서로 시간을 메워나갔다. 대부분의 책들은 동·서양 고전 문학과 철학서로 깊이 있는 독서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어렴풋이 열어주었다. 뿐만 아니라 학교 아닌 바깥 세계의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안겨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내속에 얽히고설킨 실타래, 그 무엇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견고해져 끝없는 번민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번민은 끝도 없는 방황을 낳았다. 번민과 방황 사이, 그 안에는 주체할 수 없는 고뇌가 나를 물고 늘어졌다. 그 지옥 같은 동굴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황을 일삼았던 것일까. 책과 함께하는 시간 외 나는 방황과 가까이 지냈다. 방황의 끝에는 번민도 고뇌도 없는 평안의 세계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방황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방황은 또 다른 방황을 낳았다. 그 한가운데에 문학과 불교가 있었다. 그때 난 미혹하나마 문학을 통해 불교를 만날 수 있었으며, 불교를 통해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방황으로 업을 삼고 있을 때 대부분 학우들은 학교 공부에 매진하면서 틈틈이 동아리 모임을 갖고 있었다. 서예, 음악, 문학, 미술, 등산 등의 동아리 모임을 통해 자신의 특기를 키울 뿐만 아니라 친구와의 우정을 돈독히 나누기도 하였다. 일부 학생들은 타 학교와 연계한 교외 동아리 모임도 하고 있었는데, 내가 찾은 ‘법륜’은 교외 동아리 모임 중 하나였다.
‘법륜’은 대한생활불교 내 충남고와 충남여고가 함께하는 불교 모임으로 성남동 불교병원 3층에 법당을 두고 있었다. ‘법륜’에 적을 두기 전 가까운 친구를 따라 교내 서예반에 들게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친구가 ‘법륜’에도 나가는 걸 알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도 그 친구 따라 ‘법륜’을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 2층에는 대전 시내 교교 문학회 ‘보리수’도 있었다. 거기에는 교편생활을 접고 문학과 불교지도를 맡고 있는 시인이 있었다. 바로 운장 김대현 법사님이다. ‘보리수’ 문학회의 모태도 대한생활불교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무튼 한국문단을 빛내고 있는 소설가 윤대녕, 문학평론가 박수연 등도 ‘보리수’ 문학회 출신이다.
나는 ‘법륜’을 통해 불교의 기본적인 예와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방학 때 2박3일 불교수련회를 통해 불교 생활도 하게 되었다. 짧은 기간이지만 바루공양 등 일상생활과 다른 스님의 생활양식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한 번은 하계수련회 후 그곳에 한 달여 동안 눌러 앉아 불교서적과 문학서적을 탐독하기도 하였다. 그 이후 나는 세간과 출세간 사이에서 어느 것도 아닌 삶을 철없이 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난해 첫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시와에세이, 2011)을 세상에 내놓았다. 서울생활 청산 이후 영국사 뒷방지기 삶의 편력을 고스란히 담은 것이다. 이 산문집은 나의 두 번째 시집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실천문학사, 2002) 와 같은 생활에서 얻은 글로 헛된 집착과 욕망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한 결과물이다. 내 속에 존재하는 사랑, 미움, 시기, 질투, 분노, 증오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마음의 평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자연의 질서를 좇아 여여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데 있다.
물방울이 물방울을 꿰어 꽃을 피우고 있다
하얀 꽃, 물 바구니가
제 생긴 모습 그대로 물기를 머금은 채
겹겹 달빛을 비틀어 매고
물의 꿈을 꾼다
머언 바다
하늘에 묻어 있는
흰 구름,
검은 돌탑을 스치고
물 바구니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바람은 매양 절 속에서
나래를 접고 깊은 숨쉬기를 한다
모든 것들의 울음으로
마르지 않는, 물의 꿈을 몸속에 가둔다
대웅전 위에 얹혀 있는
큰 산 하나
자정 넘어
마지막 달빛을 쓸어안고
寂默堂 돌담 옆
꽃나무 속으로 들어서고 있다
― 양문규, 「水菊」 전문
낙향 이후 몇 년 간 대부분 시편들은 천태산 영국사를 통해 얻게 되었다. 「水菊」도 예외는 아니다. 두 번째 시집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가 이를 증거한다. 이들 시편들은 과거의 상흔을 지우고 새로운 마음의 상을 얻기 위한 것이다. 문학평론가 방민호는 이 시집의 평문에서 “그것들은 무심하여 눈에 보여도 보이지 않음과 같고, 눈에 보이지 않아도 여간해서는 보이지 않음을 의식할 수 없다. 시인은 그처럼 무심한 것들 앞에 앉아서 혹은 서서 내내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기를 잊고 눈에 보이는 무심한 것들에 마음을 주고 그것들의 마음속까지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이 시편들의 세계”이 하였다.
나는 가끔 중국 남송 시대 무문이란 스님이 편찬한 『무문관』에 등장하는 육조 혜능 선사의 “바람이 펄럭이는 것도, 깃발이 펄럭이는 것도 아니다. 너희들의 마음이 펄럭이고 있을 뿐이다.”을 들여다본다. 이는 ‘일체의 제법諸法은 그것을 인식하는 마음의 나타남이고, 존재의 본체는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것일 뿐’이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다(一切唯心造).”라고 할 수 있다. 『대학大學』에서 “마음이 없다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心不在焉, 目不見).”이 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고 있다.
영국사 적묵당 옆 수국은 하얀 꽃숭어리를 달고 있었는데, 마치 “물방울이 물방울을 꿰어 꽃을 피우고 있”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수국을 “제 생긴 모습 그대로 물기를 머금은 채” “마르지 않는, 물의 꿈”을 선사하는 “하얀 꽃, 물 바구니”으 보았던 거다. 하여 그 물의 꿈을 내 몸속에 가두고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운 삶을 꿈꾸고 싶었다.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내속의 평안이 수국으로 다시 찾아들었던 것인데, 마음이 있어도 보지 못하였던 수국이 어느 날 “마르지 않는, 물의 꿈”으로 마음속에 들어앉을 수 있었다.
개는 검으나 흰 소의 눈을 가지고 있다
영동군 천태산 영국사
진도산 개 한 마리 가부좌를 틀고
움 속의 반야심경을 왼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해 떨어지기 전
하루에 한 번씩 빛의 소리를 훔치고
어둠이 내리는
서쪽을 향해 낭창한 울음 짖어댄다
적묵당寂默堂 뒤로
오늘 저녁 수천수만의 별들이 쏟아진다
세상의 끄트머리가 흰 길인가
사람을 낚는
검은 개
절 마을 잠든 곤한 새벽
별빛을 좇아 움 속의 반야심경을 왼다
― 양문규, 「검은 개」 전문
일본 현대 지성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나가자와 신이치는 동물과 인간의 관계를 대등한 존재로서 서로 공생하는 관계로 보았다. 즉 ‘미개사회의 인간과 동물이 서로 형제와 같은 혹은 부모 자식과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결혼하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서로 싸우기도 목숨을 주고받기도 하’이었다 거다. 영국사 뒷방지기 생활 때의 검둥개도 절 사람과의 관계가 그러하였다.
불교에서는 모든 중생이 제 각기 불성을 지니고 있다 가르친다. 이 불성은 모든 번뇌 망상으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으로 가는 종자로 누구나 내면에 부처님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개에게도 불성이 있을까. 조주 선사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는가 여쭙는 한 스님에게 없다고 대답하였다. 불교의 가르침에는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선사는 왜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했을까.
나는 영국사에 머물면서 마음으로부터 오는 해로운 일체의 것들을 버리기 위한 공부를 하였다. 그것들은 서울생활에서 받은 상처뿐만 아니라 내속에 오래전부터 온전히 존재했던 수천가지의 나쁜 마음이다. 그것은 청소년기의 ‘타는 외로움’과는 다른 세속적 욕망이라 할 수 있다.
영국사의 검둥개는 절식구와 한 식구처럼 지냈다. 아니 사람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곤 하였는데, 절을 찾는 사람들은 먼저 검둥개와 인사를 나눌 때가 종종 있었다. 왜일까? 움 속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모습이 수도승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세는 일체의 세속적 욕망이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자태였다. 가끔 어둠이 내릴 때 서쪽의 하늘을 바라보며 낭창한 울음을 쏟아 낼 때에는 마치 반야심경을 외는 것처럼 보였다. “가는 자여, 가는 자여, 지혜의 바다로 나가는 자여, 그 길 아름다워라.” 나도 따라 외울 때가 참 많았다.
불교는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그러나 영국사 뒷방지기 생활 이후 불교에 얽매이기보다 불교와 자유롭고 놀고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게 아니지만 내속의 나를 놓는데 있다. 굳이 큰 지혜로 깨달음에 이르는 여정이 아닐지라도 내 마음으로 지어지는 불행의 씨앗을 없애야 하겠다. 부처님의 “마음이 대상을 실제로 여기고 그곳에 안주하며 집착함이 있으면 어리석음이며, 마음에 집착함이 없어야만 반야라고 할 수 있다.”은 말씀도 깊이 새겨 읽는다.
나의 문학이 불교와 같이 결코 얽매임 없이 자연스럽게 노닐기를 바란다. 문학으로 고통스럽기보다는 문학으로 행복한 삶의 향연이기를 소망한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와도 있는 그대로의 대상, 그것으로 자연의 질서를 배우며 문학을 가꾸어 가고 싶다. 속세간과 출세간 사이에, 불교와 문학 사이에 내가 있듯이. 옴남.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 <<한국문학>> 등단.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등. 현재 계간 <<시에>> 편집 주간.